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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5월11일(화)맑음
<대화의 다섯 가지 원칙>
①말 자르지 않기
상대방이 말을 하는 중에 습관적으로 “그런데~”, “아니~” 하고 중간에 끼어들어 자기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소통을 위한 원칙의 하나로 ‘7:3의 원리’가 있다. 70%를 듣고, 30%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귀는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이유가 이것이다.
②관심 유지하기
대화를 잘 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대화 중 딴짓을 하지 말라. “오 그래?”, “그래서?”, “그거 좋은데?”, “한번 들어보자”와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격려의 말을 하라.
③평가, 조언, 충고 미루기
남의 말을 듣는 대신에 먼저 자신의 경험이나 동기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평가하려고 하지 말라.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지 말라. 대화할 때는 먼저 상대방의 감정과 상황, 의견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라.
④핵심 파악하기
대화를 잘하는 사람일수록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제대로 파악한다. 상대방이 “뭐 해?”라고 카톡 메시지를 보낸 것은 단지 내가 지금 뭘 하는지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의미는 “나 지금 심심하니까 재밌게 해줘”라는 의미이다.
⑤표현하기
적절한 대화를 위해서는 적절한 반응과 표현이 필요하다. 눈을 마주 보거나, 말로 반응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여 상대의 말을 적극적으로 듣고 있다는 것을 표현해야 한다. 주제가 바뀔 때마다 표정에 변화를 주며, 호응을 잘 해주는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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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자의 존재에서 無의 無化함이 일어난다. 無는 生動하는 無이어서 諸法을 生滅自在케 하니 果然 不然之大然이다. Das Nichten des Nichts, the nihilation of nothingness
존재(總相, 諸法)는 無住, 無相(다른 말로 無常)이다. 生生 自彊不息이다.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존재일 뿐이다.
*無는 부정사도 목표도 종료점도 아니다. 無는 존재 자체의 떨림이며 어떤 존재적ontisch 존재보다 더욱 실재적이다. 존재발생이나 존재계시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무화적 잠재력(nihilating potency)이다. 존재는 무화하는 작용인(nihilating agency)으로 발생한다.
*존재의 열린 장(會域)은 참다운 생명이 움터 오르는 시원적인 장소이다.
*여기에 나는 기다리며 앉아있었네.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으면서. 선악의 저편에서, 때로 빛을 즐기고 때로 그림자를 즐기며. 모든 것은 오직 놀이일 뿐, 순전히 호수이고 정오正午며 목표 없는 시간일 뿐. -니체 <실스마리아>
2021년5월12일(수)맑음
초하루 독경법회. 독경, 명상, 요가 하다. 김밥 공양하고 선학산을 걸어서 선학사 대위스님을 찾아뵙다. 선학사 도량이 잘 다듬어져 조촐하고 고적한 맛이 난다. 주지스님은 코로나 전염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 기간 동안 절을 찾는 사람이 없는 공백기를 이용해서 도량을 조금씩 정비하여 이젠 흡족할 만큼 되었다고 하신다. 차담을 마치고 다시 걸어서 돌아왔다. 피곤하다. 배와 머리가 아파서 몸살약을 먹다.
저녁에 초당, 리화, 정광거사가 인사차 방문하다. 코로나로 인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나, 마음은 항상 호숫가를 노닐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환담을 나누고 돌아가다.
2021년5월14일(금)맑음
화엄사 선원장 본해, 선원수좌 일선, 각범 스님 점심공양에 초대하다. 진주선원에서 차담 나누다.
2021년5월15일(토)비
부산 계시는 고등학교 은사님께 전화 인사드리다. 초파일 행사에 오시라고 초청하다. 초록보살이 공양청 해서 공양주 보살님들과 함께 공양하다. 등을 달다.
2021년5월17일(일)비
일진선사 선 강의 오후 4:20~6:20
참석자: 원담, 홍보살, 민재거사, 宗山거사(하영택, 치악산 구룡사 사찰관리)
<조사선의 核心密令핵심밀령>
如何是 平常句 어떤 것이 평상의 말씀입니까? 지금 이대로 일용하는 진리를 보이는 것.
배고프면 밥 먹는다. 구구는 팔십일. ‘自受用句자수용구’라고도 한다. 자기 스스로 활용하는 말씀이다.
如何是 本分句 어떤 것이 본래를 드러내는 말씀입니까? 春來草自靑 봄이 오니 풀이 저절로 푸르다. 日落西山月出東 서산에 해가 지니 동쪽에서 달이 뜨네.
如何是 法身句 어떤 것이 법신의 말씀입니까? 법신-도리를 잘 말한다 해도 ‘법신’이라는 관념의 흔적이 남는다.
* “妄念이 사라지면 眞心이 드러난다.”라는 구절은 我空은 되었지만, 眞心이라는 法相이 아직 남아 있다. 왜 그런가? 망념이 사라짐은 我空이며, 진심이 드러남은 法이 드러났다는 말이다. 그러나 法이라는 흔적(相)이 남는다. 그래서 아공과 법공을 다 갖추어 말하려면 “망념이 사라지면 진심도 사라진다.”라고 해야 한다. 십우도에서 8번째 人牛俱妄인우구망, 소 찾은 사람과 찾는 소도 모두 사라진 경지이다.
