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rt 2. 마음의 본성 NATURE OF "MIND"
Often used interchangeably with "ego," "mind" is the processing unit with which the ego is identified. Ultimately, like the ego, the mind itself is only a concept. As Dr. Hawkins explains, "Experientially, one can only state that thoughts, feelings, images, and memories come into one's awareness in an endless progression." And it is this endless progression that we've come to call "mind." As one comes to understand the true nature of the mind, one becomes less at the effect of its inner workings and better positioned to transcend to one's identification with it.
종종 "에고"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마음"은 그것과 함께, 에고가 식별되는 처리 단위(processing unit)입니다. 결국 에고와 마찬가지로, 마음 자체도 하나의 개념일 뿐입니다. Hawkins 박사는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생각, 감정, 이미지 및 기억은 끝없는 진행을 통해 우리의 자각(one's awareness)에 들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끝없는 진행입니다. 마음의 참 본성(true nature)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우리는 마음의 내적 작용(inner workings)의 영향을 덜 받게 되고, 마음과 동일시하는 것을 초월할 수 있는 더 나은 위치에 서게 됩니다.
Like the body, the mind is not one's real self, and like the body, it is basically impersonal. It has thoughts, but these thoughts are not a product of the self. Even if a person does not want a mind, he or she has one anyway. There is no choice in the matter; the mind is imposed and thrust upon one unasked. The fact that having a mind is an involuntary imposition helps with the realization that it is not a personal choice or decision.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은 진짜 자기(real self)가 아니며, 몸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비개인적이다. 마음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생각은 작은 나(self)의 산물이 아니다. 설령, 사람이 마음을 원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은 어쨌든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 문제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마음은 요청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주어지고 떠안겨진다. 마음을 갖는 것이 비자발적 부과(involuntary imposition)라는 사실은 그것이 개인의 선택이나 결단이 아님을 각성하는데 도움이 된다.
All seeming separation is an artifact of thought. It is essential to see that the mind is at all times experiencing a point of view.
분리(separation)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생각의 가공물이다. 마음이 항상 하나의 관점을 경험하는 중임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The design of the human mind is comparable to that of a computer in which the brain is the hardware capable of playing any software programs fed into it. The hardware is, by design, incapable of protecting itself from false information; therefore, the mind will believe any software program with which society has programmed it, for it is innocently without any safeguard or protection. The human mind, by virtue of its innate structure, is naive, blind to its limitations, and innocently gullible. Everyone is the victim of the ignorance and limitation of the human ego.
인간 마음의 설계는 컴퓨터의 그것에 비유할 수 있는데, 두뇌는 모든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넣는대로 재생할 수 있는 하드웨어와 비슷하다. 하드웨어는 설계상, 거짓 정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다. 결국 마음은 아무런 안전이나 보호장치없이 순수하기 때문에, 사회가 프로그램한 모든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믿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타고난 구조 덕분에 순진하고, 자신의 한계에 무지해서 쉽게 잘 속아넘어 간다. 모든 사람은 인간 에고(human ego)의 무지와 한계(ignorance and limitation)의 희생자인 것이다.
The human mind is incapable of discerning truth from falsehood. Were this not so, there would have been no wars in history, no social problems, and no ignorance or poverty. Everyone would be enlightened, and the consciousness level of mankind would not have remained at 190 (the level of pride, below the critical level of integrity at 200) on the Map of Consciousness, century after century.
인간의 마음은 진실과 거짓을 분별할 수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역사상 전쟁도, 사회문제, 무지와 빈곤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고, 인류의 의식 수준은 세기를 거듭하여 의식의 지도에서 190(자만심 수준, 온전성 임계 수준 200 미만)에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Because of dualistic perception, the mind could no longer discern the abstract symbol from reality. The road to error was open and inviting, and opinion held sway, as the mind had no innate mechanism to discern truth from falschood. As a result of dualistic mental processing, the mind had developed the capacity for repression and denial so that it could remove obstacles to achieving its goals. The mind discovered that it could deny ownership of an unwanted side of a pair of opposites and project it onto the world. Thus were born not only polities but also the well-known psychological mechanisms of splitting, repression, denial, and projection. This capacity turned out to be a fatal mechanism in that even when faced with dire results, the ego relentlessly pursued the same mistakes. Millions of people die in every generation throughout history and continue to do so in today's world.
