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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子西 詩云(당자서 시운)
당자서(唐庚)의 시에 이르되
山靜似太古 日長如小年(산정사태고 일장여소년)
산은 태고인양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기도 하네
余(吾)家深山之中, 每春夏之交,(여가심산지중,매춘하지교)
내 집은 깊은 산속에 거주하는지라 매해 봄과 여름이 엇갈릴 즈음이면
蒼蘚盈堦, 落花滿徑, (창선영계,낙화만경)
푸른 이끼 섬돌에 차오르고 떨어진 꽃잎 길바닥에 가득하네
門無 剝啄, 松影參差,(문무박탁,송영참치)
대문에는 두드리는 소리도 없고 소나무 그림자가 들쭉날쭉 짧아지며
禽聲上下. 午睡初足, (금성상하,오수초족)
새 소리만 오르내린다. 깜빡 든 낮잠에 막 흡족함이 느껴질 때쯤,
旋汲山泉, 拾松枝,煑苦茗啜之. (선급산천,습송지,자고명철지)
산속의 샘물을 길어오고 솔가지를 주워다 쓴맛 나는 좋은 차를 끓여 마신다
隨意讀周易․國風․左氏傳․ (수의독주역,국풍,좌씨전)
마음 내키는 대로 "주역" "시경"의 「국풍」, "춘추좌씨전"이나
離騷․太史公書及陶杜詩․ (이소,태사공서급도두시)
"이소", "사기(史記)"를 읽든가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의 시,
韓蘇文數篇. (한소문수편)
한유(韓愈)나 소식(蘇軾)의 산문 몇 편을 읽는다.
從容步山徑, 撫松竹, (종용보산경,무송죽)
조용히 산길을 거닐며 소나무나 대나무를 어루만지거나
與麛犢共偃息於長林豐草間. (여미독공언식어장림풍초간)
새끼사슴·송아지와 더불어 긴 숲, 우거진 풀 사이에 누워 쉬기도 하고
坐弄流泉, 潄齒濯足. (좌롱류천,수치탁족)
흐르는 샘물 가에 앉아 물장난을 치거나 양치질을 하고 탁족(濯足)도 한다.
既歸竹窓下, 則山妻稚子, (기귀죽창하,즉산처치자)
이미 죽창(竹窓) 아래로 돌아오노라면 산처(山妻)와 어린 자식들이
作笋蕨, 供麥飯, 欣然一飽. (작순궐,공맥반,흔연일포)
죽순과 고사리반찬을 만들고 보리밥을 지어내니, 기분 좋게 한번 배불리 먹는다.
弄筆窓間, 隨大小作數十字, (농필창간,수대소작수십자)
창가에서 붓을 놀려 크거나 작은 크기대로 수십 글자를 써보면서,
展所藏法帖·墨蹟·畫卷縱觀之. (전소장법첩,묵적,화권종관지)
소장한 법첩(法帖)이나 묵적(墨蹟)과 두루마리 그림을 펼쳐놓고 마음껏 보기도 한다.
興到則吟小詩, 或草玉露一兩段. (흥도즉음소시,혹초옥로일양단)
흥이라도 나게 되면 짧은 시를 읊조리거나, 혹은 옥로(玉露) 한두 다락 초안을 잡아 본다.
再烹苦茗一杯, 出步溪邊, (재팽고명일배,출보계변)
다시 쓴 차를 한 잔 마시고는 나가서 시냇가를 거니노라면,
邂逅園翁谿友, 問桑麻, 説粳稻, (해후원옹계우,문상마,설갱도)
밭일 하는 노인이나 냇가의 친구를 만나 뽕과 삼 농사를 물어보며 멧벼 농사 이야기한다.
量晴較雨, 探節數時, 相與劇談一餉. (양청교우,탐절수시,상여극담일향)
맑거나 비온 날을 헤아려 절기와 때를 따져보며 서로 더불어 잠시나마 유쾌한 말을 나눈다.
歸而倚杖柴門之下, 則夕陽在山, (귀이의장시문지하,즉석양재산)
돌아와 사립문 아래서 지팡이에 기대 서보면, 석양은 서산에 걸려 있고
紫緑萬狀, 變幻頃刻, 恍可人目. (자록만상,변환경각,황가인목)
자색 녹색의 만상이 순간순간 종잡을 수 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광경이 황홀하게도 사람 눈에 들어온다.
牛背笛聲,兩兩來歸, 而月印前溪矣.
소 잔등에서 피리소리 짝지어 돌아오면 달빛이 앞 시내를 훤히 비춘다
***원문출처***鶴林玉露...남송(南宋) 때의 나대경(羅大經)이 지은 수필집.
문인과 학자의 시문에 대한 논평을 중심으로
일화(逸話), 견문(見聞) 등을 수록하였다.
1248년에서 1252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모두 18권이다.
蒼蘚盈堦=창선영계...푸른 이끼 섬돌에 가득. 蘚...이끼 선.
剥啄=박탁...의성어,의태어. 딱딱. 똑똑.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두드리다.
剥(박)...(가죽·껍질 따위를) 벗기다. 까다. 바르다. 剥落(박락)=벗겨 떨어지다.
參差=참치...들쭉 날쭉 (가지런하지 아니함)
旋汲山泉=선급산천...山의 샘물을 휘저어 긷고 旋...돌 선. 汲 길을 급.
煑苦茗啜之=자고면철지...쓴차를 끓여 마신다. 煑...삼을 자. 煮와 同字. 茗...차 명. 啜...마실 철.
太史公書=태사공서...태사령을 지낸 사마천의 異稱으로 史記를 말함
從容(종용)...조용히의 원말 麛犢=미독... 새끼사슴과 송아지 麛=사슴새끼 미
潄齒濯足= 수치탁족...양치질하고 발씻고 潄=양치질할 수. 畫卷(화권)=두루마리 그림.
作笋蕨(작순궐)=죽순과 고사리반찬을 만들고. 笋=죽순순,筍과 同字 蕨 =고사리 궐
邂逅(해후)=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만남,우연히 만남. 만날해,만날후.
粳稻(갱도)=粳...메벼 갱. 秔과 同字. 稻...벼 도.
量晴較雨=량청교우...말거나 비오는 날을 헤아려 較=동의자 䡈...䡈
相與劇談一餉=상여극담일향...서로 더불어 잠시나마 유쾌한 말을 나눈다.
餉=乾糧건량향. =식경(食頃).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자(同字)䊑 .
變幻頃刻=변환경각...순간순간 종잡을 수 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變幻=갑자기 나타났다 없어졌다 함
恍可人目=황가인목...황홀하게도 사람 눈에 들어온다. 恍=恍惚(황홀)할 황.
牛背笛(篴-피리적)聲=우배적성...소잔등의 피리소리.
月印前溪矣=월인전계의...달빛이 앞 시내를 훤히 비춘다
鶴林玉露中語, 恬澹高風, 自得隱趣. 復葊新得靑田石,
乞匊鄰丈鐫此妙句, 竝鑿此語爲消夏錄.
光緖甲辰四月, 復幷記.
<학림옥로(鶴林玉露)>의 말들은 염담(恬澹:마음이 깨끗하고 욕심이 없음)하고 고풍스러워
절로 은일의 지취(旨趣)를 얻었다. 복암(復葊. 羅復堪:1872-1955년)이 새로 청전석(靑田石)을 얻고서
국린(匊鄰) 어른께 이 묘구(妙句)를 새겨달라고 하였고,
아울러 이 말들을 파는 것으로 여름날을 보낸 기록이 되게 하시라고 하였다.
광서(光緖) 갑진(甲辰:1904년) 4월에 복암이 어울러 적다.