如何是 格外句 어떤 것이 틀을 벗어난 말씀입니까? 庭前栢樹子, 麻三斤, 乾屎橛 등
他受用句타수용구: 다른 사람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말씀이다.
5. 如何是 向上句 어떤 것이 향상하는 말씀입니까? 佛祖도 모르는 말씀, 三界를 초월하는 말씀.
6. 如何是 末後句 어떤 것이 최후의 말씀입니까? 말후구는 體相用을 한 번에 그대로 드러내어 상대방을 꼼짝 못 하게 하는 말씀이다. 칼자루를 쥐고 상대의 말길을 확 끊어버리면서(殺人劍) 동시에 실상을 보는 눈을 열어줌으로써 생생한 본래 생명을 살려낸다(活人刀). 상대방 말고삐를 잡아당겼다가 놓아주었다 하면서 생각이 끊어진 자리로 끌어들인다. 이것은 縱脫自在종탈자재하며 生死與奪생사여탈하는 선사의 法力이다. 이런 예가 덕산탁발, 임제탁발, 암두밀계이다.
7. 如何是 攻過句 어떤 것이 상대의 허물을 공격하는 말씀입니까? 분명히 맞게 답했는데도 상대가 틀렸다고 할 때, 그것을 되받아치면서 상대를 반격하는 것이다. 수좌의 활달한 기질을 보여준다.
8. 如何是 寂裏句 어떤 것이 침묵의 말씀입니까? 못 들은 체하며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良久양구. 달마면벽.
9. 如何是 法身向上句 어떤 것이 법신에서 더 나아간 말씀입니까? 법신이란 자취마저도 지운다.
10. 如何是 透法身句 어떤 것이 법신을 넘어선 말씀입니까? 法身向上句와 같다.
진흙 소가 바다에 들어가더니 아무 소식이 없다. 泥牛入海無消息 니우입해무소식.
호랑이 입안에서 그네를 뛴다. 虎口裏鞦韆호구리추천.
작은 벌레 눈 속에 시장이 들어서고, 호랑이 혀 위에서 그네를 뛴다.
蟭螟眼裏放市, 大蟲舌上打鞦韆. 초명안리방시, 대충설상타추천
북두칠성에 몸을 숨긴다. 北斗藏身 북두장신
동쪽 산이 물 위로 간다. 東山水上行 동산수상행
이런 것을 알아야 祖師禪을 안다고 할 수 있다.
11. 如何是 第一句 어떤 것이 첫 번째 말씀입니까? 주장자, 棒방, 喝할, 良久.
開口卽着: 입 벌리면 그르친다. 喪神失命상신실명: 목숨을 잃는다.
*해설: 입 벌리면 그르친다.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닫고 있어도 그르친다. 閉口卽錯.
12. 如何是 第二句 어떤 것이 두 번째 말씀입니까? 言說로 提接하는 것
13. 如何是 第三句 어떤 것이 세 번째 말씀입니까? 방편으로 제접하는 것
14. 如何是 入門句 어떤 것이 입문하는 말씀입니까?
15. 如何是 當門句 어떤 것이 문에 들어선 말씀입니까?
16. 如何是 門裡句 어떤 것이 문안에 들어온 말씀입니까? 여기서부터 조사선이다.
[참고]나옹(懶翁慧懃, 1320~1376)화상 三門句
①입문구: 佛門으로 들어갈 때 왼쪽으로 떨어지지 않고 오른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으며 정면으로 향한다. 向時. 不落左不落右 正面而入.
②당문구: 불법을 받들 때 기틀과 지혜가 상응하여 겹겹의 심오한 이치로 깊이 들어간다.
奉時, 機智相應 深入重玄.
③문리구: 불법을 깨닫고 그것을 활용할 때 마땅히 주인 가운데 주인이 되어 오랫동안 문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共功時. 當證主中主 長年不出.
17. 如何是 玄中玄 어떤 것이 알 수 없는 가운데 알 수 없는 말씀입니까? 양구, 방, 할. 행동으로 보여준다.
18. 如何是 句中玄 어떤 것이 말이기는 하나 알 수 없는 말씀입니까? 格外句이다.
19. 如何是 體中玄 어떤 것이 전체 가운데 알 수 없는 말씀입니까?
화엄십현 같은 구절을 말한다. 一卽多 多卽一 등. 두순(杜順,618~907)화상 법신송 같은 류이다.
20. 如何是 主中主 어떤 것이 스승이 스승 노릇을 하는 경지입니까?
*일진선사: 푸른 창공에 공산명월입니다.
21. 如何是 主中賓 어떤 것이 스승이 제자를 장악한 경지입니까?
*일진선사: 계곡에 류수로다.
