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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35) 법은 자유의 굴레인가, 행복을 지키는 안전한 울타리인가?
법은 억압의 사슬 아닌, 모든 인간을 덕으로 이끄는 길잡이
현대 사회에서 법(法)은 더 이상 시민을 보호하는 ‘안전한 울타리’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법적 정서는 신뢰보다는 불신과 냉소에 가깝다. 특히 사법농단 사태와 검찰권의 자의적 오용 사례를 목격하며 국민이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실망을 넘어선 ‘원초적 공포’다. 법이 권력을 쥔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도구로 전락하거나, 특정 대상을 압박하는 서슬 퍼런 칼날이 될 때, 법치주의의 근간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법의 수중에서 가급적 멀리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라는 부정적 태도는 바로 이러한 법적 안정성의 파괴에서 기인한다.
법은 본래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고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다. 그러나 현실의 법은 종종 그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억압의 사슬’로 변질된다. 이러한 시대적 위기 앞에서 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고전적 지혜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그는 법의 타락을 준엄하게 꾸짖으면서도, 법이 인간의 완성을 위해 왜 필수적인지를 ‘이성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논증한다.
법의 정의(定義): 공동선을 향한 이성의 명령
토마스는 법을 단순히 권력자의 변덕이나 힘의 산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법에 대한 고전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법은 공동선을 위해 공동체를 책임지는 자에 의해 공포된 이성의 명령이다.”(I-II,90,4) 이 정의는 법이 법답기 위해 갖추어야 할 네 가지 필수 요소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첫째, 법은 ‘이성의 명령(rationis ordinatio)’이어야 한다. 법은 인간 행위의 ‘규칙과 척도(regula et mensura)’이며, 인간을 목적지로 이끄는 것은 이성의 고유한 임무다.
둘째, 법의 목적은 ‘공동선(bonum commune)’에 있다. 법은 특정 개인의 사익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행복과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협력과 연대가 없이는 자신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고 문화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도 없다.
셋째, 법은 ‘공동체를 책임지는 권위’에 의해 제정되어야 한다. 사적 개인이 타인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은 법이 될 수 없으며, 오직 공동체의 안녕을 책임지는 합법적 권위자만이 법을 세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법은 반드시 ‘공표(promulgatio)’되어야 한다. 법이 구속력을 갖기 위해서는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에게 그 내용이 명확히 전달되는 절차가 필수적이다. 밀실에서 만들어진 법이나 불투명한 법 집행은 결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왜 인간은 법이 필요한가?
토마스는 보편적인 ‘자연법(lex naturalis)’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한데, 왜 인간이 직접 제정하는 ‘인정법(人定法, lex humana)’이 필요할까? 여기에는 자연법의 ‘실천적 결핍’이라는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자연법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매우 추상적인 제1원리를 제공할 뿐, 구체적인 현실의 갈등을 해결하는 세부 지침을 모두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본성적으로 덕을 향한 성향을 지니고 있으나, 그 완성은 오직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니기에, 특히 악습으로 기울기 쉬운 이들에게는 ‘형벌의 두려움’을 동반한 법적 규율이 필요하다. 그러나 법의 궁극적 목적은 처벌 그 자체가 아니다.
토마스에 따르면, 반항하고 악습으로 기울며 말로는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 이들을, 힘과 공포로라도 악에서 끌어내야 한다. 그들이 악을 중단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삶을 평온하게 하고 또한 그들 자신이 이에 습관을 들여, 처음에는 두려움에서 행하던 것을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행하는 데에 이르고 덕을 지닌 자들이 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I-II,95,1) 즉, 인정법은 인간을 타율적 복종에서 자율적 자유로 인도하는 훈련장이다.
특히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모든 것을 재판관의 결정에 맡기기보다 법으로 명문화하는 것이 더 낫다’(I-II,95,1,ad2)고 주장했다. 이는 현대 ‘법치주의’의 핵심과 닿아 있다. 사실 수많은 개별 사건을 올바르게 판단할 만큼 현명한 재판관을 매번 찾기보다, 지혜로운 소수가 숙고하여 보편적인 법을 만드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
또한 법을 만드는 입법자는 시간적 여유를 두고 미래의 일들을 추상적·냉철하게 숙고하지만, 재판관은 눈앞의 사건을 다루며 급박하게 판단해야 한다.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재판관은 순간의 정념(사랑이나 미움)에 휘둘리기 쉽다. 즉, 법은 개인의 변덕이 아닌 ‘축적된 이성’의 산물로서 사법 권력의 자의성을 방지하는 유일한 보루이다.
