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외모를 지닌 사문, 아난
석가모니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많이 듣고 기억하여
그 육성을 우리에게 전해준 주역은
십대 제자 중에서 아난 존자라는 데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가슴엔 진리 추구의 그 배움에
대한 열기가 활활 타올랐을 뿐더러
기억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 때까지 그 곁에서 끝까지
시중을 든 석가모니의 사랑스러운 제자였다.
아난은 석가모니의
사촌 동생으로
곡반왕(斛飯王)의 아들이었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 사이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않는다.
감로반왕(甘露飯王)이라는 설도 있으며,
백반왕(白飯王)이라고 밝히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얘기의 전개상 곡반왕의 아들로 해 두겠다.
그는 싯타르타가
아직 정각을 성취하기 전에 태어났던 모양인데,
그의 아버지 곡반왕은
그 출생 사실을 사자를 시켜
싯타르타 태자의 아버지인 정반왕에게 알렸다.
정반왕은 그 말을 듣고는 '오늘은 대길(大吉)하도다.
바로 환희로운 날이구나.
그 아들의 이름은 마땅히 아난다(Ananda)라고 해야 하리라'라면서 기뻐한다.
아난다란 바로 기쁨, 환희를 뜻한다.
그가 태어나서 기쁘니 그의 이름을
기쁨을 뜻하는 '아난다'란 한 것이다.
환희(歡喜), 경희(慶喜)는 그 의역이며
아난(阿難)은 음역이다.
아난은 싯타르타가
깨달음을 이룬 후 붓다가 되어
고향인 카필라성으로 돌아왔을 때 출가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8세였지만
석가족의 자연스러운 출가 분위기에
따라 사촌들과 더불어
석가모니의 교단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그는 생김새가 굉장히 출중한 미남이었다.
얼굴은 둥근 달과 같고 눈은 푸른 연꽃과 같았다.
몸은 밝게 빛나 마치 맑은 거울과 같았다고 한다.
이렇게 뛰어난 외모를 지닌 탓으로
그는 많은 여인들로부터 유혹을 받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예화가 『마등녀경(眄女經)』에 잘 나타난다.
어느날 아난이 걸식을 하러
물가를 지나가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물을 길러 나온 젊은 여인이
아난을 힐긋 보는 순간 사지가
얼어붙는 듯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서
식음을 전폐하고 알아누었다.
상사병이 걸린 것이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그녀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러면서 아난을 남편으로 삼지 않고서는
한 시도 살 수 없노라고 어거지를 쓰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어미 마등가가
아난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올리자 그의 딸은 뛸듯이 기뻐한다.
마등가는 현재 자신의 딸이 스님을 보고
서 사랑에 빠져 누워 있으니
제발 딸의 소원좀 들어달라고 간청했다.
들어주니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엄포까지 놓아가면서.
그러나 아난은 자신은 출가
사문이기 때문에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노라고 거절하면서
위기의 순간에서 간신히 벗어난다.
여성의 출가를 강력하게 천거하다
이러한 아난에게 불교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몇 가지 일이 벌어진다.
첫째 부처님의 시자로서
그 인류의 스승이 열반에 들 때까지
보필한 일이요
둘째, 여인의 출가를 부처님께 간청하여 받아 낸 일,
그리고 경전 결집(結集)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일이다.
부처님은 정각을 성취한 후
오랜 세월 동안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활해 나갔으나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리고 점차 교단의 조직이 커지자
그를 옆에서 보좌할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시자(侍者)라 한다.
여러 제자들은 그 시중을
들 적격자로서 아난을 천거한다.
그러자 그는 세 가지 조건을 들어서
시자직을 수락한다.
먼저 부처님께 보시된 옷이나
음식을 저에게 나누어 줘서는 안 되며,
제가 받은 보시물을 부처님께 올리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
둘째. 부처님을 뵈러 온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거쳐 당신 앞으로
인도하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부재시에
하신 법문은 나중에 다시 들려 주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인
아난은 그 뒤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그날까지 20여년 동안
부처님을 곁에서 극진히 모시게 된다.
그렇게 부처님을 곁에서 모시다보니
그는 부처님 말씀을 빠짐없이 듣는다.
아니 어쩌면 그는 부처님의 말씀을
모조리 듣기 위하여 시자직을 허락한 듯
그 설법을 듣는 데서는 가히
삼매에 경지에 오를 정도다.
등창히 나서 그 종기가 난 부분에
메스를 가했을 때도 부처님
설법을 들려주자 그는 거의 아픔을 몰랐다고 한다.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는
그의 별명은 이렇게 부처님 법문을
가장 많이 들었을 뿐더러
그 법문을 듣는데서 진정한 기쁨을 느낀데서 붙여진 것이다.
성격이 다감다감한
그는 인간이 불성을 지닌 이상
남녀 간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강한 신념에서 여성의 출가를
부처님께 간청한다.
