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 모악산 아래에 있는 금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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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 모악산 아래에 있는 금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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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9. 17:43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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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모악산 아래에 있는 금산사
『택리지』에 실린 모악산의 기록을 보자.
모악산(母岳山) 남쪽에 금산사(金山寺)가 있다. 원래 절터는 용추(龍湫)라서 깊이를 측량할 수 없었다. 신라 때 한 조사(祖師)가 수만 석의 소금으로 메우니 용이 옮겨갔다. 그 자리를 닦아서 절을 세웠으며, 대웅전 네 모퉁이 뜰 밑에는 가느다란 간수가 주위를 돌아 나온다. 지금도 누각이 높고 빛나며, 골짜기가 깊숙하다. 또한 호남에서 이름난 큰절이고, 전주부(全州府)와 가깝다. 『고려사』에 따르면 견신검(甄神劍)이 아비 훤(萱)을 금산사에 가두었다는 곳이 곧 이 절이다.
일망무제로 펼쳐진 호남평야의 어느 지점에서나 보이는 산이 있다. 가까운 듯 혹은 먼 듯 넉넉한 품새로 호남평야의 젖줄인 만경강과 동진강을 나누는 산, 모악산이다. 이 산의 산줄기는 서해에 닿을 것처럼 뻗어 내리다가 산자락 아래 드넓은 호남평야를 펼쳐놓았고, 북쪽으로는 1300년의 고도 전주라는 도시를 풀어놓았다.
모악산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서북쪽으로 멀리 동양 최대의 절터를 품에 안은 미륵산(彌勒山)이 보이고, 여산의 천호산, 진묵스님의 자취가 서린 서방산이 눈앞에 다가오며, 서쪽을 바라보면 변산을 지나 바다에 이른다. 바다가 끝나는 지점에서 평야가 시작되고 평야가 마무리되는 산자락에서 산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모악산은 평야와 산지의 경계에 있다. 기름진 호남평야에 목을 걸고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본 산, 모악산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 자리한 명산(名山), 영산(靈山) 속에 어떠한 산으로 자리하는 산일까?
이중환은 모악산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금구의 모악산은 산 아래 평지로 된 골이 있어서 도회로 될 만하다는 말이 전해오나 내려온 세력이 또한 짧다.
한편 풍수지리학자 최창조는 모악산을 “해안에서 시작하여 내륙으로 들어가는 야지의 땅에 풍성하면서도 우람하게 우뚝 솟은 평지돌출의 산은 상대적인 시각의 교차로 인하여 보다 더 웅장함을 자랑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김제와 완주 그리고 전주의 경계를 이루며 드넓은 호남평야를 감싸안은 모악산은 어머니의 품처럼 넓고 포근하며 따뜻하다. 예로부터 엄뫼, 큰뫼로 불려온 모악산은 이 산의 정상 서쪽에 자리한 쉰길바위라는 커다란 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같아서 모악산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모악산은 계룡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중 신앙의 텃밭으로, 정기 어린 산으로 어깨를 겨루었으며 모악산 금산사의 봄 경치와 변산반도의 여름 경치, 내장산의 가을 단풍과 장성 백양사의 겨울 설경은 호남의 4대 절경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풍수지리상의 모악산은 전 지구적 후천개벽의 모산, 즉 어머니의 산이고 순창의 회문산은 양산, 즉 아버지의 산이라고 하였다. 우리 고유의 지리 인식에서 비롯된 여암 신경준의 산줄기 개념으로 볼 때 모악산은 호남정맥과 떨어져 있는 평지돌출의 산이며, 일본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가 만들어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는 산맥으로 볼 때는 노령산맥에 위치한 산이다.
금산사의 초파일
모악산 남쪽 자락에 있는 금산사는 창건 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나 임금의 복을 비는 사찰로 세워졌으며 백제 부흥 운동 당시 한 거점이었다.
그러나 모악산이 우리나라 곳곳의 영산과 명산에 견주어 빼어난 것은 산의 수려함과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악산 자락에 임금의 복을 비는 사찰로 금산사가 세워졌고 그 후 백제가 망한 뒤 복신, 도침과 의자왕의 아들 풍왕이 중심이 된 백제 부흥 운동의 한 거점이 되었다. 금산사는 신라 혜공왕 2년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 미륵 신앙의 근본 도량을 만들면서 번성하였다.
백제 멸망으로 뿌리 뽑힌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략적인 포석이었다고도 전해지는 금산사가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후백제의 견훤(진훤)에 의해서였다. 환생한 미륵임을 자처하며 후백제의 왕이 된 견훤이 자신의 복을 비는 사찰로 삼고 중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견훤 역시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아들과의 내분으로 궁예를 멸망시킨 왕건에게 패하고 말았다. “가련토다, 완산 아기 아비 잃고 눈물짓네”라는 참요만 남기고 견훤이 세웠던 후백제는 사라졌다. 후백제의 견훤과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여 승리한 태조 왕건은 호남 차별을 명문화한 ‘훈요십조’를 남겼고, 8조에서 “차현 이남과 공주강 이남의 사람은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등용하지 마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후 고려시대 내내 호남 지역 사람들은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그러한 폐단이 사라졌으나 선조 때 전주 사람 정여립을 중심으로 조선 선비 1000여 명이 희생된 기축옥사가 일어난 이후 호남은 반역의 고장이라 낙인찍혀 등용에 제한을 받았다.
금산사 오층석탑
송대(松臺)라고 불리는 높은 받침 위에 세워져 있다. 남북국시대 석탑의 기본 양식을 따르면서도 기단이나 지붕돌의 모습 등에서 색다른 면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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