그러나 인정법이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본질적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토마스는 성 이시도로(St. Isidorus)의 기준을 빌려, 인정법이 ‘명예롭고 정의로우며 본성에 따라 가능하고 국가의 관습과도 맞으며 때와 장소에 잘 맞고 필연적이며, 유익하고 명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I-II,95,3) 그러나 그는 법이 모든 악습을 금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살인이나 절도처럼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중대한 악습에 집중하는 ‘절제의 원리’를 지킬 때, 법은 비로소 시민의 자발적인 덕행을 돕는 가이드가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법은 인간의 자유를 옥죄는 굴레가 아니라 우리가 목적지인 행복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법적 냉소와 불신은 법이 그 본연의 목적인 공동선과 이성적 질서를 망각했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 결과다. 토마스의 가르침은 법이 단순한 ‘처벌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덕으로 이끄는 길잡이’여야 함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법은 사람을 가두는 창살이 아니라, 인간이 목적지인 행복을 향해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보호막이 되어야 한다. 물론 법은 우리 모두를 단숨에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장치가 아니다. 다만 타인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함으로써, 각자가 성숙한 삶과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신뢰의 토대이다. 정당한 법은 자유의 적이 아니라, 인간이 그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뿌리내리고 꽃피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튼튼한 울타리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29) 과도함도 부족함도 없는 중용을 통한 행복 추구
AI시대 ‘열광과 공포’ 갈림길… 현명한 제3의 길은 ‘중용’에 있다
전 세계가 생성형 인공지능(AI)에 대해 열광하고 있다.특히 미국 소비자 기술협회가 주관한 ‘2026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는 피지컬-AI를 대표하는 로봇들이 인간과 매우 유사한 동작이나, 오히려 인간을 능가하는 다양한 능력을 선보여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지난 12개월간 벌어진 변화는 과거 한 세대가 겪었던 변혁에 맞먹는다. 기술이 예측을 추월했고, 투자 시장에 전례 없는 자금이 몰려들며, AI 혁명은 ‘가능성’에서 ‘현실’이 되었다. 인간들에게 이제 과도한 육체노동이나 반복되는 가사와 돌봄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이렇게 AI를 통해서 대부분의 개인은 자신의 ‘행복’이 증대될 것을 꿈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장밋빛 청사진과 달리 곳곳에서 위태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많은 이를 감탄하게 만들었던 AI의 답변이 ‘환각(hallucination)’이라고 부르는 현상에 자주 빠진다는 보고가 잇달았다. 더욱이 AI와 상담을 지속하던 학생은 그 충고에 따라 자살을 선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AI를 가동하기 위해 필요한 엄청난 전력 수요 때문에 사라져가던 원자력발전소가 다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AI 특수가 버블이라는 의심도 나타나고, AI의 발전으로 많은 이가 일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며, 범용지능(AGI), 초지능(ASI)까지 발전하면 인간이 AI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확산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찬성이나 반대 이외에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을까? 철학에서는 이렇게 제3의 길을 찾기 위한 덕을 ‘중용’이라고 불러왔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
- 지혜를 의인화해 표현한 안드레아 사치의 <신성한 지혜의 알레고리>. 토마스는 중용 개념을 도덕적 덕에만 국한시켰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지성적 덕에도 확대 적용한다. 지성적 덕 중 특히 지혜(sapientia)는 제일 원리, 곧 하느님의 본질과 창조된 세계의 궁극 질서를 실제로 인식하는 덕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중용 개념의 수용과 변형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이론을 적극 수용하여, 이를 새롭게 재구성한다. 우선 토마스에 따르면, 모든 ‘획득된 덕’에 적용되는 어떤 공통적 특징은 그것들이 모두 ‘우리에게 상대적인 중간’, 즉 중용(medium)에서 성립된다는 점이다.(I-II,64,1) 도덕적 덕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이성과 일치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습성’이며, 과도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이성으로부터 멀어질 때 악습(vitium)이 발생한다.
