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당 전기남
포덕65년(1924) 함흥 출생
서대문지부부회장
"부모 믿음이 자식에게 가는거,
저는 믿어요"
내가 이북 함흥에서 포덕 65년(1924년)도에 태어나서
포덕80년(1939년)도에 입교를 했습니다.
입교를 누구한테 받았냐 하믄 문철모 선생하고 주사모님한테 받았어요.
우리 아버지(전상종)는 독립운동을 했어요. 내가 칠공주의 마지막입니다.
그런데 전부 여자들이라서 어머니(박상화)하고
농사를 같이 짓다가 네살 때
우리 언니가 벼를 치다가 손가락이 두 개 끊어져서
벼 위에서 탁탁 뛰는 걸 봤거든요.
그럴 적에 아버지는 발영을 메구
걱정이 돼두 바깥에서 들어오질 못 하구 있는 걸 봤어요.
그 후에 어머닐 보구 떡을 해가지고 함흥에 나무장대 시장이라고 있어요.
거기 가서 어떤 떡을 하는가 하면
송진으로 빨간 떡을 하고
파란 건 또 쑥떡으로 하고
흰떡도 해 가지고
가운데 이렇게 코처럼 올라온 떡을 해 가지고
거기다가 비밀 뭐를 넣는 모양 입디다.
그렇게 해서 나무장대 시장 앞에 가서 누가 빨간 떡 을 달라면 이 떡을 주구,
누가 뭔 떡을 달라고 하면 그 떡을 주라고 하면서
우릴 하나두 멕이지두 않구 어머닐 이어서 보냈단 말야.
그 후에 내가 일곱살 때 아버지 지은 학교로 이사 나갔어요.
삼암리라는 덴데, 독립투사들이 죽은 자리야.
그 삼암리에서 중국 사람들이 농사를 짓게 했어요.
만주에다 접촉을 하느라고 그런 것 같애요, 시방 생각은.
열다섯 살적에 아버지가 할아버지 있는데 가서 입교식을 해라 그래요.
계산해 보니까 포덕 80년(1939년)인 거 같애.
그때 과수원이 큰 거 있었어요.
그 과수원 가운데다 외딴집을 지어 놓고
문철모 선생이라고 평양 사람인데 거기 와 있었단 말야.
그런데 거기에 또 주 사모님이 계셨어요.
이 주 사모님은 바깥 에 나온 적이 없어요.
우리 어머니도 못 보게 한단 말야. 헌데 거기 가서 입교식을 했거든.
그 당시 아버지가 금융조합장으로 있었는데,
날 꼭 자전거 앞에다 앉히고 어디를 가는가 하면 극장으로 가요.
꼭 권투시합 을 하는 데만.
그리곤 거기 앉아 보라 하군
아버진 자전거 타고 어디를 가는지 갔다 온단 말야.
그러니까 그 때가 접선을 자꾸 하느라고 그런 거 같애.
내 여기 와서 육이오 적에 거제도에 피난 나왔다가
경주로 와서 안압지 옆에 경주 중학교 교장 사택에 머물러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구미산이 그 옆인데도 몰랐어요. 못 가 봤단 말이여.
그런데 안압지에 와서 빨래를 하믄
대나무 옆에 그릇이 가득해요.
아이, 무슨 귀신 단지 같은 게 이리케 많은가 했는데,
그게 다 유물인 걸 몰랐단 말야.
경주 학성동 동사무소 뒤가 바로 천도교 교당이었는데,
거기에 가니까 백세명 선생님하고 박응삼 선생님 하고 또 어떤 분이 밥해 잡숫고 있단 말야.
그러고선 10월 23일날 경주에서 부터 안동으로, 제천으로 원주로 올라왔단 말야.
올라올 제 어떻 게 올라왔냐 하믄 참 기적이야.
올라올 적에 역에 나가니까 일 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두 모두 못 떠나구 전부 있어요.
네 살 먹은 딸을 데리고 집에서 나오는데
큰 길 옆에 어떤 할아버지야. 근데 얼굴은 잘 모르겠어.
