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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천하(三日天下)
사흘 간의 천하라는 뜻으로, 권세의 허무를 일컫는 말이다.
三 : 석 삼(一/2)
日 : 날 일(日/0)
天 : 하늘 천(大/1)
下 : 아래 하(一/2)
(유의어)
백일천하(百日天下)
오일경조(五日京兆)
대중가요의 가사로 많은 사람에 오르내렸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있다. 빨간 꽃이 아름다움을 뽐내도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며 사람이 잘 나가는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하니 사후를 대비하라는 교훈이다.
권세가 10년을 넘지 못한다는 권불십년(權不十年)도 있다. 10일에 비해 까마득하지만 천하를 보면 순간이다.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시황(秦始皇)부터 청(淸)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까지 2130여 년간 211명의 황제 평균 재위기간이 10년 남짓이란 조사도 있어 성어가 알고 만든 듯이 잘 맞다.
한 나라가 한 정권에 속했을 때 천하라 한다. 가장 짧은 3일 동안의 집권이라 하면 조선 말기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884년 급진 개화파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의 청년 지식인들이 우정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민씨(閔氏)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청(淸)의 개입을 요청한 세력들에 의해 3일 만에 축출되고 개화파들이 망명했다.
인조(仁祖) 때인 1624년 반정에 공이 컸던 이괄(李适)이 공신에서 밀리고 반역의 모함까지 받자 군사를 일으켜 새 왕을 세웠지만 사흘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사흘간 단기 집권했다는 이 성어가 우리나라에서 기원했을 법 하지만 중국 검색 사이트 바이두(百度)에도 일본에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 센고쿠(戰國)시대인 1582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라는 무사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암살하고 천하를 손에 넣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토벌되었다. 이 기간이 13일이지만 통상 삼일천하라 불린다고 한다. 이 밖에 백일천하(百日天下)는 프랑스 나폴레옹이 1815년 엘바 섬에서 빠져나와 제정을 부활하고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지배를 말한다.
천일(千日)로 유명한 앤 불린(Anne Boleyn)은 영국 헨리 8세와의 파란 많은 결혼생활을 끝내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의 기간이었다. 삼일이든 백일이든 차이는 있지만 모두 짧다는 것이 공통이다. 잘 나갈 때 덕을 베풀었으면 내려와서도 존경받는데 그런 사람은 드물다. 부귀영화를 누릴 때는 끝나는 시기가 없을 듯이 주위에 거들먹거린다. 아랫 사람의 신망을 잃으면 그 자리가 더 짧아지는데도 그렇다.
삼일천하(三日天下)
이 성어는 사흘 간의 천하(天下)라는 뜻으로, ①권세(權勢)의 허무를 일컫는 말로 극히 짧은 동안 정권을 잡았다가 실권(失權)함의 비유이다. ②발탁되어 어떤 지위에 기용되었다가 며칠 못 가서 떨어지는 일의 비유이다. ③갑신정변(甲申政變)이 3일 만에 실패했으므로 이를 달리 일컫는 말이다.
🔘 이괄의 난(李适의 亂)
이괄의 난은 1624년(인조 2) 평안병사(平安)兵使) 이괄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을 가리키는데 그의 도성 진입을 흔히 삼일천하(三日天下)에 비유하곤 한다. 인조 즉위 후 서인(西人)들은 반정 공신인 공서파(功西派)와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로 갈려졌고, 공신들의 사적 군사력이 그대로 유지되자 훈신군관(勳臣軍官)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다.
공서파들은 정권 안정을 위해 대북(大北), 소북(小北) 인사의 처형과 반역 음모 적발에 힘을 기울였고, 자기파 중심의 논공행상을 함에 따라 비서인(非西人)이자 무관인 이괄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머물게 되었다. 이어 후금(後金)의 성장으로 인해 북방문제가 심각해지자 이괄은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평안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겸 부원수(副元帥)에 임명되어 영변(寧邊)으로 출진했다.
그런데 1624년 1월에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우(李佑) 등이 이괄(李适)과 그의 아들 전(旃), 한명련(韓明璉), 정충신(鄭忠信), 기자헌(奇自獻), 현집(玄楫), 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에 기자헌, 현집 등을 문초했으나, 역모에 대한 단서는 잡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공서파들은 이괄이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두렵게 생각하고 일단 아들 전(旃)을 서울로 압송하여 문초하려 했다.
