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27(목) 색다른 투어 cafe의 아침편지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이 글을 읽자
마이클 조던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 열두 살에 MVP로 선정 되었으나
고등학교 때는 학교 대표팀에서 탈락.
그 일을 계기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
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한 결과
그는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루이스 라모르
100편이 넘는 서부 소설을 쓴 베스트 셀러 작가인 그는
첫 원고의 출판을 하기 까지 350번이나 거절 당했다.
훗날 그는 미국 작가로서는
최초로 의회가 주는 특별 훈장을 받았다.
잭 캔필드와 마크 한센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의 원고는
출판 되기 까지 서른 세곳의 출판사에서
출간을 거절 당했다.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라며 매몰차게 거절당했던
이 책은 전 세계 언어로 번역 되어 1천만 부 이상 팔렸다.
스티브 잡스
애플 컴퓨터를 설립 하기 전,
아타리와 휴렛팩커드에게 전문 대학도 못 나왔다는
이유로 입사를 거부 당했다.
결국 그는 아이디어를 혼자서 실용화 하는데 성공.
창립 첫해에 250만 달러가 넘는 매출을 달성 했다.
실베스터 스탤론
공부를 못해 여러 학교를 전전 했으며,
배우가 되려고 했지만 실패의 연속.
그래서 배우보다 글쓰기에 흥미를 느껴
영화 <록키>의 대본을 써서
자신에게 주연을 맡기는 조건으로
영화 제작의 의뢰 했으나 수없이 거절 당했다.
마침내 제작된 그 영화는
1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렸으며 지금 이자리 까지 왔다.
17살에 정장을 차려 입고
자신이 진짜 감독인 마냥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들락 거렸던 그는 스티븐 스필버그 라 불린다.
고아원에 있을 때 부터... 구걸 하러 거리에 나섰을 때도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배우다' 라고 새겨 말하던
그는 찰리 채플린이라고 불렸다.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은
자신의 부하 직원들이 이것은 절대로 못한다 라고
투덜 거릴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해보기나 했어?"
- 좋은 글 중에서 -
마이클 제프리 조던(Michael Jeffrey Jordan)
조던(1963년 2월 17일 ~ )은 미국의 은퇴한 농구 선수이다. 약 120년에 이르는 농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로 평가 받는다. 1984년부터 NBA 선수로 활동하였으며, 2003년 은퇴했고, 현재는 NBA 샬럿 호니츠와 NBA D-리그 그린즈버러 스웜 구단주이다. 1963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마이클 조던은 형 래리 조던의 반만큼만 농구를 잘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의 등번호를 래리 조던의 등번호 45번의 절반인 23번으로 하였다고 한다.
루이스 라모르(Louis Dearborn LaMoore)
루이스 라모르 (Louis L'Amour, Louis Dearborn LaMoore) 드라마작가이다.
출생일 : 1908년 3월 22일, 미국
사망일 : 1988년 6월 10
주요작 : 와일드 헌터(2001) , 초원의 꿈(1991) , 머나먼 여정(1986)
잭 캔필드(Jack Canfield )
출생일 : 1944년 08월19일, 미국
직 업 : 소설가
학 력 : 매사추세츠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경 력 : 산타바바바라 영혼을 위한 닭고기수프, 기업 CEO, 마우이 작가
컨퍼런스 & Retreat School 멤버
미국의 대표적인 코치이다.〈뉴욕타임스〉 190주 연속 베스트셀러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으며, 전세계 41개 언어로 번역되어 1억부 이상 판매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닭고기수프' 시리즈의 공저자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는 출판되기 전에 서른세 곳의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다. 미국 최고의 카운슬러이자 저술가로서 전세계 21개국 90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성공 방정식을 전파해왔으며, 라디오와 TV 토크쇼의 최고 인기 게스트이자 신디케이트 칼럼니스트로도 명성이 높다. '굿모닝 아메리카', '오프라 윈프리 쇼' 등 다양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닭고기수프’ 시리즈를 비롯해 『독수리처럼 나비처럼(성공의 원리)』 『미래를 여는 집중의 힘』『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1% 행운』『잭 캔필드의 응원』『죽기 전에 답해야 할 101가지 질문』 등의 베스트셀러를 공동 집필했다
마크 빅터 한센(Mark Victor Hansen)
마크 빅터 한센은 1948년 미국 출생. 마크 빅터 한센은 전 세계적으로 8천만 부 이상 판매된 밀리언셀러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와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의 공저자이다. 인간의 가능성 개발 영역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지난 30년간 사회 저명인사들과 전 세계 일반 대중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수많은 단체와 사람들을 도와 사람들의 비전을 새롭게 해주고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에 헌신했다. 박애주의자이자 독실한 크리스천인 마크 빅터 한센은 나누는 삶과 사회 공헌에 대한 공로로 유명한 상을 많이 수상했다. 또 빈곤층을 위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인 해비타트(HABITAT FOR HUMANITY), 미국 적십자사, 동전을 모아 암 환자를 돕는 단체인 ‘마치 포 다임즈’(MARCH FOR DIMES), 미국 아동돕기협회(CHILD HELP USA) 등 많은 자선단체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좀 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일을 추진해보고자 하는 열정으로 그는 오늘도 일하고 있다.
