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 진보 격문 (討 進步 檄文) 최 치원
<목 차> 1. 지금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2.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소유욕이다. 3. 경제발전은 민주주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4. 박정희의 재평가 5. 김대중의 구조조정은 민족적 재앙이었다. 6. 귀는 없고 눈은 하나요 입은 둘인 괴물이 청와대에 살고 있다. 7. 도올, 그것밖에 되지 않는가?
1. 지금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본인이 중국특송업에 종사한 지 벌써 7년인데, 날이 갈수록 두려움이 커져간다. 중국이 거대하게 일어서는 모습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상당한 물량의 원단과 의류부자재가 들어갔었는데, 이젠 역으로 중국산 원단과 의류부자재가 쏟아져 들어온다. 다른 부자재나 잡화를 수출하는 분들은 차츰 고급스러워지는 중국산의 벽에 부딪치고 있고, 광조우의 무역박람회에 다녀온 분들은 '이제 더 이상 수출할 물건이 없다'고 한숨을 쉰다. 반면에 사무실에서 책상을 같이 쓰던 조선족 무역상은 수십 가지의 기발한 아이템을 들여오고, 홈쇼핑과 할인매장을 공략할 저가제품의 개발에 골몰하고 있다. 또 산동성에서 투자유치를 위해 고급관료가 들어오면 본인의 화교친구는 그들을 각 지방의 기업으로 안내하고 있다.
그러다 추석이 끝날 무렵 정말 가슴이 철렁하는 뉴스를 들었다. 중국과 우리의 기술격차가 2.1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 사실이다. 아니 이미 앞서나가려는 그들의 질주를 보면 2년이란 기간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들은 무진장의 노동력과 거대한 두뇌집단을 확보하고 있고, 전권을 장악한 후진타오는 경제성장만이 유일한 목표라고 천명하였다. 각 성마다 수많은 집단(우리의 대기업)이 있는데 그들의 자본력은 상상을 초월하고, 년 백만 불 이상의 소득자도 우리의 네 배이다. 거기다 이미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니 그들이 못할 것인 무엇인가? 두고 보라. 정말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들은 IT산업마저 따라잡을 것이다. 서울의 한복판에 하이얼 간판이 들어서고, 그들의 지사가 한국의 산업을 차례차례 잡아먹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상생을 이야기하던 때가 어제인데 온 나라가 갈갈이 찢어져 있고, 지도자는 조각배를 풍랑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세계가 경제만이 살길이라고 외치고 있는데, 우리는 4대 개혁입법을 놓고 결사항전을 벌이고, 나라의 정책브레인들은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돼서 아득바득 싸우느니 차라리 5천 달러에서 화목하게 살자'는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 또 386은 경영인과의 모임에서 '기업의 원죄가 워낙 크므로 규제를 달게 받으라'고 강조한다.
이런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 인간이 진실로 갈구하는 것은 부이고, 부는 가장 효율적인 생산양식인 기업을 통해서만 창출되는데, 아무도 기업을 사랑하지 않고, 기업가를 혐오하면 정의로운 자가 된다. 적자예산을 편성하여 복지예산은 대폭 늘이면서 산업관련 예산은 오히려 줄어버렸고, 미국에게 할말을 조금 하는 대가로 국방비를 10%나 늘려야 했고, 지배세력의 교체를 위해 수도이전이라는 거대한 도박을 시도하였다. 카드대란과 자영업의 몰락으로 구매력이 고갈되고, 중소기업이 거대한 도산의 바다로 빠져들려 하는 이 시점에 진보적 정책결정권자는 구름에 달 가듯이 분배정책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날 것이라고 공언한다.
서민들의 아우성이 빗발치고 요식업자들이 솥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의 지도자는 아직도 우리 경제는 영양제가 필요 없고, 87년의 혼란에도 10%대의 성장을 달성했다는 주장을 거듭하고 있으니 이렇게 통탄할 일이 있는가? 그 때는 사업가 정신과 성장잠재력이 폭발할 때고 지금은 성장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는데 어찌 그 때와 비교할 수가 있단 말인가? 무지인가 용맹인가?
우파적인 경제정책을 쓰고 있다고 강변하지만 투자의욕을 고갈시켜버렸는데 어떻게 경기회복이 가능한가? 소유와 경영은 분리되어야 하고, 유리알처럼 투명하지 않은 기업에는 가혹한 비난과 처벌이 가해지고, 노조가 무섭고, 중국제품의 위협이 커져 가는데 누가 투자를 하고 창업을 하겠는가? 새로운 일자리의 창출이 불가능한데도 노조와 똑똑한 자들은 우리의 기업을 중국으로 쫓아내기 바쁘고, 후손들은 점점 가난해지는데 막대한 국가채무를 떠안고 노년층을 먹여살려야 하니 '10년 후' 한국호는 갈갈이 찢겨져 난파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하루빨리 망해버려 좌파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살 길 아니겠는가?
이 모든 비극의 출발점은 진보는 선이요, 보수는 곧 악이라는 관념적 착오에 기인한다. 과도하게 사욕을 채우는 모든 기득권 세력은 척결의 대상일 뿐이니 화합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가족/형제/이웃과 반목하고 남쪽의 동포를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그들이 민족과 통일을 운운하는 것도 우습다. 일국의 총리가 외국기자와 국감장에서 야당을 모욕하는 데엔 정말 숨이 막힌다. 더구나 노무현 대통령은 '강남의 썩은 인간들과는 차 한잔 나눌 가치도 없다'고 하였는데, 국민이 상류층에 적개심을 가지도록 선동하는 게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들만이 정의이기 때문에 그들 편이 아닌 자와는 한 땅에 살기 싫다는 의미 아닌가? 그들의 이상국가는 남쪽의 꼴보수는 모조리 바다에 처넣고 동포의 피를 빨아먹는 김정일을 끌어안고 사는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란 그들끼리 갈라먹자는 것이고 진보란 골고루 나누어먹자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는데 과연 그런가? 과연 진보는 정의롭고 분배주의는 정당한가?
분배주의는 기본적으로 고소득층의 세금을 많이 걷어 서민층에게 더 많은 복지를 나누어주자는 개념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금을 많이 걷더라도 끝없이 부가 샘솟는 생산수단을 박탈하지 못하는데 그걸로 평등을 실현하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반면 그 돈으로 서민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건 감질나는 보조금 뿐이다. 그럼 서민들은 보조금을 원하는가 일자리를 원하는가? 본인 딸아이의 표현처럼 배고픈 아이에게 빵을 주는 것이 복지인가 구두통을 메어주는 것이 복지인가? 자기 손으로 생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존재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아닌가?
서민들이 가진 생산수단은 오로지 몸뚱아리이다. 노동력을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일자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분배주의로 세금을 과도하게 걷으면 자본의 집적이 힘들어지고, 새로 창업을 꿈꾸는 자는 기대수익률이 낮아져 모험을 하지 않는다. 세율에 제곱하는 만큼 투자가 위축되어 일자리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시가 감세정책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또 그들을 나쁜 놈이라고 몰아치면 지들끼리의 성을 쌓고 나쁜 짓을 더 많이 하게 되고, 또 재산을 싸들고 나가 땅투기나 할 것이니 이 땅에 남아있는 서민들만 불쌍하게 된다.
그럼에도 민노당의 심상정 의원은 복지확대로 개인의 구매력이 늘어나야 경기가 확대된다는 주장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이다. 복지로 풀려나간 자금 중 재투자로 이어질 수 있는 건 일부에 불과하겠지만 세금이 줄어들면 그 금액은 고스란히 기업의 운전자금으로 남아 있고, 당연히 그것은 대부분 재투자될 확률이 높은 자금이다. 그리하여 생산라인을 늘리면 수출과 일자리가 늘어나고, 그 결과 국민들이 받는 급여의 총량이 늘어나 가장 확실하게 경기가 확대된다. 그렇다면 복지확대보다 감세정책 혹은 친기업적 정책이 국민의 배를 불릴 가능성이 더 많지 않은가?
그럼에도 평등사회를 주장한다면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실패는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그렇다면 분배주의는 평등의 이상도 실현하지 못하면서 경제를 위축시켜 서민들의 꿈을 박탈하고 빈부격차를 확대시키니 그 고상한 이상과는 달리 오히려 '공공의 적'으로 기능한다. 그래서 유럽에서도 과도한 복지에 대한 회의가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논리로 말해 오늘 거위의 배를 갈라 배불리 나눠먹으면 내일 먹을 게 적어지고 후손의 삶이 가난해진다. 오늘 박봉을 받고 열심히 일해 거위의 숫자를 늘려야만 미래의 삶이 윤택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분배주의가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가 명분이 있으니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어리석은 국민들은 약자의 편을 드는 진보가 정의롭다고 믿음으로써 자신의 발등을 찍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보수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민족의 미래를 새로 열기 위해서는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구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 결론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
2.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소유욕이다.
인간심리는 지극히 복잡다기하고 모든 욕망이 절실한 것이어서 원초적인 욕망을 규정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욕망을 몇 가지의 유형으로 분류하고 거시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면 원초적 본능이 명확히 드러난다.
