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28.土. 흐리고 비
옥동서원의 함실아궁이와 단지 님 댁의 부뚜막아궁이.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든 채로 어디선가 빗방울 듣는 소리가 “투둑투둑” 들려오면 생각이 참 편안해져온다. 그렇게 가만 누워서 뒹굴뒹굴대며 한 십여 분간 생각들을 돌돌 굴려보는 재미는 일상을 세밀히 즐기며 활기 있게 시작하는 깨소금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 생각들 사이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살금살금 끼어든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오늘 아침이 그랬다.
옥동서원玉洞書院의 대문은 솟을대문이 아니라 2층 문루門樓로 되어 있다. 아래층 출입문에는 회보문懷寶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으며 이층 누각에는 난간을 두르고 중앙에는 마루를 두었고 양 옆으로는 온돌방을 놓았는데, 방 아래에 축대를 쌓아 앞쪽으로 아궁이를 설치했다. 그러니까 대문 앞에서 보면 대문 양 옆으로 한단 올라가서 두 개의 아궁이가 밖을 향해 입을 쩌억 벌리고 있는 형국이다. 언젠가 아궁이에 불을 땐 적이 있는 모양으로 아궁이 바닥에는 재가 쌓여있었지만 근래에는 불기가 없었던 탓인지 이런저런 쓰레기를 버려놓은 것이 눈에 살짝 거슬렸다. 이 두 개의 아궁이는 온돌을 덥히는 난방용이니까 구태여 구분을 하자면 함실아궁이인 셈이다. 그러니까 아궁이는 음식을 조리하지 않는 단순 난방용인 함실아궁이와 솥을 걸고 조리를 하거나 물을 데울 수 있는 부뚜막아궁이가 있다.
옥동서원은 조선조의 뛰어난 명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지와 유머가 넘쳤던 소탈한 인품을 갖춘 황희정승의 위패를 모신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그러한지 서원도 소탈하고 은근한 멋과 재치를 뽐내고 있었다. 바깥쪽에서 대문을 바라보면 당당한 2층 문루인데 담장을 살짝 넘어 들어가 안쪽에서 쳐다보면 마당이 높아서 문루가 1층으로 보였다. 아궁이가 대문 바깥쪽을 향해 나 있는 서원은 아마 옥동서원이 유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언젠가 또 한 번 보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 장소가 어딘지 기억이 아물거렸다.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균형과 다툼이라는 관점에서 조선 500년의 역사를 보면 신권을 대표했던 의정부議政府는 육조 이하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괄하는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으로써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는지 황희정승을 예로 들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태종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황희정승이 세종 대에 이르러 의정부의 수장인 삼정승으로 활동을 하면서부터 세종대가 얼마나 태평천국을 이루어 갔는지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훤히 보게 된다. 왕권과 신권의 다툼이 아니라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한 통치와 정치가 예술로서 빛나던 시기였다. 뛰어난 많은 인재들 가운데서도 그 중심에 우뚝 선 분이 바로 황희정승이었던 것이다. 예정시간보다 일찍 오늘 답사장소로 출발을 했지만 내비게이션의 센스 없는 길 안내로 이리저리 돌아오느라 조금 늦어진 진주댁 행복이 님을 기다리는 동안 나 홀로 고적孤寂하게 옥동서원 안팎을 잘 돌아볼 수 있었다. 이런 것을 두고 예기치 않은 행운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민감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유아기의 흑백으로 된 기억을 닮은 세심한 빗방울이 어쩌다 이마에 풀풀 떨어져 내렸다.
단지 님 댁의 부뚜막아궁이.
단지 님 댁을 길에서 바라보면 오른편으로는 보물 같은 푸른 솔숲이 일렁이고 있고, 정면에는 크고 작은 수십 개의 항아리들이 가지런히 줄맞춰 서 있으며 그 안쪽으로는 지붕이 있는 작은 샘터가 있고, 그 뒤편으로는 앞에서 보면 2층이고 뒤편으로 돌아가서 보면 보물창고가 그 아래 숨어 있어서 3층으로 보이는 황토색 본채가 보인다. 그리고 본채 왼쪽으로는 사랑채 같은 단층 건물이 하나 있는데, 내가 주목을 하고 들어가 본 주방 겸 부엌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는 새로운 집에 방문을 하거나 들를 때면 부엌이나 주방 공간을 구경하기를 좋아하는데 요즈음 주택구조는 거실에 연결된, 부엌이라고 하기에는 마땅치 않은 주방과 싱크대 문화라서 사실 별로 볼 것이 없다 하지만 고가古家의 사대부 집이나 사찰의 후원은 아늑하고 넓은 공간과 벽에 그을음 번져있는 아궁이와 부뚜막에 운치韻致가 서린데다 세월의 흔적만큼 연륜이 구석마다 촘촘히 쌓여 있어서 마음까지 훈훈해져온다. 그 어슴한 집안의 틈새를 나는 참 좋아한다.
