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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앞에서(출14장 1-3;13-14)
성경본문: 출애굽기14: 1- 3;13-14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하라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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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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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앞에서!”
오늘 홍해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과 불신앙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아니, 우리 인생은 언젠가 만나는 자신의 홍해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은 인생의 홍해를 만났을 때 ‘어떻게?’라고 묻지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지?”
무엇보다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물음이 있죠?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지?”
그러나 인생의 홍해 앞에서 다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홍해 앞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 ‘왜?’라고 묻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셨는지, 나에게 왜 이런 일을 행하셨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까? 조바심을 내기보다는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보게 되지요.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그 일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 순간부터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며 기대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1월에 성혜 자매의 어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미스 유니버스대회에서 떨어지고 나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미스코리아에 나가게 된 것도 기도하며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영향력 있는 청소년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 한 일인데….
미스 유니버스에 출전한 일도 분명한 확신 가운데 일을 진행하고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무모한 일이었음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확신이 분명했는데. 최종 15명에도 들지 못했을 때, 담담하게 그 일을 받아들인다고 했는데 마음이 잘 정리가 안 된다고 말입니다.
제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성혜야, 그리고 권사님! 지금까지 된 일에 대하여 의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으면 떨어지고 붙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딸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했으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죠. 그곳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일까요? 단지 준비한 사람들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 다를 뿐이잖아요. 가만히 기다려 보세요.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해 보세요.”
‘홍해 앞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실 때, 홍해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나요? 단지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셨을 뿐이고, 그들은 확신 가운데 따라 나왔을 뿐입니다.
홍해 앞에서 당황스러운 것은 ‘우리가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고,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홍해는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 홍해 앞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확신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망연자실합니다.
우리는 종종, 아니 참 많이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큰일 났어요!”라는 말을 하며 호들갑 떠는 경우를 봅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너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났을 때 그러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출애굽 했지만, 그들의 믿음이 홍해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처럼, 베드로 역시 예수님과 함께했지만, 신앙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가 변한 것을 보세요.
이미 예수님을 곁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기적을 행하시던 예수님이 없는 상태에서 제자들은 박해의 시기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자신의 친한 동료였던 야고보가 잡혀서 순교를 당하고 자신은 감옥에 끌려가서 순교의 순간을 기다려야 하는 때, 바로 날이 밝으면 순교를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전날 밤 호들갑 떨지 않습니다.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사도행전 12장 7절에 보니까,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홍해 앞에서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 인생의 홍해 앞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홍해 앞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당황하게 된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다 읽지 않았지만, 출애굽기 14장 1~2절을 보면 조금 명확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이게 무슨 말인가요?
굳이 홍해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닷가에 이끌어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돌이켜’라는 말에 조금 주목해 볼까요? 예전 성경에는 ‘돌쳐서’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현재 진행하는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되돌아가서 진을 치라는 것입니다.
얼핏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요,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장막을 친 장소는 홍해를 앞에 둔 아프리카 북쪽의 광야 끝이었습니다. 대다수의 학자는 이 위치가 지금의 수에즈만 북방 16km 지점의 비터 호수 근경으로 추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을 치라고 하신 장소는 앞은 홍해 바다이고, 양옆은 험한 산지로 막혀 있어 지리적으로 후퇴하거나 빠져나갈 다른 통로가 없는 막다른 장소였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갈 때, 당연히 홍해가 아니라 해안을 따라 난 길로 갈 줄 알았습니다.
역사 이래로 아프리카에서 중동 지역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앞은 바다로 막히고 옆은 산으로 막힌, 길이 아닌 길로 접어들었던 것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지도자의 어리석음을 흉보며 이스라엘 백성을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준 것을 후회하던 바로는 마침내 특별 병거 6백 대와 애굽의 모든 군대를 총동원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해왔습니다.
그 목적은 단 하나 오직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시 자기의 종으로 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는 열 번에 걸친 무서운 재앙, 특히 자신의 장자를 비롯하여 애굽의 모든 장자를 잃는 참혹한 재앙을 당하고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애굽의 종으로 삼으려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던 것입니다.
3절에 이 모습을 보고 바로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하리라”
바로가 생각해도 이스라엘 백성이 돌이켜 바닷가에 장막을 친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믹돌은 애굽의 동쪽 끝 국경 지역이고 그 양쪽에 비하히롯과 바알스본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앞에는 바다고 믹돌의 망대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니, 애굽 군대가 쳐 내려가면 진퇴양난에 빠지게 될 형국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모르겠습니까? 3절의 “멀리 떠나”라는 말이 사실은 ‘혼란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로 갈지 모르고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잘못 가도 한참 잘못 간 것이죠.
