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이 사망한 후의 정나라의 내분을 지금부터 설명하려 하는데, 이것은 춘추라는 시대의 원형과도 같은 것이다. ‘춘추’란 어떤 시대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 지루하더라도 참고 읽어나가야 한다.
우선 예정대로 태자인 홀이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소공을 불리는 정나라 3대 군주이다. 송은 이 얘기를 듣고 불만스러워했다. 송나라 중신의 딸이 낳은 돌이야말로 송나라가 기대했던 정나라 3대 군주인데 말이다. 어떤 책략을 쓸 것인지는 몰라도 송나라는 정나라 공신 제중을 유괴해 왔다. 당시 송나라 군주는 장공이라는 사람이었다. 장(莊)이라느니 환(桓)이라느니 혜(惠), 강(康), 여(厲), 무(武)니 하는 이름은 각국의 제후들에게 흔히 쓰이고 있는 것이어서, 같은 동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등 읽는 이의 머리를 혼란케 만들기도 한다. 어쨌든 송나라 군주는 연행되어 온 제중에게 -『귀국한 후 이 돌을 즉위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목을 베겠다.』라고 협박했다. 정나라에서 중신인 제중의 힘이 막강했던지, 아니면 새 군주인 소공 홀이 매우 평판이 나빴던 때문인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돌과 제중이 송나라에서 귀국할 때만 있었을 뿐, 소공은 위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시경에 산유 부소(山有扶蘇)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여러 가지로 풀이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로 소공의 인사 처리가 엉망이었음을 비방한 시라는 해석도 있다. 그런 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소공 홀도 대단한 군주는 아니었던 것 같다. 송나라의 후원으로 정나라의 군주가 된 돌은 여공으로 불리었다. 그는 송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제중에게 옹립되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려 하든 제중의 의견을 들어야 했다.
왕위에 있으면서 가장 귀찮은 존재는 자기를 후원해 주는 세력이다. 정나라 여공은 일일이 스폰서 노릇을 하는 제중이 싫었다. 그래서 이놈을 죽여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죽이기 위해서는, 상대방으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고 그 대상에 접근할 수 있는 인물을 구해야 한다. 여왕은 송나라에서 데려온 옹규라는 인물을 점찍었다. 옹규는 제중에게 간단히 접근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옹규의 아내는 바로 제중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네 장인인 제중을 죽여라』 이런 명령을 받은 옹규는 고민하던 나머지 자기 처에게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런데 옹규의 처는 하필이면 이 얘기를 어머니에게 알려 상의한 것이다. 사기에는 어머니에게 곧장 얘기한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버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소중한 것인지요?』 이렇게 어머니에게 물어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물음에 대답한 어머니의 말이 그럴 듯했다. -『이 세상의 남자란 어느 누구도 남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든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 법이다.』 이 어머니의 말을 듣고 옹규의 처는 아버지 제중에게 암살계획을 발설하였다. 제중은 격노하여 사위인 옹규를 잡아죽인 후 시체를 구경거리로 삼게 했다.
여공의 계획은 무너졌다. 그래도 그는 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는 제중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여공은 도리어 옹규에게 화를 냈다. -『중요한 일을 계집에게 말했으니 죽어도 싸다!』 이래서야 옹규가 불쌍하다. 이 일로 해서 정나라 군주인 여공 돌과,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제중과의 관계가 이상해졌다. 본디 제중이 여공을 옹립한 것은 송나라에서 강요한 일이다. 마음속으로는 도리어 지난날의 태자, 일단 즉위하여 소공으로 된 홀의 편이었다. 홀이 제나라와의 혼담을 거절하려 할 때 다시 생각해보도록 권한 것은 바로 그였다.
옹규 사건은 BC 697년에 일어났는데, 그해 여름 여공은 낙이라는 곳으로 갔다. 자리를 비운 것이다. 제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망명중이던 소공 홀을 받아들인 것이다. 여공은 빈집털이에게 당한 꼴이 되었다. 그는 체류지인 낙에서 정나라 관리들을 죽이고 그곳에서 자립했다. 정나라에는 두 군주가 존재한 셈이 된다. 수도인 신정에는 소공 홀이 있고, 낙에는 여공 돌이 있었던 것이다. 여공 돌 뒤에 송나라가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송나라는 무기와 병사를 낙에 있는 여공에게 공급했다. 그러므로 소공 홀은 낙을 공격할 수 없었다. 송나라를 비롯해 다른 제후도 낙의 여공을 응원한 모양인데, 여공은 형인 소공을 추방하고 복귀할 만한 힘은 없었다.
소공 홀과 여공 돌과의 형제 싸움은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됨으로써 거의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이 권력투쟁을 되풀이하는 까닭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골치아픈 일이었다. 정나라 사람들은 군주가 누구이든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면 만족했던 것이다. 정나라가 왕국을 무너뜨린 저 빛나는 전쟁은 제중과 고거미가 지휘했었다. 제충은 소공 홀의 어머니가 출가할 때 사자로서 등나라에 갔던 인물로, 홀과 제나라 공녀와의 혼담을 권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소공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고거미와 소공은 마음이 맞지 않는 것 같다.