우리가 인간에 대해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유기체적 욕구가 근원적 본능이라는 착오에 기인한다. 물론 유기체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생존할 수 있으니 원초적 본능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런 욕구는 물질적 대상을 쟁취해야 달성될 수 있으니 환경적 조건도 역시 우리의 생존을 좌우하게 된다. 그런데 환경적 조건을 인식하고, 적절한 행동을 선택하는 주체는 대뇌의 인식/분석/사고능력을 바탕으로 한 자의식이다. 우리가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기체적 충동'과 '대상물에 대한 인식'이라는 두 가지의 인식작용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의식의 매개작용이 없으면 충동도 인식될 수 없고, 환경적 대상도 인식할 수 없고, 어떤 행동도 결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충동과 욕망은 상이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먼저 환경적 위협을 느끼면 즉각 방어태세를 갖추는 것처럼 충동은 유기체의 외부에서도 가해진다. 따라서 자의식의 입장에선 유기체적 충동과 환경적 요구는 동일한 충동의 의미를 가진다. 그 결과 자의식이 이런 충동을 해소해주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절박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곧 욕망으로 형상화되고, 그에 적합한 행동을 선택하게 된다. 더구나 유기체적 충동은 환경적 자원을 획득해야만 해소될 수 있으니 밥을 먹고, 애인을 사귀고, 영화를 보고 싶다는 등의 모든 욕망은 ‘대상’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욕망은 대뇌에서 전개되는 ‘의식과정’의 일종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이왕이면 맛있는 음식을 원하고, 남자들은 이쁘고 가슴 큰 여자를 원한다. 자의식이 환경적 조건에 맞추어 유기체적 충동을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리비도이론은 자의식을 허수아비로 보고 거대한 충동의 바다인 무의식을 본능의 근원으로 상정하였으니 이것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혼돈에 빠뜨려버렸다. 무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기억의 덩어리이니 대뇌의식에 저장된 것이고, 거기엔 억압된 욕망이 녹아 있는 것이 아니라 억압의 결과 발생한 자의식의 상처가 녹아 있는데 후발적인 그것을 본능의 근원으로 상정해버린 것이다. 나아가 자존심/정체감의 욕구/성취욕/자유에의 의지/오락욕/휴식욕과 같은 대부분의 욕구가 자의식에 의해 촉발되는 것인데 이것을 리비도의 변형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하다. 행동의 결정자인 자의식을 본능의 주체로 설정해야만 인간의 양면성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럼 자의식의 원초적 본능은 무엇인가? 내적/외적 충동을 해소해주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절박감에서 무언가를 모색하고 있으니 생존본능이 원초적 본능이다. 그런데 존재에 대한 위협은 주로 외부에서 가해진다. 물질적 자원은 희소하여 늘 타인과 경쟁을 해야 하고, 환경적 위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존재 자체가 위태로와진다. 성급하게 달려들다 타인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힘센 놈은 내가 욕심을 부리지 않는데도 공격을 해온다. 또 욕구충족에 실패하면 자신이 그 고통을 전달받고 책임을 져야 한다. 이 과정 속에서 자의식은 끊임없이 상대방에게 굴복할 것인지 그를 굴복시킬 것인지 아니면 원만한 관계를 맺어 불안감에서 벗어날 것인지 고민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심각한 불안과 존재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자의식의 일차적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런 불안과 위협을 최소화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즉 유기체적 충동보다 환경적 생존을 우선적 과제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생존본능이 우선하기에 누구에게 쫓기거나 존재의 위협을 느끼면 식욕/생리욕마저 잊게 된다. 선언적으로 말한다면 유기체적 ‘충동’이 ‘생존본능’에 앞설 수 없고, 자의식은 ‘긴장과 불안’을 가장 혐오한다.
그런데 동물의 생존본능과 인간의 생존본능은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은 기억력이 아주 뛰어나기 때문이다. 동물은 허기만 면하면 욕구가 사라지지만 자의식은 한번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 다시는 그런 고통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더욱 강렬한 욕망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자의식은 늘 미래의 불안에 대비하고자 하며, 심지어는 사후세계에 보험을 들어두기 위해 종교에 매달리기도 한다.
미래의 불안을 제거하는 최선의 방법은 물질을 대규모로 저장해놓는 것이다. 그래서 저장수단이 없는 동물들은 먹이감만 있으면 생존본능에서 해소되지만 사람은 부/재산/물질을 저장해놓아야 장기적인 생존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조금 더 효과적인 방법도 있다. 완력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거나 권력적 지위를 획득하면 자동적으로 부도 보장된다. 따라서 유기체적 욕구를 지향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궁극적으로 ‘돈과 권력’의 소유를 지향한다.
여기서 부는 장기적 생존을 위한 수단이고, 권력은 생존과 부를 동시에 보장해주는 수단이다. 그런데 기억력이 뛰어난 인간은 수단이 없으면 목적 자체가 달성될 수 없음을 알기에 항상 수단을 우선하게 되고, 그래서 권력욕은 욕망의 정화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권력은 소수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기에 여기에 접근이 불가능한 서민들은 그들이 제시하는 규범적 지침에 따라 행동하면서 물질에 대한 소망을 강화시키게 된다. 단적으로 말해 사회 속의 인간은 돈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기에 '잘 사는 것‘이 인간의 가장 절실하고도 요원한 갈망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처럼 만인이 물질이라는 수단에 집착한다면 사회관계에서는 물질 자체가 곧 목적이 된다. 자유/평등/민주와 같은 모든 가치와 이상은 곧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수단적 방안인 것이다. 자유는 권력으로부터 사유재산을 지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었고, 평등은 부가 너무나 소중하므로 골고루 갈라먹자는 것이고, 민주는 자의적인 권력을 방지하여 국민을 잘 살게 만들자는 것이다. 그래서 맑스도 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농촌경제라는 바보짓에서 사람들을 구해낸 자본주의에 절절한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평등이 곧 목적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대는 판단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진정한 자유의 의미도 명확해진다. 흔히들 권력의 억압이 없는 상태를 자유라고 이야기하지만 심리적으로는 긴장과 불안에서 해소될 때 자유라는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 바닷가에 섰을 때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자의식이 긴장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며, 기간이 경과하여 이런 해방감이 사라지고 나면 오히려 권태감이 찾아오게 된다. 반면에 실직을 하고 그 자리에 서면 상실의 바다가 될 것이다. 따라서 자유는 외적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긴장과 불안에서 해방되었을 때 얻어지는 심리적 생동감이다. 그런데 사회 속의 인간은 돈/권력과 같은 물질적 수단을 구비하거나 긴밀한 인간관계의 형성에 성공해야만 이런 긴장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즉 자유는 물질적/인간적 ‘의존의 상태’에서 얻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치적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자유민주주의의 모든 것으로 생각하고 경제적 자유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는 권력의 억압을 방지하여 단지 자유를 위한 일차적 조건만 제시해줄 뿐 그 자체가 자유를 실현해주지는 못한다. 주거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해 여행을 할 수 없는 것과 돈이 없어서 여행을 할 수 없는 것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처럼 경제적 능력이 있어야만 자유를 실현할 수 있고, 생계의 불안에서 벗어나 긴장감에서 해방될 수 있다. 경제력에 의해서만 실질적/능동적 자유가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를 발전시켜 더 많은 부를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자유를 확대하는 최선의 방안이다. 부의 원천인 기업을 키우는 것이 국가의 일차적 과제인 것이다.
3. 경제발전은 민주주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민주투사들은 민주화운동만이 신성하고 박정희의 독재는 무조건 죄악이라고 규탄한다. 인권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해도 괜찮고, 저항운동을 했으면 간첩도 민주화 인사다. 자신들은 정의인 반면 기업가는 사악하고 박정희는 민주의 원흉으로 규정된다. 과연 그런가? 정치적 자유만이 소중하다면 거대한 박정희 신드롬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국민을 잘 살게 만드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자 의무라면 박정희가 오히려 정의의 편 아닌가? 입만 가지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국가발전을 지체시킨 그대들은 오히려 민중의 적 아닌가?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먼저 규명해 보자.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는 권력분립과 대의제라는 두 개의 축으로 운영되지만 선출의원이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므로 흔히 대의제가 있으면 자유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국민은 투표권을 통해서만 정치가와 관료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기에 정치가에 대해서는 정당정치의 틀로 상호견제하고, 관료는 법치주의에 따라 견제하게 된다. 이 시스템에선 여당과 야당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져야 독재와 권력남용을 견제할 수 있기에 정치적 자유가 국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핵심적 장치로 여겨지게 된다. 미국에선 이런 절차가 보장되는 것만으로도 민주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정치과정을 정권창출과정으로 보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있다.
그런데 의아스런 것은 미국에선 그렇게 환상적인 자유민주주의가 제3국에선 왜 한결같이 독재나 내란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경제가 피폐하고 권력에 대한 견제가 불가능하다는 두 가지의 원인 때문이다. 먼저 서구에선 수백년간의 합리적 전통에 따라 법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고, 또 정치과정은 언론과 다양한 견제장치로 엄밀히 감시되고 있다. 이런 견제장치만 제대로 작동하면 자의적 권력을 충분히 방지할 수 있다. 반면에 제3국에선 금권정치가 일반적이고, 대의제는 오히려 일탈적 권력과 독재를 정당화해주는 구실을 하게 된다.
