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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23) 나팔은 울려야 한다(묵시 8,6-13)
하느님의 심판은 성찰과 회개를 위한 은유
나팔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팔은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전통적 형상이다. 나팔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참혹한 장면은 기어이 등장하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는 요한묵시록의 심판이 징벌이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간절한 초대라는 사실을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다.(6월 1일자 19면) 무서운 심판의 서사라는 다소 거칠고 투박한 방식으로 전개된 하느님의 호소는 일곱 나팔의 이야기 안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나팔이 불릴 때마다 ‘종말이다’, ‘심판이다’라는 건조하고 상투적인 해석으로 하느님의 간절한 호소를 이해하는 건 게으른 것이다.
심판의 서사가 어떻게 묘사되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세심히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지상의 것들이 무너지고 파괴되며, 땅의 삼분의 일이 사라지고 제거되는 장면이 도대체 하느님의 초대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그 심판의 끝, 그러니까 일곱 나팔의 소리가 완전히 울려 퍼졌을 때, 하늘은 왜 여전히 하느님을 찬송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는 것인지(묵시 11,15) 섬세하게 물어야 한다. 요컨대, 심판의 참혹함이 하느님을 만나는 데 왜 필요한 것인지 묻는 일이 일곱 나팔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가 된다.
처음 네 개의 나팔은 땅의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땅에 떨어진 우박과 불, 불타는 큰 산과 바다, 그리고 쓴 물 등이 그렇다. 땅의 것들이 제 모습과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고 하나의 ‘상실’이나 ‘파괴’로 이해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다만, 그 심판은 옛날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재앙과 매우 닮았다. 우박과 불이 땅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이집트 재앙의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탈출 9,24-25 참조)
로지에 반 데르 바이덴 <최후의 심판> 일부. 네 명의 천사가 미카엘 대천사를 둘러싸고 나팔을 불고 있다.
요한묵시록 저자는 ‘피가 섞인 것’으로 우박의 성질을 더욱 섬뜩하게 서술한다. 이집트 재앙 첫 번째에 나타나는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한 장면이나(탈출 7,17 참조) 요엘서 3장 3-4절에서 말하는 주님의 날의 징조를 우박에 접목해 이야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간다.
핏빛의 우박이나 불구덩이가 된 땅의 서술은 요한묵시록이 쓰인 시대로부터 2000여년 전 벌어진 사건의 이야기이지만, 유다 역사 안에서 그리고 요한묵시록이 쓰인 1세기 말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위한 메타포의 한 예로 작용하고 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속 어렵고 힘든 일을 제 삶의 현실을 위한 하나의 메타포로 끌어다 사용했고, 성찰과 회개의 소재로 다루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66년에 발발한 유다 1차 항쟁이었다. 로마에 저항함으로써 유다 민족의 독립과 순수성을 회복하려 했으나 그 결말은 하느님의 자리라 여겨진 예루살렘 성전의 불바다였다.
너무나 참혹한 사건이었고, 그로 인해 절망했으며, 그것으로 세상은 그 끝에 다다랐다고 모두 생각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공관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서술하면서 유다 1차 항쟁의 역사를 끌어온다. 그 역사는 끝장난 역사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시발점으로 해석된다. 불타 무너진 성전을 예수님의 몸으로까지 해석하면서 역사의 고통을 믿음을 향한 다짐으로 어떻게든 바꾸어 내는 것, 그것이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의 땅으로 대변되는 심판에 대한 서사의 기능이다.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의 땅은 역사 속에 벌어지는 참혹한 사건들로 믿음과 삶이 완전히 무너질 때, 그 절망의 무게감에 사람들이 허덕일 때, 강렬한 심판의 형상으로 수없이 호출되지만, 혹독한 그 고통의 기억만큼이나 새로운 희망에 대한 간절함은 배가 된다. 둘째 나팔이 말하는 불타는 큰 산, 셋째 나팔이 불릴 때 나타나는 쓴 물, 넷째 나팔의 어둠 등이 차례로 서술되면서 심판이라 해석되는 여러 서술은 더욱 단단해진다.