용기를 예로 들면, 두려움이 지나치게 적어 무모해지는 것도, 지나치게 많아 비겁해지는 것도 모두 악습이며, 그 사이에서 상황과 대상, 행위자의 능력에 상응하는 ‘마땅한 정도의 두려움’을 지키는 것이 용기의 중용이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이 중간은 단순히 ‘산술적 평균’이나 ‘미지근함’이 아니라, ‘이성의 중용(medium rationis)’을 의미한다. 무엇이 중용인지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인생 경험이 많고 상황 판단력이 있는 ‘현명(prudentia)’의 덕을 가진 사람이 이 중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추덕으로 대표되는 도덕적 덕들과 중용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절제와 용기 같은 덕들은 정념의 내적 조절을 통해 중용을 이루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 상대적으로 규정되지만, 정의의 덕은 사물과 몫의 객관적 분배에서 중용을 이루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준을 갖는다. “정의 안에서 이성의 중용은, 정의가 더도 덜도 아니고 각자에게 마땅한 것을 주는 한에서, 사물들의 중용과 동일하다.”(I-II,64,2) 이처럼 토마스는 도덕적 덕의 중용을 정념 중심의 주관적 측면과 정의의 객관적 구조를 함께 고려하여 정교하게 구분한다.
중용과 다른 덕들과의 연결
여기서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용의 궁극 판단 기준을 ‘하느님이라는 최종 목적’에 두는 점에서 그 이론을 신학적으로 심화시킨다. 그에 따라 ‘현명’이라는 덕은 단순히 근시안적 실용 이익을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 곧 ‘하느님과의 친교’라는 관점에서 개별 행위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덕이다. 따라서 도덕적 덕의 중용을 판단하는 궁극 기준은 ‘어떤 것이 최종 목적의 달성에 얼마나 필요한가’라는 물음으로 확장된다.
그런데 ‘현명’의 덕은 도덕적 덕들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 예컨대 탐욕과 불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리 계산이 빠르더라도 참된 의미에서의 현명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도덕적 덕 또한 현명 없이 완전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한 덕에서 완전한 중용을 이룰 수 있으려면, 다른 덕들에서도 조화로운 질서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토마스는 덕 개개의 균형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덕의 연결(connexio virtutum)’까지를 강조한다.(I-II,65,1)
지성적 덕으로 확대된 중용
토마스는 중용 개념을 도덕적 덕에만 국한시켰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지성적 덕에도 확대 적용한다. 먼저 지성적 덕의 경우, 토마스는 진리를 지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지성의 지나침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잘못된 긍정’이며, 부족함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부정’이다.(I-II,64,3) 그러므로 지성적 덕의 중용은 AI 시대에 종종 망각되고 있는 ‘사물 자체와의 정확한 일치’를 통해 성취된다. 이는 단지 논리적 형식이나 계산의 올바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정직한 개방성과 수용성을 뜻한다. 특히 지혜(sapientia)는 제일 원리, 곧 하느님의 본질과 창조된 세계의 궁극 질서를 실제로 인식하는 덕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중용은 ‘미지근한 회색지대’가 아니라, 과도함과 부족함을 모두 넘어서, 올바른 이성(현명)과 최종 목적(하느님)에 비추어 가장 정확한 선을 선택하는 덕이다. 이제 각 개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 세계는 인공지능의 시대로 급속하게 진입하고 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도 ‘중용’의 덕이 필요해 보인다. 과도한 열광으로 그것이 가져올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산업혁명 초기에 기계를 파괴하던 러다이트 운동식의 무조건적인 반대도 바람직하지 않다.
토마스에 따르면, 중용은 멈춰있는 상태가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이성이 끊임없이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윤리적 성찰 없이 최대한 빠른 상용화와 이윤 극대화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미 제기된 위험성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해결책들을 모색하며 개발자나 투자자뿐 아니라 실제 사용자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개발하는 길이야말로 ‘중용’의 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27) 지식이 아니라 ‘마음의 지혜’를 통해 도달하는 행복
참된 행복의 문 여는 해법은? AI의 지식 아닌 인간의 지혜
인간이 문자를 발견한 이래, 인류는 꾸준히 지식을 축적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지식의 증가를 무색하게 하는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엄청난 양의 지식을 자체 학습할 수 있는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인간의 지식은 거의 무한대로 증식해 가고 있다.