이에 이괄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전(旃)을 압송하러 온 이들을 죽이고 역시 서울로 잡혀가는 한명련(韓明璉)을 구해내어 ‘군측(君側)의 악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월 22일 항왜병(降倭兵) 100여명을 선봉으로 하여 1만 2,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이괄군은 도원수군과의 충돌을 피하여 영변(寧邊), 자산(慈山), 상원(祥原), 평산(平山), 개성(開城)의 진격로를 택했다.
이괄군은 황주신교(黃州薪橋)에서 정충신(鄭忠信)과 남이흥(南以興)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긴 후, 평산(平山)이 경비가 엄함을 알고 봉산(鳳山) 고읍에서 전탄(箭灘)을 건너 샛길로 진군하여 마탄에서 또 관군을 대파했다.
이괄군이 개성(開城)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난갔고, 2월 11일 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景福宮) 옛터에 주둔하여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관원을 배치하여 새로운 행정체제를 세웠다. 한편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의 마음을 안심시키며 생업에 충실할 것을 당부했다. 이때 도원수 장만(張晩)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길마재(鞍峴)에서 진을 치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반란군의 공격에 응전했다.
2월 11일 이괄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길마재를 포위,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밤에 수구문(水口問; 지금의 광희문)을 나와 광주(廣州)로 향하다가 관군의 추격으로 완전히 흩어졌다. 이후 이괄, 한명련이 2월 15일 이천(利川)에서 부하장수 기익헌(奇益獻)과 이수백(李守白)에게 죽음을 당함으로써 난은 실패했다.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국왕의 몽진 등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공신세력 내부의 갈등의 노골화, 어영청(御營廳) 등 군영재편(軍營再編)을 초래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後金)으로 도망가 남침의 야욕을 자극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 갑신정변(甲申政變)
조선(朝鮮) 고종(高宗) 21년(1884)에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당(開化黨)이 민씨(閔氏) 일파를 몰아내고 혁신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일으킨 갑신정변 때 정권을 잡았던 개화당이 3일만에 실각한 일을 이르는 말이다. 고종 때의 정치가이자 혁명가인 김옥균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고우(古愚)이고,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6세 때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가 1872년(고종 9)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교리(校理),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면서 관료로서 출세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박규수(朴珪壽), 유대치(劉大致), 오경석(吳慶錫) 등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1881년(고종 18)에 일본을 시찰하고, 다음해 다시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에는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서재필(徐載弼) 등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다가, 1884년(고종 21)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부측에 군인 양성을 위한 300만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당시 청(淸)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민씨 일파의 세도정치가 지나치게 수구적인 데 불만을 품고 국제정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개혁을 단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수구파의 제거가 불가피 하다고 보고, 신축한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거사를 감행하여 한규직(韓圭稷) 등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의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국가 재정의 실권을 잡았으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한 후 1894년(고종 31)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가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 갑신정변은 민중이 직접 일으킨 것이 아닌 소수의 지성인들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구분되고,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항거가 아닌 기층질서(基層秩序)에 대한 개혁의지였다는 점에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과도 구분된다.
또 왕조(王朝)의 제도적 개혁을 뛰어넘어 왕조 질서 그 자체의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갑오개혁(甲午改革)과도 구분된다. 갑신정변에 투영된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문벌(門閥)의 폐지, 인민평등 등 근대사상을 기초로 하여 낡은 왕정사(王政史) 그 자체에 어떤 궁극적 해답을 주려는 혁명적 의도가 들어 있었다.
1895년(고종 32)에 법부대신(法部大臣) 서광범(徐光範)과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되고, 1910년(융희 4)에 규장각(奎章閣)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기화근사(箕和近事), 치도약론(治道略論), 갑신일록(甲申日錄:手記)등이 있다.
🔘 서한(西漢)의 선제(先帝) 때에 수도인 장안(長安)에서는 도둑떼들이 날뛰어서 집집마다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장폐라는 사람이 장안의 태수로 부임해 온 뒤 우선 민간으로 나아가 시찰을 해본 결과 이들 도둑떼가 엄격하게 조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두목이 뒤에서 명령을 시달하고 부하들이 행동을 하는 것이다.