22. 如何是 賓中主 어떤 것이 제자에게 휘둘린 스승의 경지입니까?
23. 如何是 賓中賓 어떤 것이 어리석은 제자의 경지입니까?
*일진선사: 흐르는 물속에 연어가 놉니다.
24. 如何是 賓中相去 어떤 것이 객관과 주관의 간격은 얼마나 됩니까?
雲門禪師云, 운문선사 가로되, 如眼如目. 거기서 거기다.
*해설: 주관과 객관의 거리가 眼과 目이라 하니, 그 자리가 곧 그 자리이다. 거기가 거기이니 같은 자리다. 거리가 없다. (출처: 雲門匡眞禪師廣錄 上)
[참고] 四賓主: 임제선사는 제자들에게 사빈주(四賓主, 손님과 주인과의 네 가지 관계)라는 법을 가르쳤는데, 선지식(선생, 主)과 수행자(학생, 客) 간의 선문답을 통해 깨달음의 정도를 가늠해 보는 방편법을 말한다.
①주인이 손님을 알아본다(主看客): 깨달은 선생이 어리석은 학생을 알아내는 법
②손님이 주인을 알아본다(客看主): 깨달은 선생이 깨달은 학생을 알아내는 법
③서로 손님 노릇 밖에 못한다(客看客): 선생도 학생도 깨닫지 못한 경우
④손님이 주인을 알아본다(客看主): 깨달은 학생이 어리석은 선생을 알아내는 법
나중에 임제종의 법맥(法脈)을 이어받은 풍혈연소(風穴延沼, 896~972) 선사는 이것을 달리 풀이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①주중주(主中主): 스승이 제자를 가르칠만한 역량을 제대로 갖춘 경지
②주중빈(主中賓): 스승이 제자를 가르칠 만한 깨달음이 없는 경우
③빈중주(賓中主): 제자의 깨달은 경지가 스승보다 뛰어난 경우
④빈중빈(賓中賓): 스승과 제자가 어리석어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 미중미(迷中迷).
<운문3구>
25. 如何是 函蓋乾坤句 어떤 것이 하늘을 덮고 땅을 감싸는 말씀입니까? 진리는 현상계 전체를 스며들어 포용한다.
26. 如何是 水波逐浪句 어떤 것이 모든 흐름을 한순간에 단절하는 말씀입니까? 제자의 능력과 자질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지도한다.
27. 如何是 切斷衆流句 어떤 것이 파도를 따라 흐름을 같이하는 말씀입니까? 제자의 번뇌망상을 명쾌하게 끊어버린다.
[참고]25, 26, 27을 雲門3句라 한다: 운문(雲門文偃,864 ~ 949)선사가 말씀하기를 “하늘 중에서 하늘과 땅을 덮는 것이요天中 函盖乾坤, 눈대중으로 헤아림目機銖兩이요, 봄날의 인연에 끌리지 않는不涉春緣 한 구절一句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대답하기를 “한 화살로 세 관문을 뚫느니라. 一鏃 破三關”하였다. 나중에 운문선사의 제자였던 덕산연밀(德山緣密, 宋代 생몰연대 불명)이 이 3구를 세련되게 정리하니 소위 ‘운문3구’가 되어 천하에 유행하게 되었다.
<도솔3관>
28. 도솔종열(兜率從悅, 1044~1091) 선사가 세운 세 가지 통과해야 할 법문. 이 같은 방편 법문은 깨달은 사람이 학인을 다룰 수 있는 機權기권(임기응변, 살활자재, 종탈자재하는 禪智)을 열어주게 함이다.
①撥草參玄 只圖見性 卽今上人 性在甚處?
발초참현 지도견성 즉금상인 성재심처
번뇌의 풀을 헤치고 깊은 이치를 참구하는 것은 다만 견성(見性)하기 위한 것이니
지금 그대의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
*일진선사: 본성 아닌 게 어디 있단 말인가? 다시 묻는 건 용납지 않겠다. 再犯不容재범불용
29. ②識得自性 方脫生死 眼光落時 作麽生脫?
식득자성 방탈생사 안광낙시 작마생탈
자성(自性)을 알았다면 곧 나고 죽음에서 해탈했을 것이니 눈빛이 떨어질 때
어떻게 해탈하려는가?
*일진선사: 죽음 또한 자기의 망녕된 생각인 줄 알면 생사에서 해탈하니 마니 물을 필요 없겠지.
30. ③脫得生死 便知去處 四大分離 向甚處去?
탈득생사 변지거처 사대분리 향심처거
나고 죽음에서 해탈했다면 가는 곳을 알 것이니, 지수화풍이 각기 흩어지면
어느 곳을 향하여 가는가?
*일진선사: 오고 감이 사라진 곳에 생사네, 해탈이네 하는 말 모두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
가고 옴이 없는 데 산자는 무엇이며 죽는 자는 무엇인고?