단지 님 댁 부엌에 들어서면 왼편으로는 큰 냉장고가 세대 나란히 벽으로 붙어 서있고, 오른편 안쪽으로는 아궁이 네 개와 부뚜막 위에 걸린 무쇠 가마솥 네 개가 보인다. 가마솥 크기에 비해 아궁이가 작은 것은 아마 땔감으로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가스를 연료로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 네 개의 가마솥에서 무언가를 끓이고, 삶고, 쪄낼 경우에는 부엌 안은 희부연 김들로 가득 차 있어서 신비로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아득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날렵한 몸매의 단지 님이 김이 서려 자꾸 콧등 아래로 밀려 내려오는 안경을 치켜 올리면서 재빠르게 손을 놀려가며 솥뚜껑을 열고 그 안을 쳐다볼 때마다 하얗고 뜨거운 김들이 그 안에서 뭉클뭉클 쏟아져 나오겠지.
영광에 가면 꽃무릇이 유명한 불갑사佛甲寺라는 절이 있다. 1970년대 초반이었던 그때에는 꽃무릇이라는 이름이 없었으니 그 꽃을 누구나 상사화相思花라고 불렀다, 물론 지금처럼 관광객을 위한 유원지 같은 형상이 한 군데도 없었으며 그저 꽃무릇도 숲 속에 여기저기 군락을 지어 피어날 뿐이었고, 우리도 때가 되면 붉게 피어나는 가을 한 철의 산중 꽃으로만 생각을 했었다. 그곳은 일 년 열두 달 지나가야 주말이면 어쩌다 서너 사람이 들렸다 갈뿐이었던 산속의 고요한 절이고, 산이고, 숲이었다. 불갑사 후원에도 커다란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가 두 개 있었는데, 한 달에 한 번쯤은 그 안에 쌓인 재를 치우려고 사람들이 고래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재를 한참 삼태기에 퍼내다보면 고래 안쪽의 개자리까지 들어가 재를 끌어내 올만큼 아궁이가 크고도 넓었다. 부뚜막 위 벽을 타고 천정까지 수백 년 묵은 그을음이 새까맣게 번져있었는데 벽에는 작은 감실이 있어서 조왕신竈王神을 모신 단지와 위패가 있었다. 그 아늑했던 부엌 공간은 항상 내 상상력의 친구가 되어주곤 했었다.
부엌에 있는 아궁이는 집안의 온기를 책임지는 화기火氣와 집안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조왕신이 노는 자리였다. 그래서 부뚜막 위로는 함부로 발을 올려놓거나 비린 것을 놓지 못하는 성역이었고, 아궁이 안은 단정하고 청결해야 했다. 물론 원래 음식을 만드는 곳인 부엌이라는 곳이 단정한 마음과 청결한 태도를 간직해야만 정성이 담긴 음식을 조리할 수 있었을 테니까. 요즈음 어디를 가도 보기 드문, 더욱이 단지 님 댁인 민가의 부엌에서 한동안 홀로 서성거리며 그 어둠직하고 유여한 공간에 몸을 지긋하도록 담가 보았다. 좋았다, 참 좋았다.
(- 제135차 상주 백화산 둘레길 : 옥동서원의 함실아궁이와 단지 님 댁의 부뚜막 아궁이. 2 -)
첫댓글 돌다리에 앉아서 하염없이 구수천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시더니 또 잉태하셨군요....
긴울림님~ 걸으시는 걸음걸음을 참 세세히도 기억을 하십니다. 저도 덕분에 따듯한 김 쏘이며 잘 보았습니다.
함실아궁이와 부뚜막 아궁이 그 쓰임새가 다르지만 추운 몸을 녹여주고 고픈 배를 채워주는 따듯한 온기가 느껴집니다. 긴울림님~ 감사합니다. *^^*
진천 우리동네에도 한국 온돌학회 교수님이 사시는데 그분도 함실 아궁이를 만들어 놓고
겨울이면 찜질 하러 오라고 부르시지요
고래가 어찌나 긴지 길고 덩치 큰 나무가 한도 없이 들어 간답니다
옥동서원은 주차만 했지 자세히 못보고 왔는데 긴울림님의 글로 궁금증을 풀었습니다
감사해요 기~~인 울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