이처럼 호곽에게 이 작품을 부탁한 복암이란 사람은 원래 이름이 돈(惇)으로,
강유위(康有爲)에게 수업을 받았으며, 글씨를 잘 써서 현대 중국서예가 계공(啓功) 같은 사람도
기억하듯이 민국 시기에 ‘현대 장초(章草)의 제일인’이란 칭송을 듣기도 하고
그 뒤에는 대학들에서 서법 강의를 하였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원래 “산정사태고 일장여소년”이란 이 인문(印文)은 북송 말기의 시인이자 관리였던
당경(唐庚:1070-1120년)의 <취면[醉眠:취해서 잠들다]>이란 시의 첫 구절이다.
변관에 새긴 글은 백여 년 뒤인 남송 때 나대경(羅大經:1196-1242년)이란 사람이 이 시를 읽고 쓴
<산정일장(山靜日長)>이란 산문이며 그가 지은 <학림옥로(鶴林玉露)>란 책에 들어 있는 글이다.
먼저 당경이란 사람은 미주(眉州) 단릉(丹棱:현재 四川省 眉山市 丹棱縣)태생으로
자(字)가 자서(子西)이며 사람들이 노국선생(魯國先生)이라 불렀다고 한다.
휘종(徽宗) 때 종자박사(宗子博士)가 되었고, 재상 장상영(張商英)의 천거로 승진하였다가
그가 실각하자 혜주(惠州:현재 광동성 혜주시. 홍콩 북쪽이며 광주의 동쪽)로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소식(蘇軾:1037-1101년. 東坡)을 매우 존경하였고 또 그와 고향이 같은데다 같은 혜주 땅에 귀양을 갔다고 해서
‘작은 동파[小東坡]’라 불렸다. <미산당선생문집(眉山唐先生文集)>이 있다.
그는 흔히 “누차 고치고 다듬어서 간결하고 세련된 시어(詩語)를 구사했지만
간혹 ‘교묘함을 쫓다가 졸렬해진’ 곳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중국 청대의 전종서(錢鍾書) 같은 사람은 그처럼
‘농교성졸(弄巧成拙)’한 곳이 있긴 하지만 그는
“당시 아마 가장 간결하고 치밀한 시인”일 것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宋詩選註>).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송시초(宋詩鈔)>(청 吳之振 편, 권46)에 실린
眉山(미산) 唐庚의
오언율시(五言律詩) 醉眠(취면)의 전문은 이렇다.
山靜似大古 산들은 먼 옛날인 듯 고요하기만 하고
日長如小年 해는 소년처럼 길기도 하네
餘花猶可醉 남은 꽃에 그래도 취할 만하니
好鳥不妨眠 귀여운 새들도 단잠에 방해가 되지 않는구나
世味門常掩 세상 쓴맛에 문은 늘 닫아놓았고
時光簟巳便 시절도 돗자리가 이미 편안할 때라네
夢中頻得句 꿈속에 자꾸 좋은 시구 떠오르지만
拈筆又忘筌 붓 잡으면 또다시 어찌 말할지 잊고 만다네
당경은 이때 혜주 땅에 유배 중이어서 조정의 당파(黨派) 논의에 갑론을박 추궁당하지 않으려고
이웃과도 알고 지내지 않으려고 하던 때였다고 한다. 마지막 ‘망전(忘筌)’이란 말의 ‘전’은
‘전(詮)’의 차용으로 보아야 자연스러우며(위 전종서의 해설),
이는 어떻게 말할지 말을 고른다는 말이다
(혹 <장자> 외물편의 ‘得魚忘筌’의 망전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러면 對句의 의미가 여러 모로 살아나지 못함). 당경은 장상영의 당여였기에 유배를 갔으나 한미하거나
곤궁한 기색은 보이지 않고 유유자적하며 유배지에서 재냈다.
연보에 의하면 당경은 1110년 40세 때
유배령을 받고 길을 떠나 이듬해에 아성(鵝城:혜주)에 당도하였고, 성남이씨(城南李氏)의 산원(山園)에
더부살이를 하였다(당경의 「李氏山園記」).
거기서 그는 기오재(寄傲齋)나 역암(易庵)을 짓고서 책을 읽거나
글을 지으며 서남쪽의 풍호(豊湖) 주변을 유람하며 지내다가
45세 때인 1115년 6월에 유배가 풀리고
복직되어 북쪽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나대경(羅大經:1196-1242년)은 길주(吉州) 여릉(廬陵:지금의 江西省 吉安市) 사람이며 자는 경륜(景綸)이나
자세한 생애가 알려져 있지 않다. 가정(嘉定) 연간에 태학생이 되었고 보경(寶慶) 2년(1226)에 진사(進士)가 된 뒤
말직에 있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고 하며, 그 후에는 여생을 유한(悠閑)한 산거생활(山居生活)로 보냈다고 한다.
그의 <학림옥로>는 산문집(散文集)으로 필기류(筆記類)의 수필들을 모은 것이며,
후대에 많은 고사나 일화의 전거가 되었던 책이다. 제목은 지은이가 서문에서도 밝힌 것처럼
두보의 시에서 따다 지은 것이다. 두보의 「증우십오사마(贈虞十五司馬)」라는 시에
“맑은 기운은 드넓은 금천(金天:가을하늘)과 같고, 맑은 담론은 흠뻑 내린 옥 이슬과
같아라[爽氣金天豁 淸談玉露蕃]”라는 구절이 있다. 이 책은 문인과 학자의 시문(詩文)에 대한
논평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일화나 견문 따위를 수록하여 독보적인 견해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일부 전거가 부정확한 것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1200년대 중반에 지어진
이 책은 현재 16권본과 18권본이 전하는데 중국에서는 주로 16권본이 통용되어 왔다. 하지만
일본을 통해 전해진 18권본이 원모습에 더 가깝다고 인정된다. 이는 갑·을·병 3편 구성에 편마다
각 6권씩이며 글마다 소제목이 붙여져 있고, <산정일장>은 병편 권4에 있다.(사고전서에는
16권본이 수록되었으며 소제목이 붙여져 있지 않음.) 조선에서는 중종 연간에 간행된 적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나대경의 <산정일장>은 앞에 당경 시의 첫구를 인용한 다음,
그에 빗대어 산중에 사는 자신이 좋아하는 하루 일과의 일들을 서경(敍景) 묘사와 더불어
죽 서술하고 나서 마지막에 그 시를 좋아하는 이유와 평가하는 말을 적었다.
이 글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많이 읽히며 회자되었고,
‘산정일장’이란 말은 산중의 고요함 가운데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간다는 뜻으로
산속의 한거(閑居)를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쓰였다.
특히 회화 방면에서는 중국에서 명대의 문징명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화제(畵題)로 삼아 그림들을 남겼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겸재 정선에게 배운 김희성(金喜誠)은 18세기에 이 글을 주제로
6폭의 그림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간송미술관).
조선후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원문이 실려 있다
(人事篇의 <安貧守分辨證說>).
호곽의 방각(傍刻)에서는 나대경 글의 전문을 4면에 모두 새겼으나 고자(古字)나
이체자(異體字) 등을 많이 섞어 썼다. 아래는 이 글의 판본에 따른 글자의 출입 등에 대한
교열과 약간의 주석을 붙이며 번역을 한 것이다. 교열과 표점은 중국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당송사료필기총간(唐宋史料筆記叢刊)’의 하나로 나온 왕서래(王瑞來) 점교(點校)의 <학림옥로>
본(1983년 초간, 2012년 5쇄본)에 따랐으며, 세 단락으로 구분한 것은 편의상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이 본을 원문으로 삼아 비교하며 방각의 석문(釋文)을 실었고,
원문과 다른 글자는 밑줄을 긋고 단락 밑에 밝혀 놓았다.
山靜日長
唐子西詩云: “山靜似太古 日長如小年.” 吾家深山之中, 每春夏之交,
蒼蘚盈堦, 落花滿徑, 門無剥啄, 松影參差, 禽聲上下. 午睡初足, 旋汲山泉,
拾枯枝, 煑苦茗啜之. 隨意讀周易․國風․左氏傳․離騷․太史公書及陶杜詩․
韓蘇文數篇. 從容步山徑, 撫松竹, 與麛犢共偃息於長林豐草間. 坐弄流泉, 潄齒濯足.