<백파긍선의 삼요>
31. 如何是 大機圓應句 어떤 것이 대기원응의 말씀입니까? 여래의 본분각성은 중생의 근기에 두루 호응하는 큰 기틀이 된다.
如何是 大用直截句 어떤 것이 대용직절의 말씀입니까? 본분각성은 중생의 번뇌망상을 단번에 모조리 끊어버리는 큰 쓰임새가 된다.
*일진선사: 차를 마신다.
32. 如何是 機用齊施句 어떤 것이 기용을 함께 쓰는 말씀입니까? 선지식은 중생의 다양한 근기에 맞게 호응(活)하는 동시에 번뇌망상을 끊어서(殺) 깨닫게 해준다. 機用齊施는 機用同時이다. 殺活自在하는 선지식의 솜씨이다.
*일진선사: 발로 차버린다.
[참고]백파긍선(白坡亘璇,1767~1852)은 조선말 선종의 견해를 총정리하여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지었다. 거기에서 임제3구를 주장했는데 제1구는 대기원응, 대용직절, 기용제시의 3要로 이것을 깨달으면 불조의 스승이 되고, 제2구는 현중현, 구중현, 체중현의 3玄으로 이것을 깨달으면 인천의 스승이 되며, 제3구는 유, 무, 중의 희론으로 이것으로는 자신도 구제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초의의순(草衣意恂,1786∼1866)은 백파의 견해를 비판하여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지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도 여기에 가세하여 초의를 옹호하고 백파를 비판하면서 <증답백파서(證答白坡書)>를 지었다.
33. 如何是 佛?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일진선사: 부처 아닌 게 있습니까? 지금 부처가 어디에 있습니까?
34. 如何是 諸佛出身處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이 오신 곳입니까?
*일진선사: 부처는 오고감이 없느니라. 東山水上行. 동쪽 산이 물 위로 간다.
35. 如何是 諸佛向上事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을 넘어서는 일입니까?
*원담: 마당이나 쓸게나.
36. 如何是 無上大涅槃 어떤 것이 위 없는 열반의 경지입니까?
*일진선사: 鬧市酒盤臺뇨시주반대. 시장바닥에 놓인 술상!
37. 如何是 祖師西來意 어떤 것이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일진선사: 달마는 다리가 없다. 叉手차수(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있다). 지금 달마가 어디에 있는가?
38. 如何是 本來面目 어떤 것이 본래 모습입니까?
*일진선사: 頭白顔不老두백안불노. 머리는 희나 얼굴은 늙지 않는다. 本無生死본무생사, 본래로 생사가 없다.
39. 如何是 殺佛殺祖 어떤 것이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는 것입니까?
*원담: 쯧쯧, 죽이는 걸 좋아하는 놈이군. 도리어 칼 맞는 수가 있으니 빨리 도망가라.
40. 如何是 超脫生死 어떤 것이 생사를 초월하는 것입니까?
*원담: 生!死!
41. 如何是 佛法的的大意 어떤 것이 불교의 똑바른 이치입니까?
*원담: 법당문을 활짝 열면서 “불법이 천하에 가득하거늘 똑바른 이치를 별달리 찾아 무엇 하겠습니까?”
42. 如何是 超佛越祖 어떤 것이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는 것입니까?
*일진선사: 호떡胡餠이다.
이 42가지 공안에 대해 자유자재하게 답을 할 수 있는 선사만이 이 시대에 진정 살아있는 조사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조사는 차별지를 갖춘 영적인 스승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아직 미진함이 남아 있는 途中의 사람이다.
<추가보충>
1. “이뭣고?”, “그대는 누구입니까?”, “깨달음은 그대의 다른 이름이다.”, “오직 모를 뿐”. 이런 것들은 ‘내용물이 없는 텅 빈 각성(空寂靈智)’을 바로 가리키는 것이다. 이를 ‘참나’, ‘진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을 보려고 하면 볼 수 없고, 알고자 한다면 알 수 없다. 생각이 개입되면 즉시 어그러진다. 알 수 없는데 스스로 분명할 뿐이다. 이것을 內心自證내심자증이라 한다. 자기 스스로 증험할 뿐이라는 뜻이다.
2. 유리 독에 몸을 숨긴다 琉璃瓮裏可藏身유리옹리가장신.
답: 무엇을 일러 유리 독이라 하는가? 무엇이 안팎입니까?
3. 야반삼경에 빗장을 만져라. 어디다 빗장을 채웁니까? 답: 어디다 빗장을 채웁니까? 빗장이란 생각이 끊어진 자리! 찾을 수 없음이 찾아진 자리이다.
4.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을 이르시오! 답: -악- 옆구리를 한 대 쥐어박는다.
5. 何處龍城고? 어디가 용성(龍의 城, 용성(龍城震鐘, 1864~1940)스님)입니까?
답: 용성 아닌 게 있습니까?
6. 如何是 向上句 어떤 것이 향상하는 말씀입니까?
7. 때垢가 없는 도리를 일러라? 답: 무엇이 때냐?