그러나 다시 한번 되새기자면,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이 불리는 순간, 그곳은 하늘이다. 구원의 환호가 울리는 하늘, 하느님께 찬미 찬양이 드려지는 하늘. 어쩌면 하늘을 기다리기 위해선 우리가 살아내어야 할, 끝내 통과해야 하는 고통의 삶은 필연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심판의 대상이 ‘삼분의 일’로 규정된다는 점을 살피며 심판의 대상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도드라지게 강조한다. 심판은 전체가 아닌, 부분의 일이라고 안도한다. 모두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부류가 끝장나는 것이라서 믿는 이들은 안심해도 된다는 것. 이런 해석은 뭔가 원시적이고 천박하다. ‘삼분의 일’과 그렇지 않은 ‘삼분의 이’를 갈라놓고 적어도 나는, 우리는 그 ‘삼분의 일’과는 무관하다는 식의 해석은 가소롭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이런 해석을 두둔하며 ‘삼분의 일’의 회개를 주문한다. 심판의 징벌을 통해 속죄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따르라는 이런 주문은 삶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죄다 윤리적, 율법적 일탈로 편협하거나 게으르게 해석한 결과다.
이런 해석에 예수님의 일갈은 긴요한 것이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2) 역사 속에 벌어지는 참혹한 사건들을 심판의 형식으로 다시 복기하는 것은 죄악에 대한 경고나 일탈에 대한 징계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게 아니다. 그 참혹한 사건들이 제삼자의 일이라서 무심한 것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분, 혹은 전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시대 공감의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절망하지 말자. 시대의 아픔에 무감각하게 살지 말자. 저만의 신앙을 지킨다고 이웃과 사회의 슬픔에 눈감지 말자.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는 우리 사회 도처의 아픔을 끊임없이 들추어내고 있다. 나팔이 울리듯, 세상의 고통과 아픔은 더욱더 알려지고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땅의 ‘삼분의 일’과 ‘함께’ 그 고통과 아픔을 살아내어야 한다. ‘삼분의 이’의 무릉도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팔이 모두 울려야 구원은 온다. 나팔의 울림에 귀를 기울여야 구원은 비로소 ‘우리’ 것이 된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75) 예수님이 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던 니코데모
“어느 조그만 별에 어린 왕자가 살았습니다. 왕자님은 장미꽃 한 송이를 정성 들여 기르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별의 사막에서 만난 한 여우가 왕자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사물이 잘 안 보인단 말이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1900~1944)의 소설 「어린 왕자」의 중요한 부분이다. 생텍쥐페리는 프랑스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편안한 생활을 뒤로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군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행방불명되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인간미를 추구했고 「야간 비행」과 「어린 왕자」, 「인간 대지」 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욕심 없이 세상을 바라보아야만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명한 동화 「어린 왕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움과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에 평화와 사랑을 호소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간관계와 욕심으로 인해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순수함을 잃고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며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신앙생활에서도 어린이와 같은 맑은 마음으로 새롭게 눈을 뜨고 세상을 사랑으로 본다면 더 많은 진정한 가치와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 니코데모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최고 의회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다인들의 최고 통치기구였다. 예루살렘 최고 의회(산헤드린)는 대사제와 수석 사제들, 귀족 계급의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 등 모두 71명으로 구성되었다. 니코데모는 사람들 눈을 피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눴다.(요한 3,1-21 참조)
예수님과 니코데모는 알 듯 모를 듯 대화를 이어갔지만 니코데모는 진리를 찾는 사람이었다. 마음과 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체험 후였을 것 같다. 예수님이 수난을 받으실 때도 니코데모는 혼자 용감하게 변호했는데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혼자는 역부족이어서 결국 예수님은 사형을 당한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십자가형 이후 시신을 모셔다가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고 새 무덤에 안장하며 장례를 치렀다. 사형수로 죽은 예수님의 장례를 치렀다는 자체가 의리와 신의를 지키던 인물임을 말해 준다. 예수님의 수난과 처형 당시 제자들이 도망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비교되는 행동이다.
