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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문화 비평 (下)
인터넷은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광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쉽게, 혹은 자주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과 좀더 수월하고 편리한 만남을 영위하려고 한다. 때문에 (上)편에서 바라 보았던 '컨텐츠 교류'의 관점과는 달리 '사람들의 만남'이라는 관점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인터넷의 문화적인 특성을 잘 대변해 주는 듯 하고, 이러한 관점에서라면 우리의 인터넷 문화는 매우 융성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까지 써 놓은 윗 문장들은 모두 착각에 불과하다.
익명성의 문제
익명성(匿名性, Anonymity, 혹은 Pseudonymity와도 동일한 의미로 함께 쓰임)은 흔히 '이름을 감추는 행위' 정도로 인식된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실명제(實名制)'라는 말을 쓰는 것에서 그 인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번역이 어찌 되었든,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익명성', 즉 '어나니머티'란 그보다 좀 더 넓은 뜻의 낱글이다. 이 낱글의 의미 안에는 사회 집단의 거대화, 매스미디어의 발달, 분업의 세분화, 그리고 도시 사회의 거대한 권력 구조를 암시하는 여러 사회적 이슈들이 담겨 있다.
미국 죠지타운 법대의 데이빗 포스트(David G. Post) 교수가 1996년에 발표한 '모여드는 지적 자산 (원제는 "Pooling Intellectual Capital: Thoughts on Anonymity, Pseudonymity, and Limited Liability in Cyberspace")'에서는 이러한 '익명성(Anonymity)'의 문제를 포함한 인터넷의 여러 사회적 이슈들을 잘 다뤄주고 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익명성에 대하여 법적으로 어떠한 접근이 이루어져 왔으며 또한 이루어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매우 면밀하면서도 과감한 결론을 유추해 내고 있다.
인터넷에서 익명성의 문제가 대두된 것은 이것이 거대 집단, 특히 정부의 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바로 체제의 보안(security)과 사생활 보호(privacy)의 영역에서 첨예하게 다루어졌으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이를 관리하는 중앙 집중식 감시 모델의 성립이 요구되게 했다. 반면, 벤덤의 원형 감옥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인터넷의 변화와 관련하여 1988년 미 연방 법원이 맥클린타이어 여사의 유인물 배포와 관련한 판결(윗 문서 참조)에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그것의 잘못된 적용보다 더 값진 것이다"라고 공표한 판결문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같은 해 미 연방 대법원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제리 폴웰 목사에 대한 래리 플린트의 명예 훼손 취하 상고심에 대해 원고 승소, 즉 래리 플린트에게 죄가 없음을 선고한 바 있다) 이처럼 인터넷에서의 익명성 논쟁은 표현의 자유와 체제 보안, 혹은 사생활 보호라는 양자의 필요성에 의해 매우 첨예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익명성의 문제가 단순히 법적 책임 소지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 다시 말해서 특정 사건에 대한 유무죄 판결 정도에 머무른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법 제도는 나라와 문화마다 다르고, 또 다르게 적용되는 것인데 반하여 인터넷 상에서 드러나는 인간 사회 집단의 행태는 매우 유사하고 동질적인, 인간 본래의 속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수년 전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익명성 논쟁의 얼개를 파악하는 것은 곧 우리의 인터넷 문화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익명성 논쟁의 본질은 '어째서 익명성을 추구하는가'라는 질문에 있다. 근본적으로 거대 사회 집단에서 드러나게 되는 '공공성(publicity)'은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공공(public)' 스스로가 자신에게 순응하는 개인성은 보호하되 반대하는 개인성은 제거하려는 속성을 어느 정도 가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거대화한 사회 집단에서 전체가 추구하는, 특별히 배타적인 어떤 논리에 맞서고자 하는 개인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이 제거될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비단 반체제 운동가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활동 영역이 세분화되고, 발달된 매스 미디어를 통해 이런 영역들이 쉽게 합종 연횡하여 거대 집단을 구성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사회는 여러 구획, 여러 계층의 다분화된 권력 구조를 갖게 되었다. 어떤 구획의 어느 계층에서라도 특정한 개인이 다수의 논리에 맞서고자 하는 경우 그 개인은 다수로 대변되는 '권력 집단'이 자신의 정체성, 곧 해당 사회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여러 가지 생존 활동의 요건들을 일부분, 혹은 모두 말소할 수 있다는 위험을 끌어 안아야 하는 것이다. 익명성은 이러한 필요로부터 개인이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추구된다.
