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강승택 | 날짜 : 12-01-04 22:46 조회 : 1755 |
| | | “이대로 잠자듯 갔으면 좋겠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어머니는 잠자리에 들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너무도 엄청난 말을 쉽게 하는 어머니가 그 때마다 야속하고 미웠으나 얼마나 심신이 고단하고 지치면 저러실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열다섯 어린 나이로 한 살 아래인 아버지를 만나 혼례를 치룬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으셨다. 8.15 해방과 함께 월남하시어 6.25 등 역사의 큰 고비를 돌때마다 찾아온 아버지의 경제적 좌절은 어머니로 하여금 길거리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고 결국엔 가족 모두의 생계를 떠맡게 되었다. 목척교(木尺橋) 위에 처음 좌판을 깔던 날, 양말 보따리를 풀던 어머니의 손은 차마 용기가 나지 않으셨던지 몇 번이나 풀었다 묶기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실직이 가져다준 일시적인 고행이려니 믿고 싶었던 나의 희망과는 달리 한 번 시작된 노점상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어머니를 해방시켜 주지 못했다. 어머니가 취급한 물건은 옷 이었다. 전후 복구를 위해 미국으로부터 보내지는 구호물품이 어떤 경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시장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다양한 옷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여자들의 브래지어라는 것을 처음 보게 된 것도 이곳이었다. 대구 피난시절, 앞가슴이 도드라져 나오는 것을 한사코 감추기 위해 애쓰던 큰 누나의 모습과는 달리 서양 사람들은 오히려 과장하기 위해 특별한 속옷을 사용한다니 이해되지 않았다. 검정 치마와 흰 저고리가 당시 한국 여자들의 일반적인 옷차림이었던데 비하면 이곳에서의 갖가지 옷 모양과 색깔은 충격이었다. 어깨선과 가슴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옷들을 뒤적이며 당황해하던 여자들은 이미 변화의 물결에 설렜을 것이다. 어머니가 물건을 파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나에겐 유일한 낙이었다. 학교 공부가 끝나기가 바쁘게 부지런히 시장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보미당의 진열대에 놓인 고기만두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찐빵을 들여다보며 언제 저 것들을 실컷 먹어볼 수 있을까 군침도 흘리고 왕생백화점을 지나 중앙극장 정문 앞에 이르러서는 페인트로 그려놓은 영화 포스터를 올려다보며 이리저리 줄거리를 맞춰보는 재미도 좋았다. 건장하게 생긴 기도 아저씨가 떡 버티고 서있는 극장 안을 힐끗힐끗 훔쳐 볼 때면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한국영화는 비극으로 끝났다. 최무룡, 김지미 같은 주인공에 유난히 얼굴이 긴 허장강이 함께 등장한다면 두 사람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여지없이 깨어지게 마련인 것을 나는 포스터 하나만으로도 알아맞힐 수 있었다. 물건을 놓고 어머니와 손님 사이에 벌이는 신경전도 재미있었다. 입었다 벗었다 하기를 몇 차례, 마음에 들어 곧 살 것처럼 덤비던 사람들도 마지막 흥정에선 돈 몇 푼을 깎아주지 않는다고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리곤 했는데 그런 사람일수록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나는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하시는 말씀이 있었는데 ‘밑지고 판다’는 것이었다. 거짓말이라곤 한 마디도 못하는 줄 알았던 어머니에 대한 신뢰가 금이 간 것도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손님이 흩어지고 한가해질 때면 어머니는 언제나 “무엇 사줄까?”하고 묻곤 하셨는데 이 또한 내가 시장을 찾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하루 장사가 끝나고 짐을 묶을 때면 어머니의 얼굴은 언제나 힘들고 지쳐 보였다. 자신의 몸보다 더 무거운 보따리를 어깨에 들쳐 메고 보관 장소로 이동할 때면 어머니의 작은 체구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올까 신기 했다. 그리곤 밤마다 앓으셨다. 어쩌다 밤중에 일어나 요강을 찾노라면 어머니의 가는 신음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려오곤 했다. 그러면서도 이튿날 아침이면 거뜬히 일어나 시장으로 향하시는 어머니는 한 번도 힘든 내색을 비치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의 몸은 뜸을 뜬 자국으로 어디 한 곳 성한 데가 없었다. 쑥을 가늘게 찌어 피라미드 모양으로 뭉친 후 불을 댕겨 그 열꽃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치료법이었는데 한 마디로 살을 태우는 작업이었다. 