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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11일
말씀: 시 63:1-7
제목: 하나님을 아는 삶-고난(4)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어서 실천상항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된다는 말씀을 계속 드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위해 하나님을 찾아야 된다는 말씀을 이어오고 있는데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도록 징계와 심판을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징계와 심판을 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기위해 하나님을 찾지 않은 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때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의 문화 종교 관습 전통에 젖어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인해 광야에서 죽음의 심판을 맛봐야했고, 애굽의 문화와 종교와 관습과 전통을 전혀 알지 못하는 세대, 즉 광야에서 태어난 20세 이하의 세대를 통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바벨론 문화와 종교와 관습과 전통에 물들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바벨론에 의해 유다나라가 망하는 심판을 당해야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들이 이런 이방종교와 문화와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느냐, 그것은 결국 자기중심적인 삶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하자면, 세상은 세속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1서2:16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이것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세상이란 무엇입니까? 결국 세상이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본능과 욕구에 따라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사는 삶이 바로 ‘세상’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이게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왜 세상의 문화 종교 관습 전통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느냐하면 바로 자기중심적인 삶, 즉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입니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새로 태어나야합니다. 거듭나야합니다. 생명을 얻어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 성경에서 펼쳐놓은 새로운 길을 걸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기위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경외하는 마음이 부어져서 친밀한 교제와 교통가운데 거함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알고, 즉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이 여신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어가기 전에 세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좀 알고 넘어가야 될 것 같아서 요한1서2:16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입니다. 더우면 시원해지고 싶고, 추우면 따뜻해지고 싶은 것과 같습니다. 본능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정욕으로 동원 될 때 문제라는 말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갈5:19-21 말씀에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것은 죄인들이 가진 본능입니다. 인간은 이 본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면, 즉 자신이 주인 된 삶을 살아가면 결과가 이런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곳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야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죽고 다시 사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바 되어야 비로소 육체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죽어야만 육체엣 벗어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고, 그럴 때 내 육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한 점은 우리가 죽고 다시 태어나면 완전히 육체의 유혹에서 벗어난 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유혹도 받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넘어질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육체의 지배를 받지 않은 다는 말입니다. 세속에서 머물러 있지 않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의중을 따라 하나님이 여실 길을 걸어감으로 복을 받는 복된 심령들이 비로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목의 정욕입니다. 굳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따로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안목의 정욕은 불필요한 육신의 정욕을 불러일으킵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먹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정말 먹고 싶은데 안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를 보고 다른 마음을 먹는 것 또한 안목의 정욕이지요. 지금 ‘Me Too’ 운동으로 정치계나, 예술계나, 문화계나, 종교계나 할 것 없이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서 인간들이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수요예배 때도 말씀드렸지만, 자기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 시민운동가들, 교육을 바로 세워보겠다는 사람들, 정직과 정의를 내세우는 정치인들 할 것 없이 이런 사람들이 걸려들고 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 자기가 잘났고 똑똑하고 자기만이 나라를 살릴 수 있고 자들만이 정의롭다고 하는 사람들 할 것 없이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기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지 않고서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보세요, ‘Me Too’운동을 전계하면, 왜 이런 운동을 전계할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하고 자신들을 돌아봐야하는데, 지금 어떻게 반응하느냐하면 ‘여자만 없으면 된다.’ 이렇게 ‘Me Too’운동 뒷면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식자리에 여자를 빼면 된다, 여자인턴 안 뽑으면 된다, 2013년 대통령 순방 때 여자를 한 명도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미국 순방 때, 윤창중대변인이 인턴 성추행사건 이후에 내놓은 대책이었습니다. 여교사를 가급적 신규발령을 내지 않겠다, 2년 전 섬마을 선생님이 주민들이게 성폭행당한 사건이 발생하자 교육부가 처음 내놓은 대책이 이러하였습니다. 당시 도서벽지에서 근무하는 여교사는 3000여명인데, 그러면 이곳에 여자선생을 보내지 않겠다면 지금 남자교사가 부족한 상황인데, 그러면 남자교사들을 다 도서벽지로 보내겠다는 말입니까? 여성만 없으면 된다, 여성만 안 보내면 된다는 발상은 성폭력의 원인제공자가 여성이라는 인식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정말 여자만 없으면 됩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은 육신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한,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원인제공자가 여자가 아니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을 수밖에 없었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생’이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말합니다. NIV 성경에는 ‘what he has and does’이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들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것이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누리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 가만히 있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데 시52:1 말씀을 보면,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약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잠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 이 땅의 것은 쉬 사라질 것이요, 영원히 쌓아놓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허무한 것들을 자랑한다는 것은 어리석인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즉,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십자가에 죽고 다시 태어나야 영적인 분별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즉 자기 중심적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실천적인 면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지속적인 말씀생활의 관점에서 말씀드리면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자신을 구하는 것이지요.
