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싱 페이퍼
김 윤 이
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나를 읽네
몇 장 겹쳐도 한 장의 생시 같은,
서늘한 바람 뒤편
달처럼 떠오른 내가 텅 빈 아가리 벌리네
지루한 긴긴 꿈을 들여다봐주지 않아 어둠이 흐느끼는 밤
백태처럼 달무리 지네
일순간 소낙비 가로수 이파리,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넘치네
아아 무서워 무서워
깨어진 잠처럼 튀어 오른 보도블록,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
갈라진 혓바닥이 배배 꼬이네
비명이 목젖에 달라붙어 꿈틀대네
나는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싶지만
손금이 보이지 않는 손
금 밟지 않기 놀이하듯 두 다리가 버둥대네
두 동강난 지렁이 이리저리 기어가고
구름을 찢고 나온 투명한 달
내 그림자는 여태도록 나를 베끼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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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심사평] 사근사근 풀어내는 언어감각 돋보여
시와 인간이 만나는 장소는 언어와 리듬이다. 산문과 시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많은 응모작들을 읽으며, 이 광활한 시대에 개성적이면서도 깊은 시정신을 내포한 시인을 찾는 작업이 지난함을 느꼈다.
수천통의
응모작 가운데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이어서 그런지 대체로 긴장감이 팽팽했지만, 삶의 삼투압이 시 속에 스며들지 못한 작품들이 많았고, 이는 곧
언어의 낭비로 이어졌다.
마지막까지 논의되었던 작품은 이주연의 ‘21세기,실낙원’, 박여주의 ‘신호대기’, 권지희의 ‘직소
퍼즐’, 이산의 ‘낭만적인 잠수부의 작은 눈’, 김윤이의 ‘트레이싱페이퍼’ 등이었다.
이 중에 이주연의 ‘21세기, 실낙원’은
검은 비닐속에 자라는 생명을 통하여 이 시대의 불임성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마무리가 허전하여 읽는 이를 깊은 감동으로 이끌지 못한 점이
아쉬었다. 박여주의 ‘신호대기’는 자연스러운 솜씨로써 삶을 투시하는 힘이 느껴졌지만, 관념어의 돌출과 몇 군데 표현이 클리쉐(cliche)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선작으로 김윤이의 ‘트레이싱페이퍼’를 정하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쁜 숨결 속에서도 잘
유지되는 묘사력과 활달한 상상력으로 개성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이 작품과 함께 응모한 작품에서 보여지는 다소 시류적인 어투와 산문성은 이
시인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근사근 시를 풀어내는 언어감각은 앞으로 한 시인으로서의 항해에 눈부신 햇살을 예고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새 시인의 출발을 축하한다. 한국시의 가장 예민한 촉수로서, 힘차게 비상해 줄 것을 믿는다.
[시인 / 문정희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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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왠지 읽는동안 내내~ 사라 브라이트만의'The phantom of the opera'가 들리는것같았어요. 간절한외로움과욕망이 아픔으로 전이되며 숨이막힐듯한격정의전율이....휴우~실타래를풀어내듯 포용이찾아온듯 그림자의품으로... 언제나 단비처럼 좋은글을 대하게해주셔서 감사해용^^
순자님의 멋진 댓글이 일품입니다. 동아일보는 신춘문예 詩를 해당작이 없다고 안 뽑았군요. (흐흠. 아무튼 힘 받아서 하나 더 올려볼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