既歸竹囱下, 則山妻稚子, 作笋蕨, 供麥飯, 欣然一飽. 弄筆囱間, 隨大小作數十字,
展所藏法帖·墨蹟·畫卷縱觀之. 興至則吟小詩, 或艸玉露一兩則. 再啜苦茗一杯,
出步溪邊, 解后園翁谿叟, 問桑麻, 説秔稻, 量晴較雨, 探節數時, 相與劇談一餉.
歸而倚杖柴門之下, 則夕陽在山, 紫緑萬狀, 變幻頃刻, 恍可人目.
牛背笛聲, 兩兩來歸, 而月印前谿矣.
당자서(唐子西)의 시에 이르기를, “산들은 먼 옛날인 듯 고요하기만 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기도 하다” 라고 하였다. 나는 깊은 산속에 거주하는지라
매해 봄과 여름이 엇갈릴 즈음이면 푸른 이끼가 섬돌에 차오르고
꽃은 떨어져 산길에 가득한데, 대문에는 두드리는 소리도 없고
소나무 그림자가 들쭉날쭉 짧아지며 새 소리만 오르내린다.
깜빡 든 낮잠에 막 흡족함이 느껴질 때쯤, 산속의 샘물을 길어오고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다 쓴맛 나는 좋은 차를 끓여 마신다.
마음 내키는 대로 주역이나 시경의 「국풍」, 춘추좌씨전이나
이소, 사기(史記)를 읽든가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의 시,
한유(韓愈)나 소식(蘇軾)의 산문 몇 편을 읽는다. 조용히 산길을 거닐며
소나무나 대나무를 어루만지거나, 어린 사슴새끼들과 길게 뻗은
숲속 무성한 풀밭 사이에 누워 쉬기도 한다. 흐르는 샘물 가에 앉아
물장난을 치거나 양치질을 하고 탁족(濯足)도 한다.
이미 죽창(竹窓) 아래로 돌아오노라면 산처(山妻)와 어린 자식들이
죽순과 고사리 반찬을 만들어 보리밥을 지어내니, 기쁜 마음에 한번쯤 배불리 먹는다.
창가에서 붓을 놀려 크거나 작은 크기대로 수십 글자를 써보면서,
소장한 법첩(法帖)이나 묵적(墨蹟)과 두루마리 그림을 펼쳐놓고 마음껏 보기도 한다.
흥이라도 나게 되면 짧은 시를 읊조리거나, 혹은 옥로(玉露) 한두 조목의 초안을 잡아보기도 한다.
다시 쓴 차를 한 잔 마시고는 나가서 시냇가를 거니노라면,
농원 일을 하는 노인이나 냇가의 늙은이를 만나 뽕나무와 삼 농사를 물어보며
멧벼 농사 이야기에 맑거나 비온 날을 헤아려 절기를 가늠하고 때를 점치면서
서로 더불어 잠시나마 유쾌한 말들을 주고받는다.
돌아와 사립문 아래서 지팡이에 기대 서보면, 석양은 서산에 걸려 있고
자색 녹색의 만 가지 형상들이 순간순간 종잡을 수 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광경이
황홀하게도 사람 눈에 들어온다. 소 잔등에서 피리소리 들리며
드문드문 돌아들 올 즈음이면 달빛이 앞 시내를 훤히 비춘다.
【校】오가(吾家)는 원문에 여가(余家), 또 고지(枯枝)는 송지(松枝:솔가지)로 되어 있음.
원문에는 속자인 순(笋) 대신 순(筍)을 썼고, 창(囱)은 창(窗:窓),
지(至)는 도(到), 초(艸)는 초(草), 칙(則)은 단(段:단락)임.
또 철(啜:마시다)은 원문에 팽(烹), 해후(解后)는 해후(邂逅),
계수(谿叟)는 계우(溪友), 교(較)는 교(校), 계(谿)는 계(溪)로 되어 있음.
味子西此句, 可謂妙絶. 然知其妙者蓋鮮. 彼牽黄臂蒼, 馳騖於聲利之場者,
但見滾滾馬頭塵, 匆匆駒隙影耳, 烏知此句之妙哉! 人能眞知此妙,
則東坡所謂, “無事此靜坐, 一日是兩日. 若活七十年, 便是百四十,” 所得不已多乎!
자서(子西)의 이 구절을 음미해보니 정묘(精妙)하고 절륜(絶倫)하다 이를 만하다.
하지만 그 정묘함을 아는 자는 대개 드물다. 저 사냥개를 데리고 매를 어깨에
올려놓고서 명성과 이익을 다투는 데로만 내달리는 자들은
다만 말 머리에 잔뜩 피어오르는 먼지나 망아지가 총총히 문틈 사이로 지나가는
그림자만을 볼 따름이니, 어찌 이 구절의 정묘함을 안다 하겠는가!
사람들이 참으로 이 정묘함을 안다면, 소동파가
“일 없이 이렇게 고요히 앉아 있으니 하루가 이틀맞이와 같구나
칠십 년을 산다면 곧 백사십 년을 사는 셈이로다”
라고 이른 것도 얻은 바가 많지 않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校】원문에는 ‘然’ 다음에 “此句妙矣”란 말이 더 들어가 있으며,
지(知)는 식(識), 선(鮮)은 소(少), 무(騖:달리다)는 렵(獵), 곤곤(滾滾)은 곤곤(袞袞)으로 되어 있음.
<시 속의 시, 그림 속의 그림>
산에 사네(山居)
-나대경(羅大經)
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기도 하네(山靜似太古 日長如小年)
내 집은 깊은 산 속에 있어 매년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때면(余家深山之中 每春夏之交)
푸른 이끼 섬돌에 차오르고 떨어진 꽃이 길바닥에 가득하네(蒼蘚盈堦 落花滿徑)
문에는 두드리는 사람 없고 솔 그림자 들쑥날쑥한데(門無剝啄 松影參差)
새 소리 위 아래로 오르내릴 제 낮잠이 막 깊이 드네(禽聲上下 午睡初足)
돌아가 산골 샘물 긷고 솔가지 주어와 쓴 차를 끓여 마시네(旋汲山泉 拾松枝 煮苦茗啜之)
마음 가는대로『주역(周易)』『국풍(國風)』『좌씨전(左氏傳)』『이소(離騷)』『사기(史記)』 그리고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의 시, 한유(韓愈)와 소동파(蘇東坡)의 문장 몇 편을 읽네(隨意讀周易 國風 左氏傳 離騷 太史公書 及陶杜詩 韓蘇文數篇)
한가로이 산길을 거닐며 소나무 대나무를 쓰다듬고(從容步山徑 撫松竹)
새끼사슴과 송아지와 더불어 긴 숲, 우거진 풀 사이에 함께 누워 쉬기도 하고(與麛犢 共偃息於長林豊草間)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 찰랑이며 양치질도 하고 발도 씻네(坐弄流泉 漱齒濯足)
대나무 그늘진 창 아래로 돌아오면 촌티 나는 아내와 자식들이(旣歸竹窗下 則山妻稚子)
죽순과 고사리 반찬에 보리밥 지어내니 기쁜 마음으로 배불리 먹는다네(作筍蕨 供麥飯 欣然一飽)
창가에 앉아 글씨를 쓰되 크기에 따라 수십 자를 써보기도 하고(弄筆窗間 隨大小作數十字)
간직한 법첩(法帖)·필적(筆跡)·화권(畵卷)을 펴놓고 마음껏 보다가(展所藏法帖 墨跡 畵卷 縱觀之)
흥이 나면 짤막한 시도 읊조리고 옥로시 한 두 단락 초 잡기도 하네(興到則吟小詩 或艸玉露一兩段)
다시 쓴 차 달여 한 잔 마시고 집밖으로 나가 시냇가를 걷다보면(再烹苦茗一杯 出步溪邊)
밭둑의 노인이나 냇가의 벗들과 만나 뽕나무와 삼베 농사를 묻고 벼농사를 얘기하네(邂逅園翁溪友 問桑麻說秔稻)
날이 개거나 비 올지도 모른다는 얘기 주고받다가(量晴校雨 探節數時 相與劇談半餉)
돌아와 지팡이에 기대어 사립문 아래 서니 석양은 서산에 걸려 있고(歸而倚杖柴門之下 則夕陽在山)
자줏빛·푸른빛이 만 가지 형상으로 문득 변하여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하네(紫翠萬狀 變幻頃刻 恍可人目)
소 잔등에서 피리 불며 짝지어 돌아올 때면(牛背篴聲 兩兩來歸)
달빛은 앞 시내에 뚜렷이 떠오르네(而月印前溪矣)
오랫동안 귀농을 꿈꾸던 친구가 드디어 사표를 던졌다.