다만 수염이 하얗고 모잘 썼어. 어이, 자네 어디로 갈려 그려나, 어린앨 데리구 하더라구.
그 할아버지 하구 역꺼정 가니까네
그 할아버지가 원주로 가는 할아버지야.
그래 가지고서는 육이오 끝나구서리
자동차로 처음 안동까지 나오는 첫차를
미군 장교 둘하구 그 할아버지 하구 내 하고 우리 애하고 이렇게만 탔어요.
타고서리 안동까지 오구, 안동에서 다시 원주까지 왔단 말여.
원주에 올라오니까니 천도교인이 아무도 없어요.
다 죽였다고 해요. 빨갱이라고 하고 모두 죽였는 모양이여.
거기서 또 춘천으로 올라왔어요.
춘천에 올라와서 그때 교구를 찾은 거여 공진항 선생이 강원도에 와 있었어요.
그때 강원도에 정부가 다 와 있었습니다.
거기에 경찰서도 있고 다 있었어요.
또 바로 도청 옆에 천도교 사무실이 있었어요.
그때 내가 아이를 배고서리
공진항 선생이랑 같이 천도교인들을 전부 모집 해서
교인들이 속초, 원동에서두 오구 그랬어요.
전부 모여갖고 10월인데 무슨 기념날인 것 같아.
그날 도청 앞에서 무슨 식을 했어요 전부 한 2백명 너머 모였어요.
내가 춘천에서 굉장히 강화를 크게 받아가지고서
영부를 받아가지고 썼습니다.
그 자리가 시방 춘천의 KBS자립니다.
거기 공원산이라고 있어요.
시방 팔각정 세워놓고 종을 달아 놓았는데 거기가 내가 강령 받은 자리에요.
근데 안심가 하고 똑같애요. 강령 받는데 모두 나 미쳤다 했어요.
우리 영감이 자전거 타고 와서 나를 자빠 뜨렸어. 그 정도로 요란했어요.
그랬는데 그때가 이승만 박사 난리칠 때야.
4·19 혁명이 날 때야.
우리 영감이 완고한데 백지 펴라 하니까 어디 가서 백지 를 큰 걸 가져왔어요.
난 어느새 가서 목욕하고 와 가지고 먹물을 갈아 넣고
붓을 집어서 썼단 말야.
한문자를 뭐 이만한 종이에다 가득 썼어요.
그런데 맨 위에다가 구슬 옥자를 썼는데
촛불을 양쪽에다 켜 놓구서리
청수 떠놓고 그걸 얼러덩 불에다 탁 태워서 먹었어요.
그럭허구 난 다음에 박응삼 선생님이 오셨어요.
그래가지고 영부를 쓴 거를 보구서리
아, 경전을 새로 내라 그런다 해요.
경전 두꺼운 거 박응삼 선생이 처음 낸 거,
그기 내 영부를 보고 와서 낸 거여.
나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믿음에다 대믄 천분의 일도 안돼요.
어머니가 영부를 많이 썼어요. 우리는 영부로 자랐어요.
약이라는 거 별로 몰랐어요. 큰 병이란 걸 모르고 자랐으니까.
서울에 올라와서는 서대문교구 부회장으로 활동하다가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날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으로 해 달라고 하고 교회에 발을 끊었어요.
내가 아이들하고 살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우리 영감님 굉장히 완고해 가지고 청수 그릇을 몇 번을 깨놨어.
우리 영감이 간경화증이 있어요.
청수기를 깨놓고서리 그 후부터 영감이 그렇게 아팠어요.
복수가 차서 배가 이렇게 되고
처음에는 노리끼리하다가 뒤에는 흑달이 되다가
마지막은 아주 완전히 흑달이 되구서리는
병원에 가니까니 못 산다고 나가라 그래서 나왔어요.
나와가지고서 올린 숨만 쉬고 내릴 숨을 못 숴요.
