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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1:1-5
▣ 참된 복음을 향한 바울의 태도-갈라디아서 1장-
처음의 두 장은 사적인 내용이며, 핵심이 되는 단어는 “복음“으로서 1장의 45개 구절 중에 10회나 나온다. 바울의 목표는 그의 복음과 사도로서의 소명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온 것이며, 사람들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었다. 바울은 베드로에게서 배운 바를 간접적으로 전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바울이 서로 떨어져 일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방법을 취하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은혜와 한 몸(One Body)에 관한 놀라운 멧세지는 열 두 제자들이 전한 왕국 멧세지와 더불어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을 것이다.
1. 바울이 그의 복음에 대하여 알림(1:1-5)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꾀어(3:1) 바울의 사도권과 멧세지가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과의 적절한 관계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들은 인간의 승인이 마치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나 한듯 “우리는 베드로로부터 온 천거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을 것이다.
바울은 이 편지를 시작함에 있어 그의 멧세지와 사역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1, 12, 17절에서 바울이 사용한 “... 도 아니요... 도 아니다“라고 한 말을 주의해서 보자). 그는 즉각적으로 자신이 전한 복음을 똑똑히 설명한다.
바울의 복음은 모세나 율법에 중심을 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지내심, 부활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는 평화를 가져온 은혜의 복음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지시려고...“하셨던 자유케 하는 복음이었다.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통하여 교회를 속박으로 인도해가고 있었다(2:4/3:13/4:9 참조).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러한 악한 시대에서 우리를 구원하였으며 자유 안에서 새로운 지위를 주셨다(5:1- 이하). 바울이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고 첨부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의 내용과 의도에 관하여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되겠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라 그의 생애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고 그가 당신을 자유롭게 하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복음에는 율법을 지킬 것에 대한 여지가 없다."
갈 1:6-10
2. 바울이 그들의 변동에 대해 경악함(1:6-10)
두 가지 일들이 바울을 경악케 하였다. 곧, 구원의 축복을 경험한 직후에(3:1-5) 이들은 다른 멧세지로 돌아섰으며,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한 그(바울)에게서 이탈하였다. “떠났다“는 단어는 “떠나고 있다“는 말로 번역되었어야 한다. 그 당시 이들은 단순한 은혜에서 떠나 은혜와 율법의 혼합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장 4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은혜에서 떨어졌다“고 말한다. 이 말은 구원을 잃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은혜의 영역에서 율법의 영역으로 이동해 갔다는 뜻이다. 은혜란 나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존한다는 뜻이며, 율법이란 문제들을 나 스스로 처리하며 나 자신의 힘으로 다루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이제 강력한 말로 어떠한 “다른 복음“도 정죄한다. 그 전하는 사람이 어떤 설교자이든 상관없이, 천사들이라 할지라도 정죄한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많은 “복음“(좋은 소식)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바울이 전한 것 하나뿐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아브라함은 그의 씨를 통하여 온 나라를 축복할 것이라는 “좋은 소식“ 곧 “복음“을 믿었다(3:8).
각 시대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하신 어떠한 약속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았다. 노아는 홍수와 방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아브라함은 약속된 씨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바울의 등장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가 출현한 이래로는 다른 복음은 없다. 마태복음 3장에서 사도행전 7장까지에서 전파되었던 왕국의 복음도 더이상은 받아들일 만하지 못하다."
갈 1:11-24
3.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논함(1:11-24)
이 구절들에서 바울은 자신이 열 두 제자와 예루살렘 총회에 대해 어떻게 완전히 독립적인지를 보여 주려 한다.
그가 전하는 복음을 그리스도로부터 개인적으로 받음(11-14절)-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고(행 9장)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자기의 사명과 멧세지를 받았다. 이 일은 그에게 사도로서의 자격을 부여하였다. 바울이, 사도행전 1장에서 유다를 대신하여 열 두 사도가 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은 바울이 그 열 둘에게서 떨어져 있도록 보호하셨다.