‘지식은 곧 힘이다’라고 외치며 권력과 행복을 추구하던 인간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 열린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인공지능은 현대판 소피스트이며 지식은 난무하고 지혜는 사라진다’라는 비판도 등장한다. 더 나아가 AI가 가져올 급격한 변화가 ‘인간의 존엄성’마저 위협할 것을 우려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연 축적된 지식이 인간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지혜 차원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지식과 지혜의 대비는 대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적 덕’에 대한 성찰에서 제시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전통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교 지혜의 전통과 융합시킴으로써 훨씬 더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을 수 있을까?
지성적 덕에 관한 철학적 성찰
철학(philosophia)’은 처음부터 ‘지혜에 대한 사랑’을 추구했지만, 지혜를 제1원리들에 대한 인식과 직접 연결시킨 학자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선 단련을 통해 얻어지는 ‘품성적(도덕적) 덕’과 주로 가르침에 의해 얻어지는 ‘지성적 덕’을 구분하고, 지성적 덕을 사변이성의 덕과 실천이성의 덕으로 세분했다. 스콜라 학자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지식(scientia), 이해(intellectus), 지혜(sapientia)라는 사변이성의 덕들과 기예(ars)와 현명(prudentia)이라는 실천이성의 덕을 구분해 활용했다.
토마스는 우선 덕에 대해 논하며 사변이성의 덕들에 집중한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알려지는 진리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덕을 ‘이해’라고 부른다. 백지상태(tabula rasa)에 있던 지성이 이해의 덕에 의해 제1원리들을 파악하면, 지성은 이제 추론적 탐구의 출발점들을 갖추게 된다. 추론을 통해 인간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데, 특정 부류의 대상에 대한 진리를 위한 덕이 ‘지식’(학문)인 반면에, 모든 인간 인식의 제1원리를 인식하기 위한 덕은 ‘지혜’라고 불린다.(I-II,57,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지성적 덕들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지만, 토마스는 이것들은 선을 행하는 한에서가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준비해 주는 한에서 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I-II,57,1)
성령의 선물인 지식과 지혜
그뿐 아니라 토마스는 신앙에 대한 논고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원천을 지닌 ‘성령의 선물’로서의 이해, 지식, 지혜에 대해서 논한다.(II-II,4,8) 이 선물들에 대한 논의는 이사야서 11장 2절(불가타판)에서 유래했고 그리스도교 사상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유한 의미에서 ‘지혜’라고 불려야만 하는 영원하고 신적인 대상들을 지성적으로 파악하는 일과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시간적이고 인간적인 대상들에 대한 추론적인 인식을 구별했다. 토마스는 이러한 이론을 수용해서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선물들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다.(I-II,68,2)
“지식이라는 명칭은 … 일종의 판단의 확실성을 내포한다. 만일 판단의 확실성이 가장 높은 원인을 통해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지혜’라는 특별한 명칭을 가진다. … 그런데 단적으로 가장 높은 원인, 즉 하느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단적으로 ‘지혜로운 이’라고 언급된다. 따라서 신적인 사물들에 대한 인식이 ‘지혜’라고 불린다. … 그래서 지식의 선물은 오직 인간적인 사물들 또는 창조된 사물들에 관한 것이다.”(II-II,9,2)
이렇게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유산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유산을 종합해서 이 세상의 사물에 관한 연구에 필요한 ‘지식’을 능가하는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식을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지혜의 필요성
그렇지만 토마스는 ‘인간의 지식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악덕과 다를 바 없다’던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과 달리 지식에게도 긍정적인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토마스에 따르면, ‘더 높은 것에 의한 판단은 낮은 것에 의한 판단을 대체하거나 압도하지 않는다.’(II-II,120,1,ad2) 토마스는 당대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대표되는 지식을 교만과 호기심이라고 평가절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지식 안에 담겨 있는 근본적인 제한성을 주목하며, 인간의 참행복은 오직 ‘지혜’를 통해 도달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지혜는 지식의 결과물들을 종합하고, 그것들이 지닌 의미를 통찰하는 능력을 제공한다. 따라서, 지혜 없이는 지식이 파편화되거나 제한된 관점에 머물 수 있다. 또한 지혜는 단순히 지식을 ‘통제’하는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삶의 의미나 도덕적 판단에 올바르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가치들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측면에서 철학이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지혜란 이론 차원에 머물며, 참행복의 실현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한계를 지닌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지혜라고 불린 신학과 지혜의 선물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궁극적 목표를 이해하고 추구하는 데 필수적인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방대한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열렸지만, 이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정보의 축적을 넘어 참된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실재를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부분과 전체를 통합하며, 의사결정과 그 결과를 숙고하는 능력”으로서의 ‘마음의 지혜’를 강조했다.