이원론적 인식(dualistic perception)때문에 마음은 더 이상 실상으로부터 추상적 상징(abstract symbol)을 분별할 수 없었다. 마음에는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타고난 메카니즘이 없기 때문에 오류로 가는 길은 열려 있고 매력적이며,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원론적 정신처리(dualistic mental processing)의 결과로, 마음은 억압과 거부 능력을 개발했고, 그래서 마음은 에고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 마음은 반대 쌍(pair of opposites)의 원치않는 측면의 소유권을 거부하고, 그것을 세상에 투사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해서 정치조직뿐 아니라 분열, 억압, 부정, 투사라는 잘 알려진 심리적 기제가 탄생했다. 이 능력은 끔찍한 결과에 직면할 때에도, 에고가 같은 실수를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치명적인 메커니즘으로 밝혀졌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역사를 통틀어 모든 세대에서 죽고,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계속해서 죽고 있다.
Except in small, personal affairs, the mind was not constructed to readily learn from its mistakes.
작고 개인적인 일을 제외하고, 마음은 실수로부터 쉽게 배우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One is not "forced" to feel resentment by a negative memory, nor does one have to buy into a fearful thought about the future. These are only options. The mind is like a television set running its various channels for selection, and one does not have to follow any particular temptation of thought. One can fall into the temptation of feeling sorry for oneself, or feeling angry or worried. The secret attraction of all these options is that they offer an inner payoff or a secret satisfaction that is the source of the attraction of the mind's thoughts.
우리는 부정적인 기억으로 인해 분노를 느끼도록 강요받지도, 미래에 대한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다. 이것들은 선택지일 뿐이다. 마음은 선택을 위해 다양한 채널을 실행하는 텔레비전과 같으며, 생각의 어떤 특정 유혹을 따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거나, 화를 내거나 걱정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이 모든 선택지들의 비밀스러운 매력은 마음의 생각을 끌어당기는 원천인 내면 보상 또는 비밀스러운 만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One thing is obvious: the mind is totally unreliable. It cannot really be depended upon at all. It is not able to be consistent, and its performance is sporadic as well as erratic. It will forget to take the keys to the office, forget telephone numbers and addresses, and be the source of frustration or annoyance. The mind is contaminated by emotions, feelings, prejudices, blind spots, denials, projections, paranoias, phobias, fears, regrets, guilts, worries, and anxieties; along with the fearsome specters of poverty, old age, sickness, death, failure, rejection, loss, and disaster.
마음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 이 한 가지는 분명한 사실이다. 마음은 정말로 전혀 의존할 수 없다. 마음은 일관성이 없고, 그것의 실행능력은 산발적일 뿐만 아니라 변덕스럽다. 마음은 사무실에 열쇠를 가져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전화번호와 주소를 잊어버리고, 좌절이나 짜증의 근원이 될 것이다. 마음은 감정, 느낌, 편견, 맹점, 부정, 투사, 피해망상, 공포증, 두려움, 후회, 죄책감, 걱정 및 불안으로 오염되어 있다. 빈곤, 늙음, 질병, 죽음, 실패, 거부, 상실, 재앙의 무서운 유령과 함께 말이다.
In addition to all the foregoing, the mind has also been innocently and erroneously programmed by endless propaganda, political slogans, religious and social dogmas, and continual distortions of facts—not to mention falsifications, errors, misjudgments, and misinformation. Above all else, the primary defect of the mind is not only its content, which is often irrelevant or in error, but the fact that it has no means of telling truth from falsehood. It is merely a game board.
앞서 말한 모든 것 외에도, 마음은 끝없는 선전, 정치적 슬로건, 종교 및 사회적 교리, 사실의 지속적인 왜곡에 의해 순진하게 잘못 프로그래밍되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주된 결함은 종종 관련이 없거나 오류가 있는 내용일 뿐만 아니라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단이 없다는 사실이다. 마음은 단지 게임판(game board)일 뿐이다.