아무도 바울이 자기의 멧세지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교회의 친구가 아니라 교회의 박해자였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는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급진적으로 변화하였다. 이처럼 현저한 전환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 들이는 일뿐이다.
사도들과 분리되어 그 복음을 받음(15-17절)-하나님은 결코 바울이 열두 명에 속하게 하지 않으셨음을 다시 밝혀 두자. 그들의 사역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며 왕국과 관련된 것이었으나, 바울의 사역은 이방인들에 대한 것으로서 한 몸인 교회의 비밀과 관련된 것이었다.
열 둘은 이 땅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들의 멧세지는 이 땅에서의 소망을 이스라엘에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하늘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의 멧세지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하늘의 부르심“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열두 지파와 연관하여 열 두사도가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상징하는 한 사람(이방 시민권을 가진 한 유대인)이었다.
바울은 소명을 받은 후에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즉시로 열 두사도들과 합류했더라면, 사람들은 바울이 그들에게서 멧세지를 빌려 왔고, 그들에게서 권위를 받았다고 말할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묵상하고 연구할 시간을 갖도록 바울을 아라비아로 보내셨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아라비아에 율법과 선지자(구약 성경)를 가지고 가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가지고 왔다“고 얘기한다.
그보다 앞서서 모세와 엘리야가 그러했듯이, 바울은 자기의 삶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을 붙잡고 씨름하기 위하여 사막으로 갔다. 그리고나서 그는 그가 최초로 그리스도를 증거했던 곳인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그가 전하는 복음이 교회들에게 인정받음(18-24절)-그 곳의 신자들은 사실상 바울을 두려워하여, 바나바가 아니었더라면 바울은 결코 영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 말 자체가 또한 바울이 인정받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기대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이러한 방문이 있은 후에 그는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가서 사도행전 11장 22-30절에 기록된 바와 같은 사역을 하였다.
그는 유대에 있는 신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곳의 교회들은 그의 회심에 관한 놀라운 소식을 들었으며, 하나님께서 바울 안에서, 그리고 바울을 통하여 행하신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오늘날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바울이 나타낸 바를 거절하고 율법과 은혜를 혼합하려 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그들은 왕국에 대한 계획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던 사도행전의 앞부분에 바울을 “끼워 맞추려“ 하였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훔쳐다가 베드로에게 주려고 하였다. 우리는 단순한 은혜의 멧세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교회와 왕국, 은혜와 율법,그리고 베드로와 바울을 혼합시키려는 것은 혼란을 빚어내는 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는(변하려, 1:7) 일이다."
갈 2:1-10
▣ 복음 대 율법-갈라디아서 2장-
첫장에서 바울은 그가 전하는 복음과 사도권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왔으며 열둘에게서 독립되어 있음을 입증하였다. 그의 서신서를 읽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바울은 열 두 사도,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하는 의문을 품게 될 것인데, 본 장에서 그는 이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1. 그의 복음이 사도들에게 인준을 받음(2:1-10)
바울은 사도행전 9장 26-29절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지 14년 후에, 율법과 은혜의 문제에 대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거룩한 성“으로 돌아왔다. 바울은 “계시로 인하여“ 이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이는 수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복음을 주셨던 것처럼(1:1-11) 또한 그가 가야 할 것을 개인적으로 명령하셨다.
바울은 이방인들 중에서 사역해 왔고, 그와 바나바는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며 지교회들이 설립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런데 이제, 그 이방인들의 운명이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토의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요한 회의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15장을 다시 읽어 보라.
어떤 이들은 네 차례의 다른 모임들이 개최되었다고 제언한다.
- 공식적인 모임-바울은 하나님이 이방인들 중에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하였다(행 15:4).
- 바울이 지도자들과 개인적으로 만남(갈 2:2).