이는 여성을 하챦게 여기던
당시의 인도적 시대 상황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아난은 세 번씩이나
부처님께 여성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는데,
놀라운 일은 유비가 제갈공명을
정치 군사 고문으로 모시고자
감행한 삼고 초려의 과정마저
뛰어넘는 네 번째 부탁 끝에 허락을 받아냈다는 사실이다.
그 정경을 그려보면 이렇다.
석가모니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왕자 시절의 싯타르타를
길러냈을 뿐더러 당신의 부친인
정반왕을 극진히 모셨다.
정반왕 사후 석가모니가
카필라성의 니그로다 정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녀는 불문에 귀의하고자 찾아왔으나
그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 부처님은 카필라성을 떠나
바이샬리로 그 거처를 옮겼다.
마하파자파티는 이에 굴하지 않고
머리를 깎고 누더기를 걸친 채
맨반로 부처님 뒤를 따라다닌다.
발은 돌부리에 채어 피가 흘렀다.
그렇게 그녀가 부처님이 머물고
있는 바이샬리로 오자 아난이 그
처절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마하파자파티는 아난에게
자신을 비롯해 여성을 출가를
부처님께 말해 달라고 애걸했다.
아난은 그 말을 듣고 세 번씩이나
부처님께 여성의 출가를 간청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부처님께 다시 묻는다.
'세존이시여,
만일 여성일지라도 출가하여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한다면
수행을 성과(聖果)를 이룰 수 있습니까?
드디어 부처님은 침묵을 깬다.
'그렇다. 아난아.
여인도 법에 귀의하여 지성으로
수행하면 성과를 얻을 수 있느니라.'
이렇게 하여 아난은
부처님으로부터 파하파자파티의 출가를 허락받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교단의 질서를 위하여 여성 출가자들은
따로 여덟 가지 계를 더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비구니 팔경계(八敬戒)라 한다.
현재로서는 이 계율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진 않지만 이렇게 해서
여성의 출가가 허락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여성 출가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독일의 불교학자 폴커 초츠(Volker zotz)는 이를 두고
여성들이 너무 많이
부처님의 비호 아래 속세의 억압을 버리고 떠난다면
'부처님 교단의' 전체 운동에 대해
공적인 반대가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와,
비구 공동체는 같은 소속의 여성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유혹으로
여겨졌을 것이라는 몇 가지 이유를 설득력 있게 거론하고 있다.
경전 편찬 과정에서 벌어졌던 아난다와 마하가섭의 갈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난의 가장 뛰어난 공적은
경전을 편찬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부처님 열반후 교단의 통솔자가
없어지자,
교단에 혼란이 임에 따라
교법을 통일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난다.
그래서 여러 갈래도 분산된
수행승들 중에서 대표자를 모아서
그 각사람들이 기억한 교법을 표현하게 한 다음,
그 교의를 통일시키려는 편집회의를
열어 교의의 산실을 막고 교권을 확고하게 확립시키게 된다.
이것을 결집(結集)이라 한다.
마하가섭이 주도하는 그
경전 편찬 모임에서 아난은
가장 중요한 부처님 말씀을
외워 보인 뒤 거기에 참가한
500나한들의 지지를 받고
정식으로 경(sutra)을 성립시키는
주역으로 등장한다.
오늘날 경전의 첫머리에
상용구처럼 따라 다니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라는
말은 바로 아난이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그 말씀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경전 편집
과정에서 애초에 마하가섭으로부터
신임을 받지못해 거기에 참가하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는
참담한 운명에 처하고 만다.
그 애기인 즉슨 이렇다.
부처님 열반후 마하가섭과
나머지 제자들은 다비를 마친 후에
왕사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난은 그곳에 남아 남아
7일간 붓다의 사리에 공양하고
기원정사에 들러 불적에에 절한 후
최후의 공양을 하고 왕사성으로 갔다.
그러나 아난이 그 경전 편찬 모임에
참여하려고 하자 마하가섭은
다섯 가지 죄목을 들어 그를
책망하고는 편찬 장소인 칠엽굴
출입을 금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난은
어떤 죄를 지었길래 경전
결집 장소에 참여하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난 비운을 겪은 것일까.
그 죄목 하나하나를 나열해 보자.
첫째 여인을 출가시켜 정법을 500년이나 감퇴시킨 일,
둘째 부처님의 승가리(僧伽梨)를 갤 때 발로 밟은 일,
셋째 부처님 입멸전 물을 찾으실 때 바로 드리지 않은 일,
넷째 부처님께 수명 연장을 청하여 이 땅에 더 머무르지 못하게 한 일,
다섯째 부처님 입멸후
음장상(陰藏像)을 여인에게 보인 일이다.
이 밖에도 소소계(小小戒)가 무엇인지 자세히 묻지 않은 일,
불멸후 여인을 막지 않아
불족(佛足)을 눈물로 더럽힌 일(『사분율』의 6죄)도 거론하는 경전도 있다.
사실 이것이 아난이 번뇌를 끊지못한 증거며 죄라면
어느 누구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갈 것이다.