제3국에서 견제기능이 작동할 수 없는 원인은 경제가 피폐하기 때문이다. 경제가 피폐하면 권력이 최고의 생산수단으로 인식되어 권력지향성이 강해지고, 그로 인한 정쟁의 격화는 정치자금이라는 방어수단에 집착하게 하여 부정부패를 심화시키게 된다. 그러면 필경 권력과 부의 편중이 심화되고 그들을 비난할 힘이 없는 국민은 거기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쫓는 데 더 열심이기 때문에 오히려 부패한 권력에 자양분을 제공하게 된다.
여기서 제3국의 비극이 시작된다. 자의적 권력의 폐해를 목격하는 정의파들은 국민에게 그들의 해악을 알려 저항할 것을 촉구하고, 국민은 자신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그들을 위해 일어서고, 여기에 위협을 느낀 권력자는 탄압을 시작하고, 결국은 대규모의 반정부운동이 벌어짐으로써 불행한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1960년대 중진국의 지위에 올라선 중남미 제국이 한결같이 독재 혹은 내란의 상태로 빠져버린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정의파들이 없었다면 국민은 조금 덜 불행해지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런 정의파도 국민의 편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저항운동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정의감에 불타겠지만 권력투쟁을 시작하는 순간 그를 꺽고 내가 해먹어야겠다는 야욕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방어를 위해 국민을 희생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나아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은 정의이기 때문에 그를 위한 수단도 정당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부정에 대해서는 죄의식도 느끼지 않으며, 자기만이 대의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다. 그가 집권에 성공하더라도 권력의 속성상 대의보다는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일에 진력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양김이 그 증거이다. 그들은 정치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학생과 국민을 일으켜 방패막이로 삼았고, 군부정권을 종식시킬 기회가 있었으나 경선불복이나 3당야합과 같은 파렴치한 일도 거리끼지 않았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금권정치를 답습하였고, 그들의 선량함을 믿었던 우리 국민에겐 IMF와 이태백이라는 보상을 되돌려주었다. 그래서 체 게바라와 같은 영웅을 가진 제3국의 국민은 한없이 비참해진다. 부패한 정권에게는 재산을 뺏기고, 영웅으로 인해 삶의 터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썩은 권력을 용서할 수도 없지만 영웅이 민족의 영광을 되돌려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그것이 민중의 비애이다. 민족적 영웅 카스트로의 독재를 보라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의 환상이다. 경제성장 없이는 견제가 불가능하고, 견제능력이 없는 상태에서의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독재, 붕당정치 혹은 내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제3국의 민주주의는 바로 재앙인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라크와 같은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수출하려고 전쟁마저 서슴지 않으니 그들의 국민들의 신세가 한없이 애처로울 뿐이다. 실상이 이럼에도 국민소득 5천불의 사회가 오히려 공평한 사회라는 환상에 빠진 우리의 진보세력은 정말 사고능력이 있는 것일까?
경제가 발전해야 견제능력이 발생하는 이유는 경제 자체가 포괄적 권력수단이기 때문이다. 권력이란 상대방을 자신의 의사에 따라 굴복시키는 것인데, 돈만 있으면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임금을 주고 다른 사람을 부려먹을 수 있다. 그럼 경제력이 있을 때 나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누구도 나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니 오로지 법률에 의한 지배만 가능하다. GDP가 늘어나면 이토록 소망스런 권력수단을 다수의 손에 쥐어주게 되니 경제발전은 실질적으로 민주화를 촉진하게 된다.
나아가 경제가 발달하면 기업에서 흘러넘친 부가 정치, 사회, 문화의 각 부문으로 흘러들어가 다원화된 사회가 발달하게 되며, 그들이 다양한 요구를 표출하면 권력은 이제 국민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또 산업이 발달하면 정치권력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아지고 경제를 떠받칠 의무를 지게 된다. 경제가 발전하면 자동적으로 권력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지니 경제발전은 민주주의의 필요충분조건으로 규정해도 무리하지 않다. 그래서 경제건설에 성공하지 않고서 민주주의에 성공한 나라가 없는 것이며, 경제가 발전하면 자동적으로 민주화가 촉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우리의 민주화는 박정희의 공이지 민주투사의 공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경제건설로 사회가 다원화됨으로써 권력을 질타하고 그들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송복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처럼 요란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대만이 자동적으로 민주화에 성공한 것도 경제발전으로 인한 다원화 때문일 것이며, 노동당 독재의 중국이 선출제를 받아들이겠다고 공언한 것도 결제발전의 직접적 산물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직시해야 될 것은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을 잘 살게 만드는 수단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민주화 자체가 지상목표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역설적 논리가 참인지 궤변인지 한번 확인해보자.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주권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그 때의 주권은 참정권/양심의 자유/재산권이라는 세 차원의 기본권으로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처음 천부인권사상이 태동할 땐 언론/출판/사상의 자유에 관한 기본권을 강조하였으나, 고등학교 교과서엔 사유재산신성불가침의 원리가 확립된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적어놓고 있다. 재산권이 국민주권의 핵심적 내용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참정권은 지배가 항상 소수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국민의 손을 떠나 선출의원에게 위임된다. 과거의 왕정 대신 국민의 대표가 직접 통치과정에 참여하므로 국민이 스스로를 지배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이런 선출의원이 법과 정책을 형성하면 정부는 단순히 그 내용을 집행함으로써 법치주의가 달성된다고 본다. 그래서 대의제를 자유민주주의의 요체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국민의 지배'라는 말 자체를 웃기는 소리(논리적 함정)으로 본다. 선출의원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그를 견제할 장치가 있어야 되는데, 투표를 하는 순간 참정권은 사라지고 국민의 손엔 그들을 견제할 어떤 수단도 남아 있지 않다. 의원은 의사당에 들어서는 순간 선거 때의 맹세는 잊어버리고 자신의 정치생명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투표란 곧 주권의 포기각서에 도장을 찍는 요식행위인 셈이다.
더구나 정치를 정권창출과정으로 규정하는 순간 '국민을 위한' 정치는 불가능해지고 '정치가를 위한' 정치가 이루어진다. 우리가 그렇게 정치가를 비난하고, 그들은 국민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그들은 집권야욕 때문에 맹목적으로 착한 놈과 나쁜 놈으로 갈라지고 국정은 끝없이 표류한다. 그럼에도 절망의 근원인 정당정치를 신봉해야 할 것인가? 국리민복이라는 상위목표를 망각하고 정치적 승부에 매달리게 하는 근원이 바로 정당정치에 있지 않은가? 초선의원마저 열성적인 정당의 종으로 만드는 정당정치는 곧 분열과 몰락으로의 초대장 아닌가?
나아가 참여민주주의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과두제의 철칙이란 용어처럼 지배는 반드시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부구조인 국민이 상부구조인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민중혁명을 일으키는 경우에도 그들은 반드시 자신의 대표를 통해서만 지배를 달성할 수 있으니 이것이 민중의 비애이다. 오늘날 인터넷이 참여를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할 걸로 기대되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요구를 제시하는 기능만을 할 수 있을 뿐 정책의 선택과 집행은 지배엘리트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럼 노무현이 개혁논리를 바탕으로 수많은 원성을 무시하듯 그런 요구를 뭉개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그런 배신을 응징하려면 또 4, 5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럼에도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이 옳은가? 모든 권력자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우선명제로 생각하고, 국민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될 때에만 참여를 강조하는 것인데 그들이 민중의 편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오히려 1500여 원로들의 시국선언이나 수도이전/보안법 페지를 반대하는 다수의 여론에 대해 오히려 독재의 편에 섰던 자들이 개혁에 딴지를 건다고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참여는 정부의 편을 들 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참여정부란 조용한 다수의 이익은 무시하고 정부 편을 드는 국민의 이익만 지켜주겠다는 선언에 불과하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라는 구호만큼 허황된 것이 없다. 아무리 노동자의 대표가 지배하더라도 지배자가 되는 순간 정치생명을 우선하는 정치엘리트가 될 수밖에 없으니 그는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다. 국민의 지배 또한 불가능하며, 참여민주주의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네티즌의 함성이 무서운 힘을 발휘한 것은 권력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여정치라고 생각했던 것은 곧 견제기능의 활성화이니 이것만이 '국민을 위한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현실에서 달성해준다. 그렇다면 하부구조인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누가 지배자가 되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검은 쥐든 흰 쥐든 국민을 잘 살게만 만들어주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라는 달콤한 말로 국민을 속여왔으니 민주투사가 국민의 편인가 박정희가 국민의 편인가? 국민을 정치과정에 끌어들여 놓고는 오히려 경제의 기반을 허물어버린 선동가가 나쁜 놈 아닌가?