그리고 교황청 인공지능(AI)에 관한 문헌(Antiqua et Nova)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완성도는 그가 가진 정보나 지식량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사랑할 줄 아느냐로 측정”된다. 바로 이 마음의 지혜가 끝없이 발전하는 과학적인 지식들을 인간 중심으로 활용하고, 전인적 발전, 인류의 공동선, 창조질서의 보전을 넘어,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비출 수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24) 분노하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인가?
올바른 이성이 내린 정의로운 판단 따르는 분노는 ‘선’하다
요즘 뉴스에서는 ‘분노’로 인한 이해하기 힘든 범죄들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분노에 차 흉기를 들고 길거리로 나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칼부림을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층간 소음으로 인한 이웃에 대한 분노가 살인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이와 유사한 사태들을 보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함을 하나의 질병으로 보거나, ‘분노는 하나의 결점이기 때문에 덕스러운 삶에 기여할 수 없다’는 일부 윤리학자들의 판단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크게 주목받았던 드라마 <글로리>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학교폭력 가해자들을 찾아가 하나씩 복수할 때 많은 이가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분노는 인간의 행복을 해치는 것인가, 아니면 행복을 위해 긍정적인 면도 지니고 있는 것인가? 분노를 억제하는 것은 언제나 선한가, 아니면 때때로 선한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분노에 관한 이론은 이런 어려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그 안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어느 정도로 분노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도 발견된다.
- 그리스도께서도 성전을 정화할 때 분노하셨다.(마태 21,12-13 참조) 이런 분노는 상처받은 감정에서가 아니라, 정의와 경건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그러나 복수 그 자체를 위해 분노를 사용하면, 많은 악습과 죄를 낳는다. 엘 그레코 <성전을 정화하시는 그리스도>
선과 악을 모두 지향하는 분노의 원인
토마스는 분노를 ‘복수에 대한 욕구(ira est appetitus vindictae)’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분노는 사소한 일보다는 ‘중차대한 것’에서, 곧 어렵고 심각한 악을 경험할 때 일어난다. 분노는 자신이 겪은 상해를 되갚고자 하는 마음의 충동이며, 그 안에는 욕망하고 희망하고 향유했던 선을 옹호하려 하고, 동시에 공격적으로 입은 피해에 대해서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그 악이 갚아 지기를 바라는 이중의 목표가 함께 들어 있다.(I-II,46,2) 그래서 토마스는 “분노는 겪은 고통에서 생겨나고 복수에 이르며 즐김으로 끝난다”(I,81,2)고 말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분노의 원인은 언제나 ‘분노하는 사람을 거슬러 행해진 어떤 악’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거슬러 무엇인가를 하지 않았다면, 또는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
특히 ‘마땅히 있어야 할 존중의 결핍’, 즉 경멸(parvipensio)이 분노를 크게 자극한다. 그래서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이 모멸감을 더 크게 느끼고, 반대로 아주 낮은 사람에게서 모욕을 당할 때 분노가 더욱 격렬해지기도 한다.(I-II,47,4) 예컨대 부자가 가난한 이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감정이 크게 폭발한다. 그러나 가난한 이도 ‘부당한 모멸감’을 당할 때, 얼마든지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다.
분노와 이성 - 동반과 방해
흔히 분노를 ‘이성을 잃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토마스의 관점은 더 세밀하다. 제대로 보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감정이 폭발하기보다 당한 악과 겪게 될 벌을 저울질하는 정확한 비교와 추론이 전제돼야 한다.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분노는 언제나 이성을 동반한다”고 말한다.(I-II,46,4)
그러나 분노가 이성을 동반한다고 해서, 분노가 항상 이성에 복종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토마스는 “분노는 다른 정념들보다 더 명백하게 이성의 판단을 방해한다”(I-II,48,3)고 말한다. 분노는 각자의 기질에 따라 다양하며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몸 전체를 뒤흔들기 때문에, 불(火)에 비교할 수 있다. 분노가 심해지면 피가 끓어오르고, 심장이 빨라지며, 심지어 혀의 움직임까지 방해해서 말을 더듬게 하거나 말문을 막히게 만들 수 있다.(I-II,48,2) 이런 신체적·정신적 동요 때문에 분노는 깊은 사유와 관상, 차분한 판단을 크게 어렵게 만든다.
