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남북감리교회와 신학교육
1905년, 북감리교는 영변과 공주와 해주지역을 선교구로 부흥운동을 가속화 하였습니다. 중국 감리교선교회의 관할하에 있던 남감리교회는 1906년 독립하여 송도와 원산과 춘천지역을 선교구로 하였습니다.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으로 감리교회는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지도자 양성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습니다. 북감리교회 스크랜톤 박사는 지금까지의 신학반(Theological Class)에서 중앙 교역자 양성기관인 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전하였습니다. 북감리교 선교회 스크랜톤, 북지방감리사 모리스, 서지방감리교 케이블, 남지방 감리교 스위러를 위원으로 하는 “신학교 설립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감리교 신학교육은 “신학반”(1900~1906), “신학부”(1906~1908), “신학교”(1908~)로 발전하였습니다. 1888년,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성경, 십계명, 사도신경의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그후 1893년, 한국인 담임전도사 교육을 위해 4년과정의 신학교육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신학반 교육은 12명을 선발하여 1주에 3일간 오후 시간을 이용하여 성경, 설교학, 구원론, 성경개론 등을 공부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김창식(평양), 이명숙(강화), 김기범(제물포)은 성실하게 교육을 이수하고 전도사로서 사역자의 길을 갔습니다. 1899년 5월, 신학반을 신학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4년과정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감리교는 교역자 육성을 위한 신학회와 평신도 지도자 육성을 위한 사경회로 구분하여 교육을 지도하였습니다. 신학교육에 있어서 어려움은 신학용어를 한국어로 변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성품”(personality), “의인”(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구속”(atonement), “구원”(salvation) 등 존스 선교사는 한글신학용어를 채택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신학회”(Theological Association of Club)에서는 신학개론(아펜젤러), 교리장정(스위러), 역사신학(존스), 심리학(노블), 조직신학(노블), 설교학(노블) 등을 공부하는 등 체계적인 교육체계를 갖추어 갔습니다. 1901년, 감리교 연회에서 한국기독교 사상 최초로 김창식, 김기범, 최병헌(1902년,상동교회담임)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1903년, 한국인 최초로 김창식, 이은성 감리교 목사가 복음서를 강해하였고, 교과과정은 신학개론, 조직신학, 설교학, 석의학, 윤리학, 심리학, 교회사, 목회학, 감리교교리학 등으로 보다 확대되었습니다. 1905년, 신학반 입학시험제도를 도입하여 성서한문, 성서 및 일반지리, 수학, 성경상식, 감리교교리, 감리교주의 과목 등 입학고사를 시행하였습니다. 한편 신학회의 교과과정은 신학개론, 조직신학, 설교학, 석의학, 윤리학, 교회사, 변증론, 목회학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하도록 제도화 하였습니다.
1906년 11월, 신학회는 신학교 설립을 위한 “신학부”로 승격하고 신학교육을 남북연합으로 시행하였습니다. 신학부는 신학부장 존스와 스크랜톤, 모리스, 케이블, 스위러, 클램, 헐버트, 노블, 무어, 포웰을 교수진으로 하는 신학교 체제를 확립하고 남감리교와 북감리교 연합 신학부를 구성하였습니다. 남북감리교는 신학부외에 “교회지도자 양성과정”을 신설하여, 속장과 구역지도자를 위한 “일반과정”과 지방사역자 양성을 위한 “지방성경반”과 전도자를 위한 “신학준비과정”으로 세분화 하였습니다. 1906년 11월, 신학부교육 22명, 1906년 12월, 지도자양성교육(평양) 198명, 1907년 1월, 지도자양성교육(서울) 122명, 1907년 2월, 신학부교육 98명 등이 신학부 교육을 이수하였습니다.
1907년 6월18일, 북감리교 제3회 연회에서 신학교 문제가 중요 현안이 되었고, 6월25일, 교장인 존스의 “협성신학당”(The Union Theological School) 설립 계획안이 벡크 목사의 동의로 정식 채택되었습니다. 동일한 시기, 배화학당에서 회집한 남감리교 선교회 연회는 북감리교와 연합하여 신학당을 설립하기로 가결하였습니다. 이로서 10월, 37명의 신입생과 함께 정규신학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1911년 9월, “피어선성경학원” 신입생과 함께 임시교사 규장각에서 1년2학기의 체계화된 신학교육을 시작하였으며, 그 해 12월20일, 제1회 졸업생이 45명에 달하였습니다. 1916년, 서울 냉천동에 서양 근대식 학교 본관과 3동의 부속건물과 기숙사와 교수사택을 완공함으로서 본격적인 신학교체제의 틀을 갖추었습니다.
“협성신학교”는 1대교장, 존스에 이어 2대 하디, 3대 노블, 4대 왓슨, 5대 드밍, 6대 케이블과 같이 감리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들로 구성되어 장로교평양신학교와 함께 중요한 신학교육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해 갔습니다. 남북감리교회의 연합 학교로서의 협성신학교 설립은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하나의 통합된 감리교로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협성신학교는 1916년, “신학세계”를 발간하고 한국신학의 틀을 제공하였습니다. 1915년, 남감리교는 최초로 김홍순, 정춘수, 양주삼에게 목사 안수를 하였으며 이 가운데 양주삼목사는 협성신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1920년, 남감리교 연회에서 정재덕 목사를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2월6일, 서울 “종교교회”에서 “조선여선교회 연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922년, 미국남감리교 총회에 한국대표를 최초로 파견하였으며, 1926년, 양주삼 목사가 한국최초로 철원지방 남감리교 “감리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감리사는 감리교회에만 있는 독특한 직책으로 지방회의 사업과 행정을 관할하기 위해 지방회 부서를 조직하고 관장하는 역할을 하는 직분에 한국인 목사가 임명되었다는 것은 감리교내 한국인의 위상과 가치가 그만큼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1929년, 협성신학교는 별도로 운영하던 “여성신학교”를 통합하여 “감리교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교육 강화를 위해 3년 학제를 4년제로 개편하였습니다. 1930년, 감리교신학교가 새롭게 출범하고 1935년, 빌링스 교장이 예과 2년, 본과 3년의 5학제로 개편하여 신학교육의 내실을 기하려 하였으나 1937년 중일전쟁이후 일본의 압력으로 1940년 10월3일, 정춘수 감독이 무기휴교령을 선포하고 폐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