퇴직금으로 강원도에 작은 집을 장만한 그는 인생 말년을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했다.
산새들이 극성스럽게 고성을 질러도 짜증스럽지 않은 곳으로 떠나는 친구의 얼굴은 긴 세월 우려낸 결심을 실천한 사람의 편안함이 담겨 있었다. “정말 귀농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하면서 한없이 부러워하는 나를 뒤로 하고 그 친구는 강원도로 떠났다.
이제 그는 건조하게 울려대는 알람 대신 부드러운 침묵 속에서 잠을 깰 테고, 창가에 심어둔 대나무들이 뻣뻣해진 근육을 풀 때쯤 잠자리에 들 것이다. 실적 압박에 시달리며 카렌다를 넘기는 대신 푸른 이끼가 섬돌에 차오르는 모습을 보며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구름의 냄새를 맡고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사노라면 그에게 운명은 더 이상 납처럼 무겁지 않고, 거만하게 혼을 짓누르던 걱정 따위는 맥을 못추고 물러날 것이다. 먼 산골이라 찾아오는 벗이 없어 적적할 때도 있겠지만 일하다 지치면 낮잠을 자고, 해질녁이면 마루에 앉아 노을을 고봉으로 담은 차를 마시며 시집을 펼칠 것이다. 갈 봄 여름 없이 저만치 홀로 피고 지는 꽃을 보며 사노라면 앞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 아침 해는 소년의 앞날처럼 길기만 할 것이다. 산에 사는(山居) 사람의 고즈녁함이 그의 삶을 온기스럽게 데워줄 것이다. 그는 사람답게 살 것이다.
김희겸, <산정일장>, 종이에 연한 색, 29.5×37.2cm. 간송미술관
나는 이런 집에 살 거야
친구는 늠름한 산을 배경으로 아담한 살림집을 지었다. 몇 년 전부터 강원도 산골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더니 특별히 언덕 위에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는 터전을 골라 이삿짐을 풀었다. 넘치는 책을 주체할 수 없었던 친구는 초옥(草屋)을 두 채 지어 살림집과 서재를 분리했다. 전나무와 생강나무와 두릅나무 사이로 조심스레 기둥을 세우면서 도연명이 부럽지 않도록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도연명의 꿈은 뒷산 아래 지은 정자에서도 끊어지지 않도록 그곳에도 복숭아나무를 심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대문은 위압스런 철문 대신 싸리문을 세워 바깥과 안의 경계로 삼았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그마저도 항상 닫혀 있다. 할 일 없는 날에 낮잠을 즐길 때면 천상의 학이 내려와 춤을 출 수 있도록 마당은 넓게 비워 두었다. 바람 부는 봄밤이면 복숭아꽃 아래 짜 넣은 편상에서 곡주를 마시며 인생을 음미할 것이다. 그 때 싸리문 밖 버드나무는 귀거래한 주인을 위해 무희처럼 춤을 추리니 한 나라의 제왕인들 이보다 더 즐거운 말년을 보낼 수 있으랴. 삶이 곧 꿈이고 꿈이 곧 현실이라 꿈과 현실이 사이좋게 화해한 삶 속에서 집주인은 운명과 격한 전투를 벌이지 않고서도 구절양장 우수 어린 생애를 평화롭게 사는 법을 배울 것이다.
꿈을 꾸듯 강원도로 떠난 친구가 살아갈 산촌 생활 모습을 김희성(金喜誠:1710년대-1763년 이후)이 그렸다. 제시(題詩)로는 ‘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다(山靜似太古 日長如少年)’라는 나대경(羅大經:1196-1242)의 싯귀절을 적었다. 위의 싯귀절은 흔히 앞 두 글자씩만 취해 ‘산정일장(山靜日長)’이라는 제목으로 많은 화가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출처는 중국 남송(南宋)때의 학자인 나대경의 산문집 『학림옥로(鶴林玉露)』중 산속에서의 생활의 즐거움을 읊은「산거(山居)」편에 나온 문장이다. 『학림옥로』는 나대경의 호 학림(鶴林)을 따서 지은 책으로 모두 18권인데 주희(朱熹), 구양수(歐陽修), 소식(蘇軾) 등의 문인과 학자들의 어록, 시문에 관한 논평이 적혀 있다.
<산정일장>을 그린 김희성은 화원(畵員) 화가로 호를 불염재(不染齋), 불염자(不染子)라 했고 김희겸(金喜謙)이라는 이명(異名)을 썼다. 그의 아들 김후신(金厚臣)도 화원화가였다.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운 까닭에 그의 그림 속에는 스승의 화풍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데 <산정일장>도 마찬가지다.
정선, <여산초당>, 비단에 색, 68.7×125.5cm. 간송미술관
사선으로 배치된 산 아래 초옥을 배치한 것은 물론, 부드러운 피마준에 미점을 가미한 산의 질감과 원산을 푸르스름하게 형체만 표현한 점이 스승 정선에게서 힘입은바 크다. 여러 종류의 나무 중에서 특별히 우람한 소나무를 강조한 것도 사제간의 전승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김희성만의 장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정선의 <여산초당>이 우람한 산세를 드러내고자했다면 김희성은 그 산 아래 은거하는 사람에 주목했다. 정선은 꿈틀거리듯 위용을 자랑하는 산의 맥을 보여주기 위해 세로로 긴 축화(軸畵)를 선택했다. 폭포를 그려 산이 높고 깊은 산중임을 암시했고, 신령스러움이 느껴지는 고목들도 유서 깊은 장소임을 말해준다. 반면 김희성은 산세보다 산 속에 사는 사람의 삶을 눈여겨봤다. 나대경이 노래한 ‘산에 사는’ 자의 여유로움과 풍류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김희성은 산에 사는 사람의 생활을 보여주기 위해 뒷산은 적당한 선에서 안개 뒤로 가려버렸다. 산은 산이로되 못오를 정도로 험한 산은 아니다. 적적할 때면 지팡이 짚고 올라가서 쉴 수 있는 정자가 있는 ‘만만한’ 산이다. 그래서 김희성의 <산정일장>은 세로가 더 긴 축화임에도 불구하고 가로가 더 긴 작품처럼 느껴진다. 작가가 대상을 그릴 때 무엇에 초점을 맞춰 붓을 들었는가 하는 것이 이렇게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희성의 <산정일장>은 스승의 그림에서 시작했으되 자신의 그림 세계도 잊지 않은 수작(秀作)이 되었다. 청출어람이다.