이처럼 니코데모는 강직한 인물이었고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니코데모는 신앙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유다인들 대부분의 군중과 최고 의회의 결정에 사형을 받은 분을, 그것도 최고 의회 의원이 장례를 치른 것은 정말 용감한 행동이었다. 대통령이 퇴임 후 수사를 받을 때 주변 사람들이 거의 모두 떠난 것을 본 적이 있다. 권력은 무상하면서도 비정하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 강림 사건은 사도행전에 소개됩니다. 사도행전은 루카 복음서의 후속 편이라 할 수 있는데요, 사도 1,1에 언급되는 “첫 번째 책”이 바로 루카 복음서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루카 복음서의 맺음말 대목인 예수님의 승천에서부터 시작합니다(1,2). 그리고 오순절에 사도단을 중심으로 교회가 탄생하여 지중해 연안의 전 지역으로 퍼져 나가는 과정을 서술합니다.
사도 1,11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올리브산에서 승천하신 뒤 제자들이 하늘만 보고 서 있자 천사가 나타나 질책합니다. 하늘만 보고 있을 게 아니라, 이제는 그들이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 때 하신 말씀처럼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8절)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실제로 이 순서대로 예루살렘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때 성령 강림 사건이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요, 이를 기점으로 제자들이 두려움을 떨치고 온 세상에 복음 전파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강림 대축일은 교회의 생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이 오순절(五旬節)인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오순절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주간절”(週間節; 신명 16,9-12)과 같은 명절입니다. 주간절은, 파스카 축제가 끝나고 일곱 주간 곧 49일이 지나고 50일째 맞는 명절입니다. 이것이 제2성전기에 들며 ‘오순절’로 호칭이 바뀝니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퍼뜨린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이를 그리스어 [펜테코스테](Πεντηκοστή)라 칭한 까닭입니다. 이 명칭이 우리말 ‘오순절’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성령 강림은 오순절에 사도들이 이층방에 모여 있을 때 일어납니다(사도 2장). 주간절은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 하느님에게서 십계명을 받아온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온 “셋째 달”(탈출 19,1)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첫째 달 중순’(12,2.6)부터 약 50일째 날에 해당합니다. 이런 병행성을 시사하듯, 사도 2,2-3에서는 오순절에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내려앉았다.”라고 묘사합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으로 내려오실 때 우렛소리와 더불어 불 속에서 현현하셨듯 말입니다(탈출 19장). 더구나 모세가 주간절에 십계명을 받은 것처럼, 신약 시대에는 오순절에 사도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말하자면, 성령 강림은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서 백성 가운데 현존하시며 새 백성을 태어나게 하신 사건처럼 묘사된 셈입니다. 바로 교회의 탄생 말입니다. 이렇게 구약 시대 주간절의 의미를 완성한 오순절을 다시 맞이하며, 우리 모두 교회의 생일인 오늘을 기념하고 축하합시다.
