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한다(自言)-5, 흔한 군대 이야기
3년간의 한국 전쟁에서 약 13만 명의 국군이 전사했다. 경찰은 약 3천 명이 사망하였으며. 북한군 사망자 수는 52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과 함께 북한에 맞서 싸운 유엔군 사망자 수는 미군 3만 4천 명을 포함 3만 7천 명에 달한다. 유엔군의 실종자와 포로는 각각 약 3천 명, 6천 명이며 부상자는 10만 3천 명이다. 중공군은 15만 명이 죽었고 80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쟁으로 죽은 민간인은 남한에서 24만 5천 명이, 북한에서 28만 2천 명에 달했다.
2022년 러시아가 침공한 우크라이나에서 아직 명확히 통계 수치가 나오지 않았으나 수 천, 수 만의 인명이 살상당했다.
숱한 전쟁 소설과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주제主題는 무엇일까?
그것은 집단과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와 그에 상응하는 비극이다. 그 비극에 상응하는 인간의 생명의 소중함이다.
역사는 전쟁에서 어느 편이 이겼으며, 뺏고 뺏긴 영토의 지도는 어떻게 변했는지, 전사자와 부상병의 숫자는 얼마인가를 남기지, 전쟁으로 고통받은 개개인과 그 가족, 친지의 절망과 아픔은 기록하지 않는다.
전쟁에 징집되어 간 남편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 자살한 여인들은 얼마인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늙어 죽은 여인네도 또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세계 2차 대전 한 여인은 남편의 전사 통지서를 받아들고 다른 사내에게 몸을 허락하였으나 종전 후 남편이 살아 돌아오자 왜 살아 돌아왔느냐며 무너졌다. 그녀는 그에게 당신은 나를 창녀로 만들었어라고 오열했다.
70대에서 뒤돌아보는 20대의 내 청춘, 그중에는 3년의 허탈한 공백이 있다.
1969년 4월부터 1972년 4월까지, 만 35개월 15일 동안 나는 군역軍役을 치렀다.
남자들은 술을 마시면 군대 얘기로 목청을 올린다지만, 나는 평소 군대에 있었던 일들을 아예 입에 올리지 않는다. 군 시절은 그만큼 나에겐 다시 기억하기가 싫을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무의미했고 삶의 공백일 뿐이다.
나는 세상 물정을 몰랐고 군대에 대해 영화나 소설에서 본 참혹한 장면만 뇌리에 남아 군 입대를 마치 전장에 끌려가는 것으로 잘못 입력된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입영통지서를 받고 나는 동해안 감포 위쪽의 마을 ‘두원’이라는 곳으로 떠났다. 그 마을 동장이 내 친구의 형이라서 머물 집을 구해주었다.
아마 내 인생에 마지막 할 일이 있다면 책을 읽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때처럼 열심히 집중해서 독서했던 적이 없었다. 새벽과 일몰의 해변 산책을 제외하곤 하루 종일 밤늦게까지 독서에 몰두했다. 가져갔던 서른 권 가까운 책을 읽고 나니 입영 날짜가 되었다.
논산 훈련소 수용 연대에 있는 고교 동기 고 최재열 군의 친구가 나를 찾아와서 병과를 “07, 정보병과”로 해뒀다고 말했다. 나는 기겁을 하고 그건 못하겠다고 고사했다. 어찌 남의 뒷조사나 하는 임무를 맡을 수 있냐는 나의 황당한 부탁에 그 친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그럼 원하는 병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는 것이 아예 없어서 보병이라고 답했다. 그 친구는 속된 말로 “웬 이런 또라이”가 있냐고 속으로 웃으며 돌아갔을 것이고, 나는 3년 동안 보병이었다.
훈련소는 이 세상과 동떨어진 인간성이 말소된 곳이었다. 점호와 기합의 공포, 모자란 수면과 고된 훈련의 연속이었다. 내무반 내 옆의 친구는 안동 어디에서 머슴으로 살다 왔다고 했다. 그에겐 힘든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배고픈 것이 가장 고통이었다. 나는 훈련소 음식이 정말 입맛에 안 맞아서 반쯤 먹다가 그 친구에게 밀어주면 한 숟가락에 먹어치우고 순수한 자선을 한 것도 아닌 나에게 그는 고맙고 미안해했다.