두목은 호화스런 마차를 타고 다니며 고래등 같은 집에서 수많은 계집종들을 거느리며 살고 있었다. 장폐는 포도청(捕盜廳)에 비상근무를 발동시키고 샅샅이 수색하여 도둑들을 일망타진한 뒤 도망가던 두목도 체포하였다. 그러자 그토록 들끓던 절도사건도 자연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즈즘 장폐의 친구인 양훈이라는 사람이 대역죄를 지어 사형되었는데, 조정에서는 그와 친했던 사람도 관직에서 파면시켰으므로 장폐도 곧 도적의 처벌이 끝나면 물러나야할 처지가 되었다. 장폐는 시름에 젖어 부하인 서순에게 사건 처리를 맡겼다.
그런데 서순은 명에 불응하고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태수가 앞으로 며칠이나 더 관직에 있겠어, 잘해봐야 3일 밖에 더 하겠어? 그런데 왜 내가 그의 명령에 순종하겠냐구. 미쳤나?” 이렇게 떠들고 다녀서 삼일천하(三日天下)란 말이 생겨났는데, 장폐는 서순의 방자한 짓거리를 알아채고는 그를 항명죄로 투옥했다가 3 일이 지나기 전에 목을 잘라버렸다.
삼일천하(三日天下)
개요
삼일천하(三日天下)는 반란 등으로 정변이 성공한 뒤 권력을 잡은 이가 머지않아 진압당하거나 다른 반란에 의해 허무하게 끝난 것을 조소(嘲笑, 비웃음)하여 가리키는 성어이다. 여기서 삼일은 정확히 사흘을 뜻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매우 짧은 기간'이라는 의미이다.
유래
삼일천하(三日天下)는 '불과 삼일 동안 천하를 다스렸다'는 뜻으로, 정변이나 반란, 혁명 등이 발생했으나 그렇게 성립된 정권이 매우 짧은 기간동안 유지된 것을 가리키는 성어이다. 센고쿠 시대의 무장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본래 전국 시대(센고쿠 시대) 일본의 고사에서 유래한 성어로, 1582년 음력 6월 2일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지에서 살해, 교토를 일시적으로 장악했다가 6월 13일 야마자키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당시 이름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패배하여 순식간에 몰락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실제 당시 아케치가 교토를 장악한 시간은 계산하면 11일 정도였지만, 실제 집권 기간이 어찌 되었든 '권력을 쥔 자가 얼마 못 가서 다시 정권을 내준 것'으로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이 사실을 두고 당대 일본인들이 '사흘 천하'라는 유행어로 부르며 아케치 미츠히데를 비웃었으며, 이것이 성어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삼일천하라 부를 수 있는 사례
유사하게 짧은 기간 동안 권력을 잡은 사례로 나폴레옹의 백일천하가 있다. 프랑스에선 백일천하라 하지 않고 '나폴레옹의 백일'이라 불린다. 카탈루냐 공화국은 삼일천하의 대표 주자라 할 만하다. 한 번도 어려운 삼일천하를 두 번이나 기록했기 때문이다.
1931년 4월 14일 프란세스크 마시아가 '이베리아 연방 내에서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언했고, 이에 놀란 스페인 제2공화국이 자치권을 주면서 4월 17일, 3일 만에 마무리 되었다. 이쪽은 역사적인 의의라도 있지만.... 2017년 10월 27일 카탈루냐 독립파가 '카탈루냐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으나 스페인 정부가 헌법 155조를 발동하며 카탈루냐를 직할 통치하면서 10월 30일에 카를레스 푸지데몬 수반을 비롯한 각료 일부가 벨기에로 망명하고, 의회는 자진 해산하였다.
소련이 해체되는 원인이 된 8월 쿠데타도 드라마틱했다. 1991년 8월 19일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연금하고 페레스트로이카를 중단시키려고 했으나 당시 러시아 SFSR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만 인기를 샀고 결국 8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전 병력이 철수하면서 3일 만에 싱겁게 끝났다. 그해 12월 8일 독립 국가 연합이 결성되었고 12월 26일 소련은 해체되었다.
한국사
조선 중기 이괄의 난이 벌어졌을때 초반 기세에 밀린 인조가 음력 2월 8일 공주로 도피하여 이괄이 정권을 차지한 듯 보였고 도성까지 진입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으나, 고작 사흘 뒤인 음력 2월 11일 무악재 전투에서 관군이 승리하고 이괄의 군대는 패전하여 정국이 순식간에 뒤바뀌었고, 이괄은 도주하다가 부하의 배반으로 죽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이괄이 삼일천하의 대명사로 손꼽혔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급진 개화파가 사흘 만에 진압당하며 한국사에서는 갑신정변이 곧 삼일천하의 대명사가 되었다. 김옥균 등은 1884년 양력 12월 4일 오후 6시에 우정국을 습격해 그날 정권을 장악했으나 12월 5일부터 일본이 지원을 중단하고 결국 12월 6일 낮경에 청군의 침공으로 패주했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는 각각 김옥균과 미쓰히데를 삼일천하의 상징으로 알고 있다. 또한 하코다테의 에조 공화국을 삼일천하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는 5개월을 버텼다.