어떤 근거에서 여인이 출가하여
불법이 500년 후퇴했다고 하는가.
게다가 소소계의 문제도
사실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사소한 계는 버려도 좋다는
부처님 말씀에 아난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여쭈어보지
않았다는 것에서 기인하는데,
그렇다면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그 수많은
계율 조항을 묻고 답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물을 제때 드리지 못했거나
부처님 수명 연장 등 시자직을
충실히 이행해 내지 못했다는
마하가섭의 아난에 대한 비난은
지극히 사소하며,
상식 밖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아난은 파하파자파티의 출가를
허락받아 여성 출가의 문을 열어 놓는데,
사실 마하가섭은 아난의 이러한 행동이 못마땅했으며,
그 결과 마하가섭은 비구니들로부터
좋지않은 평가를 받는다.
경전 속에서 묘사된 그 밑그림을 떠올려 보자.
어느날 아난은 가섭과 함께
왕사성으로 걸식을 나가던 도중 때가
너무 일러 비구니 정사에 들르자
비구니들이 이들에게 자리를 마련하여
법을 청했다.
마하가섭이 법상에
올라 설법을 하는데 한
비구니 왈, '가섭이 아난 앞에서
설법하는 것은 마치 바늘 파는 애가
바늘을 만드는 집에 찾아가서
바늘을 팔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비웃는다 (잡아함 권41).
이 일이 있고 난 직후인지
모르지만 아난이 또 가섭에게
설법하기 위해 비구니 처소로 가자고
권유하자 가섭은 '너 혼자 가라,
너는 참 바쁜 모양이로구나'하며 언잖은 투로 말하는 구절도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난다.
마하가섭이 아난에게
'자네는 아직도 미숙하다'고
책망하자 아난다는 '가섭 존자이시여,
나의 머리카락도 이제는
잿빛이 되었는데 아직도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행동을
금해 주시오'라고 반박했다.
이 대화를 듣던 한 비구니가 말한다.
'전에는 이교도였던 자가
정통 제자인 아난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사실 위의 인용 구절에서
마하가섭이 여성 출가에 노골적으로
반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지만,
시종일관 비구니들의 가섭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비구니를
싫어하는 그의 언행에서 그가
여성 출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여성 출가에 대한
불만섞인 감정은 그와 뜻을 같이하는
비구승 전체의 입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대목들에서
아난과 마하가섭은
여성의 출가 문제로 의견 대립이
심했던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거기에다 그 둘 사이의 성격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하가섭이 가부장적이고
권의주의적이며 냉혹할 뿐더러
직관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라면
아난은 모성적이고 다정다감하며
논리적인 성격을 소유자라 볼 수 있다.
마하가섭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전혀 상반된 입장에
처해 있는 아난이 부처님의 사랑을 받고
그 곁에서 시중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드디어 부처님 사후 그는
노골적으로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토로한다.
그리고 아난의 굴복을 받아낸 뒤
그를 경전 편집에 참여시키게 된다.
물론 경전상에는 아난의 번뇌를
모두 없앤뒤 경전 편집에 참여하였다고
적고 있지만 말이다.
석가모니의 사랑스러운 제자
그러나 아난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시기 전까지
그의 가장 사랑하는 애제자였음은 분명하다.
아난이 부처님의 열반이
다가왔음을 알고 흐느껴 울자
당신께서는 조용히 말한다.
'아난아, 슬퍼하지 마라,
탄식하지 마라.
내 언제나 가르치지 않았더냐.
사랑하는 모든 것과 언젠가는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생겨난 것은 모두 사멸되지 않을 수 없다.
아난아,
그대는 오랫동안 내 시자로서
지극하게 시봉해 주었다.
그것은 참 훌륭한 일이었다.
이제부터는 더욱 정진하여
하루 빨리 궁극의 목표를 실현하도록 하라.
아난아,
혹 너희가 '스승의 말씀은 끝났다.
우리의 스승은 이제 안 계신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난아,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아난아,
내가 설하고 가르친
교법과 계율은
내가 죽은 뒤에도
그들의 스승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아난 존자,
그는 아무도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
줄 것을 부처님께 간청한 사실로
보건대 그와 부처님 사이에는
격이 없는 대화가 오고갈 정도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 자리에서 아난이 옳고
마하가섭이 나쁘다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마하가섭은 그 나름대로의
누구도 갖지 못한 이심전심의
직관적 투시력과 카리스마적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면
아난은 논리적으로 이치를
추구해 나가는 합리적 판단력과
남에게 봉사하는 동체 대비적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한 삼존불 형식 중
마하가섭과 아난 존자가
양 협시로 등장하는 양식이
있을 정도로 마하가섭과 아난이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막중하기 그지없다.
석가모니의 십대 제자상에서나
여러 후불 탱화에서 아난은 머리를
단아하게 깎은 젊고 용모가
바른 비구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마하가섭은 그 좌측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얼굴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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