Humility is of greater value than all factual accumulation. Unless one has completely and totally experienced the presence of God in its stunning, absolute Allness, it is safe to assume that one really knows nothing and that all accumulated so-called knowledge is really only tentative. Anything within that claims "I know" proves that it is false by that very statement, or else it would not make such a claim.
겸손함(Humility)은 모든 사실의 축적보다 더 가치가 있다. 만약 놀랍고 절대적 전체임(Allness)에 있는 신의 현존(presence of God)을 완전하고 전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소위 지식이라고 하는 모든 축적된 것이 실제로는 잠정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안전하다. "나는 안다(I know)"라는 주장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바로 그 진술로 그것이 거짓임을 증명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다.
Thinking proceeds from lack; its purpose is gain. In wholeness, nothing is lacking. All is complete, total, and whole. There is nothing to think about, nor any motive to think. No questions arise, and no answers are sought or needed. Totality is complete, totally fulfilling, with no incompleteness to process.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결핍에서 비롯되고, 결핍의 목적은 이득이다. 전체성(wholeness)에서 보면, 결핍이란 없다. 모든 것은 완전하고 전부(total)이며 전체(whole)다. 무엇에 대하여 생각할 것도 없고, 생각할 어떤 동기도 없다. 의문도 생기지 않고, 추구하거나 필요한 답변도 없다. 전체성(Totality)은 처리해야 할 불완전함없이, 완전하고 모두 충족된다.
Beliefs are the determinant of what one experiences. There are no external "causes." One discovers the secret payoffs that are obtained from unconscious secret projections. One's underlying programs can be discovered by simply writing down one's litany of grievances and woes and then merely turning them around into their opposites.
믿음(belief)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의 결정자다. 외부의 "원인"은 없다. 우리는 무의식적인 은밀한 투사에서 얻은 은밀한 보상을 발견한다. 우리의 기저 프로그램(underlying programs)은 단순히 자신의 불만사항과 고뇌를 기록한 다음, 그것들의 반대쪽으로 전환함으로써 발견될 수 있다.
Thoughts are occurring on their own, not because they are caused by anything or anyone.
생각은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지, 그 어떤 것 또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Operationally, the mind is dualistic and thus sets up separate mental processing based on arbitrary, hypothetical positionalities that have no intrinsic reality. Thus, by design, the mind has the basic defect, as pointed out by Descartes, that it cannot differentiate res cogitans from res extensa (that is, mental activity about the seeming appearance of the world versus the world as it actually is). The mind thus confuses its own projections and mistakenly assumes that they have an external, independent existence whereas, in reality, no such condition exists.
작동적으로, 마음은 이원론적이어서, 마음은 내재적 실상이 아닌 임의적이고 가상의 위치성에 기반한 분리된 정신처리(separate mental processing)를 설정한다. 따라서 마음은 설계상, 데카르트가 지적한 것처럼 레스 코기탄스(res cogitans)를 레스 익스텐사(res extensa 즉, 세계의 겉모습 대 실제있는 세계에 대한 정신적 활동)와 구별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음은 자신의 투사를 혼동하고, 외부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있다고 잘못 가정하는데, 실상에서 그러한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The mind translates phenomena in 1/10,000th of a second; thus, the mind is like the playback monitor of a tape recorder. When that interface of mind between phenomena and experiencing dissolves, the difference is quite dramatic.
마음은 1/10,000초 만에 현상을 해석한다. 따라서 마음은 녹음기의 재생 모니터와 같다. 현상과 경험사이(phenomena and experiencin)의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질 때, 그 차이는 매우 극적이다.
The mind acts as a processor of data simultaneously from both within and without. It categorizes, sorts, prioritizes, contextualizes, and interprets simultaneously as it concordantly draws on memory banks, emotional centers, and conditioned responses and their correlations. All the above are orchestrated contextually with emotional/animal instincts that are sorted, rejected, accepted, or modified.