[성경 속 희망의 순례자들] 갈대 바다와 요르단 강을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희망찬 순례의 여정을 떠났던 역사적 순간을 꼽는다면, 그들이 노예살이를 박차고 이집트를 떠났던 순간과 요르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서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들의 여정을 돌아봄으로써 우리는 희망의 순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한 지 사백 삼십 년 만에 모세의 인도로 그 땅을 떠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통해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심으로써 누가 세상의 주인이신지 분명하게 보여주셨고, 마침내 파라오는 굴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떠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납니다. 이 희망찬 여정에 많은 이국인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을 인도하던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고 난 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게 된 후계자는 여호수아였습니다. 여호수아기는 하느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라고 명령하시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있어 주셨듯이 여호수아와도 함께 있어 줄 것을 약속하시며 힘과 용기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랜 광야 여정 동안 이집트를 떠났던 탈출 1세대는 여호수아와 칼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탈출 2세대는 익숙했던 광야를 떠나 약속의 땅이라는 낯설고 새로운 땅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꿈꿔 왔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차지해야 하는 과업을 수행해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큰 희망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찬 여정 앞에는 숱한 도전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도전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걸려 넘어지게 하였지만, 시련을 통해 그들의 희망은 정화되고 단단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면서 갈대 바다의 기적을 경험하였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서기 전에는 요르단강의 기적을 체험합니다. 이 두 기적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야말로 희망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이 됨을 잘 보여줍니다. 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그들을 추격하는 파라오 군대의 말발굽 소리에 둘러싸인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주님만을 신뢰하고 잠자코 있으라 명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위해 싸워주실 것임을 믿으라고 합니다. 수확기를 맞아 넘실거리는 요르단강의 강물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수아는 계약의 궤와 그 궤를 맨 사제들을 뒤따라 가라고 명합니다. 그들이 가본 적이 없는 낯선 길의 안내자는 하느님의 계약 궤와 그 궤를 맨 사제들, 곧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시련이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망하여 주저앉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주님께 대한 신뢰와 희망을 배가해야 합니다. 시편 시인처럼 이렇게 아뢰십시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 130,5)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나훔 예언서
시대 배경의 이해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아시리아는 백 년간 남왕국 유다를 비롯하여 많은 약소국가들을 위협하였습니다. 나일강, 페르시아만부터 지중해까지 정복한 아시리아는 정복한 땅의 민족들을 마구 짓밟았습니다. 이와 같은 아시리아의 잔혹한 만행을 나훔 예언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노획물로 가득한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다.”(3,1) “채찍 소리, 요란하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 달려오는 말, 튀어오르는 병거, 돌격하는 기병, 번뜩이는 칼, 번쩍이는 창, 수없이 살해된 자들, 시체 더미, 끝이 없는 주검. 사람들이 주검에 걸려 비틀거린다.”(3,2-3 참조)
그야말로 아시리아는 불의와 폭력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점차 그 세력이 기울게 된 아시리아는 기원전 626년 메디아와 바빌론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고, 기원전 612년에 수도 니네베가 함락되면서 기원전 606년에 최후를 맞이합니다. 나훔서는 아시리아의 멸망 전후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곧 나훔 예언자는 하느님 백성을 심판하기 위해 ‘진노의 막대’이자 ‘심판의 도구’였던 아시리아가 온 세상 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느님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몰라보며 자신이 주인인 양 착각한 아시리아의 교만과 기만을 고발하며 아시리아에 징벌을 예고합니다.
보복하시는 하느님
“주님은 열정을 지니신 분, 보복하시는 하느님, 주님은 보복하시는 분, 진노하시는 분이시다.”(1,2) 나훔은 시작부터 보복이라는 하느님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열정과 진노, 화를 터뜨리시는 하느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계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을 향했던 하느님의 진노가 이제는 온전히 니네베를 향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복수하시는 하느님’, ‘보복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어떻게 보입니까?
혹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라고 가르치신 하느님과 다른 분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까?
시편 94편 1절에서도 “보복하시는 하느님, 주님 보복하시는 하느님, 나타나소서.”라고 노래합니다. 과연 우리는 보복하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경에서 하느님의 복수를 거론할 때는 올바른 재판과 정의로운 심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만약 재판에서 판사가 불의하고 불공정하다면 힘없는 피해자는 아무런 보상도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하며, 힘 있는 가해자는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세상을 누비게 됩니다. 그런 곳에 정의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나훔서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바로 니네베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으시는 정의로운 분이시며, 보복의 의미는 불의를 꺾고 정의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이유없이 복수를 토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연한 불의 앞에서 정의를 세우기 위한 하느님의 방책이 복수입니다.