*일진선사가 젊은 시절에 성수(活山性壽, 1923~2012)스님을 모시고 금강산순례를 갔을 때 하루는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드렸다. 스님의 등에서 나오는 때를 보고 등을 탁 때리면서 “법당은 좋은 데 때가 많네”라고 소리치니, 스님이 “때가 없는 도리를 일러라” 하시길래, “무엇이 때입니까?”라고 되물었다. 이에 스님이 “네 아버지가 누구냐?”라고 묻길래 “구산스님입니다.”라 하니 스님은 “아들 하나 잘 두었네”라 하셨다. 또 하루는 성수스님이 내게 말씀하길 “너 나한테 와서 살아라” 하길래 나는 “저한테 와서 사세요.”라고 하니 스님이 박장대소하셨다.
8. 금고기는 무엇을 먹고삽니까? 답: 금고기는 입이 없습니다.
9. 총명(알음알이)는 어디서 왔습니까? 답: 모름!
10. 통도사 취운암에 계시던 신허薪虛(2005년 입적)스님이 묻기를 “영축산의 높이가 얼마나 됩니까?”
답: “스님, 영축산 높이를 모르세요? ”, “어디서 영축산을 보았습니까?”
11. 한 노파가 다섯 아기를 품에 안고 와서는 암두스님에게 말하길 “스님이 잘 이르시면 이 아기들은 살 것이고, 스님이 잘못 이르시면 아기들을 강물에 던져버리겠다”고 하니, 암두스님은 주장자로 뱃전을 두드렸다. 이에 노파는 주저 없이 아이들을 물에 던져버렸다. 이때 암두스님이 무어라 답했으면 아기들을 살릴 수 있었을까?
*일진선사: 당신은 엄마 자격 없다! 아이를 죽인다니.
*원담: 무릎을 꿇고 “아이고, 할매. 아기를 살려주세요.”라 하겠다. 화두에 맞는 답을 찾아서 해결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아기들의 목숨이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비심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언행이 나와야 한다. 아기들을 살리려는 연민이 가슴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면 “아이고, 할매. 아기를 살려주세요.”라 하게 된다. 이는 일반적인 선문답이 아니라 자비심의 발로에서 나오는 선문답이 된다. 사회문제가 많이 생겨나는 현대사회에서는 자비와 연민으로 흘러나오는 한마디, 살아있는 한마디, 사람을 살리는 한마디가 필요하다. 이것이 活句활구, 사람을 살리는 ‘살아있는 한마디 말씀’이다. 목하의 현실문제에 살아있는 답(活句)을 내놓을 수 있는 분이 시대의 진정한 선지식이다.
12. 어느 날 한 수좌가 문을 벌컥 열고는 “당신 깨달았느냐?”고 다짜고짜 물었다. 이에 일진선사가 즉답하기를 “네가 깨달았으면 내가 깨달았고, 네가 못 깨달았다면 나도 못 깨달았다.” 그러자 그 스님이 “스님, 거짓말하면 지옥 갑니다.” 이에 일진선사 곧바로 되받기를 “내가 안 가면 네가 간다!”. 그 스님은 풀썩 주저앉았다.
13. 컵을 앞에 놓고 “이것에 대해 한마디 일러라.”고 한다면 “물 한잔 하시오.”(법신구). 컵을 뒤집는다(투법신구). 컵을 발로 차버린다(법신향상구).
*일진선사: ‘일러라’고 한 그놈을 악! 하면서 확 밀어버린다(말후구).
<末後句말후구>
암두스님이 덕산 조실 스님에게 “밥 먹을 시간도 아닌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힐문하니 덕산스님이 아무 말 없이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이에 설봉스님은 덕산스님의 반응에 의심이 들었다. 덕산스님이 말없이 자기 방으로 되돌아간 행동이 설봉스님의 생각을 끊어 주지 못하고 오히려 생각에 생각을 덧붙이게 만들었다. 설봉의 생각을 단번에 끊어주는 결정적인 한마디 말을 했어야만 했다. 일체의 망상분별을 단번에 끊어버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하는 한마디 말이 곧 末後句말후구이다. 권투로 말하자면 決定打결정타, 카운터펀치counter-punch이다.
*일진선사: 암두가 덕산에게 “밥 먹을 시간도 아닌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시비를 걸었다. 내가 덕산이라면 “그 질문이 생각인가, 생각이 아닌가?”라고 되묻겠다.
*일진선사의 말후구 해설: 물으면 죽어버리고, 말하면 틀려버린다. 아는 자는 즉시에 답이 튀어나온다. 不會知金, 會得如屎. 불회지금 회득여시. 모르면 금이나 알면 똥이다.
여래선은 법신-경계이지만 조사선은 투법신-경계이다.