이처럼 참정권이 국민의 손을 떠났으므로 국민의 손에 남은 주권은 인권과 재산권이다. 그런데 민주투사는 인권의 신장에 기여하였고, 박정희는 경제적 자유를 대폭적으로 신장시켜주었다. 이 중 무엇이 더 소중한가? 우리는 인권 없이 살 순 있지만 돈 없인 살 수 없다. 돈을 위해서라면 자존심/인권/정절/명예/인생/나라마저도 팔 수 있는데 이에 우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럼에도 정치적 자유나 인권만을 강조하는 이런 전도된 논리가 한 시대를 횡행해왔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부는 만인이 추구하지만 인권억압은 권력에 도전하는 소수에게만 가해진다. 그런데 경제발전의 위대한 업적엔 개발독재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반정부활동이나 인권운동을 했으면 정부가 포상까지 해준다. 이런 궤변적 논리가 정의의 이름으로 칼춤을 추고 있으니 이런 나라의 쇄락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정말 웃기는 나라 아닌가? 그래서 세계 각국이 과거로 회귀하는 우리나라를 비웃는 것 아닌가?
물론 민주투사들이 인간적으로 선량하고 정의롭다는 것은 잘 안다. 또 기업가들의 사악함도 잘 알고 대기업이 일어서면서 얼마만큼의 중소기업을 짓밟았는지도 잘 안다. 그러나 인간적 정의와 국가의 정의는 상이함을 어떡하겠는가? 노동력이라는 생산수단밖에 없는 국민은 일자리가 주어져야만 생존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자본이 집적되어야만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수 있으니 저주받을 기업가가 가장 선량한 존재로 기능한다. 그토록 정의로운 그대들은 이처럼 보람 있는 일을 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본인도 실미도를 보면서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 너무나 참혹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독재정권으로부터 박해받고 고문당하던 사람이라면 결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 분들이 독재자를 응징하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박해 속에서 일신의 영달을 희생하고 인권운동을 해온 분들은 진정 정의로운 분이다. 그러나 이 때의 정의는 어디까지나 인간적 정의일 뿐 국가의 정의는 누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해주는가 하는 기준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그런데 경제가 피폐할 때는 민주화운동으로 사회가 과도하게 혼란해지는 것보다는 독재자의 권위가 살아있는 것이 덜 해롭다. 그러다 경제가 성장하고 다원화된 사회가 도래하면 자동적으로 민주사회가 구현되니 이 때는 자유민주주의가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인권운동을 하는 분들은 국가/민족/역사의 정의를 운운해서는 안되며, 부당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당사자의 행위에 비난을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견제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핵심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응징을 위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 할 때 오히려 역사의 죄인이 될 가능성이 많다.
4. 박정희의 재평가
먼저 민노당의 최순영 의원에게 묻는다. 그대는 자신이 YH 여공으로 착취당할 때 박근혜 대표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물었지만 그 때의 여공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대답해보라. 대부분이 그 때보다 나은 삶을 경험하고 좋은 집과 차를 가지고 있을 것인데 이것이 성장의 대가 아닌가? 그런 착취가 없었다면 자본의 집적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런 착취자가 늘어나지 않았다면 고향에 송금을 하고 종자돈을 키울 방법이 없었을 것인데, 그럼에도 착취의 기회마저 존재하지 않았던 필리핀의 생활상이 바람직하다는 것인가? 젊었을 때 근검절약하던 사람이 노후에 풍족하게 살듯이 그런 착취의 기간을 거쳐야만 산업화의 토대를 일굴 수 있는 것 아닌가?
또 유신독재를 외치는 분들에게 물어보자. 본인도 젊은 시절 유신독재가 너무나 혐오스러웠지만 개발독재와 착취형 독재가 어떻게 같은가? 단순논리로 말해보자. 독재라면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해야 한다. 그런데 참정권은 정치권으로 넘어가 있고, 국민은 인권과 재산권만 가지고 있다. 그럼 유신헌법으로 장기집권을 추구한 것은 정적에게만 독재를 가한 것이지 국민에겐 아무런 억압도 가한 게 없다. 따라서 정치가의 입장에서 독재로 표현하는 건 맞지만 국민의 입장에서 유신헌법을 독재로 표현할 이유는 없다. 착취형 독재처럼 국민의 인권과 재산권에 억압을 가할 때만 국민이 그를 독재자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박정희가 양심의 자유를 억압한 것은 맞다. 그러나 실제로 억압된 대상은 독재타도를 외치는 소수에 불과했다. 반면에 국민의 재산권은 눈부실 정도로 팽창시켜주었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이 그를 독재자로 부를 수 있는가? 젊은이들이여, 우리의 장년들이 박정희에게 그렇게 강한 향수를 느끼는 것이 판단력 부족 때문으로 보이는가? 나이 든 사람은 전부 미친 사람으로 보이는가? 오늘날 그대들의 고급스런 소비문화가 박정희 단 한사람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그를 독재자로 매도하는 것이 정당한가? 개발독재는 정적에게만 위해를 가했으니 제한적/정치적 독재로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독재타도라고 외치는 정치가의 선동에 넘어가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지체시킨 죄과에 대해 피를 토하고 사과해야 하지 않겠는가? 민주주의는 상부구조의 정치가가 돌아가면서 해먹는 것이고, 이미 참정권을 그들에게 넘겨버린 국민은 정치과정에 참여할 수 없으니 누가 해먹든 잘 살게만 해주면 그만 아닌가?
그럼에도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아버린 독재자로만 매도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그렇게 지고지순한 과제로 생각해야 할 이유는 뭔가? 자신을 잘 살게 만들어줄 거란 믿음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기업을 일으켜야 하고, 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토지/자본/기술/노동력/시장/사회건접시설 등 모든 사회적 자원을 한 곳으로 집약시켜야 하는데 강력한 리더쉽이 없으면 이런 전략적 집약이 불가능하다. 그 어려운 일을 박정희가 해내지 않았는가? 그 불모의 땅에서 개발독재 없이는 불가능한 일 아니었는가? 아시아 제국 중 개발독재 없이 경제건설에 성공한 전례가 없다는 역사적 증거가 무수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말 많고 탐욕스런 정치인에게 나라를 맡겨놓았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민주정부 십수 년 동안 지겹도록 부패를 지켜봐야 했으니 그 때의 부패는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을 것이다. 양김이 서로 해먹겠다고 수십 년 동안 국토를 동서로 갈라놓았고, 이런 개명천지에도 정쟁으로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데 박정희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필경 내란으로 이어질 정도로 붕당의 대립이 격화되었을 것이다. 경제도 없고, 국민도 없는 상태에서의 민주주의가 무슨 의미인가? 정말 만악의 근원인 그대 정치가들이 국리민복에 기여한 일이 언제 있었던가? 박정희의 쿠데타가 그대들로부터 나라를 지켜주었으니 오히려 그의 등장은 민족의 행운이자 축복 아닌가? 단언컨대 박정희의 가장 큰 공헌은 경제발전이 아니라 정치인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 때문에 문명충돌론을 주장했던 헌팅턴은 제3세계에서는 군부쿠데타가 역기능보다 순기능이 더 많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제3세계의 군부정치는 사회적/정치적 불안을 제거하는데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에 필요악의 의미를 가지고, 또 군인이 그 사회에서 가장 잘 훈련되고 자질이 높은 집단이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효율적인 정책집행을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쉽이 불가피하다. 먼저 그것은 사람들의 욕구의 크기를 줄여놓아 갈등의 크기를 최소화하며, 사람들은 생존본능에 의해 사회적 요구에 적응하려는 적극적 의사를 가지기 때문에 그 때에 가해지는 억압은 심리적 저항감을 야기하지 않는다. 반면에 민주적 리더쉽은 사람들의 요구를 증폭시켜 아무리 많은 재원으로도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이미 욕구가 발현한 단계에서 억압이 가해지면 결코 굴복하지 않기에 이익갈등이 심화된다. 그래서 다원화되지 않은 저개발의 상태에서는 독재를 통해서만 사회적 혼란의 극복이 가능하다. 그것을 부정하면 내란이 있을 뿐이다. 수많은 증거가 있다.
박정희의 또 다른 위대성은 불모의 땅에서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그는 국력쇄신에 대한 열망과 뛰어난 선견지명을 바탕으로 한국을 중화학공업국가로 육성하였고, 그가 키워낸 대기업은 세계시장을 휘젓고 다니면서 한국의 성가를 높이고 있으며, 지금 우리는 그들이 벌어온 달러로 연명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수수께끼와 같은 사건이다. 그래서 신뢰와 협동을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생각하는 후쿠야마(F. Fukuyama)는 저신뢰 저협동의 사회에서 중후장대산업을 일궈낸 박정희를 경이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노동운동가들은 경제발전이 피땀 흘려 일한 노동자의 몫이지 어떻게 박정희의 몫이냐고 강변한다. 삼척동자가 들어도 코웃음을 칠 이야기가 먹혀들고 있으니 정말 억장이 무너진다. 생각해보라. 사람의 노동력으로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농업사회의 그것이 전부이다. 여기에 자본가가 등장하여 토지/설비/사람/기술/원료 등을 끌어모아 조직적/분업적/전략적으로 작업을 시키고, 효과적인 시장이 있어야 잉여가치가 생산되어 드디어 갈라먹을 수 있을 정도의 부가 생성된다. 그럼 노동력은 임금을 주고 구매한 재료에 불과한데 노동자가 경제건설의 주체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전 재산을 걸고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기업가가 없으면 그들의 노동력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국가가 기업환경을 조성해주지 않으면 기업의 육성이 어떻게 가능한가? 원료가 없어도 공장은 돌아가지 않는데 노동자가 없으면 공장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임금을 대여섯 배로 올리고 주인행세를 해도 되는 것인가?