정의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은 온 세상 만물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주인으로서 공의롭고 정의로운 분이시기에 나훔서는 “그분 앞에서 산들이 떨고 언덕들이 비틀거린다.”(1,5)라며 그분의 놀랍고 위대한 능력을 찬미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불한당이 다시는 너를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2,1)
대제국 아시리아의 폭력과 만행 앞에 힘없고 약한 나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폭력을 휘두르는 대제국보다 더 강한 분이 산을 넘어오십니다. 이 소식이 아시리아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이겠지만 유다에게는 원수의 멸망과 자신의 구원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 됩니다.
이제 아시리아에 남은 것은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처분뿐입니다. 니네베는 불안에 떨고, 왕후는 끌려 나와 사로잡혀 가고 시녀들은 비둘기 소리처럼 한숨지으며 가슴을 칩니다. 아무리 “멈추어라, 멈추어라!”하고 소리치지만 돌아보는 자 아무도 없으며, 심장은 녹아내리고 무릎은 후들거리며 허리는 모두 떨리고 얼굴을 죄다 하얗게 질립니다(2,7-11 참조).
위로의 예언자 나훔
다른 예언서들과 달리 나훔은 민족의 타락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부여받은 힘을 악용한 아시리아를 고발하고 있으며, 심판의 징벌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아니라 수도 니네베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복으로 하느님의 정의와 통치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억압과 핍박에 시달리던 유다는 위로를 얻게 됩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가해자에게는 보복의 심판이 되고, 피해자에게는 위로와 보상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예언자 나훔(נחום)의 이름은 ‘주님께서 위로하시다.’ 또는 ‘위로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나훔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며 사람을 억압하는 권력자,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대항하며 자신이 역사의 흐름을 결정할 수 있다는 지도자, 물질적 풍요로움에 자신의 배를 채우고 교만해져 의기양양 하느님께 도전하는 어리석은 자에게 하느님께서 정의의 활을 당기시고, 올곧은 자들에게 안식처가 되신다는 위로의 하느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사실 니네베는 단순히 한 도시만이 아니라 주님을 거슬러 일어난 모든 나라의 전형입니다. 어지럽고 혼탁한 사회, 부정부패와 부조리가 만연한 세상을 바라보면 원칙과 규정 위에 인맥과 관계가 있고, 옳고 그름의 기준보다 나의 편과 남의 편이란 기준이 더 중요하며, 선과 악의 구분보다 ‘좋다와 싫다’로 가치를 판단하는 세태를 마주합니다. 그래서 힘만 있으면 아무리 악해도 처벌받지 않고 당당히 세상을 활보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느님의 정의가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다”(루카 1,52 참조)라고 노래하신 성모님을 따르는 군단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5월 성모성월을 보내며 작고 어리고 나약했지만, 하느님의 정의를 믿으며 하느님의 통치에 모든 희망을 걸었던 성모 마리아의 신덕을 청해봅시다.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22) 하느님을 향한 구원(묵시 8,1-5)
구원과 고통의 간극을 어떻게 해석할까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린다. 요한묵시록 5장의 문제, 그러니까 봉인을 열 수 있는 주체를 찾는 일은 이제 그 끝에 다다랐다. 봉인은 모두 열렸고 봉인은 그러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열리는 과정은 지난했으나 그 흐름은 놀랍게도 구원에로 방향 지워졌다. 마지막 일곱 번째가 열리는 공간은 하늘이다.
하늘에서 봉인되어 있던 두루마리는 하늘의 자리에서 완전히 열렸다. 처음부터 하늘이었고 마지막까지 하늘인 봉인의 흐름은 요한묵시록의 구원 의지를 분명히 한다. 앞서 요한묵시록 7장 마지막 부분의 말씀을 다시 되새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7) 이사야서의 한 대목을 옮긴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와 위로, 그로 인한 하느님 백성의 희망을 노래한다. 봉인이 해제된 두루마리는 하느님의 구원을 찬찬히 살펴보게 하는 묵상의 글이 된다.
