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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개요
바울은 세번째 선교여행기간(A.D.52-57) 중 그리스에 머무르면서 이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지중해 동쪽 지역에 복음을 거의 전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서방, 특히 로마를 거쳐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바로 로마를 방문할 수 없었습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성도들이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헌금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어떻게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것은 아닙니다. 아마 로마와 동방 사이에 무역이 성행한 결과로,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로 이주해 간 결과로 로마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봅니다. 아마 로마서가 기록된(A.D.57년) 몇 년 전에 세워졌지 않은가 합니다. 이 로마교회는 지역교회가 아니었고 수많은 가정교회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이 로마교회의 회중이 주로 유대인이었는지, 이방인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왜 이 로마서를 기록했을까요? 그는 스페인으로의 여행을 위해 로마를 들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로마교회를 들러 복음을 소개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스페인으로 가서 복음을 전할 생각이었든가 봅니다. 본문을 보면 그것 외에 다양한 이유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다양한 이유들 중에 하나가 바로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편지가 중요한 이유는 모든 이방인 교회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서는 ‘의로움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묻습니다. 그렇다면 ‘이신칭의’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서에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소개합니다.
의의 관점에서 구조를 나누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1부(1:1-15)는 이 편지글의 서론이고, 제2부(1:16-17)는 주제구절로, 이 서신의 본질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를 소개합니다. 제3부(1:18-3:20)는 모든 인류의 사악함에 대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의를 소개합니다. 제4부(3:21-5:21)는 그리스도로 인해 죄인들이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를 소개합니다. 제5부(6:1-8:39)는 의로워진 죄인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를 소개합니다. 제6부(9:1-11:36)는 이스라엘과 열방을 다루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를 소개합니다. 제7부(12:1-15:13)는 의로워진 사람의 삶의 여정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를 소개합니다. 마지막 제8부(15:14-16:27)는 인사말을 포함한 이 서신의 결론입니다.
로마서 1장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은 사도’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이요 직분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주어진 이런 직분에 근거하여 말씀을 전합니다. 또한 로마에 있는 교인들을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절). 송신자와 수신자의 소개에서 이미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도대체 복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미리 예언한 것입니다. 장차 태어날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대로 예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임하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여러 번 가고자 바랐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보기를 심히 원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무엇 때문에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열망했을까요? “신령한 은사”( 절)를 나누어 주고, 피차 “안위함”( 절)을 받고, “열매”( 절)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빚진 자’(14절)의 심정으로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주고 싶어 한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절)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의로운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직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절).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하기 위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벗어나 죄를 범하는 모든 인생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벌하시는 공의를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우선 이방인들을 예로 들어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느냐를 따집니다. 이방인들은 ‘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어느 정도 인식하지만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죄악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마음의 정욕’(24절)과 ‘부끄러운 욕심’(26절)과 ‘상실한 마음’(28절)대로 버려두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온갖 부끄러운 죄악을 저지릅니다. 이들은 죄악을 저지르고도 회개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뻔뻔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죄를 권장합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절).
로마서 2장
2장으로 넘어가면서 바울은 이방인들 중 도덕철학자들을 예로 듭니다. 이들은 본성과 양심을 가지고 사회윤리체계를 세웁니다. 이들은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벌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남을 판단하면서도 자기들도 은밀하게 동일한 악을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절).
이들은 ‘말’만 내세우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의 기준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절).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3절)이고 공정(6절)하고 개별적(9절)이기 때문에 도덕 철학자들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떨까요?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스스로 ‘맹인의 인도자’요, ‘어둠에 있는 자들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아브라함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랑거리가 넘쳐났던 유대인들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절) 율법을 지키지 않으니 언약백성의 증표인 할례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절)고 말합니다.
로마서 3장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유대인은 누구보다 나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지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일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 의무를 저버린다면 언약관계 밖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 받을 벌이 훨씬 더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거짓되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십니다.
그렇다면 결론이 뻔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 이것은 또한 구약성경을 통해서도 증명됩니다. 바울은 구체적인 신체 기관들의 죄를 예로 들어 사람 자신이 죄인임을 논증합니다. 목구멍, 혀, 입술, 입, 발 등을 말합니다. 사람 전체가 죄에 물들었다는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인생 중 하나님을 찾는 자도 아무도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이 죄인이라고 판명납니까? 그것은 율법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통해 우리를 살펴보면 구원을 얻을 육체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소개합니다.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믿음을 통해 나타난 의’입니다. ‘믿는 자에게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이 나타나는 의’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공로로 인해 죄인들을 구원하신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결과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의로움은 ‘하나님의 은혜’( 절)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 절)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사건이요, 그 두 가지가 동시에 만족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씩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 짐승의 피를 언약궤 위에 뿌려 백성들의 죄를 씻은 것을 가리킴)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을 ‘구속’(노예시장에서 돈을 주고 노예를 사서 풀어 자유케 하는 것을 보여줌)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의 ‘의로움’(법정에서 무죄선언되는 것을 가리킴)을 선포하셨습니다.