정말 우리 민족은 너무 배은망덕하다. 모두가 자기만이 잘났고 김구를 제외한 모든 지도자는 반민족적 존재로 폄하된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이미 적화통일이 되어 대한민국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는데도 우리는 정부수립일(1948. 8. 15)조차 기념하지 않고, 박정희가 없었다면 지리한 붕당정치나 내란의 골에 빠져있을 터인데 쿠데타의 원죄만 남아 있다. 우리에게 보릿고개의 가난을 극복하게 해주고, 이토록 소망스런 부와 향락적 생활을 안겨주고, 세계무대에 당당히 나설 수 있게 해준 게 박정희인데 유신만이 그의 전부이다. 오로지 민주투사만이 옳고 이미 세상은 그들의 것이 되어 있다.
정말 혐오스럽다. 과연 민주세력이 정의인가? 국민들이여, 대답해보라. 과연 유신독재로 여러분의 삶이 핍박받고 곤궁해졌는가? 나도 한번 해먹자고 하는 정적들에게만 핍박을 가한 것 아닌가? 물론 부마사태 때 대학생이었던 본인도 질식할 것 같은 유신독재가 너무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민주세력이 우리에게 더 잘 해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기에 현혹된 학생들은 정의를 위해 피를 흘리며 정부에 대항하였고, 이들의 희생으로 나쁜 정부의 이미지가 확산되는 것을 즐기면서 양김은 이들을 선동하여 거리로 내몰았고, 수시로 국민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그 대가가 무언가? 문민정부는 IMF를 안겨주고, 국민의 정부는 카드대란과 청년실업을 안겨주고, 참여정부는 중산층의 몰락을 현실화하였다. 이제 우리 앞에 남은 건 뭔가? 국가파산밖에 더 있는가? 정말 안타깝지 않은가? 나라의 몰락이 눈앞에 보이기에 모래알 같은 보수세력이 시청 앞에 결집하는 것 아닌가? 혈기와 정의감이 앞서는 젊은 그대들이 과연 나이든 사람보다 세상을 더 잘 알고 현명한 판단을 하는가?
여기서 양김에게 물어보자. 진정 님들은 민주화를 갈망했던가, 자신의 집권을 갈구했던가? 정녕 님들은 대통령병 환자가 아니었던가? 진정으로 민주화를 갈망했다면 경선불복이나 3당야합은 있어서 안 되지 않는가? 님들이 쿠데타에 대해 그렇게 지독한 혐오감을 표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훼손보다 자신에게 돌아올 밥그릇을 빼앗긴 데 대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민주화를 외쳤던 님들이 당내에서는 독재자 아니었던가? 거대한 정치자금을 움켜쥐고 철저한 보상과 응징의 원리로 가신들의 충성을 받아내고 그들 위에 군림하였지 않은가? 나도 한번 해먹자고 주장하면 민주화 운동인가? 민주정부의 실세들은 천문학적인 부정을 저지르고 국민의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었으니 님들은 오히려 반민주적/반민족적 존재 아닌가?
386 이여, 대답해보라. 그대들이 말하는 개혁은 무엇인가? 지배세력을 완전히 교체하여 그대들이 다 해먹는 것인가? 모두가 공평하게 못 사는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인가? 물론 님들이 인권신장에 기여한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경제적 생존권을 박탈한 것은 어떻게 설명하고 보상할 건가? 인권은 내가 잘 살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것이지만 경제는 한번 허물어지고 나면 회복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토록 인권을 외치는 님들이 북한의 인권유린엔 왜 관대한가? 민족의 진기를 빨아먹는 그들 부자가 민족적 지도자이기 때문인가? 과학이란 무엇인가? 경험적으로 검증된 것만을 진실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럼 경제발전 없이 민주주의에 성공한 나라가 없다는 역사적 증거에 따라 박정희가 민족의 은인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개발독재가 나쁘다고 주장한다면 차라리 미신이 진리라고 외치라.
돌이켜 보면 너무나 원통하다. 양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어 있을 것인가? 그렇게 격렬한 학생시위도 없었을 것이고, 87년의 혼란도 없었을 것이고, 급격한 임금인상도 없었을 것이고, 경공업의 몰락도 없었을 것이다. 한 때 우리 재벌의 시장개척능력에 세계가 경악하였으니 우리의 기업은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을 것이며, 세계의 정상들이 투자유치를 위해 우리 정부에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GDP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시장이 팽창하여 더 많은 중소기업이 생겨나고, 그들이 틈새시장을 개발하여 이미 일본으로부터 기술자립을 이루어냈을 것이며, 그들이 세계시장을 개발하여 우리에겐 수많은 일자리가 주어지고, 해외의 일자리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말 그대로 생동감이 넘치는 시대가 도래했을 것이다. 아마 일본에 버금가는 지위를 차지하지 않았을까?
5. 김대중의 구조조정은 민족적 재앙이었다.
우리 민족의 비극은 5공 정부에서 시작된다. 전두환 정권은 등장할 이유가 없는 정권이었고, 그는 천문학적인 부정축재를 저질렀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5년 후 우리 경제는 터질 듯이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고질적인 인플레를 잡은 데에도 상당한 영향이 있겠지만 본인은 자기들만 해먹는 대신 정치인들로부터 나라를 보호했기 때문으로 본다. 모든 사회적 자원이 경제에 집약되어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쿠데타와 독재가 우리 국민의 가슴에 너무나 많은 상처를 안겨 사회적 모순이 극도로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주사파가 횡행하고, 노태우 정권부터 노동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노조공화국이 되어버렸고,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우리 국민들은 양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좌파의 손에 이 세상을 넘겨주게 되었다. 그의 쿠데타는 비극의 출발점인 것이다.
김영삼의 특징은 나르시시즘이다. 88올림픽을 거친 우리 민족의 영광이 모두 민주화운동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는 가장 먼저 당당한 외교를 천명하였고, 그의 재무장관은 달러 누적 때문에 소비가 미덕인 시대가 되었다고 공표하여 우리 민족의 절제심을 한 순간에 무너뜨려버렸다. 그 때부터 모든 자치단체는 컨벤션센타급의 청사를 짓고, 우리 국민은 향락적 소비에 빠져 5년만에 곳간을 비워버렸다.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무리하게 OECD에 가입하여 금융시장을 붕괴시켰고, 당당한 외교를 주장하던 그가 루빈 미재무장관과 깡드쉬 IMF 총재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고, 일본 수상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외교적 실언은 일본이 고의적으로 자금을 회수하여 IMF를 촉발하는 보이지 않는 도화선이 되었고, 세계 각국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우리를 조롱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은 김대중의 구조조정에서 시작된다. IMF 위기는 분명 재벌/정부/국민/국제투기자본의 공동책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은 재벌에게 뒤집어씌워졌고, 그 때부터 투명경영이란 이름으로 재벌해체를 위해 집요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귀족노조는 그토록 악랄한 파업에 어떤 죄의식도 없었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는 우리의 집권층은 아직도 대기업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걸 정의의 상징이자 최후의 보루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민주화과정이 국력쇠퇴의 과정과 일치하게 된 것이다.
과연 재벌은 사악하기만 한가? 물론 그들이 저지른 패악은 잘 안다. 그러나 그들이 부당이득을 취하고 그들의 발 아래 쓰러진 중소기업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본의 집적이 커져 새로운 산업영역과 시장이 개발되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중소기업과 일자리가 생겨나 더 많은 소득을 안겨주는 걸 어떡하나? 이것이 국가의 정의인 걸 어떡하나? 실제로 규모의 경제는 작용한다. 크면 클수록 안전하고, 그만큼 리스크가 줄어들어 동일한 자본으로 가장 높은 산출을 달성할 수 있고, 일관체제가 이루어져 비효율을 최저화 할 수 있다. 백오십년 전의 맑스마저도 자본주의에서는 대기업이 시장을 독식할 걸로 예측하였고, 오늘날 세계화 시대는 초일류기업만 살아남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데, 이렇게 세계가 벌벌 떨 정도로 막강한 대기업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고 있으니 정말 눈이 뒤집힌 나라이다. 대만이 가장 부러워하는 게 우리의 대기업과 중화학공업 아닌가?
그럼에도 김대중은 대만식 중소기업 모델을 종교처럼 이야기하면서 벤처산업을 일으켰으나 열병과도 같았던 코스닥은 몇 년만에 1/8로 폭락하여 어마어마한 국부를 매몰시켜버렸고, 그 때 졸부들의 행태는 재벌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누가 재벌을 욕할 자격이 있는가? 그렇게 엄격한 윤리를 요구하는 우리 국민은 얼마나 도덕적인가? 불꽃놀이가 끝난 뒤의 쓰레기 더미를 보라.
물론 IMF 외환위기는 금융위기에서 촉발되었고, 금융위기는 부실채권 때문이었으니 대량의 부실채권을 발생시킨 재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 보면 어느 정도의 부실채권은 매우 유익하다. 그것이 투자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 그것은 최소한 3배 이상의 승수효과를 일으키게 되는데, 그럼 부도가 나 금융기관에 손실이 나더라도 이미 국민의 주머니엔 2배 이상의 소득이 남아있어 그만큼 GDP가 커지게 되며, 경제가 팽창한 만큼 자금수요가 늘어나 금융기관은 더 높은 이자를 받고 늘어난 수익으로 결손금을 채울 수 있다. 또 늘어난 경제규모는 기술개발 및 시장개발을 촉진시켜 그만큼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이 강해진다.