그러나 구원이란 게 그리 호락호락한 선물이 아니다. 한번 노력해서 한번 받고 끝나버리는 영화나 소설 속 해피엔딩이 아니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는 것을 두고 종말이 왔음을, 그 종말의 시간에 봉인을 펼친 유일한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이 완성된 데 주석의 방점을 찍는다. 이런 해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구원의 유일한 길과 목적은 예수님인 건 분명하나, 그 구원이, 종말이 어느 시간의 흐름 끝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요한묵시록은 구원 이전에서 구원 이후의 시간 흐름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미 이뤄진 구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해 쓰였다. 구원이 왔음에도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가 여전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구원과 고통의 간극을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요한묵시록의 집필 동기다. 일곱 교회에 보내진 편지를 통해 우리는 이미 그 동기를 얼마간 살펴보기도 했다.
예컨대 에페소 교회에 보내진 편지에서 말하는 ’첫사랑‘의 상실이 그러하다. 첫사랑은 십사만 사천과 닮았다고 보면 어떨까. 저만이 옳고 구원에 합당하다 말하는 니콜라오스파의 배타적 자세가 첫사랑을 상실한 것이라면 모든 이에게 열린 구원에의 외침을 가리키는 십사만 사천은 첫사랑의 회복일 것이니. 첫사랑은 그러므로 구원을 누리는 이들이 한결같이 지켜나가야 할 보편적 사랑, 누구에게도 열린 구원의 선포와 같은 것이니.
구원이 왔다, 종말이 당도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업적은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외치는 것은 오래된 중언부언이라 식상한 것이 아닐까. 구원을 이미 누리고 사는 이에겐 너무나 자명한 말이라 새롭지 않아 지루한 선포가 된다. 구원은 찾아 나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의 소재다.
‘반 시간’의 침묵은 그래서 소중하다. 전통적으로 ‘침묵’은 주님의 날이 임박했음을 가리키는 시간적 지표다.(스바 1,7; 즈카 2,17; 시편 76,9 참조) 주님이 오시고 그분이 행하시는 것을 찬찬히, 겸허히 살펴보는 시간이 반 시간이다. 반 시간은 그러므로 주님의 시간이다. 일곱 개의 봉인이 인간 세상의 희로애락 속에서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폈다면 반 시간의 침묵 후에 펼쳐질 일곱 개의 나팔은 심판이라는 묵시문학적 장치들로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어떤 것인지 소개할 것이다. 반 시간의 침묵 속에서, 그리고 구원이 완성된 시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숙제를 얻은 셈이다. 하느님이 역사 속에서 직접 개입하셔서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이 무엇을 향해 서술되는지, 그리하여 그 방향성 안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것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읽어내어야 한다.
하느님의 일은 ‘일곱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유다이즘 안에서 일곱 천사는 대천사의 그룹으로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그분의 현존에 함께하는 천사로 소개된다.(에녹 20, 토빗 12,15; 이사 63,9) 천사는 일곱 나팔을 가지고 있는데, 하느님의 경고(예레 4,5)나 하느님을 위한 축제와 예배(2사무 15,10; 민수 10,10), 아니면 하느님의 현현이나 마지막 날 하느님의 등장을 상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탈출 19,16; 요엘 2,1; 스바 1,16) 일곱 천사와 일곱 나팔은 하느님을 향한 지시체다. 반 시간의 침묵에 이어 일곱 천사와 일곱 나팔은 하느님을 향해 더욱 세심히, 민감하게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일을 살피기 전, 우리에겐 하느님 그분을 향한 시선이 필요하다.