저녁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허리에 둘렀던 전대를 풀어놓고 지폐들을 세는 작업부터 했다. 손에 침을 묻혀가며 하나하나 정성껏 세어나갔다. 열장 단위마다 그 중 하나를 반으로 접어 띠를 둘렀다. 어머니가 벌어오는 돈이 얼마나 힘들고 피나는 고생의 대가인가를 모를 리 없는 나는 그러나 어머니 몰래 전대를 뒤진 일이 몇 차례 있었음을 고백한다. 우리 집 앞에는 극장이 있었는데 영화보다는 주로 악극을 공연하는 곳이었다. 공연이 없을 때면 전국 각지에서 개봉, 재개봉까지 거치고 온 철 지난 영화들을 모아다가 두 편씩 묶어 조조할인까지 해 주는 곳이었는데 영화관으로는 하류관인 셈이었다. 일요일이면 딱히 갈 곳도 없을 때 지금의 기억으로 당시의 돈 15원을 들고 아침에 극장 문을 들어서면 두 편의 영화를 실컷 보고 나올 수 있었는데 시간 보내기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이 극장의 진면목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 악극 공연으로 ‘눈물의 여왕 전옥’은 물론 ‘이수일과 심순애’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 등 당시 대표적인 공연에서 나타났다. 분장실이 우리 집 쪽으로 향해 있었던 탓에 지나면서 팔짝팔짝 뛰어오르면 낯익은 출연자들의 얼굴이 모두 보였다. 이런 날 저녁이면 초저녁부터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극장엘 가긴 해야겠는데 돈이 없으니 답답했다. 결국 생각이 미친 것이 어머니의 전대였다. 어머니와 함께 돈을 세어나가다 한두 장 씩 ‘삥땅’을 치는 것이었는데 불쌍한 어머니는 전혀 눈치를 못 채셨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다른 날에 비해 돈이 많이 들어왔다 싶은 날엔 그에 비례해서 한두 장을 더 빼냈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당시의 영화와 배우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이때의 삥땅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머니의 노점상도 차츰 쇄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목척교와 중교가 복개되고 그 위에 현대시설을 갖춘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가 들어서면서 어머니의 노점상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려났다. 시간은 또 다시 흘러 현대시설을 자랑하던 두 상가마저 얼마 전 철거되고, 사라졌던 목척교가 복원되는 과정을 거쳐 사람들 앞에 나타났지만 그 위에 어머니의 모습은 환영조차 만날 수 없다. 5,60년대의 암울했던 시절, 한 가정의 생계를 떠맡아야했던 어머니와 목척교에 대한 기억은 아픔과 함께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
| 이진화 | 12-01-05 00:07 | | 강승택 선생님, 목척교에 얽힌 이야기가 슬프고도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혼인을 하여 주부와 어머니 역할까지 하셨으니 얼마나 노고가 크셨을까요. 어머니의 땀과 눈물이 어린 몇 장의 지폐가 어쩌면 선생님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지극한 투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머니께는 죄송하지만 부모님 앞에서 허물이 많은 독자에게 위로가 되는 에피소드입니다. '아, 저렇게 반듯한 분도 어린 시절에 그런 일탈을 했었구나.'하는 안도감이라고나 할까요. 대학시절 남대문에서 이천 원인가 주고 산 구제품 파카를 입고 학교에 다니던 일도 생각나고요. 아련히 떠오르는 장면들과 함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잘 읽었습니다(^_^* | |
| | 강승택 | 12-01-05 09:26 | | 저도 이 글을 쓰면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짠했답니다. 이진화 선생님, 저, 절대 반듯한 사람 아닙니다. 많이 보듬어주세요, 이선생님의 그 푸근한 어머니같은 심성으로~ ㅎ | |
| | 임재문 | 12-01-05 00:48 | | 저도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어머니의 사랑만큼 포근한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가난했던 그 시절 우리들의 어머니야 말로 자식들을 위해 희생봉사하신 어머님이 아니시던가요? 감동적인 글 잘 읽고 갑니다. 강승택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 | 강승택 | 12-01-05 09:31 | | 임선생님, 감사합니다. 나이 들어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왜 더해만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옛말,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지요? 새 해 더욱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