스포츠
현대에서는 스포츠 리그에서 자주 발생한다. 주로 1위와는 인연이 없는 약체 팀이 일시적인 플루크 폭발과 행운으로 1위에 올랐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을 때 하는 말이다. 자기들도 당황하면 이렇게 된다.
캐나다의 육상 선수 벤 존슨은 1988 서울 올림픽 육상 남자 100m 결승에서 미국의 칼 루이스를 제치고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1위로 골인했으나, 3일 후에 도핑 사실이 적발되어 금메달과 기록을 모조리 몰수당했다.
FC 샬케 04는 2000/2001 시즌 최종전에서 5:3 승리를 거두고 우승 경쟁 상대였던 FC 바이에른 뮌헨이 90분에 선제골을 허용하면서 극적으로 우승을 차지하나 싶었지만 94분의 파트리크 안데르손이 극적인 동점 골을 성공하면서 4분 챔피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E스포츠계에서는 칠일천하라는 것이 있다. 한때 스타크래프트의 본좌이자 아이콘이었던 마재윤이 이윤열을 신한은행 스타리그 2006 시즌 3 결승에서 물리치고 만인지상의 절대 본좌에 오른 2007년 2월 24일부터 곰TV MSL 시즌1 결승에서 신예 김택용에게 충격적으로 셧아웃당하기 전날인 3월 2일까지의 짧았던 일주일을 일컫는 표현. 물론 이윤열과의 결승전 한참 이전부터 마재윤은 이미 사실상 최강자인 본좌로 취급받고 있었으며, 3.3 혁명 이후에도 한동안은 그럭저럭 게속 본좌로 불리긴 했지만, 모든 안티 세력을 일소하고 여론을 천하 통일 해 절대 무적으로 군림한 기간은 저 일주일에 불과했다.
2021년 4월 18일, 유럽에서는 슈퍼 리그가 공식적으로 출범한다는 소식이 나왔다. UEFA와 FIFA의 강경 대응에도 굴하지 않고 강행될 것 같았던 슈퍼 리그는 4월 20일 맨체스터 시티를 시작으로 PL 6팀이 모두 탈퇴하고 뒤이어 FC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AC 밀란 등 대부분의 팀들이 탈퇴 의사를 비치면서 해체 수순을 밟았다. 슈퍼 리그 자체가 UEFA나 FIFA의 방식에 반대하며 계획된 리그였기 때문에 갑신정변과 삼일천하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또한 두 사건 모두 자국 국민들의 지지를 못 받은 점도 비슷하다.
삼일천하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膾炙: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림)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제 16대 임금인 인조 2년(1624년)에 발생한 이괄(李适)의 난을 겪으면서 부터라는 것이 역사의 뒷켠으로 전해오고 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서인들이 당시 득세하던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한 정변)에서 나름 공을 세웠다고 이괄(李适)은 생각했다. 그런데 변방인 평안병사로 발령을 받자 이에 불만을 품고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조정을 공격한 사건이다.
이괄의 난은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최초의 사건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이괄은 서울을 점령한 후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왕으로 옹립하고 민심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으로 새로운 행정체계를 도입하는 등 개혁정책을 펼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인조는 이괄의 군대를 피해 공주까지 쫓겨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만(張晩), 정충신(鄭忠信) 등이 지휘하는 조정의 군사들에 의해 반군은 궤멸되고, 사흘 만에 반란의 주모자였던 이괄의 목이 잘림으로써 난은 수습되었다. 세간 사람들의 입에서는 사흘 만에 목이 잘려 죽은 이괄의 어리석음을 빗대 삼일천하(三日天下)라고 수근댔다는 이야기가 야사(野史)로 전해지고 있다.