<무소유>에 대하여:
一切法은 自性이 無所有하다. 자성이 없는 걸 空性이라 한다. 텅 빈 것(空性)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랴? 공성은 무소유이며, 무소착(無所着, 무집착)이다. 이른바 ‘무소유’란 사유재산을 부정하거나, 많이 가진 걸 비난하거나, 가난하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물의 공성을 깨달아 ‘소유’라는 관념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소유란 공성을 보는 지혜, 반야이다. 본래무일물이니 소유주도 없고 소유물도 없다. 일체의 자성이 무소유이기 때문에 일체가 우주적인 공동소유이다. 따라서 내 집과 재산, 동산과 부동산은 잠시 나에게 맡겨진 세계의 공적소유물이다. 나에게 한시적으로 위탁된 공적소유물을 잘 활용하여 중생에게 이익되게 하라는 것이 ‘무소유’가 주는 가르침이다.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 불가득>에 대하여:
①떡 파는 노파가 주금강 스님에게 말하길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없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는데,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하려오?” “만일 답을 하면 떡을 시주할 것이거니와, 답을 하지 못하면 점심을 굶어야 할 것이오”. 이에 스님은 답을 하지 못해 점심을 얻어먹지 못했다. 무엇이라 일러야 노파의 마음에 들겠는가?
②원담은 처음에 “노파여, 떡값이 얼마요?”라고 되받아치면서 상대방에게 한 방 날렸다. 그러나 일진선사가 비평하기를 “뭘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말로 받아칠 게 있느냐? 자연스럽게 슬쩍 한마디 하면 되지.”라고 했다. 이에 원담은 선을 공부했다는 놈이 멋지게 한마디 해야 한다는 의도에서 말을 뱉었음을 반성하였다. 그냥 봄바람이 가시덤불을 넘어가듯 자연스럽게 경우에 맞는 말을 하면 될 것을.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노보살님, 안녕하세요?” 이에 대한 게송을 지었다.
三心不可得, 삼심불가득
如何點心麽; 여하점심마
老婆勘僧地; 노파감승지
點頭你好麽. 점두니호마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을 얻을 수 없어
어떻게 마음에 점을 찍을까?
노파가 스님을 간파하려 찔러보지만
고개를 까딱하고 “할매, 안녕?”
<조사선이란?>
祖師조사란 부처를 지금 여기 현장에서 표출해내는 생생한 작용을 말한다. 祖師는 역사적으로 실재했거나 현재 실존하고 있는 인간일 수도 있지만, 일상의 삶 가운데서 살아있는 부처를 드러내는 활동을 말한다. 부처님의 깨달음(如來禪)이 세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삶의 한가운데서 그 깨달은 힘은 살아 움직인다(祖師禪).
<여래선이란?>
여래선은 인도에서 전승해온 불교에 기초했기에 계, 정, 혜 삼학을 닦아 진여의 세계에 들어감을 지향한다. 당나라 때 선 수행자들이 인도에서 전승된 불교를 체득하여 중국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생활언어로 바꾸어 자국민의 풍토에 맞게 재정립한 것이 선종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여래청정선(줄여서 여래선)이라 했다. 여래선은 마음의 당체(이것을 性 혹은 心性이라 하면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선호하는 개념이다)인 空性공성만 깨치면 된다고 생각한다.
<조사선과 여래선의 차이>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은 佛性불성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如來禪은 佛性을 여래장-자성청정심(如來藏-自性淸淨心)이라 보며, 조사선은 佛性을 般若반야로 작용하는 생멸심(生滅心) 자체라고 본다.
“妄相망상이 제거되면 眞相진상이 드러난다”고 말하면 여래선의 관점이고,
“妄念망념이 제거되면 眞相진상도 사라진다”고 말하면 조사선의 관점이다.
그런데 여래선은 法身법신이라는 흔적이 남는데, 조사선은 그 흔적마저 지우기에 생멸하는 마음이 그대로 진여자성이며 반야로 작용한다고 본다.
조사선은 진공(眞空)이라는 그 지견 마저 넘어서, 드러난 현상 그 자체가 진리, 본마음의 실상일 뿐 별도의 진리를 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공성이면 法의 相(심성, 불성, 공성, 진리, 진여, 실상 등과 같은 말들을 法相이라 한다)을 따로 세울 필요 없이 드러난 현상에서 바로 체득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생시에 일어나는 8만4천 번뇌를 곧바로 반야지혜로 바꾸어 쓴다. 여래선은 眞空진공에 주목하고 조사선은 妙有묘유에 주목한다. 조사선은 본체보다 작용을 강조하여 그 활용에 주력한다. 여래선이 만법이 空함을 깨닫는 대부정의 길이라면 조사선은 만법을 妙有로 굴려 쓴다는 대긍정의 길이다.
여래선은 공성을 깨달아 無差別智무차별지를 밝힌다면, 조사선은 差別智차별지를 밝혀 말후구와 格外別傳句격외별전구를 구사한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복잡다단한 차별경계에서 무차별지를 쓴다는 견지에서 “조사선은 여래선에서 잡아 쓴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나 그를 만난다”고 말하면 法身句(여래선)이고, “어느 곳에서나 그를 만나지 못한다” 하면 透法身句투법신구(조사선)이다. 도대체 뭐가 붙는 걸 도무지 허용하지 않는 것이 조사선이다. 그리하여 조사선은 沒蹤跡몰종적이다.