스티븐 폴 잡스(Steven Paul Jobs)
간단히 스티브 잡스(Steve Jobs / 1955년 2월 24일 ~ 2011년 10월 5일)는 미국의 기업인이었다. 애플의 전 CEO이자 공동 창립자다. 2011년 10월 5일 췌장암에 의해 사망했다.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과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하고, 애플 2를 통해 개인용 컴퓨터를 대중화했다. 또한, GUI와 마우스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내다보고 애플 리사와 매킨토시에서 이 기술을 도입하였다. 1985년 경영분쟁에 의해 애플에서 나온 이후 NeXT 컴퓨터를 창업하여 새로운 개념의 운영 체제를 개발했다. 1996년 애플이 NeXT를 인수하게 되면서 다시 애플로 돌아오게 되었고 1997년에는 임시 CEO로 애플을 다시 이끌게 되었으며 이후 다시금 애플을 혁신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게 이끌었다. 2001년 아이팟을 출시하여 음악 산업 전체를 뒤바꾸어 놓았다. 또한, 2007년 아이폰 을 출시하면서 스마트폰 시장을 바꾸어 놓았고 2010년 아이패드를 출시함으로써 포스트PC 시대를 열었다.
스티브 잡스는 애니메이션 영화 《인크레더블》과 《토이 스토리》 등을 제작한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픽사의 소유주이자 CEO였다. 월트 디즈니 회사는 최근 74억 달러어치의 자사 주식으로 이 회사를 구입하였다. 2006년 6월 이 거래가 완료되어 잡스는 이 거래를 통해 디즈니 지분의 7%를 소유한, 최대의 개인 주주이자 디즈니 이사회의 이사가 되었다. 한편 그는 2004년 무렵부터 췌장암으로 투병생활을 이어왔다. 그의 악화된 건강상태로 인하여 2011년 8월 24일 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최고경영책임자(CEO)를 사임하고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팀 쿡이 새로운 CEO를 맡는다고 밝혔다. 잡스는 CEO직에서 물러나지만 이사회 의장직은 유지시키기로 했으나, 건강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사임 2개월도 지나지 않은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 IT분야의 혁신의 아이콘으로 꼽힌다.