여유 있는 삶의 상징, 낮잠
김희성의 <산정일장>은 『학림옥로』의 「산거」편을 모두 여섯 폭으로 그린 작품 중 한 폭으로, 성리학적 이상을 실천하며 사는 은자(隱者)의 삶을 담은 시리즈라 할 수 있다. 2폭은 <산가독서(山家讀書):산속 집에서 책을 읽다>, 3폭은 <좌롱유천(坐弄流泉):흐르는 시냇가에 앉다>, 4폭은 <산처치자(山妻稚子):촌티 나는 아내와 자식>, 5폭은 <수루작서(水樓作書):물가의 누각에서 글을 짓다>, 6폭은 <적성래귀(篴聲來歸):피리 불며 돌아오다>이다. 모두『학림옥로』에서 제시를 취한 작품이다. 여기서는 1폭 <산정일장>과 함께 2폭 <산가독서>, 4폭 <산처치자>를 다른 작가의 작품과 함께 비교하며 살펴보기로 하겠다. 6폭 중에서 특별히 3폭만 선정한 이유는, 나머지 세 폭 그림의 좋은 도판을 구하지 못한 것도 원인이지만 무엇보다도 이 세 편의 제시가 다른 작가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희성의 <산정일장>에서 주인공은 낮잠을 자고 있다. 낮잠 자는 것을 흔히 ‘오수(午睡)를 즐긴다’고 표현한다. 오수는 한가로운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이다. 밥을 과하게 먹어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몸을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 빈둥거리는 사람의 게으른 잠도 낮잠에 포함되겠지만 근본적으로 낮잠은 마음 속에서 거추장스런 고민의 짐을 덜어낸 사람만이 빠져들 수 있는 안락의 세계다. 피곤에 절어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떨어지는 토막잠하고는 그 색깔이 다르다. 하물며 산이 깊어 문 두드리는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한 곳에서의 낮잠은 얼마나 평화롭고 여유로울 것인가. 번다한 세속을 벗어난 은거자의 삶을 보여줄 때 낮잠만큼 명료한 모습은 없을 것이다. ‘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긴’ 유장한 자연 속에서의 삶을 보여주면서 주인공의 자세를 굳이 낮잠 자는 사람으로 선택한 것은 이런 배려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재관, <오수도>, 종이에 연한 색, 122×56.cm. 삼성 리움미술관
아예 낮잠을 드러내놓고 화제로 그린 그림도 있다. 이재관(李在寬:1783-1837)의 <오수도(午睡圖)>가 그것이다. 그는 「산거」편의 ‘새 소리 위 아래로 오르내릴 제 낮잠이 막 깊이 드네(禽聲上下午睡初足)’를 화제로 적어 놓았다. 그림은 초옥 안에서 책을 베개 삼아 낮잠을 자고 있는 선비를 클로즈 업 했다. 심하게 굴절된 소나무 아래는 선비의 고고한 삶을 대변하는 듯 두 마리 학이 서 있고 마당가에서는 동자가 차를 끓이고 있다. 잠자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면서 굳이 차 끓이는 동자를 함께 그린 것은 ‘돌아가 산골 샘물 긷고 솔가지 주어와 쓴 차를 끓여 마시네’를 위한 암시다.
소당(小塘) 이재관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어려운 형편에 따로 그림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화조영모도(花鳥翎毛圖)와 초충도(草蟲圖)에서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며 남종화(南宗畵)와 초상화에서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일본인들은 그의 영모화를 무척 좋아하여 동래관(東萊館)을 통해 해마다 그의 그림을 주문했다. <오수도>가 주문에 의한 그림인 지 아니면 자신의 심사를 의탁하기 위한 감상용 그림인 지는 알 수 없다. 어느 경우든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화가 또한 세속에서의 복잡한 송사를 잊고 그림 속 선비의 혼곤한 낮잠 속에 빠져 들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꿈이 베개 속에 담긴 책 속의 꿈이려니 현실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허망한 꿈일지라도 상상속에서는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던가.
이재관, <전다도>, 종이에 연한 색, 120×56cm, 개인소장
이재관은 <오수도> 다음으로, 다음 장면인 <전다도(煎茶圖)>를 그렸다. 제시는 ‘창가에 앉아 글씨를 쓰고(弄筆窗間) 다시 쓴 차를 달여 한 잔 마신다(再烹苦茗)’라고 적어 놓았다. 이재관은 자신이 그림 그리기 편리하게「산거」편에 따로 떨어져 있는 두 구절을 짜깁기하여 제시로 삼았다. 낮잠에서 깬 선비가 방 안에서 붓을 들고 글씨를 쓰고 있고, 동자는 마당에서 열심히 부채질을 하며 차를 끓이는 중이다. 화면의 중앙에 이야기하고 싶은 대상을 찬찬하게 그린 후 나머지 공간은 넓은 여백으로 남겨 놓은 것이 이재관 그림의 특징인데 <전다도>도 예외는 아니다. 맑은 설채법(設彩法)과 담백한 인물 묘사 등이 이인상(李麟祥:1710-1760)에서 김홍도(金弘道:1745-?)로 이어지는 화맥을 이은 계승자임을 말해준다.
<전다도>는 현재 개인 소장품으로 <오수도>와 따로 분리되어 소장되어 있지만 원래는 모두『학림옥로』시리즈 중의 한 폭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작품 외에도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치자공반(稚子供飯)>과 소장처를 알 수 없는 <삼인해후(三人邂逅)>가 더 있다. <치자공반>은 ‘촌티 나는 아내와 자식들이 죽순과 고사리 반찬에 보리밥을 지어주다(山妻稚子作筍蕨供麥飯)’라는 제시를, <삼인해후>는 ‘밭둑의 노인이나 냇가의 벗들과 만나 뽕나무와 삼베 농사를 묻고 벼농사를 얘기하네(邂逅園翁溪友問桑麻說秔稻)’를 각각 제시로 삼았다. 이재관은 이 네 작품 외에도 김희성이나 이인문의 경우처럼 두 점이나 네 점을 더 그려 모두 여섯 폭이나 여덟폭짜리 《학림옥로첩》을 그렸으리라 짐작되지만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어 안타깝다.
『학림옥로』를 제재로 그린 작가로는 김희성과 이재관 외에도 정선, 심사정(沈師正:1707-1769), 정수영(鄭遂榮:1743년-1831), 이인문(李寅文:1745-1821), 김홍도, 오순(吳珣:19세기 중엽), 김수철(金秀哲:19세기 중엽), 허련(許鍊:1809-1892)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인문은 『학림옥로』시리즈 8폭 병풍을 여러 벌이나 그려 나대경의 글에 대한 애착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때로 『학림옥로』의 내용을 여러 폭의 병풍으로 그릴 때도 있었고 한 폭에 전체 내용을 압축해서 그릴 때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모든 그림 속에는 나대경의 글을 빙자한 화가의 꿈이 담겼다.
김희성, <산가독서>, 종이에 연한 색, 29.5×37.2cm, 간송미술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비록 《학림옥로첩》을 그린 작품의 제작 편수에 있어서는 김희성이 이인문보다 많지 않으나 작품의 질에 있어서는 사정이 다르다. 김희성의 《학림옥로첩》두번째 폭 <산가독서(山家讀書)>는 은거하는 선비가 산 속의 집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그렸다. 박락이 심하여 처음 작품을 제작했을 당시의 산뜻함을 많이 잃었지만 축축한 물기가 느껴지는 김희성의 붓질을 짐작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화제는 ‘독주역국풍좌씨전(讀周易國風左氏傳)’이다.‘『주역(周易)』『국풍(國風)』『좌씨전(左氏傳)』을 읽는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선비는 ‘『이소(離騷)』『사기(史記)』,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의 시, 한유(韓愈)와 소동파(蘇東坡)의 문장 몇 편’을 읽을 것이다. 문장이 긴 까닭에 화제에서 뒷부분을 생략했는데 나대경의 시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림 속 주인공이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하게 될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계절은 바야흐로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때. 선비의 초옥 곁에는 한여름을 향해 맹렬히 뻗어나가는 수목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이렇게 좋은 계절에 서늘한 마루에 앉아 책을 읽는 기쁨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으랴. 선비는 이미 부드러운 초여름 산들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낮잠도 한숨 자고 난 다음이다. 쓴 차도 한 잔 마셨다. 1폭 <산정일장>에서는 낮잠 잔 모습은 보여줬으나 차 마시는 장면은 생략했다. 대신 2폭의 <산가독서>에서 독서하고 있는 선비 뒤로 찻잔 세트를 그려놓음으로써 독서 전에 차를 마셨음을 은연중에 알려준다. 전체를 6폭의 그림으로 나누면서 작가는 어떤 장면을 보여줄까 고심했을 것이다. 강조할 것은 강조하고 생략할 것은 과감히 생략으로써 글보다 더 현장감이 느껴질 수 있도록 그리는 것이 그림 그리는 자의 역할이다. 안정된 구도 위에 윤기있는 붓질로 표현된 <산거독서>는, 벽에 꽂힌 책과 서안과 찻상에 붉은 색을 칠하자 자칫 심심할 수도 있는 산 속 생활이 알고 보면 깨알처럼 고소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김희성이 얼마나 색깔에 민감했는 지 알 수 있다.