나는 운 나쁘게도 후반기 교육까지 받았다.
1사단 11연대 1중대 박격포 소대에 배치된 신참 졸병은 매일 80미리 박격포 포신을 매고 산 중턱으로 올라가야 했다.
내 체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산으로 올라가면 주변을 살폈다. 서울이 어느 방향이며 어느 길로 탈영할 것인가 하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어느 날 사단 본부에서 나에게 호출 명령이 왔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학물을 먹은 사병이 드물었는지 그날로 나는 행정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내무반 30명 중에 가장 늦은 군번인 나는 매일 어김없는 취침 전 기합에서 군번 순으로 두 대씩 때리는 소위 “줄빳다”를 29 x 2, 도합 58대씩 맞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
기합의 이유는 돈이었다. 나는 사병계 보직을 받아 매일이다시피 훈련소에 오는 신병들에게 강제로 장기 복무, 강제 월남 파병 등등의 공갈을 쳐서 팬티 속에 감춰온 돈을 빼앗아 한 달간 모은 돈을 고참 사병에 상납해야 하고, 아마 그 돈이 상사에게 다시 상납되는 모양이었다. 군기가 세야 돈이 제대로 걷힌다는 어이없는 논리로 졸병들은 매일 얻어터지고 고참들은 변태적인 쾌감을 즐기는 악순환이었다.
사단 병력중 5백 명 이상이 부정한 방법으로 제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나 같은 무능력한 사병은 이 일에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하달된 목표 수금액에 턱없이 모자라서, 형들에게 구원을 청하는 편지도 자주 보냈었다.
그 당시 군대는 그야말로 불합리와 부정의 난장판이었다. 사병에겐 심리적, 신체적 폭력이 일상이었고 장교들은 문란하고 비리 투성이었다. '천일양병 일일용병(千日養兵 一日用兵)'은 금언에 지나지 않는다. 군대가 썩으면 필사즉생必死則生의 신념으로 전투에 임할 태세가 불가능하다. 사단급 훈련에서 사병들은 얼어붙은 눈길을 행군하느라 지치고 동상이 걸리는데 지휘부에서는 몇 천 마리의 통닭을 업자에게 팔아 먹었다.
또다시 탈출을 꿈꾸었다. 방안은 오직 하나, 월남으로 지원하는 것 외엔 없었다.
부산 제3부두를 떠나는 LSD 함에서 다른 사람들은 갑판에 올라 가족 친지들에게 이별 예식을 치르고 있었지만 나는 고교 동기 김대학 군과 경북고 나온 김정태 군과 함께 낯선 이국에 용병으로 가는 희극을 선내에서 소주로 자조自嘲했다.
모두들 무슨 목적을 갖고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으로 왜 가는지 참 모를 일이었다.
대학이는 퀴논에 있는 십자성부대로, 나와 정태는 나쨩에 있는 십자성부대에 배속되었다.
군수부대인 십자성부대의 장교나 사병들의 주된 일은 미군에서 받는 식품과 물품들을 공공연히 편취하여 월남인들에게 팔아 착복하는 것이었다. 장교들은 미군에서 받는 주, 부식의 반 이상을 팔아먹고, 사병들은 기관총이나 소총을 한나절 동안 연발하고 모은 탄피를 압착한 후 박스에 넣어 본국에 보내서 돈을 만드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동안 나는 벙커에서 부대 작전 현황과 계획 업무를 맡아 낮엔 놀고 밤엔 뜬 눈으로 잠도 모자라게 지냈다.
어느 날 백마부대가 대규모 작전을 시작하여 참모가 휴대할 탄띠 등 장비를 챙기려고 새벽에 탄약고에 들어갔다. 두 명이서 미리 준비해 둔 박스를 드는 순간 눈앞에 불꽃이 번쩍하였다. 둘은 정신없이 입구를 향해 도망쳤는데 뒤에선 벌써 탄약이 터지고 있었다. 새벽에 발생한 폭발은 저녁 늦게까지 계속되었고, 실탄과 포탄이 난사되므로 온 사단 병력은 벙커에서 고개도 못 내밀고 숨어서 지냈다.