정당한 분노와 죄가 되는 분노
그런데 토마스는 분노를 무조건 죄로 보지 않는다. 분노는 정의로울 수도 있고 불의할 수도 있다. 오히려 어떤 부당한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복수를 원하기 때문에, 분노는 불의(iniustitia)보다는 정의(iustitia)에 더 가까운 셈이다.(I-II,46,7) 분노가 이성의 적절한 통제 하에서 일어나 ‘정당한 복수’일 경우, 그것은 정의라는 덕의 발로로 여겨진다.
반대로, 분노가 무질서한 복수를 지향할 때 - 법적 질서를 벗어나 사적인 방식으로 응징하려 하거나, 죄를 없애기보다 죄인 자체를 파괴하고 절멸시키려 할 때 - 그것은 죄가 된다. 이런 문제 때문에 토마스는 분노를 칠죄종(七罪宗, 추요죄) 가운데 하나로 보면서, 분노에서 말다툼, 고성, 저주, 폭력 등 여러 악습이 흘러나온다고 분석한다. 분노는 정당하게 다루어질 때 정의를 위해 타오르는 불이 되지만, 방치될 때는 많은 죄악을 낳는 ‘악습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토마스는 불의를 보고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상태도 하나의 악습으로 본다. 그는 정당한 원인에 대해서 그 느낌에 상응하는 움직임의 부재, 곧 처벌하려는 의지의 결핍을 분노의 결핍이라는 악습으로 설명한다. 즉 분노해야 할 자리에 전혀 분노하지 않는 것, 불의 앞에서 무감각한 태도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런 성찰을 바탕으로 토마스는 증오(odium)가 분노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말한다. 증오는 악을 그 자체로서 원하지만, 분노는 ‘정당한 복수라는 선’으로 악을 원하기 때문이다.(I-II,46,6) 분노하는 사람은 적어도 정의의 이름을 내세우고, 그에게 내리는 벌이 어떤 의미에서는 공동선을 위한 것일 수 있다. 반면 증오는 상대에게 그 어떤 선도 바라지 않고 악을 그 자체로 원하므로, 분노보다 훨씬 사악한 정념이다.
토마스는 ‘올바른 이성과 일치되는 정당하고 칭찬할 만한 분노’를 인정한다. 이성에 앞서 선행하여 이성을 어지럽히는 분노는 악하지만, 이성이 내린 정의로운 판단을 따른 후속하는 분노는 선하며 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노는 교회의 선익, 사회 정의, 약자의 보호를 위한 투쟁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성전을 정화할 때 분노하셨다.(마태 21,12-13 참조) 이런 분노는 상처받은 감정에서가 아니라, 정의와 경건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정의와 사랑을 위해 분노를 사용하면, 분노는 덕의 도우미가 된다. 그러나 복수 그 자체를 위해 분노를 사용하면, 분노는 칠죄종으로서 많은 악습과 죄를 낳는다. 신앙인은 분노를 부정하거나 억누르기만 하기보다 자기 안의 분노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정의 감각과 어떤 상처에서 나오는지 살피면서, 그것을 정의와 사랑을 위한 힘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22) 고통과 슬픔, 인간이 피해야만 하는 가장 큰 악(惡)일까?
이웃의 불필요한 고통 없애주는 ‘하느님의 손’ 되어주자
우리는 예기치 못한 질병이나 고통이 다가왔을 때, ‘혹시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고통이 꼭 죄인들만이 아니라, 올바르고 열심히 살아온 이들에게도 닥치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많은 종교인은 ‘하느님이 의인(義人)을 시험하거나 교육하기 위해서도 고통을 내린다’라고 해석한다. 이런 입장은 역사가 매우 길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철학적인 논변의 형태를 갖추며 ‘변신론(辯神論)’으로 발전했다. 근대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악 없이 선이 존재할 수 없고 악을 거쳐 선이 증가되기 때문에 전체의 조화를 위해 악은 불가피하게 허용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모든 고통이야말로 악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는 현대인들에게 터무니없는 것처럼 들릴 뿐이다.
변신론에 대한 거부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더라도, ‘과연 고통과 슬픔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피해야만 하는 가장 큰 악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입장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까?