이것을 궤변이라고 주장한다면 다음의 역설적 비극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김대중은 금융기관의 부실을 떨기 위해 불과 몇 달 사이에 BIS자기자분비율 200%를 맞추지 못하는 기업은 무조건 정리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금융기관이 무차별적으로 대출금을 회수함으로써, IMF가 제안했던 년 25%의 이자율보다 두 배나 높은 년 50%의 고금리가 두 달간이나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이 시기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맹목적으로 정리해고를 독촉하고, 경쟁력이 없는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아 민중학살의 비극을 자행한 것은 무지몽매한 반기업 사상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만약 이회창이 되었다면 완급을 조절하여 금융부실을 떨고 원만한 대미관계로 외환위기의 급한 불을 임시적으로 끈 후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로 위기를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이 2개월간의 민중학살을 언급하지 않는가?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자하여 구조조정을 하고 나면 다시 건강하게 태어난다고 하였는데 오히려 민중의 몰락이 점점 더 현실화되고 있다. 그 때 도산한 사람들 중 다시 일어난 사람이 30%도 안 된다는 보고도 이미 나와 있다. 그런데 우리의 경제학자들은 이 민족적 재앙의 원인에 대해 왜 입을 닫고 있는가?
생각해보라. 경제는 생산-소비-투자의 사이클이 맞물려 돌아가는데, 부채비율 200%와 출자총액제한제도 등으로 기업의 목을 죄어놓았으니 기업은 수출과 내수로 번 돈을 부채를 갚는 데 털어넣음으로써 경제사이클에 유통되어 승수효과를 일으키는 화폐의 총량이 줄어들어 경제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외견상으로는 기업의 재무구조가 좋아져 구조조정이 성공한 것처럼 보여지지만 일자리가 줄어들고 국민이 받는 급여의 총량은 늘어나지 않아 경기는 자동적으로 침체하게 된다.
그런데 선거가 임박하자 김대중은 투자제한 조처를 완화하여 경제사이클을 정상적으로 돌려놓는 대신 내수진작이라는 편법을 동원하였다. 이것이 우리 경제를 깊은 골병의 수렁으로 빠뜨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내수를 확대하면 기업의 수익이 재투자로 이어져 경기확대가 성공하는 건 맞다. 그런데 우리의 기업은 부채비율을 줄여야 우량기업이 될 수 있었으므로 늘어난 수익금을 모조리 빚을 갚는데 사용했고, 금융기관이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및 개인에게 빌려준 돈은 경제사이클을 돌아다니지 않고 곧바로 금융기관으로 되돌아왔다. 대기업이 돈을 빌려가지 않으니 이자율은 폭락하여 안정적인 이자소득에 기대던 사람들도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소비를 줄여 경기확대는 오로지 개인의 부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면 결과는 빤하다. 기업은 알토란처럼 토실토실 수익을 늘려가지만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으니 소비가 늘어난 만큼의 지출은 결국 부채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카드대란이 발생하였고, 그리하여 서민의 구매력이 사라지자 자영업이 몰락하였고, 경기후퇴가 명확해지자 이제 중소기업의 대량도산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다. 이게 뭔가? 대기업의 빚이 500조원이라는 서민의 빚으로 전환되어버리지 않았나? 처음 구조조정을 외칠 땐 금융부실화를 막기 위한 것인데, 알진 기업은 늘어났지만 금융기관은 더욱 심각한 구조적인 부실을 직면하고 있지 않은가? 단순한 외환위기가 이제 경제위기로 전환되어버리지 않았나?
그보다 더욱 심각한 위기는 모든 국민이 이 기업에서 나오는 걸 뜯어먹고 사는데, 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숫자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위의 숫자가 늘어나야만 국민이 잘 살게 되는데 병약한 거위는 다 잡아먹고 남아있는 거위만 아무리 살찌우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거위알을 만져볼 기회가 없는 사람은 돈을 벌 방법이 없어 계층갈등이 심화될 것 아닌가? 그래서 이태백 사오정이 늘어나고 좌승희 원장이 10대 불가사의라고 말하는 것처럼 빈부격차가 오히려 확대된 것 아닌가?
그럼에도 구조조정이 옳은가? 아직도 위기의 근원이 어딘지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우리와 동일한 시기에 IMF 위기를 맞은 말레이시아의 예를 보라. 마하티르 총리는 태국이 IMF의 권고에 따라 금리를 인상한 후 더욱 심각한 경제위기에 빠지는 것을 보고 오히려 고정환율제를 실시하고, 외국인 투자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오히려 기업에 대한 금리인하와 여신확대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시장이 안정을 되찾자 정리해고 대신 투자확대를 취하고 대규모 건설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소수 우량기업을 살리는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말레이시아는 IMF 국가중 가장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하는 나라가 되었다. 금년까지 높은 성장과 대규모 무역흑자를 달성하고, 자국 주식시장과 국가재산을 외국자본으로부터 훌륭히 지켜내었다.
그런데 우리는 뭔가? 삼성전자 국민은행 등을 포함한 알짜 기업은 이미 절반이 우리 것이 아니며, 외국인 주주들은 주총에서 기업의 전략적 투자보다는 배당을 늘리도록 의결하여 대규모의 국부를 유출하고 있으며, 삼성전자마저도 경영권 방어에 절치부심하고 있다. 달러를 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신성하다는 모토로 유전지분까지 팔아넘기도록 강요하고, 국부의 대부분을 처분하고도 이 지경이니 김대중은 진정 나라를 팔아먹은 셈 아닌가? 외국의 연구기관이 ‘한국경제는 더 이상 한국의 것이 아니다’고 선언하였으니 그의 구조조정은 민족적 재앙 아닌가?
아직도 모르겠는가? 박정희가 고속도로를 건설하려 하자 야당의원들은 어마어마한 국가채무를 놓고 정말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나 10년 뒤 경제의 규모가 커지자 오히려 넘쳐나는 외화를 걱정하게 되었듯이, 부실금융과 부실기업은 경제가 팽창하면 수익이 확대되어 선순환의 방식으로 해결되는 것인데, 건강한 놈만 자식취급하려 하였으니 비만 잡으려다 악성빈혈에 걸려버린 셈이다. 이제 더 이상 금융기관을 부실하게 할 투자자가 없으니 이것이 진정한 비극인 것이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IMF 위기를 최단 시간 내에 극복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햇볕정책 하나로 그는 존경받는 지도자로 남아있다. 민주정부 10년이 환멸밖에 남겨주지 않았지만 우리 국민들은 또 다시 급진적 개혁론자인 노무현에게 희망을 걸었다. 양김의 실패는 측근들의 비리와 무능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고, 서민층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빈부격차가 확대되는 상황이 배가 아팠기 때문일 것이다. 노무현처럼 깨끗하고 정의로운 자라면 젠장할 빈부격차를 좀 시원하게 해결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역설적 현상이다. 철부지처럼 어리석은 국민은 달콤한 말만 믿고 은혜와 원수를 뒤바꾸어 응징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 대가도 응당 국민의 몫일 수밖에 없다.
6. 귀는 없고 눈은 하나요 입은 둘인 괴물이 청와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참여정부 2년이 지난 지금 환멸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는 당선되자마자 자주외교를 선언하여 심각한 외교갈등을 촉발하였고, 이제 미국에 어느 정도 할 말을 하는 대가로 국방비를 대폭증가하고, 주한미군의 감축을 늦춰달라고 애걸하고, 양강도 폭발사건이 있어도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또 취임하자마자 사회적 약자의 편을 들겠다고 선언하여 지긋지긋한 노사분규가 폭발하였고 대기업은 속절없이 그들의 요구에 굴복해야 했다. 경제의 기저가 완전히 허물어지려는 이 때 상생과 화합 대신 강남과 조중동에 적개심을 키우려는 공산당식 마타도어 전략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수도이전은 이념적으로 신성한 그들이 기득권과는 절대적으로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적개심을 극단화한 전략임이 드러났고, 4대 개혁입법은 그들만의 세상을 건설하려는 원대한 포부의 초석이라는 불안감을 안겨준다.
물론 대선자금 수사와 탄핵정국으로 상당한 정치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들도 전혀 깨끗하지 않으면서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우려를 안겨주었고, 그 혼란스런 탄핵정국도 정치적 승부를 위한 거대한 도박이었음이 드러났다. 그 결과 개혁세력의 대결집을 이루고 총선에서 완승하였지만 이게 뭔가? 승자라면 아니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모든 국민을 감싸 안아야 할 텐데, 끝없이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고 있지 않은가? 별놈의 보수나 강남의 인간이나 조중동이나 민족정기를 들먹이는 방법으로 국민의 적개심을 키워 반사적 이득을 보려는 선동술이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인가?