로마서 4장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했고, 아브라함을 자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절). 비유하자면 아브라함은 일해서 삯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한 것이 없이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지 않더라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렇게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을 노래했습니다(시 32:1-2).
유대인들은 할례를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자기들을 모든 이방인들과 구별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할례 자체에 의해 의로워졌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절).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세상의 후사(약속의 자녀)가 된 것은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았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절).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모든 구약 성도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신약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 성도들이 믿어야 할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절).
로마서 5장
이제 바울은 의롭게 된 이들의 상태에 관해 진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워진 자는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립니다. 사도는 화평을 누리자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화평을 누린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의인은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절). 환란은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는 연단을 만들어내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어 내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이 확실한 것은 미래구원에 대한 확증으로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절).
의인은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안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은 미래구원의 확실성을 보여주기 위해 흥미로운 논리를 사용합니다. “훨씬 더 어려운 A가 사실이라면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이 쉬운 B는 얼마나 더 사실이겠느냐?”라는 논리(a fortiori)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어주심으로 의인(칭의)이 되었다면, 이미 의인이 된 상태이니 미래의 진노에서 벗어날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화친)되었다면, 이미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미래의 진노에서 구원받을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시켜 사망과 영생을 증거합니다. 두 사람은 우리 인생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였고, 또한 오실 분의 모형이었습니다. ‘첫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든 인생은 범죄하였고, 정죄받았고, 사망의 왕 노릇하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모든 인생은 은혜를 누리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생명의 왕 노릇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범죄와 그 결과를 능히 보상하고도 남을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절). 심판과 선물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심판을 자초했고, 하나님을 선물을 주십니다. 둘 다 사람 자신이 한 것으로 인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에 모든 것이 걸려 있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에 모든 것이 걸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로마서 6장
바울은 이제 논리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킵니다. 지금까지의 논리를 들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비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비방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너의 말처럼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면 결국 죄를 지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냐?”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칭의의 외부적인 표시인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된 자입니다( 절). 세례를 받은 이들은 죄에 물드는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을 섬기는 ‘새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어떤 자가 되었는지 인정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절). ‘여기라’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제 ‘여기라’에서 ‘드리라’로 넘어갑니다. 존재론에서 의무론으로 넘어갑니다. 자신을 살아있는 자로 여기는 이들은 적극적으로 몸의 모든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된다고 하는 주장은 터무니없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종의 비유를 듭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누구든지 죄(사탄)의 종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의(하나님)의 종이 되든지 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절). 사탄은 우리를 용병으로 고용하여 죄짓게 하고 사망이라는 품삯을 주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삼아 의를 힘입게 하고 생명이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죄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의의 종으로 영생에 이릅니다. 죄에서의 해방이 완전한 해방인 것은 ‘죄책’(죄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죄의 능력’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해방은 완전한 해방입니다.
로마서 7장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워진 사람은 율법에 대해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결혼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 법으로 남편에게 매어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있습니다. 이것과 똑같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것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절). 남편이 죽었듯이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제 의인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율법이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원래 거룩하고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원리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탐심이 무언가를 금하는 율법에 반응하여서 죄를 짓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절). 율법이 죄짓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가 우리를 부추겨서 율법을 어기게 만들고 우리를 저주합니다. 의인은 이렇게 우리를 저주하는 율법,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된 이들입니다.
의인이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받으려는 노력으로부터,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의인이 되었다고 해서 죄를 안 짓는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긴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저지르는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19절, 20절에서 바울이 자기 자아와 죄를 구분한다고 해서 자신에게는 죄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적이고 경건한 무리들 중 죄를 지은 후 “그것은 내 속에 있는 옛사람이 죄지은 것이지요”라고 어깨를 어쓱해 하는 것과 다릅니다. 바울은 선과 악 양자를 행하는 하나의 자아에 대해 말합니다.
심각한 고민으로 인해 사도 바울은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는 죄의 법과 하나님의 법을 동시에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절).
로마서 8장
바울은 이제 죄인이 의인이 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우선 의인이 된 죄인이 날마다 죄와 싸우고 있지만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절).
그리스도의 이 구원사역이 어떻게 개개인에게 적용이 됩니까?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합니다( 절). 성령을 소유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후계자입니다. 그런데 후계자는 장차 영광을 받을 뿐만 아니라 현재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이제 바울은 모든 것들이 죄와 그 결과로부터의 구속을 바라면서 탄식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모든 피조물(19-22절)이 탄식하며 고통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23-25절)이며, 심지어 성령(26-27절)까지도 탄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탄식의 진전을 봅니다. 이렇게 탄식이 진전하는 방식에 의해 구원에 대한 열망이 하나님 앞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는 구원의 황금고리를 소개합니다. ‘미리 아심’ 부터 시작하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 하심’을 거쳐 ‘영화롭게 하심’까지 이어집니다. 중간에 어느 곳에서 끊어지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절).