밤이 되어서 범인(?)인 두 명이 헌병 중대에 호송되었다.
헌병 중대장은 참모(대령)의 지시로 본국 군법에 회부될 것이라며 일단 감방에 투옥시켰다.
나는 본국에 후송되어 군 형무소에서 지내느니 후송되기 직전 M-16 소총으로 자살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 이튿날 헌병중대장에게 불려갔다. 중대장은 주월사령부의 지시로 폭발사고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고 했다. 사망자가 없고, 군수품은 미군 것이고, 연루되는 장교들은 자기들 휘하인 ”하나회“ 소속인 관계로 그런 결론이 난 것이었다. 명령 불복이라는 죄명으로 20일간 영창 생활을 했다.
누구는 돈 욕심으로, 누구는 현실 도피로, 누구는 경험을 갖기 위하여, 누구는 별 목적도 없이 먼 나라의 전장으로 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위해 월남파병을 결정했다지만 사병들은 과연 그곳에서 무엇을 갖고 돌아왔는가.
이 중 5천 명이 사망했으며, 1만 1천 명의 부상자 그리고 16 만 명이 고엽제 등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남는 시간 맥주만 퍼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텅 빈 rucksack을 매고 귀국하여 곧바로 제대했다. 국군 경리단에서 용병으로 근무한 대가로 미군이 지급한 월급 중 강제로 저축된 돈을 찾아 오산의 부대에 있던 친구를 찾아가 후진 술집에서 맥주를 마셨고, 옆에 앉아 벌벌 떨며 시중을 들던 아가씨에게 빚을 갚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가진 돈 전부를 줘버렸다.
스무 살 청년에게 3년은 그렇게 흘러가 버렸다.
얻은 것이라곤 바위에서 떨어져 다친 후 야전 병원에 3개월 입원했다가 평생 고질이 된 허리와, 보람도 없고 의미도 없이 시간을 낭비해버린 허망함뿐이었다.
그러나 요즈음 가로 늦게 보훈처가 주는 30만 원 가까운 참전 수당을 매월 받으면서 호국 보훈의 이름은 터무니없이 부끄럽지만 늘그막에 이만큼의 용돈이 생긴다는 사실은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다.
흔히들 우리 늙은이들은 ”요즘 군대는 군대도 아니다. 기합도 없고 언어폭력도 없고, 복무 기간도 1년 조금 남짓하고, 사병들이 휴대폰도 가질 수 있고, 새 정부는 사병에게 200만 원씩 월급도 준다더라. 이래서 전쟁이 터지면 소대장이 돌격 앞으로! 해도 누가 뛰어나가겠는가?“라고 걱정한다. 나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꼰대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군대 이야기는 남자들의 술 안주일 뿐 안보의식은 희미해졌다.
군부대는 혐오시설이 되어 도시에서 쫓겨 산간으로 이전되고, 연평도가 공격당했을 때 정부와 국민은 증시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지는 않았는가? 천안함이 피침되었을 때 좌파 정치인들은 북한의 짓이 아니라고 극구 변호하였다.
누가 적인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위험한 법이다.
군의 사기는 존재를 인정받을 때 높아진다. 그러나 문xx 정권은 장군들을 모아 놓고 "북은 적이 아니다"라고 교육하고, 그들 패거리는 군을 민중과 대립되는 평화의 걸림돌로 비하하여 장단을 맞췄다. 군의 사기와 군기가 온전할 수 있겠는가.
세월이 흘러 늙은이가 된 지금도 나는 가끔 군대 시절의 꿈을 꾼다. 맞은 엉덩이의 상처가 덧나서 서울로 외출을 나갈 때 버스 좌석에 앉지도 못한 채 청평에서 청량리까지 서서 가던 일 등 그저그런 꿈이다.
그러나 군 시절을 악몽으로 여기는 나지만 만약에 적이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다시 침범한다면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전선에 가고자 한다. 쓸모없이 거치적대기만 할 뿐이겠지만 취사반 부엌데기라도 되어 국토 수호의 밀알이 되고 싶은 것이 나의 애국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