실베스터 가르덴치오 스탤론(Sylvester Gardenzio Stal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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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배우이자 영화 감독, 제작자로 1946년 7월 6일생이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다. 근육질과 선이 굵은 외모를 자랑하며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입지전적 배우로 록키와 람보로 대표되는 영화배우. 북미에선 애칭으로 슬라이(Sly)라 불리기도 한다. 루니툰의 멍청한 악역 고양이 실베스터와 이름이 같아 학창시절에 심한 괴롭힘을 받았다고 한다.다만 이는 그만 그런게 아니라 실베스터란 이름이라든지 벅스란 이름을 가졌거나 미키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아이들이 겪었던 일화이기도 하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1946년 12월 18일 ~ )는 미국의 영화 감독, 각본가, 영화 프로듀서이다. 드림웍스의 공동 창립자이다. 스필버그의 영화는 40여년의 시간 동안 많은 주제와 장르를 다뤘다. 스필버그의 초기 SF, 어드벤처 영화는 현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의 원형으로 꼽힌다. 스필버그는 1993년 《쉰들러 리스트》와 1998년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 타임지는 그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에 올렸다. 2011년 해즈브로 주최 트랜스포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찰리 채플린( "Charlie" Chaplin)
찰스 스펜서 "찰리" 채플린 경 (영어: Sir Charles Spencer "Charlie" Chaplin, KBE, 1889년 4월 16일 ~ 1977년 12월 25일)은 영국의 코미디언, 영화 감독이자 음악가로 무성 영화 시기에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그는 그의 캐릭터라 할 수 있는 '리틀 트램프' 캐릭터를 통해 전세계적 아이콘이 되었으며 이 캐릭터는 영화 산업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캐릭터로 인식된다. 그는 어린 시절 빅토리아 시대에서부터 그가 88세를 일기로 사망하기 전까지 75년을 일했으며 그동안 수많은 찬사와 비난을 받아왔다. 런던에서 채플린은 어린 시절동안 가난과 고난을 겪었다. 그의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어머니가 힘들게 살림살이를 하면서 채플린은 9살이 되기 전가지 2번이나 고아원에 보내졌다. 14살에 되던 해에는 어머니가 정신 병원에 수용되었다. 채플린은 어린 시절부터 뮤직 홀에서 연기를 시작하였으며 크면서 무대에서 코미디언으로 활동하였다. 19살에 그는 프레드 카노의 극단에 들어갔으며 곧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채플린은 할리우드에서 코미디 분야로 유명하였던 맥 세넷의 키스톤 스튜디오에 발탁되고, 그는 처음으로 《생활비 벌기》 (1914)에 출연하게 된다. 곧이어 그는 자신의 캐릭터인 '리틀 트램프'를 선보이게 되고 많은 팬들을 형성하게 되었다. 채플린은 초기에 출연하던 영화부터 감독을 맡기 시작하였고 이후 그는 키스톤에서 에사네이, 뮤츄얼, 퍼스트 내셔널까지 감독을 맡아 왔다. 1918년에 채플린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들 중 한 명이 되었다. 1919년에 메리 픽퍼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D. W. 그리피스와 함께 공동으로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설립한 그는 자신의 영화를 혼자 찍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의 최초의 장편 영화인 《키드》 (1921)을 찍은 후 채플린은 UA에서 《파리의 여인》 (1923), 《황금광시대》 (1925), 《서커스》 (1928)를 찍으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다. 1920년대에 출연한 유성 영화에 대해 혐오해하였던 그는 이어 《시티 라이트》 (1931), 《모던 타임스》 (1936)을 무성 영화로 촬영한다. 이후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 (1940)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에 각종 스캔들과 논쟁에 연루되면서 채플린의 인기는 추락하게 되었고 채플린은 공산주의자의 사상을 동의하였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1952년에 FBI는 그의 미국 입국을 금지시켰으며 채플린은 스위스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는 말년에 '리틀 트램프' 연기를 그만두고 새로운 역할들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 영화들은 《무슈 베르두》 (1947), 《라임라이트》 (1952) 등이 있다. 채플린은 대부분의 영화를 감독하고 각본을 썼으며, 제작, 편집, 주연, 그리고 음악까지 맡았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완벽주의를 고집하였으며 UA를 설립하면서 행한 재정적 독립은 이후 그의 영화가 영화사에서 창조적인 작품으로 기억되게 하였다. 그의 영화는 비애감이 결합한 슬랩스틱 코미디가 특색을 이루고 있으며 내용에는 자신의 자전적 모습이 그려져 있다. 1972년에 아카데미상은 "지난 세기동안 그가 만든 헤아릴 수 없는 기법들이 이후 영화 예술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그에게 공로상을 수여하였다. 그의 영화들은 대부분 위대한 영화 순위에 항상 오르며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배우 50명에서 남자배우 순위 중 10위에 선정하였다.
정주영(鄭周永)
정주영(1915년 11월 25일 ~ 2001년 3월 21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현대그룹의 창업주이며 한국의 기업을 이야기할 때 자수성가한 기업인 중의 한 명으로 쉽게 대화의 주제가 되는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대에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 서비스(Art Service)를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한때 홀동광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946년 4월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하였고 현대그룹의 모체를 일으켰으며 건설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1995년에 조사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9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정부를 도와 대북사업 추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정주영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영웅시대》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1998년 6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정치 활동으로는 1992년 초 김동길 등과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선출되었으며, 제14대 총선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해 12월에 제14대 대선에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듬해 2월에 의원직을 사퇴하고 통일국민당을 탈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