이처럼 익명성의 필요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 집단으로부터 발복한 자연 발생적인 것"이라면 이것의 상대어를 '인터넷 실명제'라고 할 수 있을까. 익명성의 상대 개념은 오히려 '체제의 보안(system security)'이나 '사생활의 보호(privacy protection)'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체제의 보안이나 사생활의 보호에 반하는 그 무엇, 혹은 '표현의 자유(right of free speech)', '중앙 권력의 견제(restraint on central power)'가 익명성(anonymity or pseudonymity)의 본래 의미가 된다.
새로운 개념의 대두 : 사이버 인간(e-person)
앞서 소개한 데이빗 포스트 교수의 글은 '가상 공간(Cyberspace)'에서 드러나는 익명성의 문제는 인간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고유한 욕구와 필요들, 나아가서는 법적인 규약의 필요 문제 등에 적절히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또한 그는 이 글에서 기업 이론 분야에서 대두되었던 개념을 제시하면서, 적어도 가상 공간에서라면, 익명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법적 대상의 개념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커티스 카르노(Curtis Karnow)가 제안한 바 있는 '사이버 인간(e-person, electronic persona)'의 개념이다.
사이버 인간의 개념은 생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이와 유사한 '변종 인간'의 개념을 익숙하게 받아 들이고 있다. '법인(corporation)'이라는 것은 경제 활동을 하는 법적 개인을 규정해 놓은 것으로 일반적인 회사를 뜻하지만 법적으로는 한 사람의 개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별도로 부여받는다. 사이버 인간은, 마치 경제 활동이 규격화, 거대화되고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발휘하게 된 '기업'이라는 객체를 인간 사회의 구성원으로 흡수했던 것과 같이 사이버 공간이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연동하는 환경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법인(法人)'과 같이 표현한다면 '전인(電人)'이라는 다소 낯설은 이름이 되어 봄직한 이 사이버 인간은 가상 공간에서 존재하는 모든 인격체를 대변하는 하나의 규격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이버 인간은 현실 세계의 사람이 바로 드러나지 않으려는 익명성의 욕구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체제의 보안이나 사생활 보호를 위해 부과되는 의무를 짊어지게 할 법적 대상이기도 하다. 현실 사회에서는 반체제 게릴라로나 전락할 개인들도 사이버 공간에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유도를 확보하고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물론 '법인'과 같이, '사이버 인간'도 권리와 책임의 어느 정도는 실제의 사람과 연결되어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법인'이라는 법적 대상이 규정되기 전에 이미 기업 활동이 있었던 것처럼, '사이버 인간'이 어떠한 법적 개체로 규정되기 전인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우리는 그러한 속성의 '그 무엇인가'를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법인'처럼 '전인(電人)'이 규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앞서 말한 '사이버 공간에서의 자유도'를 누리지 못하는가? 우리는 이미 스스로 사이버 인간화된 자신의 복제물을 인터넷 상에서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터넷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훗날 어느 순간에 '사이버 인간', 'e-person', 'electronic persona' 등으로 불리게 될 미래형 객체의 원시 모델인 셈이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사람의 활동에서 야기된 또 하나의 어떤 '상(象, image)'에 불과하다.
눈속임
우리가 인터넷에서 만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활동에서 비롯된 복제물들이다. 문자를 통해, 영상이나 음향, 혹은 좀 더 기호화된 음향 신호로서의 음성 정보들을 통해 우리는 그 대상이 말하고자 하는 '사람'을 유추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누구도 완전히 성공할 수 없고 또한 누구라도 대강은 접근할 수 있는 이러한 눈속임의 규칙이 우리의 인터넷을 떠 받치고 있다. 그리고 그 규칙을 지탱하는 거대한 체제는 바로 '언어'이다.