이인문,<산거독서>, 종이에 연한 색, 39.2×109.9cm, 간송미술관
김희성의 <산가독서>와 같은 내용을 그린 작품으로 이인문의 <산거독서(山居讀書):산에 살며 책을 읽다>를 들 수 있다. 이인문은 《학림옥로첩》을 가장 많이 그린 작가다. <산거독서> 역시 8폭 병풍 중의 한 폭이다. 병풍으로 제작된 만큼 화면이 세로가 길어 그림은 뒷산과 집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그림은, 석축을 쌓아 세운 서재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는 선비를 중심으로 짐을 들고 오는 아이와 낚시질하는 아이를 앞마당의 좌우에 그려 넣었다. 이인문은 김홍도와 동갑이었고 친분이 두터워 함께 모여 작업할 때도 많았는데 그의 그림 속에서 풍속화적인 면을 읽을 수 있는 것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영향을 받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집을 에워싸듯 심어 놓은 낙락장송과 버드나무와 대나무는 이 곳 ‘산거지(山居地)’가 ‘문 두드리는 사람 없는’ 두메산골임을 말해줌과 동시에 선비가 ‘한가로이 산길을 거닐며 소나무 대나무를 쓰다듬을 수 있는 곳’임을 의미한다.
김희성과 이인문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드는 생각 하나. 똑같은 내용을 그린 작품인데 김희성의 작품에는 <산가독서>라는 제목을 붙였고, 이인문의 작품에는 <산거독서>를 붙였다. ‘가(家)’를 ‘거(居)’로 한 글자 바꾸었을 뿐인데 김희성의 작품에서는 ‘집’이, 이인문의 작품에서는 ‘산’이 강조된 제목이 되었다. 글자만 보면 그다지 제목의 차이가 크게 실감나지 않는데 그림을 본 다음 제목을 보면 무릎을 치게 된다. 얼마나 오랫동안 고심한 후 지은 제목이었을까. 모두 후대 사람들이 붙인 제목이지만 작품을 이해하는데 제목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예라 할 수 있다.
(왼쪽)김희성, <산처치자>, 종이에 연한 색, 29.5×37.2cm. 간송미술관
(오른쪽)『고씨역대명인화보』의 <동원(董源)>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학림옥로』중에서 화가들이 가장 많이 화제로 삼은 구절은 단연 <산처치자(山妻稚子):촌티 나는 아내와 자식>이다. 김희성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학림옥로첩》 4폭에 <산처치자를 그렸다. 제시는 여느 작가와 마찬가지로 ‘촌티 나는 아내와 자식이 죽순과 고사리 반찬에 보리밥을 지어주다(山妻稚子作筍蕨供麥飯)’이다. 풍광이 기막히게 좋은 산 아래 계곡 위에 누각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는 사방관을 쓴 선비가 앉아 있다. 그 곁에는 아이가 ‘죽순과 고사리 반찬에 보리밥’을 담은 상을 들고 서 있다. 아이의 손에 들린 소박한 음식은 왼편 팔작 지붕 건물 안에 서 있는 ‘촌티 나는 아내’가 만든 것이리라.
<산처치자>는 명대(明代)에 출판된 『고씨역대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의 <동원(董源)>의 그림을 참고로 그렸다. 기울어질 듯 불안하게 서 있는 뒷산의 표현이나 수목 사이에 세워진 누각 속 인물 등은 그대로 화보에서 차용했다. 그러나 형식은 화보를 참조했으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완전히 조선식으로 바뀌었다. 화보 속의 초옥은 기와집으로 바뀌었고, 책상 앞에 앉은 선비는 사방관을 쓰고 도포를 입은 조선 사람으로 변했다. 집 뒤에는 화보에 보이지 않는 대나무를 심어 ‘산거도(山居圖)’를 그릴 때 죽림(竹林)과 노송(老松)을 그려 넣는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 전통 위에 ‘대나무 그늘진 창 아래로 돌아오면(旣歸竹窗下)’이라는 싯구절을 참고했으리라. 팔작 지붕 속의 촌티 나는 아내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은 김희겸이 중국의 화보를 참조하면서 관념산수(觀念山水) 배경을 그리되 조선적인 분위기를 내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큰 산을 배경으로 그렸지만 김희겸의 <산처치자>은 건물 속의 인물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김희겸의 작품과 이인문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두 사람의 개성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왼쪽)이인문, <산처치자>, 모시에 연한 색, 117×44cm. 선문대박물관
(오른쪽) 이인문, <산처치자> 세부
이인문이 그린 <산처치자>는 <산거독서>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로가 긴 축화(軸畵)로 산수배경이 강조된 작품이다. 사람살이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 담긴 희노애락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지만 멀리 떨어져 관찰해보면 그저 한 그루 나무에 무수히 많이 달린 나뭇잎처럼 보일 뿐이다. 이인문의 <산처치자>는 개별적이고 소중한 선비의 삶을 읊은 나대경의 시를 형상화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무궁무진하게 펼쳐진 산수 속에 기대어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린 이인문의 대표작 <강산무진(江山無盡)>의 세부를 보는 것 같다. 그만큼 이인문의 작품에서는 산수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왼쪽) 정선, <산처수반도>, 비단에 연한 먹, 22×15cm. 개인
(오른쪽)정수영, <산처치자>, 종이에 연한 색,22×28.5cm. 개인
현존하는 작품 중에서 <산처치자>를 가장 먼저 그린 작가는 정선이다. 정선이 그린 <산처수반(山妻修飯)>은 나대경이 지향하고자 했던 은거하는 선비의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세계 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생각된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빈한하지도 않은 ‘ㄱ’자 집의 세간살이는 ‘죽순과 고사리 반찬에 보리밥’을 차려 먹는 생활이 딱 맞을 정도로 수수하다. 정선이 <산처수반>에 차린 밥상을 보다 김희성의 <산처치자>에 차린 밥상을 보면 똑같은 반찬에 보리밥인데도 불구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는다. 정선은 벼슬을 떠난 선비가 절약하느라 가난한 밥상을 차렸고, 김희성은 돈 많은 갑부가 별장에 놀러와 건강을 위해 웰빙식으로 차린 밥상 같다. 감상용으로는 김희성의 <산처치자>가 훨씬 더 상큼한 느낌을 줄 지 모르지만 울림에 있어서는 정선의 <산처수반>이 더 묵직하다. 만약 소장품으로 선택하라면 김희성의 작품을 선택하겠지만 말이다.