의로워진 죄인은 장차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확실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습니다. 사도는 도살당한 양같이 고난 속에서 탄식(시 44:22)하던 시인을 끌어와서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을 노래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4가지로 묘사합니다. “누가 대적하리요?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끊으리요?”
로마서 9장
본 장부터 11장까지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다루시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소개합니다. 우선 바울은 양자됨, 영광, 언약들, 율법, 예배, 약속, 조상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배척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크게 근심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기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지라도 자기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과 맺은 언약을 폐지하셨는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족장들의 삶을 예로 들면서 원래 혈육이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약속(“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과 선택(“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이 구원의 근거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어떤 혈통이나 노력이나 선행이나 고행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선택만이 우리 구원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과연 공의로운 것인가? 독단적인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도 제기됩니다. 바울은 바로의 완악함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예정이 결코 불의한 것이 아니라고 변증합니다. 우선,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자발적인 은혜에 대한 근거가 못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완악함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주의 자비를 부인하시고 완악함에 내버려 두십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절)
또 하나의 질문은 ‘예정되었다면 인간의 노력은 불필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입니다. 바울은 토기장이의 예를 들면서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의지가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변증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인간의 자유의지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선택과 버리심에 대한 분명한 뜻을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만 우리 자신의 책임에 대한 여지를 남겨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선민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에는 민족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사 1:4, 10:22) 과 이방인들(호 1:10)의 차별이 없이 누구나 부르심을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택함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선지자 호세아의 글(호 2:23)을 인용하면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부르신다고 말합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절).
로마서 10장
왜 유대인들 중 대부분이 하나님의 약속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을까요?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고자 자신들의 의에 의존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절).
하나님의 의는 율법 속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퉁이 돌이요 기초석입니다. 이사야 28:16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 모퉁이 돌은 구원의 장소인 성전의 구조적인 든든함을 보장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지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에 과도하게 매달리므로 모퉁이 돌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조문만 잘 준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절).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말은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예표한다는 의미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율법이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는 의미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길이 열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절).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 믿음을 소유하도록 말씀을 전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보내셨기에 전파했고, 전파했기에 누군가가 들었고, 들은 자는 믿었고, 믿은 자는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이방인들이 오히려 믿었습니다. “내가 백성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절).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절).
로마서 11장
바울은 이제 이스라엘의 미래를 논합니다. 이스라엘이 패역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폐지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 편의 실수로 말미암아 무효가 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도는 선지자 엘리야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을 하나님께 송사했지만 하나님은 7,000명을 남겨 두셨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습니다( 절). 그러나 나머지 유대인들은 완악하여졌습니다.
이방인들이 대신하여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절). 여기서 바울은 접붙이는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어떤 나무 주인이 참 감람나무의 가지(유대인들)를 꺾고 돌 감람나무의 가지(이방인들)를 참 감람나무의 줄기에 접붙였습니다. 그러니 돌 감람나무의 가지는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주인이 원가지를 아끼지 아니했듯이 접붙여진 가지도 교만하면 당연히 꺾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절).
이스라엘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절). 여기서 말하는 ‘온 이스라엘’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장차 유대인 개개인들이 다 믿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민족적인 개종을 의미할까요? 그래서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이란 것도 일어났습니다. 유대인 선교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서 말입니다. 온 이스라엘이란 남은 자들의 전부를 의미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부터 전 세대를 걸쳐 믿는 이들에게 주님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습니다( 절). 불러놓고 잘못 불렀다고 후회하시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부르신 자는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부르신 백성이 제 멋대로 행한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얼마나 부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세토록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분입니다.