이제 돌아가실려구. 그렇게 됐는데 딱 영부를 드렸으면 좋을 것 같은데
내가 영부 쓸 때 같으면 좋겠는데
그 동안에 내가 하두 우리 영감님이 완고하시고 그래서 교회를 중단할 때야.
그런데 서대문교구 장 선생님이 발영을 메고 잉크를 팔러 댕겼어요.
그럭허면서리 성미를 거두러 댕겼거든요.
"장 선생님, 아무래도 우리 선생님이 오늘 저녁을 못 넘길 것 않습니다. 나 영부 좀 써 주세요."
그래서 와서 영부를 썼는데 딱 일곱 장이 나왔어요.
그랬는데 그걸 다 드리믄 또 날 괴롭힐 것 같애.
그래 서 다섯 장만 태워서 드리고서
"당신이 살겠으믄 이 염주를 쥐고 이걸 잡수세요."
그래니까니 우리 영감이 염주를 탁 감아줘고 그 영부를 잡쉈어요.
이때꺼정 물 한 모금 들이키믄 왈칵 게 우구, 왈칵 게우구 하던 걸
그 영부 태운 거는 넘어갔어요.
그 날부텀 숟가락으로 물 떠먹는 거예요.
이렇게 그 청수기를 께고서리 그 양반이 그렇게 혼났지요.
내가 백령시장에서 포목점을 했어요.
그러는데 영감이 나한테 또 괴로움을 줬거든.
염주를 우리 아파트 밑에다 태워서 버렸단 말야.
집에 와서 청수를 모시려고 하니까 염주가 없어
그래서 내가 그냥 괴로워하면서리
다음날 장사를 나갔다가 오고 난 다음에
그날 저녁부터 우리 영감님이 열이 막 나고 아파요
막 땀이 나면서 그런 거를
그 다음날 염주를 줏어다가 다시 꿰 논 것이 지금까지 있어요.
서대문교구를 사십사 년 동안 나갔어요.
지금은 젊은 사람들 한테 다 맡겼지요.
내가 순회를 댕기면서 뭣을 해야 되는데, 이렇게 못해 걱정이에요.
그래두 우리 교구는 나가보믄 전부 젊은 사람들이에요.
포덕을 더 해야 되겠다 하는 건 내 소망이고,
모두 화목하게 성심성의껏 한 마음 한 뜻이 돼 가지고
서로 이끌어 나갔으면 좋겠는 게 내 소망이고.
내가 피난 나오면서 너무 기적이 많아요.
시방 우리 조카애들 모두 일곱을 데리고 나왔거든.
밤에 피난 나간다 해서 얼른 나 있는데
백사장에 사람이 하나 까득 줄을 서서 있는데 군함이 왔어요.
그런데 군함에서 내린 트럭이
그 사람들 다 두고 내 앞 에 와서 딱 서는 거야.
그러곤 얼른 타세요, 그래서 그 배를 일등으로 탄 게 우리여.
또 부산에서 경주로 가는 도중에 울산을 건너가는데
솔나무 밭을 넘어갈 적에 사람이 앉고 또 앉고 해서
그 버스에 세 사람씩 앉았어요.
이렇게 가득 찼는데 짐을 버스 위에다 실었단 말야.
그런데 울산 공단 바로 앞에 와서 우리 보따리가 떨어진 거야.
그거가 무슨 보따린가. 우리 어머니가 조각보를 한 천 개를 가져온 거야.
거기에 또 뭐이 들어갔는가 하믄
아버지 준 염주하고 천덕송하고 사진책이 모두 있었어요.
그 보따리가 그 자리에 떨어졌어.
그래 가지고 그 후에 가서 보니까 공단이 됐어요.
내 보따리 떨어진 자리가 공단이 됐다구.
내가 걸어온 길로 말하자면 기적도 너무 많고
그래서 나는 부모의 믿음이 자식에게 간다는 거 믿어요.
난 믿음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 믿음이
그렇게 나를 인도해 줬다는 걸 절실하게 느낍니다.
■구술일 : 145년(2004년) 3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