<산처치자>를 그린 작품 중에서 선비가 사는 집의 내부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듯 그린 작가는 정수영이다. 그가 그린 <산처치자>는 선비와 아내가 있는 건물이 ‘ㄱ’자로 배치되어 있고 배경은 집 주위에 심어진 나무 몇 그루가 전부다. 나머지는 전부 생략되었다. 그 때문에 밥상을 앞에 둔 선비의 유유자적한 표정뿐만 아니라 뒷벽에 붙여 둔 그림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집안 묘사가 세밀하다. 정수영은 감상자가 집안의 인물을 제외한 그 어떤 것에도 신경을 빼앗기지 않도록 담장처럼 그린 나무 왼쪽은 가벼운 붓질로 둔덕을 표시하고 멈추었다. 그래서 ‘대나무 그늘진 창 아래로 돌아오면 촌티 나는 아내와 자식들이 죽순과 고사리 반찬에 보리밥 지어내니 기쁜 마음으로 배불리 먹는다네’라고 적힌 제시 부분이 마치 제시를 위해 따로 그려서 붙인 듯 어색하다. 초옥(草屋)의 한쪽 면을 나무와 함께 잘라 낸 듯 갑작스런 마무리다. 덕분에 감상자의 시선은 더욱 더 집안에 있는 인물들에게 집중하게 된다. 이 작품은 여러 폭 중의 하나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이 작품만 따로 전해지고 있어 그 전모를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산처치자>는 많은 작가들이 탐내는 화제(畵題)였지만 과연 여자들도 좋아했을까 생각하면 회의가 든다. 여인들이 그린 그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뭐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림 속의 내용이 오로지 남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한 즐거움이라 그 속에서 노동을 담당해야 하는 여인들에게는 결코 반가운 설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리 산천경개가 수려한 곳이라 해도 그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누각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세 끼 밥을 해결하기 위해 뙤약볕 아래 서 있어야 한다면 과연 행복할 것인가. 삶 속에 생활이 끼어드는 순간 낭만이나 풍류는 어느덧 사라지고 삶의 고달픔만이 남게 마련이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이 이런 대화를 나눈다. 여자가 처음 남자 집에 가서 남자가 사과를 깎는 것을 보면서 하는 말이다.
여자: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남자: “왜요?”
여자: “좋잖아요. 귀찮은 일 다 시키고, 청소시키고 밥하라 그러고 사과도 깎아주고 귓밥도 파주고...”
<산처치자>를 볼 때마다 산에 사는 즐거움에 취한 선비보다 허리를 굽히고 서서 부엌에서 일하는 아낙네의 모습이 오랫동안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아마 내가 여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재료는 똑같은데 매 끼니마다 색다른 반찬을 올려야 하는 아낙네의 걱정이 바로 나의 걱정이기 때문이다. 도시에 사나 산 속에 들어가 사나 어딜 가든 반찬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주부들은 밥상 차릴 때가 되면 아마 이런 소리를 중얼거릴 것이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김수철, <죽창포식>(8폭 병풍 중 1), 1877년, 비단에 연한 색, 119.4×32.5cm. 개인
시 전체를 감상할 수 있는 그림
지금까지『학림옥로』의「산거」에서 마음에 드는 단어를 취해 화제로 삼은 작품을 살펴보았다. 특정한 단어를 선택해서 화제로 쓸 경우, 작가는 그 단어에 해당하는 내용을 구체적이면서도 집중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 그림 감상자에게 작가의 뜻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산처치자>처럼 은거하는 선비가 ‘촌티 나는 아내와 자식’이 차려 준 소박한 밥상’을 앞에 두고 초옥에 앉아 있는 장면을 그리면 되기 때문이다. 화제로 취한 단어는 그 단락에서 핵심이 되는 ‘키 워드’이기 때문에 함축된 단어가 들어간 그림만으로도 문장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반면, 키워드가 들어간 문장 전체를 빼놓지 않고 정직하게 화제로 그린 작가들도 있다. 위에서 살펴 본 이인문의 <산거독서>도 그 중의 하나다. (제시는 그림 바깥에 따로 적혀 있다) 시 전체를 그리는 방식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인문의 그림처럼 시를 몇 단락으로 나눠 제시로 쓰고 그 단락에 맞는 그림을 그린 경우가 있고, 시 전체를 한 화면에 압축해서 그린 경우도 있다. 전자는 여러 장면이 필요한 만큼 6폭이나 8폭의 병풍이나 화첩 그림으로 제작되고, 후자는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의 <학림옥로>나 허련의 <선면산수도>처럼 한 장으로 제작되었지만 꼭 그 형식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8폭을 온전히 나대경의 시로 채운 그림으로는 이인문의 작품이 대표적이지만 앞서 그의 작품을 소개하였으므로 여기서는 김수철과 오순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살펴보게 될 김수철의 작품 <죽창포식(竹窓飽食):대나무 창에서 난 집에서 식사하다>은 8폭(혹은 10폭) 병풍 중의 한 폭인데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어떤 차이가 있는 지 비교해 보기 위해 앞서 살펴본 <산처치자>와 같은 주제를 선택했다. 제시는 정수영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나무 그늘진 창 아래로 돌아오면 촌티 나는 아내와 자식들이 죽순과 고사리 반찬에 보리밥 지어내니 기쁜 마음으로 배불리 먹는다네’이다.
<죽창포식>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안개와 구름이다. 구름은 선비가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초옥과 나무를 언뜻 보여줄 뿐 마을과 산을 휘감아 돌고 있다. 김수철의 작품에는 다른 작가들 굳이 강조했던 ‘촌티나는 아내와 자식들’이 안개 속에 묻혀 있다. 제시가 아니었더라면 운무가 쌓인 산골마을의 정경쯤으로 읽혔을 만큼 평범한 산수화다. 시시콜콜 보여주기를 거부하고 과감하게 생략하기를 좋아했던 김수철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단순한 구성과 산뜻한 색채로 마치 현대의 수채화를 보듯 담백하면서 참신한 화풍을 구사한 김수철의 화풍이 잘 살아난 작품이다. 김수철은 과감한 생략과 세련된 파스텔톤의 색채 사용으로 ‘신감각파’ 혹은 ‘이색화풍’으로 분류되는 독특한 화가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일파로 평가되는 북산(北山) 김수철은 오랫동안 학산(寉山) 김창수(金昌秀)와의 관련성에 대해 궁금증이 많은 작가였다. 화풍은 같은데 이름과 호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두 사람이 동일인이었음이 이태호 교수에 의해 판명되었다. 2011년 동산방에서 개최된 “조선후기 산수화전”에는 <죽창포식>이 포함된 5점의 병풍 그림이 전시되었는데 각 그림의 제시 끝에는 ‘학산(寉山)’이라는 서명 아래 ‘학산(寉山)’이라는 양각도장과 ‘김수철인(金秀喆印)’이라는 음각도장이 함께 찍혀 있었다. 그 결과 ‘학산(寉山)은 김수철이 처음 사용한 아호였고 김창수(金昌秀)는 김수철의 초명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죽창포식>이 들어간 병풍은 전체 그림 중에서 5폭만 공개되었는데 그 중 3폭을 제외한 나머지 그림은 나대경이 아닌 다른 시인의 시를 화제시로 삼았다. 나머지 공개되지 않은 3폭(혹은 5폭)에 나대경의 시와 관련된 그림이 더 있는 지는 현재로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오순, <누각산수도>, 종이에 연한 색, 56.5×36cm. 삼성 리움미술관
초전(蕉田) 오순(吳珣)이 그린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는『학림옥로』「산거」의 도입부분을 화제로 삼았다. 즉 ‘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山靜似太古)...’부터 시작해 ‘낮잠이 막 깊이 드네(午睡初足)’까지다. 예서체로 단정하게 쓴 제시 밑으로는 농도가 다른 앞산과 뒷산이 사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사이에 은거하는 선비의 누각이 보인다. 앞산은 진한 농묵으로, 뒷산은 연한 담묵으로 그린 까닭에 그 사이에는 깊은 거리감이 느껴져 작은 산수화임에도 불구하고 대관산수화(大觀山水畵)에서 맛볼 수 있는 웅장함이 느껴진다. 화면 구성을 하면서 작가가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게 된다. 진한 필치로 그린 앞산 양옆으로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으며 연한 필치로 그린 은거지는 우뚝 솟은 소나무에 둘러 쌓여 있어 이곳이 ‘태고처럼 고요한’ 숲이 우거진 깊은 산중임을 보여준다.