시24편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시편24편은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로 하나님을 알기위해 찾아나가는 것입니다. 시편은 평형 법으로 되어있습니다. 성경은 대부분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시편이 더욱 평형법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 전체구조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것을 더욱더 풍성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표현들을 나란히 사용하는 것입니다. 시24:6절에서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와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는 같은 문장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기위해 하나님을 찾아야 되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시42편을 봅시다. 이 시편42편은 ‘고라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라자손은 레위의 아들 중의 하나로서 그 후손들을 말하는데, 다윗은 언약궤에서 지속적으로 찬양하는 무리들을 세우는데요, 아삽등 이 모두가 고라자손들입니다. 이 시편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시편입니다. 시42: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면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이렇게 기록한 것으로 봐서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배로 인도한 사람임을 볼 수 있고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는 가뭄이 들고 큰 화제가 있어서 짐승들이 목말라 울부짖는다고 표현된 곳입니다.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아프리카에서 근기에 수많은 동물들이 물을 찾아 수천 킬로를 이동하면서 죽기도하고 병들 기도합니다. 그 중에 가장 앞장서는 동물은 사슴이랍니다. 왜냐하면 사슴은 물 냄새를 맡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이처럼 간절한 갈급함으로 주를 찾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하나님을 찾는데 이처럼 찾는다는 말입니다. 여기를 봐도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을 알기위해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함’이란 무슨 뜻입니까? 2절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1절에서 하나님을 찾기에 갈망한다는데,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살아계신 그 분을 갈망하는 것을 의미하고 과거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는데,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을 알기위해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입니다. 호5:14-15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이스라엘과 유다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구절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아닌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심판이 왜 사랑인가를 호세아서5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이 나옵니다. 14절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젊은 사자가 굶주려서 먹이를 발견하고 그 먹이를 물 때 절대 그 먹이를 놓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임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심판하시느냐하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도록 하기위해서입니다. 징계와 심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다듬어 내시고 빚어내시기 위해 징계하시고 심판은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죄악 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향해 내리시는 것입니다. 징계는 고난을 통해서 주로 징계하시는데, 징계의 가장 주된 목적도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을 얼굴을 구하기까지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기위해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호6:1절에서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기위해 하나님을 찾아야 되는데 하나님을 알기위해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로 종교는 그가 섬기는 대상을 찾습니다. 찾되 열심히 찾습니다. 열왕기상18장에서 보면 바알과 아세라묵상을 섬기는 850명의 선지자들이 그 신을 찾는데 어떻게 찾느냐 발버둥 치면서 찾습니다. 심지어 자기 몸을 해하면서 피를 흘리면서 그가 섬기는 신을 찾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섬기는 신을 진성으로 알기위한 것이 아니라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찾는 것입니다. 자기유익을 위해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되 어떻게 찾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을 알기위해 찾아야 됩니다. 2-3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찾도록 심판하셨는데 찾되 하나님을 알기위해 찾아야 되고 그 찾음은 바로 하나님을 얼굴을 구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라는 말이지요. 결국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위해 찾는 것이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알기위해 하나님을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필요를 위해, 도움을 구하기 위해 찾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시63: 이 시편은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겨나다시피 도망쳐 나와 광야로 가는 길입니다. 1절‘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광야에서 물이 마른 것을 말합니다. 광야에서 물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다는 것을,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한다,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전 존재가 바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앙모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하면 바로 2절에 있습니다. ‘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다윗이 성소에서 주를 보았을 때를 회상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성소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던 곳입니다. 다윗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의 영광을 본 곳입니다.
보십시오. 다윗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사막에 있지요, 여기서 부인과 가족은 다 내버려 두고 몇몇 신하와 쫓겨나다 시피 도망 나왔는데, 여기서 지금 다윗은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왕궁요, 왕의 권세요, 국가의 안녕, 후궁들의 안전, 압살롬의 멸망, 화려한 음식, 안락한 침대, 아닙니다. 그는 여기서 그토록 성전의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사모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고난 중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가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얼굴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같으면 뭘 구했겠습니까?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위기상황을 맞이했을 때, 질병으로 죽음을 눈앞에 보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구합니까? 암환자들이 다급하게 전화가 옵니다. 빨리 기도해 달라고, 무엇을 말입니까? 치유와 고침을 위해서 낫게 해 달라고, 생명을 연장시켜달라고, 그런데요 이럴 때 우리가 구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리고 그 분으로 인해 결정되어야할 모든 것에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더 중요하고 더 갈급해 해야 할 문제인데 우리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3절‘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인자’는 헤세드, 즉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영광을 보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4절‘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이나 사역, 그분의 존재 자체를 가리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보호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손을 들리이다.’는 간절한 기도 자세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나는 무익한 존재입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항복합니다’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높이 든 빈 손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감과 신뢰심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번에 정말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간구하는 특별기도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6절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옲조린다’ 는 것은 묵상하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그 분을 신뢰하고 그 분의 주권을 믿고 나아가지 않았다면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환경과 여건이 어떻게 되었던지 간에 하나님으로 인해 나아가는 삶이라면, 아무 걱정 없다는 것을 다윗이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기위해 구하고 찾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번 특별기도회가 온전히 하나님만을 구하며 찾아 하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의중과 뜻을 깨달으며 새 길을 열어가며 영광된 삶, 감사의 삶, 축복을 삶을 내 인생에 펼쳐 나가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