- 공식적인 토론(행 15:5/갈 2:3-5)
-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결정짓기 위해 모인 회의(행 15:6-).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멧세지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지도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났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의 멧세지가 올바른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거짓 형제들“을 들여보내지 않음으로써, 불에다 기름을 더하는 격이 될 뿐인 공개적인 논쟁을 피하기 위해 그들을 개별적으로 만났던 것이다. 항상 정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룹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디도는 바울과 함께 있었는데, 그는 이방인으로서 할례를 받지 않았었다. 유대주의자들의 말에 따른다면 디도는 구원을 받지도 못한 것이다!(행 15:1)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은 디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으므로, 바울은 이것을 들어서 할례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결론적으로 입증한다.
그 곳에 거짓 형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고 있던 신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자유를 잃게 만들려는 자들이었다. 이 분당들은 디도의 할례 문제로 논쟁을 벌였을 것이 분명하나, 바울은 이들을 “눌러 이겼다.“ 무리가 나뉘어져서, 어떤 이들은 율법주의의 편에 섰고 어떤 이들은 자유를 지지하였으며, 또 다른 이들은 이 두 가지가 타협된 안을 택하였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여전히 분열되어 있어, 어떤 가르침은 의식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며, 다른 교훈은 은혜와 율법을 혼합하고, 소수는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바울의 멧세지와 사역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베드로와 열 두 사도가 유대인에게 사역한 반면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 사역한다는 점에 교회 지도자들이 동의한 것이었다. 8절에서 바울은 베드로 안에서 역사하신 같은 성령께서 바울 안에서도 역사하셨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똑같은 멧세지와 똑같은 성령이었으며 다만 사역의 영역만 달랐던 것이었다. 회의는 바울의 멧세지에 아무것도 첨부하지 않았으며(6절), 다만 시인했을 뿐이었다. 바울은 원수들의 거짓말에서 “복음의 진리“(2:5)를 보전하였다."
갈 2:11-21
2. 그의 복음이 베드로 앞에서 보호를 받음(2:11-21)
바울이 2장 6절에서 인간들의 “영적인 지위들“을 무시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가장 우수한 인간들과 영적인 지도자들조차 실수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점에 대해 바울은 바나바와 베드로를 본보기로 인증하였다.
예루살렘 회의 이후에 베드로는 바울과 바나바가 여전히 사역하고 있던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었다(행 15:35). 사도행전 10-1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어떤 음식이나 어떤 사람도 부정하지 않다고 분명하게 계시하셨었다. 그러나, 이 사도는 전과 같이 율법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가 처음으로 안디옥에 왔을 때에는 이방인들과 섞여서 함께 식사하였으나, 예루살렘에서 방문객들이 온 후로는 스스로 철회하고 옛날 유대인의 장벽을 다시 세웠던 것이다. 게다가 “바나바조차“ 함정에 빠짐으로써 선교 사역의 동역자인 바울을 놀라게 하였다.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12절). “왜냐하면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이 올무가 되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바나바는 바르게 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짓는다. 베드로와 바나바는 영적인 진리에 대하여 혼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직선으로 반듯하게 걸을 수가 없었다. “복음의 진리“는 우리가 방어만 할 것이 아니라(2:5) 우리가 실행해야 할 것이다(2:14). 14-21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베드로에게 한 책망의 요지를 볼 수 있다. 물론 바울은 이보다 많은 말을 하였으나, 간추린 이 말은 이 문제를 매우 잘 요약해주고 있다.
바울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유대인이지만, 자신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사이에 장벽을 두지 않고 이방인처럼 살아 왔다. 그런데, 이제와서 당신은 이방인들에게 당신 자신조차도 하지 않는 일을 시키며 그들이 유대인처럼 살기를 원한다.“
15-17절에서의 “우리“는 물론 유대인을 가리킨다. “우리 유대인은 유별난 특권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방인이 범하는 것 같은 죄를 짓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구원받는 것과 꼭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았다.“ 어쩌면 바울이 “그들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하리라고 기대될 것이지만 그는 반대로 바꾸어 버렸다.
