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위로의 종착지 》
살후 2:16~17
〈 더 힘든 사람을 보고 위로 받기 〉
“의찬아, 나는 너를 보고 위로를 받는다!”
고등학교 동기 중 ‘베프’이고 ‘절친’인 친구가 수년 전 나에게 직접 한 말입니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기분이 묘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말해도 돼?’ 하는 의아함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면전에서 맞받아칠 수도 없어서, “그래, 그렇게라도 위로를 받아라!” 했습니다.
그 친구의 가정사는 여러모로 비극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하여간 평범하지 못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을 겪었습니다.
매우 불우한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꿋꿋이 살아가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저를 보고 위로받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고등학교 시절 제법 잘 나가던 친구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는데, 둘 다 농인입니다.
자녀가 농인이라는 것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게다가 둘째인 농아 아들은,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아들을 잃고, 딸을 농아인끼리 결혼시켜서 두 손주를 보았는데, 이혼했습니다.
지금은 딸과 함께 두 손주를 돌보면서 살아가는 ‘목사’가 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제가 처한 조건이나, 친구의 조건이나 오십보백보인 듯 보입니다.
그런데 친구가 저에게 한 말입니다. “의찬아, 나는 너를 보고 위로를 받는다!”
속으로는 기분이 형언할 수 없으리만치 야릇했지만 그 자리에서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 나를 보고, 그렇게라도, 위로를 받는다하니 다행이다!”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서 서로를 기대고 있었는데, 친구가 솔직하게 말 해 준 것입니다.
수년 전 그 말을 들은 이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 위로를 받는 것이 확실하구나~’
☞ ‘그러면 나는,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찾아서 위로를 받아야 할까?’
☞ 저는 저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 삼성 이병철 회장을 통하여 위로를? 〉
누구나 힘이 들면, 본능적으로 위로를 찾아나섭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위로가 어디 없나 찾아나섭니다.
저도 목마른 사슴이었습니다. 위로가 시급한 사슴이었습니다.
저는 어디서 위로를 찾아냈을까요?
딸이 사위와 별거하는 중에 이혼소송이 제기되었습니다.
기구한 처지도 그렇거니와, 목사의 딸이 이혼소송이라니,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겨우겨우 힘을 내어 목회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마음을 두었던 삼성 창업가 이병철회장의 하나님에 대한 질문 24가지입니다.
그 질문에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답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습니다.
그 일이라면, 딸의 이혼소송 중이라도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답하는 책을 내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도 읽고, 관련 서적을 탐독했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서는 이미 6~7권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 책들을 모두 구하여 읽었습니다.
‘이미 답변서가 나왔음에도 내가 또 한 권을 보태야 할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럼에도 내가 책을 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기존의 답변서와 분명히 차별화한 책으로 내기 위하여 필요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병철 회장의 일대기를 섭렵했습니다.
‘도대체 “천하의 이병철 회장”이 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했단 말인가?’
‘이병철 회장의 삶이 어땠기에 하나님을 찾았을까?’ 이것이 궁금했습니다.
이 회장을 긍정하는 책뿐 아니라 부정하는 책도 구해서 읽었습니다.
이 회장 삶의 궤적을 어느 정도 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책이 되지 못합니다.
열심히 자료와 씨름하던 어느 날, 뇌리에 전광석화같이 스치고 가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나, 황의찬 목사보다 훨씬 힘들었겠다!”
“그렇게 힘이 들었으니,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제가 자료를 탐독하며 찾아낸 것입니다. “그는 나보다 더 힘들었다!”
☞ 그렇다면 내가 책을 쓸 수가 있겠다. 그래서 나온 책이 [이병철의 하나님]입니다.
〈 전주대학교 설립자 강홍모 목사 〉
2020년 6월에 딸은 이혼 확정판결을 받았습니다.
일년쯤 지나 2021년 5월에 [삼성창업가 이병철의 하나님]이 출간되었습니다.
책의 반응은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 그 무렵, 고등학교 시절 은사 목사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전주에는 전주대학교가 있습니다.
전주비전대학교, 전주영생고등학교, 전주대사대부설고등학교 등 4개 학교가 있습니다.
제가 전주영생고등학교 출신입니다. 은사님은 저의 고교시절 교목이셨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그 동안 제가 펴낸 책을 모두 읽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병철의 하나님]까지 모두 여섯권이 있었는데 다 읽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 개 학교 설립자 강홍모 목사님에 대한 책을 황 목사가 썼으면 좋겠네…”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3년 내내 강홍모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매주 월요일 첫시간, 전교생 채플에서 설립자 강홍모 목사님이 주로 설교하셨습니다.
설교는 많이 들었지만, 그 분의 다른 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습니다.
저에게 책을 쓰라하셨지만, 그래서 처음에는 고사했습니다.
그러나 은사 목사님의 권유는 중도에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자료 조사를 해 보고 답을 올리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료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강홍모 목사님은 전북도청 공무원으로 계시다가 1952년에 학교를 세우기 시작합니다.
맨 처음에는 야간 중학교를 시작하고 점차 고등학교, 대학교, 전문학교를 설립하십니다.
종합대학교 1개, 전문대학 1개, 고등학교, 여자고등학교를 번듯하게 세웠습니다.
그리고 1984년, 학원사업에 투신 하신지 32년 만에 거짓말처럼 학교를 송두리째 뺏깁니다.
단 한 푼도 받지 못하고, 4개 학교를 당시 신동아학원 최순영회장에게 넘겨야 했습니다.