산중생활이란 것이 그렇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문에는 두드리는 사람 없는’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 산중이다. 그러나 심심하고 무료할 것 같은 산중생활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이 그림처럼 말이다. 전경에서 중경의 누각으로 이르는 곳에는 다리가 놓여져 있고 다리 끝에는 한 남자가 어깨에 짐을 매고 걸어가고 있다. 누각 안에서는 선비가 팔베개를 하고 누워 오수를 즐기고 있고 옆방에서는 동자가 차를 끓인다. 그런데 이 모든 장면이 워낙 흐릿하고 작게 표현되어 얼핏 스쳐 보면 잘 보이지 않는다. ‘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라는 제시를 읽으면서 그림 한 번 보고, 다시 ‘해는 소년처럼 길기도 하네...’라는 뒷구절을 읽으면서 음미하듯 천천히 그림을 들여다보노라면 생소하기만 하던 시와 풍경이 마치 고향집을 찾아갔을 때처럼 반갑고 눈에 익게 된다. 그 때 바위와 나무와 계곡과 사립문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더 이상 심상하지 않고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침잠하듯 그림 속에 푹 빠져 있노라면 바위와 나무 표현에 있어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나 뒷산의 설채법(設彩法)에서 신윤복(申潤福:1758-?)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해도 오순이 세우고자했던 미의 세계가 전혀 손상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이런 고즈녁한 그림을 그린 오순의 생애는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는 정조의 부름을 받아 화원이 되었는데 1805년 ‘문조왕세자책례도감의궤(文祖王世子冊禮都監儀軌)’에 참가한 바 있으며 김홍도, 이인문, 김득신, 윤제홍 등의 여러 작가와 함께<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畵屛)>(개인소장)의 제작에도 참여하였다.『학림옥로』를 주제로 그린 작품으로는 <누각산수도>외에 다른 병풍에 포함된 작품을 한 점 더 남기고 있다.
(좌)<학림옥로도>,《천고최성첩》, 모시(그림),종이(글씨), 27×30.7cm(그림), 27×25.7cm(글씨),선문대박물관
(우)<학림옥로도 세부>
그의 시가 내 가슴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나대경이 쓴 「산거」의 내용을 제화시로 한 시의도 여러 점을 살펴 보았다. 같은 시를 읽어도 그리는 사람에 따라 얼마나 다양한 그림이 나올 수 있는지, 사람의 상상력이란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한 지 확인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대경의 「산거」의 첫 문장 ‘산은 태고인 양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다(山靜似太古 日長如少年)’라는 문장은 원래 나대경의 글이 아니었다. 당경(唐庚:1071-1121)이 쓴 「술에 취하다(醉眠)」라는 시의 첫 번째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1606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朱之蕃)에 의해 전래된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중 선문대박물관에 소장된 임모본 <학림옥로도>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옆에는 ‘나대경이 말하기를 당경의 시 산은 태고인 양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다...(羅鶴林曰唐子西詩云山靜似太古日長如少年...)’라고 적혀 있어(‘子西’는 당경의 字) 나대경이 당경의 시를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한동안 학계에서는 이 글이 당경의 시인지 나대경의 산문인 지 규명되지 않아 설전을 펼칠 적도 있었다. 그만큼 나대경이 선택한 당경의 시가 나대경의 시로 오인 받을 만큼 다른 싯귀절과 조화를 잘 이루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나대경이 인용한
당경의 시「술에 취하다(醉眠)」 전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山靜似太古)
해는 소년처럼 길구나(日長如小年)
남은 꽃에도 취할 만하고 (餘花猶可醉 )
고운 새 잠을 방해하지 않네(好鳥不妨眠)
세상 일 어두워 문은 항상 닫았는데(世昧門常掩)
시절은 벌써 돗자리가 편할 때로구나(時光簟已便)
꿈 속에서 좋은 구절을 자주 얻어도(夢中頻得句)
붓을 잡으면 다시 잊어버리네(拈筆又忘筌)
-당경,「술에 취하다(醉眠)」
당경 또한 ‘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구나’를 시의 첫 구절로 삼았다. 그도 은거하는 선비의 자족감을 시 속에 담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당경의 시가 은둔자의 심상세계를 간결하게 표현했다면, 나대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은둔하는 사람의 생활 모습을 눈 앞에 펼치듯 자잘하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나대경의 글이 당경의 시보다 시의도(詩意圖)를 그리는 화가들에게 훨씬 더 깊은 공감을 자아냈다.
선문대 소장 <학림옥로도>는 나대경의 글 전체를 한 화면에 압축해서 그린 작품이다. 여러 폭으로 나누어 그린 시리즈만큼 구체적인 정경을 읽을 수 있는 소소한 맛은 없지만 작가가 지향한 은거지의 모습이 깔끔하게 개괄되어 있다. 그림은 초옥 속에 앉아 있는 은자와 그를 찾아가는 손님(客)을 중심으로 그렸다. 시자(侍者)에게 거문고를 들려서 은자를 찾아가는 손님의 이야기는 나대경의 글에는 보이지 않는다. 순전히 그림 그리는 사람의 창작품이다. 산속의 은자를 찾아갈 때 거문고 든 손님을 그리는 것은 말 안해도 통하는 상식임을 감안한 것이다.
허련,<선면산수도>, 1866년, 종이에 연한 색, 20×61cm. 서울대박물관
나대경의 시 「산거」전체를 한 화면에 써 넣은 또 다른 작품으로 소치(小癡) 허련의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를 들 수 있다. 선문대 소장의 <학림옥로도>가 그림과 시를 따로 따로 분리해서 제작했다면 허련의 <선면산수도>는 시와 그림을 한 화면에 어우러지게 했다. 한양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던 허련이 귀향한 후 제작한 <선면산수도>는 나대경의 시를 빌려 자신이 살고 있는 진도의 운림산방(雲林山房)의 모습을 담았다. 허련은 스승인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극찬을 받았는데 작품세계는 중국의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가 지향했던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를 선호했다. 자신의 호를 원말사대가의 한 사람인 ‘대치(大癡)’ 황공망(黃公望)의 호를 본떠 ‘소치(小癡)’라 한 것도 그가 얼마나 사의적(寫意的)인 남종문인화에 빠져 있었던가를 말해준다. 허련은 간일(簡逸)한 구도와 마른 붓질, 인적이 드문 정자 곁에 서로 다른 종류의 고목을 배치하는 남종화의 세계를 선호했는데 <선면산수도>에도 그와 같은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사람들이 선호했던 나대경의 시를 자신의 은거지 속에 스며들게 그린 <선면산수도>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현실을 피해 주어진 환경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했던 조선 말기의 한 선비의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지금까지 나대경의 시를 화제 삼아 그린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나대경의 시를 좋아했던 만큼 그림도 많이 그려져서 논의가 길어졌다. 시대별로 혹은 작가의 개성에 따라 시를 읽고 해석하는 색깔이 다양함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홍도의 <삼공불환도>에 두 개의 서로 다른 글이 한 화면에 담겨 있다면 김희성의 <산정일장도>에는 ‘시 속의 시’가 담겨 있다. 학문간의 벽을 허물자는 통섭과 융합이 화두가 된 요즘, 그런 운동을 이미 3백여년 전에 실천한 조선시대 선배들의 작품을 감상해보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성을 던져줄 것이다.
*이 글은 『주간조선』2211호(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211100028&ctcd=C09&cpage=1)에 실린 글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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