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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박정희) 구체적 친일 행적 열 가지 ★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친일파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친일분자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이다. 친일부역의 정도에 따라서 A급, B급, C급 등으로 나눈다면 박정희에게는 A급으로는 부족하여 특급 친일파(A+)로 분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겨울공화국 같은 독재와 반민주, 반인권의 죄상을 묻지 않아도 친일행적 하나만으로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역적 죄인이다.
'변신의 황제'였던 그는 결국 한반도 남쪽에 일본도 흉내만 내다만 천황주의를 완성하였다. 즉, 다카키 천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반전술, 변장술, 위장술, 둔갑술 등을 이용하여 천황주의를 완성하고 진짜천황이 되었는데 그 과정은 역겨운 구토물 속에서 이루어졌다
교사에서 군인으로--- 조선청년에서 일본군 장교로--- 박정희에서 다카키 마사오로--- 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오카모토 미누루에서 다시 박정희로--- 일본군 장교에서 대한민국 장교로--- '빨갱이' 무기수에서 반공의 기수로--- 충성스런 장성에서 군사반란 두목으로--- 육군 대장에서 대통령으로---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혈서(최우수 제국군인)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자진해서 만주군관학교 생도생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입학(1940년 4월 4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나이 23세. 입교 동기생으로 240중 조선인 12명. 15등으로 입학하였다. 하지만 2기 졸업식에서는 240명중 당당히 1등으로 졸업하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그 덕에 영광의 얼굴로 [만주일보]에 실린다. 뿐만 아니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졸업식 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힘차게 낭독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자원해서 들어가는 상황을 좀더 살펴보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즉, 나이 때문에 자격 미달이었는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호적을 고쳐서 나이를 낮췄다고 한다.
또한 나이를 낮췄다고 멀쩡한 조선인이 군관학교/사관학교에 입학하기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원검증과 사상검증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어떻게 하면 신원검증과 사상검증에서 인정을 받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동료교사 유증선이 아이디어를 내주었는데 "박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하며 제안했다고 한다. 이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찬동했다.
나이도, 신원검증도, 사상검증의 장애물을 한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충성혈서는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을 감동 시켰다. 아니 일제를 감동 시켜 당시의 언론에(만주일보) 대서 특필 되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
이 글귀가 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이다
이 글귀를 풀이하자면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라는 가미가제식 자폭성 혈서를 쓴 것이다. 이 충성혈서는 한 가지 기록을 갖게 된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혈서로 일본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조선사람은 단 한명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뿐이었다. 스스로 자진해서건 강제로건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 JS표 일본인 준비
만주군관학교를 투철한 친일정신과 열성적 훈련으로 수석 졸업의 영광을 차지한다. 수석졸업의 영광으로 금시계를 선물로 받고 졸업생 대표로 천황찬양으로 가득한 답사를 읽었다.
당시 친일신문〈만주일보 1942. 3. 24〉기사 일부를 인용하면...
[… 빛나는 우등생 오카이(日系), 고야마(日系), 다카키(鮮系-박정희) 등 5명에
게 각각 은사상증의 전달이 잇고 폐식 하였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은 대략 제1기∼제7기까지 50여명 정도인데... 이 만주군 출신들은 훗날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방장관, 군참모 총장, 해병대사령관, 군사령관, 군단장, 연대장, 고급 참모등 정부와 군의 요직에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중요 인물이 된다. 한 마디로 황군들이 나라 조지고 민족정기 좀 먹는 세력이 된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를 지도했던 한 일본인 장교의 말을 들어보면 다카키 마사
오(박정희)가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철투철미 하게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고자 하였나를 알 수 있다.
[ 매년 가을이 되면 군관학교에는 생도 전원이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행군연습을 실시했다. 박정희는 그때 내가 맡은 소대의 제1분대장이었는데, 다른 분대장과는 달리 기합이 들어 있었고, 의욕도 대단했다. 진지공격 연습 같은 때 대단히 어려운 임무가 부여되더라도 박정희는 그 임무를 달성하려는 의욕으로 꽉 차있었다. 박정희는 말수가 적고 속에 투지를 감춘 사나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
③ 완전한 일본인 - JS표 일본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례대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일본육사 특전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입학하려고 군관학교 시절 남들보다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열심히 공부한 것이다. 일본 육사에서도 진지한 학습태도로 모범생이란 평을 받고 3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다카키 마사오)이 되었다. 아니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10.26으로 김재규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한 일본 외교관은 이러한 말을 했다.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JS(Japanese Standard)표 [일제인]이라는 말인 것이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
소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본토의 마쓰야마 제 14연대에 처음 배속을 받았으나 진정한 일본군인을 참작하여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란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영안지방 →간도에서 활약한 한인 독립군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에 주둔하던 요충지였다. 열하지구 ⇒ 일본군에 대한 항일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항일세력은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의 게릴라 (유격대) 등이었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이곳에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한다. 군의 편제상 소대장은 최전선에 배치된다. 여기에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되어 있었던 부대는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를 출정하게 되는데 과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양심의 가책이나 동포를 죽이는 행동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에 고민을 하였을까?
미안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조센징 토벌'이라면 환장을 한 놈이었다.
문명자씨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텅에서 벌어진 일들』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함께 지냈던 어떤 만주군 장교 출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
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
다....]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중국북지(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여기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소수민족들의 특수부대는 많았다. 조선인의 간도특설대, 러시아인의 찬야부대, 몽고인의 기야부대, 회교인의 회교부대, 오르치온족의 공작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본군, 만주군이 못해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인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 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한 특수부대(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이야기이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 지원 입대... 만주군관학교의 수석졸업과 금시계의 영광... 3등으로 졸업한 일본육사 생활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복무하며 항일세력을 토벌하던 생활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날아가 버린다.