좀 전에 보았던 2절에서 참 의미 있는 두 개의 지명이 나옵니다.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은 ‘구출’이라는 의미가 있고요. ‘바알스본’은 ‘바알이 내려다본다,’라는 뜻입니다.
참 흥미롭죠?
홍해 앞에서 그리고 자신이 예측할 수 없었던 인도하심 앞에서 이들은 두 개의 가능성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출을 받든지, 아니면 이전에 섬기던 우상 앞에 항복해 버리든지 절대적인 위기와 선택의 순간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홍해 앞에서 위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옛 생활로 돌아가 우상숭배를 하든지, 아니며 그 위험한 순간에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든지.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오늘 참 흥미로운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이켜 지금 이 홍해 앞에 이르게 하셨다면, 혼란스럽게 떠들 일이 아닙니다. 이미 이 지경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죠. 본문 13~14절을 보십시오.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홍해 앞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처음으로 하신 명령이 무엇인가요?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고 가만히 서서”
말씀을 묵상하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때는 우리가 잠잠한 시간이라고.
우리가 심적, 육적으로 잠잠해지기 위해서는 우리를 떨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한 민족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두려워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두려움이란 놈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우리가 제어할 능력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에 처한 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두려움이란 말이죠. 잘 이해가 안 되나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젊은이가 전쟁에 나가 23만 명 정도가 전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에서 자식을 염려하다 죽은 부모의 수가 100만이 넘는다고 하죠? 어떤 근거인지는 모르지만, 두려움과 걱정이라는 적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약점 가운데 하나가 너무 쉽게 두려움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잘 아시죠? 성경에 “두려워 말라!”라는 말이 365번이나 나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증명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 시작할 수 있는 타이밍은 두려움이 사라질 때입니다. 두렵게 하는 상황이 아니라 두려움을 누르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말입니다.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공포가 노크할 때 믿음이 나가봤더니 아무것도 없더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잠잠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저는 종종 그런 상상을 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에 대하여 우리는 참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런 상황에 부닥쳐 있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맞이했을까요? 그 순간에 홍해가 갈라지리라는 것을 기대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문제가 닥쳤지만, 문제의 해결은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면 참으로 분주하고 번잡하게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을 해 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진퇴양난의 순간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어떤 해결 방법이 있을까요?
수치스럽게 사느니 장렬하게 물에 빠져 죽을까요?
이왕 죽느니 자신들을 괴롭혔던 자들과 싸우다 죽을까요?
아마도 가장 신빙성 있는 방법인데, 창피한 일이지만 목숨을 구걸하고 항복하는 일?
출애굽기 14장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하나님은 수치를 당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는데, 이들은 수치를 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목숨이 가장 귀하다고 여기면 목숨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초라해지죠.
과연 이 홍해 앞에서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다급함 앞에서 인간들의 보편적인 모습 중의 하나는 늘 ‘비난할 대상’을 찾는 것이죠. 사실 이들이 모세를 안 따라왔으면 될 일입니다.
그들도 같은 꿈을 꾸던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 순간에 모세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모세의 탄생에서부터 10가지 재앙과 출애굽의 역사를 볼 때, 그 원인이 출애굽기 2장 24절에 아주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홍해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신음하고 고통에 울부짖었던 것을 잊은 모양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기적으로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손길과 계획이 순식간에 홍해 앞에서, 그리고 그들을 뒤쫓아 오는 거대한 군대 앞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애굽의 군대를 보니 하나님의 계획도 보이지 않고, 인도하시는 하나님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물론 우리가 삶의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4차원적인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라 ‘홍해 앞에서’ 무엇을 바라보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바다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들 앞에서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음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그들이 살았지만, 바다에서 몰살한 애굽의 병사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이 산 것을 기억하지만, 목숨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자꾸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생명이 주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생명 주께 있네.
능력 주께 있네.
소망 주께 있네.
주 안에 있네.”
그래서 하나님을 믿을 때 생명을 다해 믿는 것입니다.
생명을 다해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힘을 빼고, 우리의 능력이 아닌,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나안으로 향하기 위한 하나님의 첫 번째 계획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힘을 빼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여름 바닷가에 가면, 혹은 수영장에 가면 반드시 구조대원들이 높은 곳에 의자를 마련하고 쌍안경을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조난을 당해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 신속히 헤엄쳐 가서 구조하려고 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면서 구조대원의 발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그러면 같이 빠져 죽습니다.
몸을 맡기세요. 몸을 맡기세요. 해도 맡기기는 뭘 맡겨. 더 매달리니까 그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턱을 들어서 주먹으로 때리라는 것입니다.