▶️ 三(석 삼)은 ❶지사문자로 弎(삼)은 고자(古字)이다. 세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 젓가락 셋을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셋을 뜻한다. 옛 모양은 같은 길이의 선을 셋 썼지만 나중에 모양을 갖추어서 각각의 길이나 뻗은 모양으로 바꾸었다. ❷상형문자로 三자는 '셋'이나 '세 번', '거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三자는 나무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대나무나 나무막대기를 늘어놓은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三자는 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숫자 3을 뜻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호의를 덥석 받는 것은 중국식 예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최소한 3번은 거절한 후에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三자가 '자주'나 '거듭'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三(삼)은 셋의 뜻으로 ①석, 셋 ②자주 ③거듭 ④세 번 ⑤재삼, 여러 번, 몇 번이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석 삼(叁)이다. 용례로는 세 해의 가을 즉 삼년의 세월을 일컫는 삼추(三秋), 세 개의 바퀴를 삼륜(三輪), 세 번 옮김을 삼천(三遷),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세 대를 삼대(三代), 한 해 가운데 셋째 되는 달을 삼월(三月), 스물한 살을 달리 일컫는 말을 삼칠(三七), 세 째 아들을 삼남(三男), 삼사인이나 오륙인이 떼를 지은 모양 또는 여기저기 몇몇씩 흩어져 있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삼삼오오(三三五五), 삼순 곧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을 삼순구식(三旬九食),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삼매경(三昧境), 유교 도덕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의 인륜을 일컫는 말을 삼강오륜(三綱五倫), 날마다 세 번씩 내 몸을 살핀다는 뜻으로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을 일컫는 말을 삼성오신(三省吾身),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사흘 간의 천하라는 뜻으로 권세의 허무를 일컫는 말을 삼일천하(三日天下),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남이 참말로 믿기 쉽다는 말을 삼인성호(三人成虎), 형편이 불리할 때 달아나는 일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삼십육계(三十六計), 하루가 삼 년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 몹시 사모하여 기다리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삼추지사(三秋之思), 이러하든 저러하든 모두 옳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삼가재상(三可宰相), 삼 년 간이나 한 번도 날지 않는다는 뜻으로 뒷날에 웅비할 기회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삼년불비(三年不蜚), 세 칸짜리 초가라는 뜻으로 아주 보잘것 없는 초가를 이르는 말을 삼간초가(三間草家), 봉건시대에 여자가 따라야 했던 세 가지 도리로 어려서는 어버이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좇아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삼종의탁(三從依托), 키가 석 자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라는 뜻으로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을 삼척동자(三尺童子), 세 사람이 마치 솥의 발처럼 마주 늘어선 형상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을 삼자정립(三者鼎立), 세 칸에 한 말들이 밖에 안 되는 집이라는 뜻으로 몇 칸 안 되는 오막살이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간두옥(三間斗屋),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삼생을 두고 끊어지지 않을 아름다운 언약 곧 약혼을 이르는 말을 삼생가약(三生佳約), 세 마리의 말을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뜻으로 재물에 욕심이 없는 깨끗한 관리 즉 청백리를 이르는 말을 삼마태수(三馬太守), 세 치의 혀라는 뜻으로 뛰어난 말재주를 이르는 말을 삼촌지설(三寸之舌), 얼굴이 셋 팔이 여섯이라는 뜻으로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의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삼면육비(三面六臂), 사귀어 이로운 세 부류의 벗으로서 정직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과 견문이 넓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익지우(三益之友), 세 가지 아래의 예라는 뜻으로 지극한 효성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지지례(三枝之禮), 머리가 셋이요 팔이 여섯이라 함이니 괴상할 정도로 힘이 엄청나게 센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두육비(三頭六臂), 세 번 신중히 생각하고 한 번 조심히 말하는 것을 뜻하는 말을 삼사일언(三思一言) 등에 쓰인다.