친일파 아니 일본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일본의 지배는 영원 할 것이라고 생각한 박정희에게는 일본의 항복은 대단한 쇼크였을 것이다. 패잔병의 낭패감과 극한의 절망에 빠졌으리라.
하지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누구인가 변신의 천재가 아닌가? 절망도 잠시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곧바로 변신을 시도한다. 그토록 노력하고 공들여 입
은 황군의 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만주군의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들어 북경으로 들어가 광복군에 합류한다.
7. 여순반란사건에 남노당 군사총책으로 사형수가 된 박 정희
해방후 절대빈곤 상태에 있던 해방정국에서 좌익이 우세하던 분위기에서 남노당 군사총책이던 박정희는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자 남노당 동지 3500명을 밀고하여 죽게 만든후 자신은 그 배신의 대가로 살아 남는 비열함을 보여준다.
(박정희의 3째형 박 상희는 남노당 간부였음)
그리고 다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준다. 어쩌면 한반도 남쪽을 반공으로 도배하는 길만이 자기의 과거를(황군/좌익 등) 은폐하고 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기회주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기회주의란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보여 준 전형적인 인물이다.
속성이 이런데 일본 패망 후 곧 바로 광복군으로 위장하여 합류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하던 일본의 진짜군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쥐새끼 마냥 살아 남으려고 광복군 흉내를 낸 것이다.
정말 구토가 나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행동이다.
8.박정희의 창씨개명 - 조선인 흔적 지우기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인들은 강제로 창씨개명 되었다. 박정희도 예외가 아니어서 창씨개명을 하였는데 그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이다.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은 박정희란 조선이름을 응용한 것이다. 다카키(高木)란 성은 고령 박씨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한 것이다. 그래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호칭에는 약간이나마 조선민족의 뿌리가 남아 있다고 하겠다
박정희는 일본정신으로 머리 채우고 일본군복을 입고 일본사람보다 일본어를 더 잘해도 핏줄 만은 바꿀 수 없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조선인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박정희는 조선민족이라는 핏줄 끊기를 강행한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에서는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여 다시 작명을 한다
그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참으로 경악할 박정희의 행동이다. 자작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조선인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조선인이라는 흔적을 철저하고... 말끔하게... 깨끗히 지우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태어 나고자 했던 것이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진짜 일본이름이다. 이 이름 어디에서도 조선사람의 뿌리를 찾을 수 없다.
9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관동군으로 이어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복무기간은 5년 정도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나이 23세에서 28세까지의 기간이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몸과 마음을 환골 탈퇴하여 일본인 일본군인이 되어 정서체계와 사고방식 등 모두 일본놈 그 자체였다. 그 증거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타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취미 생활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것은 얌전한 행위에 속했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압권이다.
[중앙일보. 1991. 12. 14]
[ .....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이런 미친 인간이 18년간 우리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통치 기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인재로 등용하여 나라를 좀먹고 민족정기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망쳐 놓았다.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의 망언
일본 방문중 동경의 한 요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여 동석했던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것도 유창한 일본어로 말이다.
1963년 12월 17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걸작의 말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라고 하였다.
사실 자민당의 보수 세력은 박정희와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제국의 동료 및 상관들이었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박정희는 이때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보상 명목으로(한일경제협력을 위한 지원금) 3억달러 정도를 받는 것으로 끝낸다.
장면 시절의 8억달러나 이승만 때의 80억 달러의 주장에 비하면 너무나 헐값이었다. 일본은 이때 받았던 3억달러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은 모두 끝났다고 말한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몇 백일을 시위해도 일본은 10원 한푼 내놓지 않을 것이다. 모두 친일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작품이다.
또한 1973년 서울 지하철 차량부정도입 사건을 저지른다. 일본에서 지하철차량 186량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에서 3,204만엔하는 가격을 6,350만엔이란 두 배 정도나 비싼 가격으로 계약하였다. 이것은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의 리베이트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전 생을 통하여 배신과 배반을 밥먹듯 하며 출세와 부귀를 추구한 민족반역자를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일제의 잔존세력으로 하여금 이 나라를 다시 지배 강점할 수 있다고 자신하게끔 만드는 반역적 태도라는 것을 개달아야 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것도 이미 민주당 정부가 만들어 놓고 그 시행하기전 박 정희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집행도 못해 본 것이다.
경제개발이 100% 박 정희의 공이라 하더라도 그게 존경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스타린도 쏘련을 강국으로 만들었고
히틀러도 독일을 부강케 하엿지만 결코 존경하지 않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흉년에 부모를 죽인 원수가 쌀말이라도 주어 죽이라도 쑤어 먹었다고 하여 그 원수가 은인이 될 수 없음과도 같다.
친일청산운동본부
삭제된 댓글 입니다.
님만이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테지요...아마..그런데 왜 댓글이...하나인지..아무튼 감사합니다.
한반도 남쪽에 일본도 흉내만 내다만 천황주의를 완성하였다.2
똑똑한 사람이 변절을 하면 얼마나 불행한 국가와 국민이 되는지 보여주는 보여주는 사례임![!](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요즘도 노무현때문에 박정회가 변절했다는 사람이 있을정도로 불행한 국민... ![ㅎ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70.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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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뿌리가 깊히 박혀있는지라...청산 하기 위하여는 향후 50년 이상이 걸리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그것도 친일 청산에 대한 의욕이 지금처럼 식지 않는 분이 많다는 전제하에...어느정도 청산 분위기가 무르익어간다 하였더니 이~~웬수 맹박이 같은 넘이 나타나서는...훼방을 놓는지..원...
50년 이면 저 같은 넘도 이미 저승 사자와 ....! .. 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