때리면 기절합니다. 기절하고 늘어지면, 몸을 맡기기 때문에 물속에서 건져 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맡겨야 해요. 물에 빠진 사람 건지는데도 맡기지 아니하면 같이 빠져 죽는 것처럼 이 세상에 문제를 당해서 하나님께 나와 부르짖을 때 주님께 온전히 맡겨야지 내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버둥을 치다가는 낭패와 실망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주님이 도와주실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밤새도록 일어난 일!!!
본문 21절을 보세요.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말씀을 묵상하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큰 동풍이 불고서 바닷물이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가 남의 일처럼 보일 때에는 스펙터클한 일이지만,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역사는 긴 밤을 지새우는 가슴 졸이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그 순간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요?
그래서 또 하나의 단어를 생각해야 합니다.
13절의 “가만히 서서”라는 말인데, 영어 성경에는 “stand fir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서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말고 서 있으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이루어질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읽으며 참 이해할 수 없었던 말씀 가운데 하나가 ‘열 가지 재앙’이었습니다.
한 가지 재앙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일인데, 어쩌면 계속해서 바로의 마음이 바뀌고,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그 시간을 견디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무서워도 흔들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가만히 서서 견고히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홍해 앞에서의 시간은 인생의 결전의 시간입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내쫓았다면, 그 믿음으로 견디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밤새도록 몰아치는 동풍을 견뎌야 합니다.
당시 동풍은 아라비아에서부터 몰아치는 ‘시로코의 열풍’ 즉 죽음의 바람입니다.
그런데 그 바람이 이스라엘에는 생명의 바람, 기적의 바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누군가는 밤새도록 동풍이 부는 동안 더 큰 두려움과 의심에 휩싸여 있지 않았을까?
사실은 기적의 순간보다 기적이 일어나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더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기적은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견디는 믿음의 시간이 폭발하는 순간이라는 생각, 믿음의 결정체라는 것을 생각해 보셨나요?
기적이 일어나면 그 사건이 믿음의 흔적이 되고, 기념비가 됩니다. 본문 31절을 보세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글쎄, 제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기는 하지만 그렇게 바람직한 신앙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능력을 보고 믿었던 백성은 앞으로 일어날 광야의 수많은 사건 가운데서, 환란이 일어날 때마다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기적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만을 바라보는 자들의 신앙은 변하지 않습니다.
소위 무속적인 신앙이 무엇인가요? 끊임없이 표적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기적을 믿습니다. 기적이 보일 때 믿음이 좋은 것 같으나 기적이 사라지면 하나님도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기적을 믿는 사람들은 또 다른 기적을 보면 그 기적을 따라갑니다.
그 동안 한국 교회 성도들이 “신실하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기적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어디든지 가려는 자들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만 찾아다닌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똑같이 믿지 않는 자들과 같이 불평하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 하는데 기도해서 안 되면 세상 사람과 똑같은 불의한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언젠가 일본의 <후쿠시마>에 갔을 때입니다.
젊은 가이드가 목사님들과 함께하면서 참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합니다.
소위 접대하는 관광을 안내하게 되면 못 볼 것을 참 많이 경험한답니다.
참 말쑥한 신사들이 술 접대를 받으며 저렇게 변할 수 있고, 성을 파는 여성들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집에 돌아갈 때가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내와 딸의 선물을 사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방법입니다.
접대로 무엇을 해 보려고 하고, 공짜로 주는 것이라면 선과 악을 가리지 않고 받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아무리 계속돼도 변하지 않는 백성을 보게 됩니다.
홍해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볼 때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을 바라보면, 내 삶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헨리 나우웬의 [춤추시는 하나님]이란 책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내 일에 늘 방해물이 끊이지 않는다고 항상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해물이 바로 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우리 인생의 길에는 수없이 많은 방해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방해물이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장기 환자를 보살피는 일이 있습니다. 힘 드는 방해물이지만,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장애 자녀를 뒷바라지하는 일이 있습니다. 평생 짐입니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치매 노인을 치다꺼리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 큰 방해물입니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이 모든 것이 다 나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당한 방해물이 있습니다. 홍해도, 애굽 병거도, 배고픔도, 고기 먹고 싶음도, 목마름도 모두가 걸림돌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씩 해결하면 해결되는 기쁨이 있고, 가나안이 보입니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늘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다!”
아무리 부인해도 저도 아버지의 그늘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인해도 하나님을 믿는 한 하나님의 그늘서 살아갑니다.
시편 91편 1절에 보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그늘서 살고, 아내는 남편의 그늘서 사는 것이 이 세상 사람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러나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 곧 하나님 품 안에서 사는 사람은 전능하신 자의 그늘서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기적이 있어서, 홍해가 갈라져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지존자의 그늘에 거하는 자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물이 갈라지는 기적을 보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을 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믿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또 다른 기적을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지존자와 동행하는 사람들이 복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