▶️ 日(날 일)은 ❶상형문자로 해를 본뜬 글자이다. 단단한 재료에 칼로 새겼기 때문에 네모꼴로 보이지만 본디는 둥글게 쓰려던 것인 듯하다. ❷상형문자로 日자는 태양을 그린 것으로 ‘날’이나 ‘해’, ‘낮’이라는 뜻이 있다. 갑골문은 딱딱한 거북의 껍데기에 글자를 새기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둥근 모양을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日자가 비록 네모난 형태로 그려져 있지만, 본래는 둥근 태양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갑골문에 나온 日자를 보면 사각형에 점이 찍혀있는 모습이었다. 이것을 두고 태양의 흑점을 표시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먼 옛날 맨눈으로 태양의 흑점을 식별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日자는 태양과 주위로 퍼져나가는 빛을 함께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태양은 시간에 따라 일출과 일몰을 반복했기 때문에 日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시간’이나 ‘날짜’ 또는 ‘밝기’나 ‘날씨’와 같은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日(일)은 (1)일요일(日曜日) (2)하루를 뜻하는 말. 일부 명사(名詞) 앞에서만 쓰임 (3)일부 명사(名詞)에 붙이어, 그 명사가 뜻하는 날의 뜻을 나타내는 말 (4)날짜나 날수를 셀 때 쓰는 말 (5)일본(日本)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날 ②해, 태양(太陽) ③낮 ④날수 ⑤기한(期限) ⑥낮의 길이 ⑦달력 ⑧햇볕, 햇살, 햇빛, 일광(日光: 햇빛) ⑨십이장(十二章)의 하나 ⑩나날이, 매일(每日) ⑪접때(오래지 아니한 과거의 어느 때), 앞서, 이왕에 ⑫뒷날에, 다른 날에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달 월(月)이다. 용례로는 그 날에 할 일을 일정(日程), 날마다를 일상(日常), 날과 때를 일시(日時), 하루 동안을 일간(日間), 해가 짐을 일몰(日沒), 해가 돋음을 일출(日出), 그 날 그 날의 당직을 일직(日直), 직무 상의 기록을 적은 책을 일지(日誌), 하루하루의 모든 날을 매일(每日), 날마다 또는 여러 날을 계속하여를 연일(連日), 세상에 태어난 날을 생일(生日), 일을 쉬고 노는 날을 휴일(休日), 오늘의 바로 다음날을 내일(來日), 축하할 만한 기쁜 일이 있는 날을 가일(佳日), 일본과 친근함을 친일(親日), 일본에 반대하여 싸우는 일을 항일(抗日), 일이 생겼던 바로 그 날을 당일(當日), 일정하게 정해진 때까지 앞으로 남은 날을 여일(餘日), 날마다 내는 신문을 일간지(日間紙), 일상으로 하는 일을 일상사(日常事), 날마다 늘 있는 일이 되게 함을 일상화(日常化), 날마다의 생활을 일상생활(日常生活), 해와 달과 별을 일월성신(日月星辰), 아침 해가 높이 떴음을 일고삼장(日高三丈), 항상 있는 일을 일상다반(日常茶飯), 날마다 달마다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일취월장(日就月將), 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다는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일구월심(日久月深) 등에 쓰인다.
▶️ 天(하늘 천)은 ❶회의문자로 사람이 서 있는 모양(大)과 그 위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一)의 뜻을 합(合)한 글자로 하늘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天자는 ‘하늘’이나 ‘하느님’, ‘천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天자는 大(큰 대)자와 一(한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天자를 보면 大자 위로 동그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의 머리 위에 하늘이 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하늘은 동그랗고 땅은 네모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天자는 사람의 머리 위에 동그라미를 그려 ‘하늘’을 뜻했었지만 소전에서는 단순히 획을 하나 그은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天(천)은 (1)하늘 (2)범 인도(印度)에서 모든 신을 통들어 이르는 말. 천지 만물을 주재 하는 사람, 곧 조물주(造物主)나 상제(上帝) 등 (3)인간세계보다 훨씬 나은 과보(果報)를 받는 좋은 곳. 곧 욕계친(欲界責), 색계친(色界天), 무색계천(無色界天) 등 (4)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늘 ②하느님 ③임금, 제왕(帝王), 천자(天子) ④자연(自然) ⑤천체(天體), 천체(天體)의 운행(運行) ⑥성질(性質), 타고난 천성(天性) ⑦운명(運命) ⑧의지(意志) ⑨아버지, 남편(男便) ⑩형벌(刑罰)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하늘 건(乾), 하늘 민(旻), 하늘 호(昊), 하늘 궁(穹),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흙 토(土), 땅 지(地), 땅 곤(坤), 흙덩이 양(壤)이다. 용례로는 타고난 수명을 천수(天壽), 하늘과 땅 또는 온 세상이나 대단히 많음을 천지(天地), 타고난 수명 또는 하늘의 명령을 천명(天命), 사람의 힘을 가하지 않은 상태를 천연(天然),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이 곧 황제나 하느님의 아들을 천자(天子), 우주에 존재하는 물체의 총칭을 천체(天體), 부자나 형제 사이의 마땅히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를 천륜(天倫), 타고난 성품을 천성(天性), 하늘 아래의 온 세상을 천하(天下), 천체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천문(天文), 하늘과 땅을 천양(天壤), 선천적으로 타고난 뛰어난 재주를 천재(天才), 하늘에 나타난 조짐을 천기(天氣), 하늘이 정한 운수를 천운(天運), 자연 현상으로 일어나는 재난을 천재(天災),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 하늘과 땅 사이와 같이 엄청난 차이를 천양지차(天壤之差), 선녀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리가 없다는 천의무봉(天衣無縫), 세상에 뛰어난 미인이라는 천하일색(天下一色) 등에 쓰인다.
