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보수와 진보라는 낱말이 나오지만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과 같은 사상의 의미는 담지 않았습니다.
보수라는 같은 글자의 다른 뜻을 가진 낱말이
보수(報酬), 보수(補修), 보수(報讐) 등 3가지가 나오는데 보수(保守)의 의미를 가진 글자는 없습니다.
보수(報酬)는 개역한글에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의 생질이나 어찌 공으로 내 일만 하겠느냐
무엇이 네 보수(報酬)겠느냐 내게 고하라는 말씀에 처음 등장합니다.
여기서 보수는 품삯, 곧 일한 댓가를 의미하며
민18:31절과 , 겔29:18절과, 겔29:20절에 나오며, 개역개정에서 롬4:4절에 나옵니다.
로마서 4:4절에 나오는 보수((報酬)를 개역한글에서는 빚이라고 번역하였는데
문맥상 삯에 해당함으로 빚 대신 의역해서 보수로 번역해도 무방하며
대부분 영역은 원문을 debt, 빚이라고 영역하였습니다.
헬라어 원문의 오페일레마는 "빚"이라는 의미인데
주인이 일하는 자에게 반드시 갚아야 하는 빚, 곧 품삯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일의 댓가로 받는 품삯이 아니라
일을 하지 않는 자가 받는 믿음의 의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4:4-8)
이 말씀에서 일하지 않고 받는 것이 은혜요,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믿음의 의는 삯으로 받는 빚(X),보수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믿음의 의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서 "보수"이므로
은혜를 갚아야 하는 의미에서의 "빚"은 일한 자에게 반드시 주어야 하는 주인은 채무자입니다.
여기에서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일꾼을 쓰는 사용자입니다.
그리고 개역한글의 보수(報讐)를 개역개정은 물론 대부분의 역본에서 복수나 보복으로 번역하였는데
사전적 의미는 복수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관점에서는 복수(復讐)가 아닌
보수(報讐)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보수(報讐)는 "합당한 갚음", "좋은 일로 되갚음"이라는 긍정적 의미이지만
복수(復讐)는 원수를 앙갚는 설욕이라는 죄성의 충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해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해는 그 뉘앙스가 완전히 다르며
복수, 보복이라는 인간의 잔인한 포학성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보응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개역한글)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라는 말씀을
(개역개정)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시94:1)라고 읽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시선의 불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수와 빛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인자와 긍휼을 내포한 긍정의 시선을 갖게 하지만
복수와 빛은 하나님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오해를 일으키게 하는 오역의 불편한 진실은
마치 사람을 개자식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뉘앙스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보수는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담아내지만
복수는 인간의 포학한 죄성을 나타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보수(補修)는건물이나 시설 따위의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치는 것으로
성전의 퇴락한 곳을 수리하거나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진보(進步)에 관한 말씀은 개역한글에서 복음의 진보와 믿음의 진보,
그리고 너, 곧 디모데의 진보에 대해서 말씀하였습니다.
성경의 진보(進步)는
낱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전진을 의미하며 발전과 성장과 성숙의 의미를 포함하지만
인본주의적인 변화와 혁신, 그리고 개혁의 의미는 아닙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빌1:25-26)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딤전4:15-16)
분명한 것은 성경의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가치는 성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성경의 진실 앞에 신본적 올바른 이해와 인본주의적 오해만 있을 뿐입니다.
인본주의적 개혁과 혁신은
종교다원주의 함정이요, 올무며 , 그 덫입니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적 영성의 세계는
성경의 진실 앞에 선 그 남은 자의 그루터기 마저 희롱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진실한 이해는
역본의 차이와 글자의 오류, 그 한계를 뛰어넘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보수와 진보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문득 우리 나라의 보수와 진보의 이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최근 보수(保守)와 진보(進步)의 아름다운 가치는
수구 꼴통과 좌뻘이라는 퇴색된 의미로 흡착되어 패당과 붕당 정치의 복마전이 되었습니다.
보수는 앵벌이가 되었고 진보는 좌좀이 된 망국병은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지키지 못한 정치와 언론과 학자의 책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수의 적폐와 진보의 극좌 행보는
혁신과 개혁의 점진적인 균형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광란과 혁명이라는 시대악을 낳았습니다.
보수의 성찰과 진보의 성찰이라는 이성적 판단의 한계를 거부한 시대의 병폐는
보수(補修)하지 못하고 복수(復讐)하는 적화지대의 적폐청산이라는 괴악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보수(保守)의 성찰은 앵버리 보수의 적폐라는 말이 말해주듯
보수(保守)의 가치, 그 마지노선마저 무너졌습니다.
보수의 적폐 현상은 보수 정권과 정치와 언론의 궤멸로 이어졌고.....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민초의 풀뿌리만 남았습니다.
태극기 물결의 애국 운동은보수 정권과 정치와 언론의 궤멸 위에 남은 자의 그루터기로
이 땅을 지키고자 하는 민초의 저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앵벌이 보수의 정치적 이합집산은
보수의 적폐를 쌓는 모래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뛰어든 앵벌이 보수의 불나방들......
보수의 옷을 입은 얼치기들의 품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로 보수우파의 잡동사니들......
정치적 시정잡배의 저급한 집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상한 지성으로 뛰어든 애국의 불나방들.....
지성과 애국적 보수의 옷을 입었어도 앨벌이 보수의 적폐로 썩은 뿌리의 마른 가지일뿐입니다.
비열한 거리의 앵벌이 품바 타령은
모래성의 복마전을 보수의 유희로 즐기는 적성세력보다 더 못한 열린 무덤의 창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풀뿌리 태극기 애국 시민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농락하고 희롱하고 짓밟는 저들의 악행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보수의 함정이요 올무요, 그 덫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파멸되고 궤멸된 보수의 이념은 앵벌이 보수의 만연한 적폐로
소원의 항구는 보이지 않고 적화의 덫에 걸려 사망의 줄에 옥죄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보수의 가치는 보수의 성찰이라는 기회도 갖지 못하고
파고높은 적화의 함정과 덫에 걸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편 진보는 진보의 가치가 퇴색되어
좌좀의 광란이라는 적화의 무풍지대를 만들었습니다.
국회와 언론과 검찰과 법원 등 적화지대가 되었고......
언론과 방송의 거짓 선동으로 여론몰의 사냥은 부산행 좀비의 세상으로
그 마지노선의 낙동강 전선마저 무너뜨렸습니다.
탄핵정국의 전리품인 대선의 논공행상은
비열한 거리를 즐기는 좌좀들의 축제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우리 사회에서 성경적인 보수(補修)와 그 진보(進步)를 이루지 못하는 곳은
권모술수와 이전투구를 일삼는 시정잡배로 가득한 정치 집단이며
성숙한 상생의 정치를 이루지 못하고 대립과 반목으로 가득한 욕망의 덫을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