그 자체로 악인 고통에 대한 정당한 저항
토마스는 고통이 선하거나 악한가를 판단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그 자체로(secundum se)’와 ‘어떤 다른 것을 전제로(ex suppositione alterius)’, 즉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라는 구분을 기준으로 들여온다. 그는 ‘그 자체로’ 바라본다면 ‘모든 고통은 악’이라고 주장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고통을 바라본다면 욕구가 선 안에 머무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마스의 판단은 라이프니츠식의 변신론적 주장들이 설 자리를 없애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입장이 고통을 무조건 없애 버려야만 하는 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는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고통이나 슬픔도 선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악인 고통이 선이 될 수 있는 조건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토마스는 수치스러운 어떤 일이 이미 벌어졌다는 전제 아래 ‘부끄러움’은 선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잘못된 일이 전제되고, 어떤 이가 현존하는 악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한다면 이는 선한 일이다.(I-II,39,1)
- 고통 받는 이들을 만났을 때, 이들을 단순히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구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가 그들의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하느님의 손’이 돼야 한다. 프란치스코 폰테바소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조건에 따라 선도 될 수 있는 고통
토마스는 이런 결론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선하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탐구해 들어간다. 그는 욕구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으로서의 선인 ‘정당한(Honestum) 선’과 사람들이 욕구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길인 ‘유익한(Utile) 선’, 그리고 최종 목적을 즐길 때 느껴지는 ‘편안한(Delectabile) 선’을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을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라는 주장과 연결시켜 보자. 가장 먼저 고통이나 슬픔은 ‘정당한 선’일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토마스는 슬픔도 ‘악에 대한 인식과 거부를 포함하는 한에서’ 정당한 선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육체적 고통의 경우, 위험하고 고통을 일으키는 것을 본성이 피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생명이라는 선을 보존할 수 있다. 또한 내적 슬픔의 경우, 악에 관한 인식은 이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를 거부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면, 슬픔도 ‘정당한 선’이 될 수 있다.(I-II,39,2) 이것을 인정한다면, 두 번째로 고통과 슬픔이 다른 선에 도달하기 위한 ‘유익한 선’이 될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 보인다.
실제로 서구 사상사 안에서 고통에 대해 죄에 대한 처벌, 사회 안정성 유지 등으로 도구적인 유용성을 인정하려는 해석은 끊임없이 지속됐다. 토마스는 여기서도 고통 전체보다는 내적인 고통인 슬픔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우선 죄와 같이 피해야만 하는 악에 대한 슬픔이라면 유용하다. 또한 악은 아니더라도 악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이 세상 사물들이 지닌 일시적 좋음에 대한 슬픔은 유용할 수 있다. 더욱이 피해야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슬픔은 그 악을 피하려는 노력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도 유용하다.(I-II,39,3) 그렇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이 고통과 슬픔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서 ‘어떤 슬픔이나 고통도 인간에게 가장 큰 악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슬픔이나 고통은 진정으로 악인 것에 의해 발생하거나, 실제적으로 선인데 악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의해 발생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그것에 대한 슬픔은 가장 큰 악일 수 없다. 진정으로 악인 것에 대한 슬픔보다 실제적으로 악인 것을 악이라고 판단하지 않음이나 그것을 거부하지 않음이 더 나쁘기 때문이다. 선인데 악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대한 슬픔보다 진정한 선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서 아무런 슬픔조차 느끼지 못할 때 가장 큰 악이 된다.(I-II,39,4)
고통받는 이를 위로할 때 필요한 감수성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고통은 인간이 지닌 초월성을 드러내고, 하느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섭리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무조건 하느님을 옹호하는 것은, 자칫 그들의 솔직한 상태나 표현을 억누르거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2차 가해가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 고통 받는 이가 한탄이나 질문을 통해 표현하는 불확실성과 불평을 함께 마음을 열고 경청하면서 견딜 수 있도록 곁에 머물러 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 그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을 찾아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고통의 심오한 의미가 고통받는 사람들 스스로에 의해 수용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고통의 유용성을 과장해서 미래의 행복을 근거로 인간의 고통을 당사자가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고통이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인간의 유한성에 뿌리를 둔 더 이상 극복될 수 없는 고통’과 ‘인간의 이기심과 악의로 인해 빚어지는 고통’을 구분해야 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만났을 때, 이들을 단순히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구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가 그들의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하느님의 손’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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