▶️ 下(아래 하)는 ❶지사문자로 丅(하)는 고자(古字)이다. 밑의 것이 위의 것에 덮여 있는 모양이며, 上(상)에 대한 아래, 아래쪽, 낮은 쪽, 나중에 글자 모양을 꾸며 지금 글자체가 되었다. ❷지사문자로 下자는 ‘아래’나 ‘밑’, ‘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下자는 아래를 뜻하기 위해 만든 지사문자(指事文字)이다. 下자의 갑골문을 보면 윗부분은 오목하게 아랫부분은 짧은 획으로 그려져 있었다. 윗부분의 오목한 형태는 넓은 대지를 표현한 것이다. 아래의 짧은 획은 땅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下자는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하여 ‘아래’나 ‘밑’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금문에서 숫자 二(두 이)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소전에서는 아래의 획을 세운 형태로 바꾸게 되면서 지금의 下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下(하)는 (1)아래. 밑 (2)품질(品質)이나 등급(等級)을 상(上)과 하(下), 또는 上, 中, 下로 나눌 때의 가장 아랫길(끝째). (3)일부 한자로 된 명사(名詞) 다음에 붙이어 ~밑에서, ~아래서의 뜻으로, 그 명사가 조건이나 환경 따위로 됨. 나타냄. ~하에, ~하에서, ~하의 형으로 쓰임 등의 뜻으로 ①아래 ②밑(물체의 아래나 아래쪽) ③뒤, 끝 ④임금 ⑤귀인(貴人)의 거처(居處) ⑥아랫사람 ⑦천한 사람 ⑧하급(下級), 열등(劣等) ⑨조건(條件), 환경(環境) 등을 나타내는 말 ⑩내리다, 낮아지다 ⑪자기를 낮추다 ⑫못하다 ⑬없애다, 제거하다 ⑭물리치다 ⑮손대다, 착수하다 ⑯떨어지다 ⑰항복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낮을 저(低), 낮을 비(卑), 내릴 강(降), 항복할 항(降), 낮출 폄(貶),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윗 상(上), 높을 존(尊), 높을 고(高)이다. 용례로는 공중에서 아래쪽으로 내림을 하강(下降), 값이나 등급 따위가 떨어짐을 하락(下落), 어떤 사람의 도급 맡은 일을 다시 다른 사람이 도거리로 맡거나 맡기는 일을 하청(下請), 아래쪽 부분을 하부(下部), 강이나 내의 흘러가는 물의 아래편을 하류(下流), 산에서 내려옴을 하산(下山), 낮은 자리를 하위(下位), 공부를 끝내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옴을 하교(下校), 한 달 가운데서 스무 하룻날부터 그믐날까지의 동안을 하순(下旬), 정오로부터 밤 열두 시까지의 동안을 하오(下午), 차에서 내림을 하차(下車), 위에서 아래로 향함을 하향(下向), 보호를 받는 어떤 세력의 그늘을 산하(傘下), 일정한 한도의 아래를 이하(以下), 치적이 나쁜 원을 아래 등급으로 깎아 내림을 폄하(貶下),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을 귀하(貴下), 끌어 내림이나 떨어뜨림을 인하(引下), 원서나 소송 따위를 받지 않고 물리치는 것을 각하(却下), 낮아짐이나 내려감 또는 품질 따위가 떨어짐을 저하(低下),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라는 하석상대(下石上臺), 붓만 대면 문장이 된다는 하필성장(下筆成章), 아랫사람의 사정이나 뜻 등이 막히지 않고 위에 잘 통함을 하정상통(下情上通), 어리석고 못난 사람의 버릇은 고치지 못한다는 하우불이(下愚不移)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