마음은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데이터 처리기(processor of data) 역할을 한다. 마음은 기억 은행, 감정 센터, 조건 반응 및 그것의 상관 관계를 조화있게 끌어당기면서 동시에, 범주화, 정렬, 우선순위 지정, 맥락화 및 해석한다. 위의 모든 것은 분류, 거부, 수용 또는 수정되는 감정적/동물적 본능(emotional/animal instincts)과 함께 맥락적으로 편성된다.
In addition, this profound complexity is simultaneously subject to options, choices, and the will. Options and choices are related to meaning and value overall; and they are under the influence and dominance of an all-inclusive, overall field of consciousness having concordant and variable levels of power related to the level of consciousness that is also influenced by karmic propensities. Simultaneously, the mind assesses degrees of relative truth, credibility of information, and suitability and probabilities of action within similarly multilayered behavioral social limits, including moral, ethical, social, and religious principles.
게다가, 이 엄청난 복잡성은 동시에 선택지(options), 선택(choices), 의지(will)의 대상이 된다. 선택지와 선택은 전반적인 의미 및 가치와 관련이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카르마의 성향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의식 수준과 관련이 있는, 조화 및 가변적 파워의 수준을 갖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체적인 의식 장(overall field of consciousness)의 영향과 지배 하에 있다. 동시에, 마음은 도덕적, 윤리적, 사회적, 종교적 원칙을 포함하여, 마찬가지로 다층적 행동 사회적 한계(behavioral social limits)내에서 상대적 진실, 정보의 신뢰성, 행동의 적합성과 가능성의 정도를 평가한다.
The mind is like an infinitely complex processing unit of both internal and external data.
마음은 내부 및 외부 데이터의 무한히 복잡한 처리 단위(processing unit)와 비슷하다.
The mind naively assumes that it is the real "me" who is searching for truth because it assumes that its ego/self is primary and is the sole author of intention as well as action, and therefore the arbiter of reality.
마음은 자신의 에고/자기ego/self)는 중요해서, 의도뿐만 아니라 행위의 유일한 저자이며, 따라서 실상의 결정권자라고 가정하기 때문에 진리를 찾는 사람이 "진짜 나(real me)"라고 순진하게 가정한다.
A person identifies with his body because his mind is experiencing his body.
사람은 그의 마음이 그의 몸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의 몸과 동일시한다.
The end point of intellectual investigation arrives at the obvious conclusion that the mind and the intellect are each inherently defective and therefore incapable of arriving at absolute truth.
지적 탐구의 종착점은 다음과 같은 명백한 결론에 도달한다. 마음과 지성(intellect)은 각각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어서,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Q: What makes thinking so tenacious?
A: All mental content represents attachments, and underlying are the attachments to the self and the clinging to what is believed to be the source of survival as well as happiness. It is also one's identification. In reality, the source of happiness is the Self, and not the self (the ego).
Q: 생각이 그렇게 끈질긴 이유는 무엇입니까?
A: 모든 정신적 내용은 집착을 나타내며, 그 기저는 작은 나(self)에 대한 집착이고, 행복뿐만 아니라 생존의 원천이라고 믿어지는 것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식별(identification)입니다. 실제로, 행복의 근원은 작은 나(에고)가 아니라 참나입니다.
Thinking is a processing device with great pragmatic value; it presumes that it knows the data, but it actually has no innate capacity to know. Belief manufactures an imaginary inner "knower” that becomes the "me." Likewise, it manufactures an imaginary doer of deeds, an actor of acts, and an imaginary thinker of thoughts.
생각은 매우 실용적인 가치를 지닌 처리 장치(processing device)다. 생각은 그 데이터를 알고 있다고 가정하지만, 사실상 알 수 있는 선천적 능력(innate capacity)이 없다. 믿음은 '나(me)'가 되는 가상적인 내면의 '아는 자(knower)'를 만들어낸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행위의 가상적 행위자, 행동의 가상적 행동자, 생각의 가상적 생각자를 만들어낸다.
Each thought actually arises out of nothingness, or the black field of silent mind, and is not, as presumed, caused by a preceding thought.