“구원은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같이“ 될 것을 요구하지 오히려 않는다. 유대인들이 저주받은 이방인들을 대신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지위를 받아 의로와졌다. 율법의 사역으로는 인간을 결코 의롭게 할 수가 없다. 유대인 중에 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물론 없다! 라고 말한다.
17-18절에서 바울은 율법으로 되돌아간 베드로의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만일 율법으로 되돌아 간다면 당신은 아직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죄인이며,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지 않으셨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당신을 다시 죄인으로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죄의 사역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부인하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행전 10-11장을 참고로 하여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말하였다. “당신은 이방인들에게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는데, 이제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전파했던 당신이 이제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전파한다. 이로써 당신은 자신이 이전에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우고 있으며, 이 일은 당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계속 지켜가기를 권하시는 일을 헐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바울은 베드로에게 그의 행동과 믿음에 일관성이 없음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율법은 생명의 길이 아니고 죽음의 길이다. 율법은 우리를 죽이지만 복음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리스도인은 외적인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로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영원히 연합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함께 죽었으며 그가 부활하실 때 함께 부활하였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믿음으로 행할 때 그들을 통하여 그의 삶을 사시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이것은 규율과 규례와 의식을 종합해 놓은 것이 아니다. 율법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며, 만일 율법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길이라면 그리스도는 헛되게 죽으신 것이 된다.
갈라디아서나 사도행전 그 어느 쪽에도 베드로의 반응이 실려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책망이 그 목적을 달성했음을 알고 있다. 사실상, 베드로가 기록한 서신들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권고 중의 한 가지는 신자들이 이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서신들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벧후 3:13-16). 베드로를 신앙과 교리의 문제에 있어서 실수가 없는 지도자로 보는 사람은 본 장에서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갈 3:1-
▣ 믿음으로 의로워짐-갈라디아서 3장-
3-4장은 교리적인 내용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바울은 여기서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설명한다. 여기서는 믿음(14회), 율법(19회), 약속(11회)의 세 단어가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여섯 가지 논점을 각 장에 세 가지씩으로 제시하는데, 구원이 율법과는 별개로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오는 것을 입증하려하고 있다.
1. 개인적인 논점(3:1-5)
바울은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와 가지던 경험에서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율법이 아니란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으며, 그들이 믿고 순종한 멧세지는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구원의 증거로 성령을 받았는데(롬 8:9) 이는 어떠한 율법에 복종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엡 1:13-14) 말미암은 것이었다. 분명히, 바울이 전한 복음, 곧 바울 자신의 삶과 그들의 생애들을 바꾸어 놓은 복음은 참된 멧세지였다. 성령이 그들을 위하여 모두 성취하신 율법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바보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들은 믿음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당하였었다. 어느 누가 참되지 않은 것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 하겠는가? 성령의 은사들로 말미암아 교회 내에서 그들의 사역자들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고 있었으며, 그 일들은 율법을 통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볼 때 모든 일들은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데, 곧 구원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3절의 진리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구원하신 같은 성령께서 또한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써 구원은 받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그들 자신의 힘에 의존한다는 개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로마서 7장에서는 신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명백하게 가르치며, 로마서 8장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은혜의 사역을 계속하시며율법의 요구들을 성취하신다고 가르친다.
갈 3:6-14
2. 성경적인 논점(3:6-14)
“성경적“이라는 말은 바울의 다른 논점들이 말씀에 입각하여 참되지 않다는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 부분에서 구약 구절들에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다. 사실상, 당신은 이 관련 구절들과 본문의 내용들을 주의깊게 검토하고 싶어질 것이다.
창세기 15장 6절 인용(6-7절)-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본으로 내세우기 때문에 바울도 꼭같은 일을 한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던가? 믿음으로였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며, 그는 믿는 자들의 아버지이다. 이 논점을 좀더 확충해서 보려면 로마서 4장 1-8절을 참조하라.