<여래선과 조사선의 기원>
‘조사선’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은 앙산(仰山慧寂, 807~883)과 향엄(香嚴智閑, ?~898)스님 사이에 벌어진 법거량 부터이다. 앙산스님이 사제인 향엄스님에게 묻기를 “요즘 그대의 공부가 어떠한가?”
향엄이 답하길,
去年貧未是貧, 거년빈미시빈 지난 해 가난은 가난이 아니라
今年貧始是貧; 금년빈시시빈 올해의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네
去年無卓錐之地,거년무탁추지지 지난 해는 송곳 꽂을 땅도 없었는데,
今年錐也無. 금년추야무 올해는 송곳조차 없네
이에 앙산이 말하길, “그대가 여래선은 알았다고 할 수 있으나, 조사선은 아직 꿈에도 보지 못했네.” 그러자 향엄이 다시 게송을 지었다.
我有一機, 아유일기 나에게 하나의 기틀이 있으니
瞬目示伊; 순목시이 눈을 깜짝여 그걸 드러내 보인다
若人不會, 약인불회 그래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면
別喚沙彌. 별환사미 다시 “사미!”를 부르리
앙산은 드디어 위산(潙山靈祐, 771∼853) 큰스님에게 향엄이 조사선 알았다고 알렸다.
<향산선사가 깨달은 인연>
위산선사가 향엄스님에게 하루는 묻기를 “부모미생시에 도리를 일러보라”고 했는데, 향엄은 아는 소견을 다 동원하여 답했으나 아니라며 부정당했다. 평소에 경율론에 밝고 박학다식하다고 소문난 스님이었기에 자존심 셌던 그는 스승이 아니라고 하시니 답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스승은 “내가 그대에게 가르쳐준들, 내가 아는 도이지 그대의 도가 아니다”라며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에 분이 난 향엄은 자기 방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불 싸지르고 위산스님을 하직하고, 다른 처소로 공부하기 위해서 대위산을 나왔다. 남양혜충국사 탑묘에 가서 참배하고 하룻밤을 지낸 다음 날 아침 공양을 마치고 청소를 했다. 기와 조각이 하나 있어서 담장 밖으로 던졌는데 대나무에 맞아서 탁! 하고 소리가 나는 찰나 문득 마음이 활짝 열렸다. 확철대오다. 답답하던 마음이 일시에 해결되니 스승이신 위산선사께 너무나 고마웠다. 그분이 나의 이해를 돕고자 화두를 破說파설하셨다면 오늘 이 깨침이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는가! 자신이 도를 물었을 때 말해주지 않은 스승이 너무도 고마워 가사 장삼을 수하고 향로에 향을 꽂고 대위산 위산선사를 향해서 삼배를 올렸다. 그리고 위산스님을 찾아가 悟道頌오도송을 지어 바치니 스승은 바로 印可인가를 하시면서 “그대가 입태출태에 자유자재함을 얻었도다”라고 함께 기뻐해 주셨다.
<임제록을 誤讀할 수 있다>
임제록은 선종역사상 가장 애독되는 어록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명안종사의 안내 없이 저 혼자 어록을 읽는다면 오독할 가능성이 있다. 가령 “그대들의 몸뚱이 속에 하나의 무위진인(赤肉團上 有一無位眞人)이 있어 항상 그대들의 면전에서 출입한다. 아직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누구라도 이것을 체험하도록 노력하여야만 한다.” 이 글을 잘못 읽으면 우리 몸속에 무위진인이라는 뭔가가 있어 몸 밖으로 들락날락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마치 仙道일파에서 陽神(氣로 이루어진 몸)을 出身하듯. 그리고 이는 ‘영혼’ 혹은 아트만 상주론에 빠질 염려가 있다. 또 임제선사는 불성을 활발발 하게 쓰는 주체로서 人(사람)이란 말을 많이 쓴다. 불성을 활발발하게 쓰는 주체로서 ‘약동하는 생명’을 人으로 표현했다. 당시로서는 참신한 표현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사람들은 그 말을 잘못 알아듣고 ‘영혼, 정신, 참나, 眞我, 神我’ 등과 같은 我見에 빠질 위험이 있다. 임제선사가 즐겨 쓰는 용어를 바로 보라. 언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보면 손가락을 잊어야 하겠지만, 후인을 위해 다시 손가락을 들고 달을 가리켜야 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기에 보이지 않던 달이 비로소 보이게 된다.
무의도인(無依道人):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불성의 생생한 작용
무위진인(無位眞人): 어디에도 위치 지울 수 없는 불성의 생생한 작용
청법저인(聽法底人): 법문을 듣고 있는 생생한 불성
농광영저인(弄光影底人): 빛과 그림자놀이를 하는 불성의 생생한 작용
승경저인(乘境底人): 경계를 타고 노니는 불성의 생생한 작용
착의저인(著衣底人): 온갖 종류의 옷을 걸치는 불성의 생생한 작용
<무문관>
제46칙 장대 끝에서 나아감(竿頭進步간두진보)
[고칙]
석상 화상이 말했다.