각각의 생각은 실제로 무(nothingness) 또는 고요한 마음의 검은 들판(black field)에서 발생하며, 추정되는 바와 같이 선행하는 생각(preceding thought)에 의해 초래되지 않는다.
Consciousness research confirms that approximately 99 percent of the "mind" is silent and only 1 percent is processing images. The observer self is actually hypnotized by that 1 percent of activity and identifies with it as "me"—it is oblivious to the silent 99 percent of the field because it is invisible and formless.
의식 연구는 "마음"의 약 99%가 침묵하고 1%만이 이미지를 처리하고 있음을 명백히 밝힌다. 관찰자 자기(observer self)는 실제로 활성의 1%에 의해 최면에 걸리고, 그것을 "나(me)"와 동일시한다. 그 장의 99%가 고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이지 않고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Once thoughts or feelings are labeled as "mine," they become magically imbued with presumptive omniscience and an assumed sovereign validity.
일단 생각이나 감정이 "내 것(mine)"으로 분류되면, 그것들은 추정적 전지전능(presumptive omniscience)과 가정된 통치권 타당성(ssumed sovereign validity)이 마법처럼 스며들게 된다.
Thoughts, ideas, and concepts are of pragmatie and useful value to worldliness; but with the relinquishment of worldliness, they are excess baggage and of no value.
생각, 아이디어, 개념은 실용적이고 속세의 세상에 유용한 가치이지만, 세속적인 것을 버리면 그것들은 초과 수하물(excess baggage)일 뿐이고 가치가 없다.
Through self-examination and inward focus, one can discover that all states of consciousness are the result of the execution of an option. They are not unchangeable certainties determined by uncontrollable factors at all. This can be discovered by examining how the mind works.
자기-조사(self-examination)와 내면의 집중(inward focus)을 통해, 우리는 의식의 모든 상태(all states of consciousness)는 하나의 선택지를 실행한 결과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들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변하지 않는 확실성(unchangeable certainties)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조사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
The primary defect now is, as it always has been, that the design of the human mind renders it intrinsically incapable of being able to tell truth from falsehood. This single, most crucial of all inherited defects lies at the root of all human distress and calamity.
언제나 그래왔듯이, 주된 결함은 인간 마음(human mind)의 설계가 본질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타고난 모든 결함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이 단 하나의 결함이 모든 인간의 고통과 재앙의 근원에 자리잡고 있다.
The ego/mind presumes and is convinced that its perceptions and interpretations of life experiences are the "real" thing and therefore "true". It also believes by projection that other people see, think, and feel the same way—if they do not, they are mistaken and therefore wrong. Thus, perception reinforces its hold by reification and presumptions.
에고/마음(ego/mind)은 인생 경험에 대한 그것의 인식과 해석이 "실제(real)"이고 따라서 "참(true)"이라고 가정하고 확신한다. 에고 마음은 또한 다른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보고, 생각하고, 느낀다는 투사에 의해 믿는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실수한 것이고, 잘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인식은 실체화(reification)와 추정을 통해 그 지배력을 강화한다.
The dualistic proclivity of the mind prevents the realization of the Oneness of Reality or the occurrence of Self-realization because the dualistic belief system as represented in language presumes a "this” causing a "that.” It therefore simultaneously and automatically also views the self as being a separate (and moralistically judged) "doer of deeds.” This dualistic system of mental processing reinforces the ego's positionalities that, in turn, produce the perceptual “illusion of the opposites" that stands at the gateway to enlightenment.
마음의 이원론적 성향은, 언어로 표현되는 이원론적 믿음 체계(dualistic belief system)가 '저것'을 일으키는 '이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실상의 하나임(Oneness of Reality)의 각성이나 참나-각성(Self-realization)의 발생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시에 그리고 자동적으로 작은 나(self)를 분리된(도덕적으로 판단되는) "행위의 행위자(doer of deeds)"로 간주한다. 정신처리의 이 이원론적 체계는 에고의 위치성을 강화하는데, 그것은 차례로 깨달음의 관문에 서 있는 인식의 '대립 환상(illusion of the opposites)'을 생성한다.