| | 박영자 | 12-01-05 05:23 | | 강선생님, 언젠가 대전에 갔을 때 목척교를 건넌일이 있어요. 아주 조그마하지만 아담한 다리여ㅆ던것 같아요. 그 다리에 선생님의 아픈 추억이 서려있는줄 알았다면 좀 더 자세히 보아두는 건데... 솔직한 자기고백이 이글을 빛 냅니다. 수필의 매력이 바로 이런게 아닐까요. 이런 진솔한 고백은 다른 어떤 장르로도 표현하기어려윤게 아닐런지요. | |
| | 강승택 | 12-01-05 09:41 | | 다리는 작아도 대전을 상징하는 것 중의 하나가 목척교랍니다. 지금은 커다란 아취로 둘러싸여 예전의 소박함이 많이 사라졌지만요. 박선생님,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새 해, 활기있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 |
| | 양순태 | 12-01-05 08:31 | |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날, 옛 이야기 들려주시는 강승택 선생님 가마솥에서 끓인 구수한 숭늉 한그릇 대접받은 듯한 아침입니다 아련한 그리움이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수필의 상큼한 맛깔이 성찬이었습니다. | |
| | 강승택 | 12-01-05 09:50 | | 양선생님, 잠시라도 추위를 녹일 수 있으셨다면 더 없이 다행입니다. 양선생님의 따뜻한 시선이야 말로 저에게 용기를 북돋는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
| | 김용순 | 12-01-05 08:40 | | 강선생님, 그 시절에는 누구나 가난하였지요. 더구나 이북에서 월남하셔서 더욱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머님의 피나는 노력 덕택에 자식들을 반듯하게 키우셨겠지요. 사실은 나도 대학 다닐때, 어머니 지갑에서 돈 훔쳐, 막걸리 값이나 데이트 비용으로 썼지요. 당시에는 어머니가 돈을 좀 만지고 있어, 가끔 삥땅을 해도 모르데요. 아버지 케비넷에서는 담배 훔치고요. 우리 아버지는 모른척 하셨을 것입니다. 그 때가 그립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 | 강승택 | 12-01-05 09:56 | | 막걸리 값은 어머니의 지갑, 담배는 아버지의 캐비넷에서~ 역시 김선생님다운 화끈한 자기 고백이 웃음을 자아냅니다. 당시로는 가슴떨리는 모험이었겠지만 돌아보면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 한토막~ 새 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
| | 임병문 | 12-01-05 09:08 | | 세월이 아련해질수록 그 느낌은 더욱 새록해지는 것같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애련한 기억과, 그 기억속에서 성장해가는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흑백필름의 음영처럼 제 가슴을 적십니다. 그 세월이 아픔이고, 그 세월이 환희이듯 삶의 의미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봅니다. 선생님의 글이 연이어 저를 감동시키는군요. 엄동에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
| | 강승택 | 12-01-05 10:03 | | 시대가 많이 풍족해질수록 우리는 왜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흑백필름을 뒤로 돌리면 차라리 그 시절이 순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게되고요.날씨가 많이 차갑습니다. 옥체 보존하소서! | |
| | 박원명화 | 12-01-06 11:23 | | 목척교~아 듣기만 해도 지난 날의 추억들이 머릿속에서 몽실몽실 피어납니다. 저두 그 다리를 많이 건너다녔거든요. 그땐 서로 모르고 지나쳤을터이지만, 말입니다. '어머니'는 생각만 해도 가슴저리고 그리워집니다. 시대의 가난속에서 몸부림치시던 우리의 어머니, 그래도 가슴이 따뜻했던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 |
| | 강승택 | 12-01-07 08:13 | | 언제 대전 방문 기회가 있으시면 옛추억도 살릴겸 목척교를 다시 한번 걸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많이 변했지요. 멋진 아취도 생기고 하천도 많이 정비 되었답니다. 감사합니다. | |
| | 김자인 | 12-01-18 17:58 | | 강승택 선생님, 선생님 글을 읽으니 마음이 짠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머니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하지요. 예전의 어려웠던 시절 모든 어머니들이 선생님의 어머니처럼 고단한 삶을 살다가 가셨지요. '목척교 위의 어머니'가 영화의 한장면 같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 |
| | 강승택 | 12-01-19 11:24 | | 김자인 선생님 감사합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할때면 저희들 세대에 누리는 호사가 마음 편치 않을 때가 많답니다. 금년 한 해, 김선생님의 건필을 빕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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