‘다른 천사’의 등장은 하느님을 향한 방향성을 더욱 탄탄하게 만든다. 우리말 성경은 제단 ‘앞에’라고 번역하지만, ‘앞에’라고 번역한 그리스말 ‘에피’(ἐπὶ)는 공간적 친밀성을 드러내는 전치사다. 그러므로 제단 앞은 하느님께 보다 ‘가까운’ 공간이다. 다른 천사에게는 금향로와 많은 향이 주어졌다. 다른 천사는 마치 사제와 같다.(레위 16,12; 민수 17,11 이하)
그러나 다른 천사가 보이는 뜻밖의 행동은 많은 의문이 남는다. 천사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숯불을 가득 담아 땅에 던진다. 향로와 향이 성도들의 기도일진대(묵시 8,3-4) 그 기도가 땅을 향해 던져지는 셈이다. 하느님을 향하는 기도가 땅을 향하는 공간적 연결성은 낯설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늘 이렇다. 4장의 천상이 땅의 공간과 하나 되어 서술되었고, 6장의 봉인이 열리면서 천상의 두루마리는 지상의 삶 자체를 겨냥했다. 요한묵시록 끝에 나타나는 새예루살렘 역시 하늘과 땅의 중간 어디쯤, 모든 것들이 통합되는 초월적 공간을 잉태한다.
주석학자들은 땅에 던져진 향로를 심판의 징조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요한묵시록 8장 6절부터 서술되는 그 ‘심판들’이 과연 흑과 백을 나누듯 잘못된 이들을 향한 심판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아니면 천상의 기도가 이 땅 위에 떨어져 한계 지워지고 부족하고 그리하여 슬픈 현실 속, 하느님을 향한 쓸쓸하지만 겸손한 오솔길로 거듭나는 건 아닐까. 구원을 이미 누리는 이로서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아간다. 구원은 그러므로 천상의 행복만도, 지상의 불행만도 아닌, 여전히 살아내어야 할 삶 자체에 주어진 하느님과의 인연이 아닐까.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74) 잘못을 회피하고 진리에 눈감은 빌라도
우리나라 역사는 물론 세계사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왕들도 많았지만, 잘못을 저지르고 역사의 역적이 된 왕들도 있다. 12세기경 영국의 존 왕은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조카를 살해하고 왕의 자리를 빼앗았다. 좋지 못한 방법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에서 많은 반대에 직면했다.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훌륭한 왕이 되려고 노력했다면 모를 텐데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켜 영국 국민에게 큰 피해를 남겼다. 또한 교회와 사이가 좋지 않아 왕위를 내려놓을 위기에 처하자,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정하여 국왕의 체면을 잃었다. 올바른 길을 제시한 귀족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 법률을 제정했다가 곧 법률의 무효를 선언하여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세익스피어(1564~1616)는 존 왕의 일을 연극으로 만들었다. “잘못을 범하면 그 잘못이 더 두드러진다”는 대사는 그의 연극 대본에 나오는 말이다. 처음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시작부터 진리에 눈을 감고 평생을 그릇되게 살아야 했던 존 왕의 일생은 많은 이에게 교훈을 준다. 지금은 조금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진리를 선택하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작은 거짓말이 큰 거짓말을 낳듯 악은 눈덩이처럼 더 커지기 마련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방임한 로마제국의 총독이었다. 로마제국은 넓은 식민지를 정치적으로 잘 통치하기 위해 어느 정도 식민지의 종교를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은 유다인들의 종교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지만, 사법권이나 사형집행권 등 중요한 권한은 여전히 총독에게만 있었다. 그래서 유다인 대사제 가야파는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을 총독 앞으로 끌고 가 재판을 받게 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다. 심문을 해보니 흉악범도 아니고 사형을 선고할 죄목도 없었다. 빌라도는 로마제국의 총독이란 막강한 권력자였지만 골치 아픈 종교 문제에는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넘긴 의회 의원들과 율법학자, 대사제들은 자신들은 죄인을 십자가형에 처할 권한이 없으니, 십자가형을 선고해 달라고 졸랐다. 빌라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형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청하고 있으니 난감했다. 빌라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그는 부하를 시켜 대야에 물을 떠 오게 하고 군중 앞에서 손을 씻었다. 자신은 아무 책임과 관계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권력자에게 무책임은 때론 무능보다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다. 빌라도는 진리에 눈감고 악과 타협한 것이다. 지도자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국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