Although the human mind likes to believe that it is "of course” dedicated to truth, in reality, what it really seeks is confirmation of what it already believes. The ego is innately prideful and does not welcome the revelation that much of its beliefs are merely perceptual illusions.
비록 인간의 마음은 그것이 '당연히' 진리에 봉헌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할지라도, 실제로 찾는 것은 이미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일 뿐이다. 에고는 선천적으로 교만해서, 그 믿음의 대부분이 단지 인식의 환상이 드러난 것뿐이라는 사실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The human mind presumes that the commonality of a belief system is evidence of truth, and, of course, history is full of obvious examples of the contrary (for examples, see Extraordinary Popular Delusions and the Madness of Crowds by Charles Mackay).
인간의 마음은 믿음 체계의 공통성이 진실의 증거(evidence of truth)라고 가정하며, 물론 역사는 이와 반대되는 명백한 사례로 가득 차 있다(예를 들어, 찰스 맥케이의 대중의 미망과 광기를 보라)
Just as the physical "I"' registers images and objects like a camera, the mind is the "I" of the self, which perpetuates the illusion of a unique, separate personal identity that becomes hypothecated to be the originator of thought, intention desire, and so on. With relinquishment of this narcissistic illusion, it becomes apparent that all aspects of supposedly personal life are actually occurrences that are autonomous and spontaneous.
물리적인 '나(I)'가 카메라처럼 이미지와 사물을 등록하는 것처럼, 마음은 작은 나(self)의 '나(I)'이며, 이는 생각, 의도 욕망 등의 창시자로 담보된 독특하고 분리된 개인 정체성(personal identity)의 환상을 영속시킨다. 이 자기애적 환상(narcissistic illusion)을 버리면, 추정상 개인 삶의 모든 측면이 사실상 자율적이고 자발적 발생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All negative emotions persist because of their secret payoff. When this "ego juice" is declined, thoughts tend to diminish and then disappear. The mind then tends to go blank," which then brings up the fear of boredom. With observation, it becomes clear that the mind is busy anticipating the future (fear); clinging to the past (regret, hatred, guilt); or savoring the past to extract pleasure via reruns. Thus, the mind becomes the focus of amusement as "doing“ something.
모든 부정적인 감정은 에고의 은밀한 보상(secret payoff)때문에 지속된다. 이 "에고 단물(ego juice)"이 거부될 때, 생각이 줄어들고 그런 다음,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마음이 텅비는(go blank) 경향이 생기고, 그러면 따분함(boredom)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잘 관찰해 보면, 마음은 미래에 대한 기대(두려움), 과거에 대한 집착(후회, 증오, 죄책감); 또는 되돌리기(reruns)을 통해 쾌락을 추출하기 위해 과거를 음미하느라 바빠진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마음은 무언가를 "하는(doing)" 놀이에 집중하게 된다.
Because consciousness is formless and devoid of content, it is able to recognize form. Thoughts are only discernible if they move in a field of nonthought. The background of the mind is therefore the silence of the field of consciousness itself. In turn, consciousness, which is a field of potential energy, is detectable because it is illuminated by the light of awareness that is the Self.
의식(consciousness)은 형태가 없고, 내용이 없기 때문에 형상을 지각할 수 있다. 생각은 오직 생각이 없는 영역(field of nonthought)으로 생각이 이동할 때만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의 배경은 의식의 장 자체의 고요함(silence of the field of consciousness itself)이다. 차례로, 잠재 에너지의 장(field of potential energy)인 의식은 그것이 참나(Self)인 자각의 빛(light of awareness)에 의해 빛비추어지기 때문에 감지할 수 있다.
The mind has only information and imagination about anything; it cannot actually "know" because to know is to be that which is known. All else is only speculation and supposition. When the mind is transcended, there is nothing left to ask about. That which is complete lacks nothing, and that completion is self-evident in its Allness.
마음은 오직 어떤 것에 대해 정보와 상상력(information and imagination)만 보유한다. 그것은 실제로 "알(know)" 수 없는데, 왜냐하면 안다는 것(to know)은 알려진 것(which is known)이 됨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은 오직 짐작과 추정일 뿐이다. 마음이 초월될 때,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다. 완전한 것은 부족함이 없고, 그 완전함은 그것의 전체임(Allness) 안에서 자명하다.