선대인 장공이 고거미를 기용하려 했을 때, 아들인 홀은 반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공은 아들의 의견 같은 것은 듣지 않고, 자기의 의사로 고거미를 대신으로 등용시켰다. 고거미는 홀이 자기를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홀이 군주가 되면 어차피 자기는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했다. 살해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서 풀려나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고거미는 수렵나갔을 때 소공을 사살해 버렸다. 정나라 소공 2년(BC 695)의 일이었다.
군주가 없게 되었다. 아니, 두 사람 있던 군주 중 신정의 소공 홀이 죽었기 때문에 낙의 여공을 맞아들이는 것이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정나라의 두 중신은 모두가 이에 찬성하지 않은 것 같다. 낙의 여공이 복귀하면 소공을 옹립한 사람들은 숙청될 것이다. 제중 등은 제일 먼저 숙청될 것임이 틀림없다. 제중과 고거미는 서로 의논한 후 제3의 공자인 자미를 즉위시키기로 했다. 이 사람은 즉위한 후 얼마 가지 않아 살해되었으므로 시호가 없다.
공자 시절일 때 제나라 양공은 정나라 자미와 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싸움은 아직도 결말이 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양공이 글을 보내서 수지(首止)에서 만나 동맹하자고 했다. 제중은 자에게 자미에게 가지 말라고 말렸다. 그러나 자미는 『제나라가 우리와 수교하게 되면 우리는 태산같이 평안할 것이다』 하고 회맹에 응했다. 고거미는 따라나섰지만 제중은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과연 자미는 수지의 회맹 장소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 직전에 제 양공은 누이인 문강과 저지른 불륜을 숨기기 위해 그 남편이자 매제인 노나라 장공을 죽였다. 이런 무도한 행위에 대해 백성들의 공론이 사라지지 않자 천하에 의리 있는 몇 가지 일을 해서 그 위세로 민심을 얻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정 소공의 시해 관련자를 유인하기 위해 동맹을 제의했던 것이다. 자미를 수행해 온 고거미 역시 제 양공의 명에 따라 미리 용사를 거느리고 현장을 둘러싸고 있던 왕자 성부와 관지부 등에 의해 참수되었다. 다만 고거미의 경우 간신히 도망쳐 온 후 다시 제중과 상의했다는 설도 있다.
자미가 죽은 후 또 한 사람의 공자 영이 진(陳)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들여 즉위시켰다. 그가 정자(鄭子)로 불리는 군주였다. 낙에는 여전히 여공이 버티고 있었다. 정나라에 있어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기분 나쁜 폭탄이나 같은 것이었다. 정자 8년에 제나라 양공이, 관지부의 반란으로 죽음을 당했다. 정자 12년(BC 682)에 정나라 기둥이었던 제중이 사망했다. 제중이 있었기 때문에 낙에 있는 여공의 복귀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제중이 죽음으로써 낙의 여공은 드디어 복귀를 위해 행동을 개시했다.
여공은 정나라의 대신 보하를 꾀어내 자기가 복귀할 수 있도록 힘써 줄 것을 강요했다. 보하는 석방되어 돌아가자, 여공과 약속한 대로 정자와 그의 두 아이를 죽인 후 낙에서 여공을 맞아들였다. 오랜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여공은 원한을 갚을 것을 다짐했다. 숙청해야 할 제1호는 물론 제중이었으나 그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 때문에 여공은 백부가 되는 원을 불러내어, - 『그 동안 나는 망명하고 있었는데, 백부님은 나를 복귀시키려고 애쓰지 않았다. 너무 심한 일 아닌가』라고 책망했다. 이에 대해 원은 『임금을 섬기면서 딴마음을 안 가지는 것은 신하의도리이다. 나는 죄를 안다.』라고 대답한 후 자살했다.
여공은 다음으로 자신의 복귀를 위해 힘쓰면서 정자를 죽인 보하를 불러낸 후, -『그대는 임금을 섬김에 딴마음이 있었다.』라고 비난하고는 죽여 버렸다. 보하가 힘쓰지 않았다면 자기가 복귀할 수 없었는데도 궤변을 내세워 죽인 것이다. 물론 정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섬김에 딴 마음이 있었던 자가 된다. 그러나 여공이 한 짓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여공은 즉위 4년에 망명하여 낙에 있은지 17년, 그리고 복귀한 후 7년만에 죽었다. BC 673년의 일이다.
우리는 여공의 심리를 한번 꿰뚫어 볼 필요가 있다. 조그마한 친절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큰 은혜는 은혜를 받는 쪽에서 짐이 무거워져 어떻게 보답해야 좋을지 모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언제까지나 「내 덕택에 이렇게 잘 됐다」는 말도 듣는다는 것은 은혜를 받은 쪽으로서는 유쾌한 일이 못 된다. 너는 딴마음이 있었다는 이유로, 여공은 자신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인 보하를 없애버렸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