근대 언어학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는 "언어란 기호의 부분 집합으로서 기표와 기의에 의해 설명되는 명명(naming)의 구조체"라고 말했다. 즉, 언어란 그 언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기의)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기표)으로 나뉘어 구성되었다는 말이다. 가상 공간에서의 인식 대상이 '사이버 인간'이라는 새로운 개체이며 이 사이버 인간들이 서로 의사를 소통하는 방식은, 영상과 음향 메시지를 넓은 범주의 '기호성 언어'에 포함시킨다고 했을 때 '언어'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공간(real world)'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답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관조적으로 고찰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드러난다. 우리는 실제의 사람들을 만날 때 어느 정도의 '언어적 거리감'과 이를 해소하는 여러 행위들, 표정, 손짓, 혹은 의복이나 심지어 몸의 냄새나 뇌파의 간섭을 통해서 서로 소통하는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기술이 발달하면서 조금씩 나아질런지는 몰라도 출발선 상에서 바라볼 때 이것은 철저히 가려진 가면의 축제와도 같다. 더욱이 그 가면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속성이 변하지 않는한 기술의 발달은 오히려 취사 선택되는 특수한 경우에나 도움을 줄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속이려는 우리 자신에게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언어에 익숙하고 인터넷에 익숙한 많은 이들은 실제 사회에서도 능숙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한다. 인터넷을 통해 만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본래의 자신과 다르더라도 인터넷에서 보여져 온 모습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익명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이름을 밝힌다고 해소될까. 우리는 그 이름이 사실인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성별, 혹은 생일과 나이는 어떨까. 살고 있는 지역, 좋아하는 음식이나 음악, 하는 일이나 직업을 밝힌다고 그를 실제의 사람으로 바로 연결시킬 수는 없다. 모든 것이 거짓일 수 있으며 또 모든 것이 진실일 수 있으되 그 진실들조차 그 사람 자신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사회 속의 개인을 명확히 '지명'할 수 있는 정보들은 대체로 개인의 생존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기 때문에 감추어지고 삭제된다. 주민등록번호나 사회보장번호와 같은 사회 체제의 인식자들은 역으로 무수한 가짜 정보들이 난무하여 실제 가치의 고유성을 훼손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 군중들을 향해 직장의 이름과 주소를 공개하거나 사는 집의 위치를 알리는 일은 거의 없다. 자신의 정보를 보호하는 요령들은 가족이나 친지, 동료들의 정보 보호에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이것이 때로는 그들을 공격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인터넷 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때로 여럿일 수도, 때로 하나일 수도 있는 가상의 '사이버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 '사이버 인간'들이 대화하는 대상 역시 내가 아니다. 내가 만들어 내고 있는 '사이버 인간'이다.
사이버 인간들의 문화
이러한 현실의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 인터넷을 바라본다면 그 문화의 특이성과 특수성에 대해 감탄할 수도 있고 때로 위협을 느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얼개가 나 자신, 또는 우리 각자에게 호의적이냐 위협적이냐가 아니라 그러한 사회가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의 속성에 대해 고민하고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사이버 인간들을 '본능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가'에 대해 관여할 수 있다. 우리의 숨겨진 욕구일 수도 있고, 우리의 열렬한 이상향일 수도 있는 그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인터넷을 메우고 있다.
그것이 욕구에 의해서든, 바램에 의해서든 사이버 인간들은 그래서 항상 우리의 목적과 연관을 갖는다. 큰 범주에서 볼 때 내면적인 욕구 충족의 목적과 공공이나 특정 집단을 향한 정보 전달의 목적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 이것은 '사이버 인간'들의 '존재 가치', 그들의 생존을 담보하는 '동인(動因)'이며 '모티브(motive)'이다. 우리의 인터넷 문화는 거대한 가면 축제의 문화인 셈이다. 무엇을 위해서인지 저마다 말할 수는 있으되 그조차 가면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곳은 '가상 공간(Cyberspace)'이다.
이제 생각해 보자. 당신은 누구인가.
아니, 당신이 지금 만나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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