Although the personal self likes to think that the thoughts going through the mind are "my thoughts," they are actually only "the thoughts" that prevail at a given level of consciousness.
비록 개인적 자기(personal self)는 마음을 관통하는 생각이 "내 생각(my thoughts)"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부여된 의식 수준(given level of consciousness)에서 지배하는 '그 생각(the thoughts'일 뿐이다.
Thoughts think themselves, they don't need you at all, just like the body goes about its business on its own.
생각은 스스로 생각한다. 몸이 스스로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은 당신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The mind's reality is a fiction. With that realization, it loses its reign as the arbiter of reality. Through the eye of the ego, life is a kaleidoscope of consciousness-changing attractions and repulsions, fears and transient pleasures.
마음의 실제(mind's reality)는 하나의 허구(fiction)다. 그 각성과 함께, 마음은 실상의 결정자(arbiter of reality)로서의 통치권을 잃는다. 에고의 눈으로 볼 때, 삶은 매력과 반발, 두려움과 일시적 쾌락을 변화시키는 의식의 만화경이다.
If you watch what your mind is really doing, you'll see that it is always trying to get “one up" on the next instant. By the next instant (about 1/10,000th of a second), what a person is experiencing (they are never experiencing reality) is the ego's interpretation of reality. Like an audio system, there is a monitor. So just as you record a program, the monitor feeds it into your ears. You heard what was just recorded a split second ago, but you are not hearing the program source; you are hearing what was just recorded.
만약 당신이 당신의 마음이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을 관찰한다면, 당신은 항상 다음 순간에 "1번(one up)"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다음 순간(약 1/10,000초)까지, 사람이 경험하고 있는 것(그들은 실제로 실상을 경험한 적이 없다)은 실상에 대한 에고의 해석일 뿐이다. 오디오 시스템과 같은 모니터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서 당신이 프로그램을 녹음하는대로 모니터는 녹음 소리를 귀에 전달한다. 당신은 찰나의 순간 전에 방금 녹음된 것을 들었지만, 프로그램 근원(program source)은 듣지 못한다. 당신은 방금 녹음한 내용을 듣고 있을 뿐이다.
Most people experience the monitor tape of the ego's interpretation of events. They're not experiencing events as they are in reality, they're experiencing the ego's interpretation.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건에 대한 에고의 해석이라는 모니터 테이프를 경험한다. 그들은 실상(reality)에서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에고의 해석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Mentalization is of egocentric origin, and its primary function is commentary. Unless requested, thought is vanity: an endless procession of opinion, rationalization, reprocessing, evaluating, and subtle judgment by which the thoughts are given value or importance via presumed significance because they are "mine." The ego is enamored of its life story and its central character.
정신화(Mentalization)는 에고 중심적 기원이며, 정신화의 주요 기능은 논평(commentary)이다. 요청되지 않은 생각은 헛된 것이다. 생각이 '나의 것(mine)'이기 때문에 의견, 합리화, 재처리, 평가 및 그 생각에 의한 미묘한 판단은 가정된 중대성(presumed significance)을 경유하여 주어진 가치나 중요성(value or importance)이 된다. 에고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와 중심 인물에 마음을 빼앗긴다.
That the human mind, without help, is unable to tell truth from falsehood due to its own innate structure and design is so staggering a discovery that it is roughly comparable to the discovery by Copernicus that caused cultural shock in the 16th century. Because this single fact alone is confrontational to the average mind, it will probably not be welcomed or warmly greeted by those who profit from sophistry and its illusions.
도움이 없다면, 인간의 마음(human mind)은 그 고유한 구조와 설계로 인해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은 16세기에 문화적 충격을 일으킨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에 비할만큼 놀라운 발견이다. 이 한 가지 사실 홀로 보통 사람의 마음과 대립되기 때문에, 궤변과 그 환상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아마도 환영받지 못하거나, 따뜻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