“백 척 장대 끝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내딛는가?”
다시 옛 스님이 말했다.
“백 척 장대 끝에 앉은 사람은 비록 도에는 들어왔으나 아직 참되지는 않다.
백 척 장대 끝에서 모름지기 한 걸음 내디뎌야 온 우주에 온몸을 드러내리라.”
百尺竿頭須進步, 十方世界全現身.
[무문의 말]
한 걸음 내디뎌 몸을 뒤집을 수 있다면, 다시 어느 곳을 꺼려해서 스스로 최고라고 자부하지 못하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말해 보라!
백 척 장대 끝에서 어떻게 한 걸음을 내딛는가?
*일진선사 덧말:
得樹攀枝未足奇, 懸崖撒手丈夫兒. 득수반지미족기 현애살수장부아
나뭇가지를 붙잡는 일은 그리 기특한 일이 아니니,
천길 벼랑에 매달렸을 때 손을 놓을 줄 알아야 대장부라네
-야보도천(冶父道川)의 <금강경오가해>에서
천길 절벽에서 떨어질 때 다행히 암벽에 붙은 나뭇가지를 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사람(我空을 모르는 놈이다)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 몸과 마음을 턱 놓아버려라(心身脫落). 지금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무문의 송]
정수리 위의 눈을 감아 버려서
저울의 눈금을 잘못 읽는다면,
아낌없이 목숨을 버릴 수 있더라도
한 소경이 뭇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다.
*일진선사 덧말: 알 수 없는 본성자리에 어두우면, 하는 일마다 어긋난다.
[군소리]
백 척 장대 위에서
한 걸음 내디디면
어디를 가더라도
장대 위에 있으리.
*일진선사 덧말: 장대 위에서 재주 부리지 말고, 장대를 밟고 지나가라.
제48칙 건봉의 외길(乾峰一路건봉일로)
건봉 화상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온 우주의 부처님들이 한 길로 열반문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그 길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十方婆伽梵, 一路涅槃門
건봉이 주장자를 집어 들어 한 획을 긋고 말했다.
“여기에 있다!”
뒷날 그 승려가 운문에게 다시 가르침을 청했는데,
운문은 부채를 집어 들고 말했다. “부채가 폴짝 뛰어 33천으로 올라가 제석천의 코를 쥐어박고, 동해의 잉어를 한 방 때리니 비가 물동이를 쏟아붓듯이 내린다.”
扇子勃跳, 上三十三天, 築着帝釋鼻孔, 東海鯉魚打一棒, 雨似盆傾.
[무문의 말]
한 사람은 깊고 깊은 바다 밑에서 키로 흙을 까불어 먼지를 일으켰고,
한 사람은 높고 높은 꼭대기에서 흰 파도를 일으켜 하늘에 넘치게 하였다.
함정에 몰아넣어 꼼짝 못 하게 하기도 하고 자유롭게 놓아주기도 하면서,
각자 한 손을 내밀어 宗乘종승을 부축해 세웠지만,
흡사 곱사등이 두 사람이 딱 마주친 것과 같으니,
세상에는 분명 꼿꼿이 선 멀쩡한 사람은 없는가 보다.
바른 눈으로 살펴보면, 두 노인이 모두 아직 길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일진선사 덧말: 건봉은 주장자, 운문은 부채. 두 노인이 장난감을 가지고 잘 노는구나. 그렇다 해도 주장자 든 놈은 주장자로 후려치고 부채든 놈은 부채로 날려 보내야 천하가 평안하리라.
[무문의 송]
아직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이미 도달하였고 未擧步時先已到,
아직 혀를 움직이기도 전에 벌써 다 말했다. 未動舌時先說了,
설령 한 수 한 수에서 기선을 제압한다 하더라도 直饒著著在機先,
다시 위로 향하는 한 개 구멍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更須只有向上竅.
*일진선사 덧말: 向上一竅향상일규, 위로 향하는 한 개의 구멍이란 무엇인가? 허공이 이미 통째로 구멍인데, 어디에서 구멍을 찾느냐?
[군소리]
열반으로 가는 하나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찾으면 없고 찾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한다.
여기에 이르면 모두들 꼼짝달싹 못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문득 해결될 날이 있으리.
*일진선사 덧말: 찾으면 없고 찾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한다. 말 잘했다. 열반으로 가는 한 길이라고? 뭔 귀신 방아 찧는 소리인가. 생사 이대로 열반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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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何點心麽; 여하점심마 어떻게 마음에 점을 찍을까?
老婆勘僧地; 노파감승지 노파가 스님을 간파하려 찔러보지만
點頭你好麽. 점두니호마 고개를 까딱하고 “할매, 안녕?”
워메 멋저불어. 조아불어(照我佛語)!!! 震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