창세기 12장 3절 인용(8-9절)-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교도들(이방인들)을 축복하기로 약속하셨는데, 이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물론, 아브라함이 믿은 복음은 온전히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조차 그들에게 이 복음이 설명되기까지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진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것이며 위대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는 기쁜 소식(복음)이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었으며, 이 믿음이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간주되었다).
신명기 27장 26절 인용(10절)-“너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가? 그러나, 율법은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하는 것이다!“
하박국 2장 4절 인용(11절)-우리는 전에도 이 구절을 다루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히 10:38). 하박국서에서 나온 이 짤막한 구절은 너무도 풍성하여, 하나님은 이 구절에 대한 세 차례의 주석을 쓰셨다.
레위기 18장 5절 인용(12절)-“행하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을 온전히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신명기 21-23장 인용(13-14절)-율법은 인간을 저주 아래 둔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저주에서 우리를 옮기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나무(십자가-벧전 2:24)에서 죽으셨는데, 이로써 신명기에 주어진 말씀을 성취하셨다. 주님께서 우리의 저주를 가져가셨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적용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여섯 인용 구절들을 다시 한 번 읽고, 구약 율법 자체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됨을 가르치고 있음을 확실하게 입증하는 것을 보자."
갈 3:15-29
3. 논리적인 논점(3:15-29)
바울이 다루는 논점들이 모두 논리적인 것은 물론이지만, 이번 논점은 특히 이성의 추리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을 인간의 계약에 비교하고 있는데, 두 사람이 계약을 체결하면 제3자가 개입하여 변화시키거나 철회하는 일은 불법이 된다.
하나님은 율법이 주어지기 400년 전에 아브라함과 계약(언약)을 체결하셨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본래의 약속을 철회할 수가 없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와도 약속을 하셨는데, 16절은 이 씨가 그리스도이심을 시사한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을 철회한 새로운 구원의 방법이 아니었다. 그렇게 된다면 논리적이지 못하다. 약속과 믿음은 같은 차원의 것이나, 약속과 율법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는가?“라고 바울의 반대자들은 논란을 벌일 것이다. 이에 대해 세 가지로 대답한다.
율법은 유대인만을 위한 임시적인 것이다(19-20절)-로마서 2장 14절과 사도행전 15장 24절은 하나님이 결코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주지 않으셨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도덕법은 이미 그들 이방인의 마음에 씌어져 있으나(롬 2:15), 의식법(안식일에 관한 법 포함)을 이방인들에게 주신 일이 없다. 율법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대신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더하여진“ 것이다. 그 씨(그리스도)가 오시자 율법은 사라졌다.
유대주의자들은 “그러나, 율법은 영광 가운데서 주어진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임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응대할 것이지만, 바울의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율법은 천사의 중개적인 손에 의해 주어졌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개인적으로 직접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성취하는 일도 하나님께만 달려 있는 문제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지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21-22절)-죄인들을 구원하는 율법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아끼고 그러한 구원의 방법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없었다.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죄를 드러내어 죄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율법은 은혜의 필요성을 보여 주며, 은혜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할 수 있게 한다. 율법은 모든 사람들이 죄 아래 있다고 결정해 버린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만일 하나님이 한 사람이라도 율법으로 구원을 받도록 허락하셨다면 어떤 사람도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다(23-29절)-“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믿음이 있기 전에 율법은 인간들을 가두어 놓아 구세주가 필요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E. L. 맥스웰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모여왔다.“ 율법은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유아기“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 쓰임받은 “교사“(가정교사)였다. 헬라와 로마의 가정교사는 어린 아이들이 법적으로 성인이 될때까지 보호하고 가르쳤다. 그런 후에 이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복음의 온전한 계시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주어지기까지 유대인들을 “줄 안에“ 가두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