노무현 대통령의 의식은 정말 기이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참여정부란 무엇인가? 만인의 이익과 주장을 공평하게 반영하겠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수도이전, 보안법폐지처럼 다수 국민이 반대해도 그들의 불안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으면서 그것만이 개혁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겠다는 것이니 참여의 구호는 젊은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선동책에 불과하다. 또 10만의 보수세력이 광화문에 운집하였는데도 과거 독재정권을 옹호하던 괘씸한 자들의 자유를 제한하지 못하는 게 내심 원통하다고 표현하였으니 그에게는 국민에게도 적이 있는가?
아니 자신의 정의를 강조하고 평등사회를 구현하는 건 좋다. 그러나 독재는 무조건 나쁘다고 주장하는 건 20대의 혈기에서나 가능한 일 아닌가? 무릇 민주사회는 다원화된 사회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다양한 부문이 공존하면서 영위되는데, 경제가 발전하면 다수가 중산층에 이르고 사회/문화의 다른 부문에도 부가 흘러들어가 자연적으로 복된 사회가 도래하는데, 정적이 정권을 잡을 기회를 제한했다고 다른 부문에서의 모든 공이 무시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그는 편향된 시각을 가지지 않았나?
이처럼 그는 개혁세력을 제외한 모든 기득권을 척결의 대상으로 생각하면서도 기업인 앞에서는 이 말을 하고, 국민 앞에서는 또 저 말을 하고, 지들끼리는 숙청의 전략을 의논한다. 대선 때 자신은 상황논리에 따라 말한다고 했던가? 그런 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지금 겉으로는 화폐개혁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언젠가는 불시에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런 계급갈등론적 시각 때문에 18개월만에 50조의 자산이 해외로 새나간 것 아닌가? 이렇게 쥐새끼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면 그 배는 반드시 침몰할 거 아닌가? 그 배엔 죄 없는 서민만 남아있을 거 아닌가? 이처럼 ‘귀는 없고 눈은 하나요 입은 둘인 괴물’이 청와대에 살고 있으니 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조금 더 따져보자. 노무현이 인간적으로는 정말 선량하고 정의로운 것이 맞다. 그러나 지도자로서도 그러한가? 먼저 노조를 사회적 약자로 규정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주지하다시피 만인은 부를 갈망하는 데 그것은 생산수단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그런데 갈라먹을 수 있을 정도의 부는 가장 효율적인 생산양식이 기업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거기서 넘쳐나는 부가 사회의 각 계층으로 넘치고 넘쳐 서민들도 부의 단맛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귀족노조가 바닥의 계층으로 흘러내리는 부를 차단해버리면 서민들의 생활은 더 곤궁해진다. 당장 납품단가가 깍여 중소기업 근로자의 임금상승 기회가 줄어들고, 기업의 투자여력과 위험이 커져 일자리가 줄어들고, 물건값이 올라 서민경제의 활력이 줄게 된다. 은행원들의 비싼 임금 때문에 창구서비스는 점점 줄어들고, 각종 수수료가 폭등하니 그들은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자신의 배때기를 불리는 셈인 것이다. 생산성의 범위를 넘어선 이런 노동운동이 어떻게 정당할 수 있는가?
물론 맑시즘에 전도된 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은 무조건 숭고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아, 이것을 알라. 프롤레타리아란 무산계급을 의미하는데 몸뚱아리밖에 없는 실직자와 중소기업 근로자 및 영세 자영업자가 프롤레타리아지 경영권을 요구하는 귀족노조가 어떻게 피착취자인가? 서민들은 노동력밖에 가진 게 없으니 일자리만이 그들의 살 길 아닌가? 그대들은 정녕 반사회적/반민족적 존재 아닌가? 지난 십수년간 국운의 상승을 가로막고 곶감을 빼먹은 그대들은 이 엄청난 죄과를 어떻게 사죄받을 수 있겠는가?
거기에 한술 더 떠 이 정부는 인권이란 이름아래 공무원 노조의 단결권/단체교섭권을 제한없이 허용하고, 민노총과 민노당은 공무원 파업을 진두지휘하고 있으니 나라에 망조가 들지 않았나? 도대체 공무원이 노동자라니 이런 해괴망칙한 망발이 어디 있는가? 생각해보라. 기업의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약자이기에 단체행동권을 주는 것이 형평에 맞지만 공무원의 고용주는 국민인데 국민이 그들 위에 군림하는가? 국민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몽땅 국가에 위임해주었고, 국가권력은 정책의 형성권과 집행권으로 나누어져 정부와 관료가 직접적으로 국민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데, 국민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노동자라면 삼척동자가 웃을 일 아닌가? 지배행위가 노동이라면 통치노동은 혹심한 중노동이니 장관과 대통령은 3D 근로자 아닌가?
국가권력을 정책형성권과 집행권으로 나눈 것은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될 때 그 피해가 국민에게 돌아오기 때문인데, 신분/정년이 보장된 공무원이 단체행동권마저 가진다면 견제가 불가능해진다. 자유민주주의가 곧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의해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자는 것인데, 견제가 불가능해진다면 권력자의 세상이 되어버린다. 정당정치가 정치가를 위한 정치를 정당화하였듯 관료를 위한 정부로 전락할 게 뻔하다. 그들에게 봉급을 지불하는 우리 서민은 직장폐쇄를 할 수도 없으니, 납세거부권을 주어야 형평에 맞지 않겠는가? 그러면 오히려 재산부터 압류할 것이니 이렇게 억울한 경우가 어디 있는가? 우리 국민은 이토록 고난의 수렁에 빠져있는데, 퇴직연금까지 보장받고 100억이란 파업기금을 마련할 정도로 배때기가 부른 그들이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파업을 감행하다니 정말 파렴치한 일 아닌가? 안 그래도 부처이기주의와 각종 부조리로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그대들이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겠단 말인가? 참여정부여, 그럼에도 국민의 이익보다 인권이 중요한가?
또 한번 따져보자. 과연 민족자존심이 그토록 소중한 것인가? 따지기 좋아하고 자존심 센 친구를 기피하듯 우리도 국제무대에서 따돌림받을 것 아닌가? 예를 들어보자. 직장인이 꼴같잖은 상사에게 대항하여 사직서를 던지고 오는 것이 옳은가, 꾹꾹 눌러 참다가 십년 이십년 후 떡 하니 차사고 집사는 게 옳은 일인가? 명색이 가족을 책임진 가장이라면 생계문제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거 아닌가? 국가도 이와 완전히 동일하다. 수많은 사례에서 보듯이 지도자가 자존심을 강조하면 그 민족은 반드시 고립되고 불행한 결과를 맞는다.
반면에 박정희의 굴욕외교는 386의 젊은이에게 치명적인 영혼의 상처를 안겨주었지만 5공 말기 국력이 터질듯이 부풀어 오르자 대영제국의 수상마저도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투자확대를 요청하였다. 우리가 가난하면 똥걸레를 빠는 허드렛일까지 감지덕지해야 하지만 내가 잘 살면 나누어주지 않아도 모두가 굽신거린다. 자존심은 실력과 힘만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외교는 반드시 실리외교가 되어야 한다. 자존심마저 팽개치고 굴욕외교를 펼 수 있었던 박정희가 진정한 지도자인 것이다. 그가 인권문제를 들먹이며 주한미군을 감축하려는 카터에게 저항하여 자주국방을 외쳤다면 단박에 젊은이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또 한번 굴욕한 것은 경제만이 그에게 소중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정의로운가? 반만년 역사 동안 외침에 시달리기만 했던 우리 민족에게 당당히 세계무대에 나설 수 있도록 했던 박정희가 정의로운가, 십수년간 민족을 쇄락의 길로 이끌기만 했던 민주세력이 정의로운가? 금번 노무현 대통령이 각국을 순방하면서 기업이 곧 나라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던 이 자랑스런 기업을 많이 일구는 것이 진정한 자주외교 아닌가?
그럼에도 노무현은 경제로 가는 길을 접어두고 과거사 정리 없이는 국민소득 3만불도 의미가 없다고 천명하였다.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그것이 개혁인가? 그들만의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개혁인가? 나아가 그들은 인권을 그토록 소중히 생각하고 사상의 자유를 위해 보안법마저 완전히 허물어야 한다고 밀어붙인다. 나라가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그토록 공멸의 길로 몰아가야 하는가?
생각해보라. <백야>에서 자유가 그토록 소중하게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의 위협으로부터 존재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는 불안과 위협으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그렇다면 법과 질서를 지키면 그만큼 자신의 존재가 안전해지기 때문에 권리와 의무를 지키는 것이 자유이다. 규제가 없는 자유는 다수의 안전을 위협하는 독선과 방종인 것이다. 과도한 인권의 보호가 독선가나 범죄자의 활동영역을 넓혀주어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거나, 맹목적인 사상의 자유가 안보를 위협한다면 자유의 환상은 파국을 초래하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권총 없는 우리나라 정말 좋은 나라 아닌가? 성인은 모두 지문을 찍으니 우리가 얼마나 안전한가? 강남의 CCTV가 범죄율을 떨어뜨려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듯 국가안보에 대한 확고한 보장만이 국민을 자유롭게 만들어주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인권만이 소중한가?