로마서 12장
12장부터 15장까지는 의로워진 사람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2장으로 넘어가면서 의인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살아야 될 의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바울은 개인 삶을 점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드리는 삶을 살았듯이 의인들은 죽은 제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살아있는 몸으로 거룩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절). 또한 타락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절)
그 다음에는 성도들과의 관계입니다. 각 사람이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받았습니다. 이것들은 주장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은사와 직분을 받았든지 오직 서로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절). 또한 믿는 형제들끼리 서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향해서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같이 동참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들을 높여줄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할 수만 있다면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도 화평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의 교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음을 안 바울은 심지어는 핍박하는 그들까지도 가슴으로 품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절). 그러면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국가권력에 대해 ‘의로워진 죄인’이 취해야 할 태도는 어떠할까요? 바울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인정하든지 하지 않든지 말입니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절). 여기서 바울은 부정한 세상 권력이라든지, 교회를 핍박하는 권력 등에 대한 세세한 문제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자세한 것은 성경적인 원리에서 깊이 생각해 보고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부패할 수밖에 없는 세상 권력을 세우셨을까요? 세상 권력이 없는 것이 신자들에게 더 좋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권세는 악을 벌하고, 선을 권장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런 정부의 도움으로 교회는 마음껏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외적인 안전을 보장 받습니다. 물론 정반대로 핍박 속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신자는 정부가 주는 벌이 두려워 복종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위해 복종해야 합니다( 절).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은 탈세를 종종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인들에게 조세와 관세를 잘 바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던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충성을 나누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 권력을 우리 위에 세우신 것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정부는 육적인 칼, 교회는 영적인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8절부터 바울은 문제의 본질로 파고 들어갑니다. 율법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통제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절). 그러면 율법이 완전히 폐지되었다는 말입니까? 바울은 11절부터 사랑의 법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낮의 빛과 같은 복음의 빛을 받았으니 어두움에 속한 일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절).
로마서 14장
그리스도를 통해 의로워진 사람의 새로운 행동양식인 의는 사랑에 의해서만 인도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뿐만이 아니라 서로를 용납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제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할 것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설명합니다.
그것은 이방우상 앞에 드려진 고기와 유대인들의 절기들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그리스도로 인해 획득된 자유를 마음껏 누려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는 그 고기를 마음대로 먹고, 모든 날을 같이 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그런 자유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고기를 먹지 않았고, 어떤 날을 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태도가 바릅니까?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니라”( 절). 이것은 소위 아디아포라(adiafora)라는 문제입니다. 그 자체로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들은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딱 부러지게 ‘이것이 옳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자유가 있다고 무조건 자유롭게 행해도 될까요? 바울은 연약한 형제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절).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연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평생 그것을 하지 않고 얽매이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무엇이든지 먹고 마실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육체를 탐닉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의 삶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성령을 의지하는 삶, 성령의 감동에 민감한 삶, 성령에 순종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절).
로마서 15장
본 장에서 바울은 앞 장에서 논의한 강한 자와 약한 자의 관계를 계속해서 진전시킵니다. 앞 장에서는 ‘용납’이라는 관점에서 말했습니다. 본 장에서 바울은 ‘연합’이라는 관점에서 논합니다. 즉 바울은 연약한 자와 강한 자가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절).
음식에 관한 문제나 날들에 관한 문제가 교회를 분열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서로 용납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어느 한 가지를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적들을 향해 자기 부인을 하셨듯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새로운 의는 교인들의 연합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리적인 부분까지 서로 용납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할례의 수종자, 즉 자신을 율법 아래 두사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런 사역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열매를 맺었습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그 어떤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런 연합이 구약 성경에 이미 언급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그는 구약성경의 세 구분인 율법(신 32:43), 선지서(사 11:10), 성문서(시 117:1)를 인용합니다.
바울은 개인적인 고백을 덧붙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받아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절).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사람이 신약시대의 제사장입니다. 한편, 지금은 이방인들의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간다고 합니다. 이 헌금이 귀한 이유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가지고 교제하고 서로 섬기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후에는 로마를 거쳐 서바나(스페인)까지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위해 기도요청을 합니다. 자기의 안전과 헌금봉사의 일과 로마로의 여행을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16장
마지막 장인 본 장은 바울의 개인적인 인사말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6장이 로마서의 원문에는 없던 부분이었는데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고 합니다. 16장에서 로마에 있는 사역자들에게 문안하라는 말은 다른 서신들에는 없는 생소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21-23절에 가서야 비로소 고린도(바울이 이 서신을 기록한 곳)에 있는 자들이 로마교회에 문안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로마에 있는 몇몇 사람들을 예로 들어 그들에게 문안하라고 할까요? 왜 “내가 ...에게 문안하노라!”가 아니라 “너희는 우리의 동역자인 ....에게 문안하라!”고 할까요? 바울은 로마 교인들이 로마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며 활동하고 있었던 이들 사역자들에게 문안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들에게 문안하는 것은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교제한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사역자들을 당연히 인정해야 합니다.
반대로, 사도 바울은 거짓 선생들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복음이 전하여지는 어디에서나, 어느 교회에서나 거짓 선생들이 활동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절). 바울이 염려하였던 대로 후에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로마의 교회는 그때까지도 유대인들과의 완전한 분리를 선언하지 않았던 것 같고, 유대인들도 교회를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행 28:22).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교훈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악랄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로마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던 유대주의와 이교주의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로마 교회를 굳건하게 세우실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절).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확신을 품고 로마교회를 향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고 청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비한 계시, 마침내 드러난 비밀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믿고 순종하게’ 하시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