이 과정이 의혹에 쌓였습니다. 베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정치적 배경이 없을 리 없습니다.
1984년 전두환을 등에 없고 학교를 인수한 최순영은 설립자 강홍모 지우기를 시도합니다.
그 결과 전주대학교를 비롯한 네 개 학교 관계자 모두 1984년 비사를 말하지 못합니다.
자료 조사를 하면서, “이것은 세상에 밝혀야지!” 하는 저자로서의 욕구도 있었지만,
☞ 책을 내기로 한 결정적 계기는 “강홍모 목사님은 나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였습니다.
〈 나보다 더 힘든 사람 둘 〉
제가 펴낸 책 중에서 특정 인물의 전기를 다룬 책은 2권입니다.
[삼성 창업가 이병철의 하나님] [너 알아? 전주대학교-설립자 강홍모 행전]입니다.
제가 이 두 권의 책을 낸 이유는 단순하지 않지만, 공통점은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님, ‘나 황의찬 목사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았다.’”
“강홍모 목사님도 ‘나 황의찬 목사보다 훨씬 더 힘든 인생을 사셨다.’”
오늘 설교 본문을 보겠습니다.
(16~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6절에서 한 번, 17절에서 한 번, “위로”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하나님의 위로를 늘 체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의 위로는 어떤 것일까?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위로하실까?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늘 느낄 수 있을까?
그래서 위로를 주제로 설교 해야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위로의 뜻은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입니다.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 따뜻한 말을 해 주는 것, 위로입니다.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 따뜻한 행동으로 괴로움을 나눠주는 것, 위로입니다.
☞ 그러나 삶에서 보다 근본적으로 내가 위로받을 때는 언제입니까?
☞ 실제 우리가 위로받는 것은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음을 확인함으로써”입니다.
제 친구는 저를 보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는요?
삼성 이병철 회장, 전주대학교 설립자 강홍모 목사님을 보면서 위로 받았습니다.
☞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볼 때, 위로를 받습니다.
〈 위로의 순환 〉
‘삼성 이병철 회장’ 하면 대한민국 재벌의 원조입니다.
그의 삶을 통하여 황의찬 목사가 위로를 받았다고 지금 고백하는 중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위로는 이렇게 순환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아무리 돈많은 재벌이라도 깊이 들여다보면, “나보다 더 힘들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깊은 이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책이 세상에 있습니다.
“너보다 행복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너보다 더 힘들게 살고 있으니 위로받아라!”
[이병철의 하나님] [너 알아? 전주대학교] 이 두 권은 독자를 위로하는 책입니다.
책을 읽으면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나를 위로해 줍니다.
☞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위로 받고 있다는 것, 하나님은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16절에서는 “영원한 위로”라는 표현을 쓰면서 강조합니다.
우리가 성경책을 읽을 때,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찬송할 때, 위로를 받게 됩니다. 찬송가 곡조는 수많은 이들을 위로합니다.
예배할 때도 우리는 풍성한 위로를 받습니다. 할렐루야~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서 위로받는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심으로써 위로하시고,
섭리와 경륜으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서 위로받는다’는 것을 매우 잘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위로하실까요?
☞ 하나님은 친히 우리보다 못한 자리로 내려가십니다.
☞ 저의 고딩 친구보다, 황의찬 목사보다, 이병철 회장보다, 강홍모 목사님보다 더 아래로~
☞ 더 깊이 내려가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어떻게요?
☞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 십자가 죽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죽음입니다. 주님이 거기까지 내려가십니다.
〈 위로의 종착지 〉
“위로는 그 사람 아래로 내려가서 그 사람을 위로 떠밀어 올려 세워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상 모든 사람보다 더 비천한 곳으로 몸소 내려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음부’에까지 내려가십니다.
죽은 자들이 가는 곳 ‘음부’ -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습니다. 거기까지 가셨습니다.
왜요? 세상에서 힘들게 사는 이들, “예수님이 그 밑에서 떠밀어 올려주시려고!” 할렐루야~
제 친구가 저를 보고 위로 받았습니다. 저는 이병철, 강홍모 바라보고 위로 받았습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 강홍모 목사는 어디서 위로를 받았을까요?
이 두 분이 “영원한 위로”를 받았을까요?
강홍모 목사님은 학교를 빼앗기고 18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 삶이 어떠했을까요?
강홍모 목사님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위로” 받았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24가지 질문하고 안타깝게도 한달 지나 사망했습니다.
저를 보면서 위로 받은 그 친구에게 권면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라!”
주님을 바라볼 때 “영원한 위로”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위로의 종착지”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설교제목을 정했겠습니까?
위로라고 해서 다같은 위로가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위로”가 있습니다.
이 영원한 위로는 어떤 위로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위로의 끝은 무엇입니까?
내가 받은 위로가 온전한 위로, 완전한 위로가 되어야 하지않겠습니까?
10년, 20년 위로받는 것으로 인생이 끝나지 않습니다.
80년, 90년, 100년 위로를 받아야 하지않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죽어서도 위로를 받아야 비로소 위로의 완성, 영원한 위로입니다.
영원한 위로, 그것은 곧 구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누리는 위로의 종착지는 다름아닌 “구원”입니다.
☞ 위로는 구원으로 결실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 이것이 위로의 완성, 위로의 종착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영원한 위로, 구원을 받으라!”
오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은 구원의 종착지, 구원에 도착한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