정말 답답하다. 인간 노무현은 정의롭지만 지도자 노무현은 최악이다. 왜 그는 수많은 역사적 자료와 증거 앞에서, 또 국민의 갈구 앞에서도 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반독재만이 정의라고 외치는가? 아무리 그것이 중요하더라도 국가의 안위를 책임진 자라면 순서와 합리성을 따져야 할 것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살길은 단 하나다. 하루라도 빨리 망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 땐 우리 국민이 선동가의 실체를 알아차리고 정신을 차릴 것이다. 그러나 그 땐 이미 중국이 산업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엄중한 세계화의 물결은 한번 도태된 자들을 철저히 짓밟을 것인데 그 때도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것인가? 지금 우리가 살 길은 진보-보수의 대립이 아니라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경제를 일으키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등소평과 같은 지도자다. 선부론(先富論)을 주장하면서 검은 쥐와 흰쥐를 가리지 않겠다고 하였고, 문화혁명 때 자신을 축출하였던 자들을 포용하여 거대중국에게 하나의 목표를 제공하였다. 그들은 노동당 독재로도 경제건설이 가능함을 증명하였으니 자유민주주의가 경제건설의 필수조건이 아님이 이미 밝혀졌고, 그런 그들이 최근 선출제를 받아들이겠다고 공언하였으니 경제발전은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자 필요충분조건임이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우리의 정치인들은 이렇게 싸우고만 있을 것인가? 그렇게 무릎을 꿇고 상생을 맹세했으면서도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정당정치를 해체하라. 국민을 무시하고 그렇게 상쟁하는 근원이 정치인이 정당정치의 볼모로 사로잡히기 때문이니, 정당정치를 해체하지 않으면 그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
모든 선출의원은 여당의원이 되고 각 부서의 정책결정과 집행까지 담당하여 결과에 책임을 지라. 그리고 선거에서의 차점자와 고위공직자를 야당의원으로 배속시키고 상임위별로 국정조사권 및 수사권을 부여하여 정책에 대한 실질적인 견제가 가능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국가와 민족의 번영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자만 정치적 이득을 보게 하라. 정당공천이 사라지면 진정한 인재가 의원으로 선출되고, 그는 봉사를 위해 전력을 기울일 것이니 정치가를 위한 정치가 아닌 ‘국민을 위한’ 정치가 현실에서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또 권력집중과 수도권집중이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행정수도 이전이 아니라 서울대 최막중 교수의 제안처럼 완전한 지방분권을 실시하라. 대통령제의 폐해와 비대한 중앙정부의 비효율성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니 외교/국방/재정/복지의 기능만 남기고 내치기능은 모두 지방정부로 이양하라. 그러면 미국의 연방제처럼 각 도는 고유한 입법체계와 정책목표를 가지고 서로 경쟁할 것이며, 재정자립도를 높이고 주민복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더 많은 기업을 유치하기 위한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각 지방의 인재는 지방에서 충원되므로 자동적으로 지역불균형이 소멸되고 지방대학이 성장할 것이다. 중앙정부의 크기도 1/3 이하로 줄어들어 비효율성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재정자립도의 차이가 크다면 각 도에서 거두어진 세금의 절반은 도가 가지고 나머지 절반은 한 덩어리로 묶어 각 도의 인구/면적 비례로 배분하는 등의 방안을 강구하면 될 것이다. 이것이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는 진정한 개혁방향일 것이다.
그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기업에 대한 족쇄를 완전히 풀어 경제사이클을 정상적으로 되돌려놓는 일이다. 일등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정보화/세계화의 시대에 공정거래의 이름으로 기업의 목을 졸라놓는 것은 정말 역사의 범죄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기업의 불투명성과 비효율성 때문인데 이미 투명성과 효율성이 증명된 초일류기업에까지 공정성의 잣대를 들이대어 해부하려는 것은 자해행위와 마찬가지이다. 투자확대 없이는 경기회복이 불가능하니 출자총액제한제도에 더 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다. 만병의 근원인 투자제한조치를 해제하지 않고 콜금리인하/재정확대/뉴딜정책과 같은 대증요법을 쓰면 경제의 골병이 더욱 깊어져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을 능가하는 후유증을 남길 것이니, 기업에 묶어진 족쇄를 완전히 해체하여 마음대로 세계시장을 헤집고 다니도록 하라.
국민들이여, 지금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분위기의 문제라는 것을 직시하자. 인간의 자의식은 불안을 가장 싫어하는데 지금 기업가들은 너무 불안하다. 노조와 공정위가 무섭고, 말 많은 인권단체와 환경단체도 무섭고, 망나니의 칼을 휘둘러대는 좌파정권도 무섭고, 무섭게 시장을 잠식해가는 중국제품도 무섭고, 경영권을 위협하면서 고배당을 요구하는 국제투기자본도 무섭다. 그러니 그들의 이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투자위험이 적은 중국에 공장을 짓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밥그릇을 발로 차는 격 아닌가?
정말 직시하자. 기업은 우리의 밥줄이자 생명줄이다. 그러나 이젠 전 세계가 공급우위의 상태로 접어들어 고수익이 보장되는 새로운 산업분야가 없고, 있더라도 첨단산업분야를 선점하는 것이니 거기엔 대규모의 자본과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니 무모한 투자자가 아니라면 창업을 꿈꿀 리 없고, 그런 투자가 없으면 일자리도 떨어지지 않는다. 남아 있는 방법은 기존의 기업이라도 마음놓고 투자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주고, 연관산업이 발달하도록 하여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업가정신이 되살아나고 경제사이클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 우리의 앞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우리 기업을 사랑하자. 정부가 기업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면 수익을 늘려 더 많은 세금을 낼 것이고, 노동자가 자신의 기업을 사랑하면 기업가는 노동자를 가족처럼 보호할 것이고, 지역민이 자신의 기업을 사랑하면 기업가는 지역민에게 봉사하여 복지의 근간이 될 것이다. 기업의 존재 자체가 최선의 복지인 것이다. 나아가 부자들을 배척하는 대신 그들에게 존경을 제공하면 빌 게이츠처럼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하는 부자가 많이 나와 계층화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나아갈 길 아니겠는가? 후진타오가 옳지 않은가?
7. 도올, 그것밖에 되지 않는가?
금번 헌재의 판결에 대해 분노하는 도올의 외침을 들었다.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역사와 정의의 이름 아래 헌법재판관을 ‘갑신칠적’으로 규정하는 독선을 보곤 정말 가슴에 정을 맞은 듯 멍멍하였다. 자신의 이상과 다르다고 이런 인격살인을 해도 되는 것인가? 딸의 주례를 직접 설 정도로 자신의 사상가적 지위를 신봉하는 사람이 타인에게도 사상의 자유가 있다는 건 왜 인식하지 못하는가? 양심의 자유가 곧 자유민주주의의 출발점일진대 그들의 자유를 부정하면 곧 또 다른 독재가 되어버리지 않는가? 님의 철학은 이런 심판과 만행을 정당화할 정도로 완벽한가? 헌법학 원론 첫장에 관습헌법에 관한 학설이 나오는데 헌법을 얼마나 알고 하는 소린가? 수도이전이란 ‘도박’의 완벽한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가?
정녕 인간과 사회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식자들이 그러하듯 어떤 논거에서 잘못되었다고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는 선에서 그침이 마땅할 것이다. 님의 언행은 그 화려한 명성에 비해 정말 깃털처럼 가볍다. 더 이상 논평을 하기도 아까울 만큼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아니 실수가 아니라 이것이 님이 가진 밑천의 전부일 것이다. 당부하건대 정말 인격수양이 된 후 다시 세상에 나오라. 님이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지 못하면서 사람들에게 침을 튀기면서 일그러진 얼굴로 할을 하는 것은 보기 좋은 일이 아니다. 제발 겸양의 말투부터 새로 배우고 조심스럽게 글을 쓰라.
아울러 늘상 개혁과 정의를 외치는 고상한 분들이여, 이젠 제발 평등사회의 환상에서 깨어나라. 분배주의의 모순에서 보듯 그것이 평등사회를 구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발전을 지체시킴이 이미 증명되었다. 그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오니 세월이 지나면 자연 그대들에게 비판이 화살이 되돌아올 것이다. 서민들을 위해 고리채를 제한하면 서민들은 급전을 써야 하고, 상가나 주택의 임대기간을 늘려주면 오히려 임대료가 오르는 것이 현실이니 강제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들은 부를 원하고 그것은 생산수단의 집중에서 얻어지는 것이니 경제를 키우는 것이 순리인 것이다. 그래서 평등의 이상은 항상 그 고상한 목적과는 달리 애꿎은 서민의 희생과 눈물을 초래한다.
전교조도 그렇게 평등교육을 외치지만 좋은 대학과 직장은 한정되어 있는데 어떤 방법으로 평등교육을 실현할 건가? 세계가 지식경쟁의 사회로 접어들어 일등만 생존할 수 있는데 인재양성에 실패할 경우 우리 민족의 미래 자체가 없어진다. 조그만 나라 안에서 더 많이 갈라먹겠다고 싸우다 정녕 제3국으로 전락되어버린다면 우리 백성만 불행해진다. 그 때 님들은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는가? 결과에 책임질 자신이 없다면 부디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라. 이미 맑스는 죽었고, 사회주의도 죽었고, 세상은 승자독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밀림으로 변해버렸으니...
- 끝 - 자유 기업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