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933호
단어單語의 세계
강영은
늦은 눈 내리는 3월, 눈보라를 지나가는 감정이 있다. 몰려드는 눈갈기 손으로 털며 소복소복 쌓이는 눈을 밟으며 눈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표정이 있다.
대숲에 드는 눈설레처럼 흰 여백 채우는 발자국 소리
돌담 둘러친 동백숲에선 붉게 핀 애기동백 뚝뚝, 모가지를 떨구는데 가야 할 먼 곳 있다는 듯 죽음을 지나가는 형식이 있다.
그리움은 죽음보다 더 먼 곳에 놓여 있다고 오늘을 지나가는 저 사람,
심장이 녹기 전에 눈 속에 묻은 발목 지나야 한다. 3월에 태어난 눈사람처럼 비유比喩의 세계를 지나야 한다.
사람 닮은 한 덩이 돌덩어리로 굳어질까 봐, 눈사람은 우두커니 서서 울고 있는데 동백꽃 지는 밤을 지나가는 목숨이 있다.
말 걸지 말아줘, 나는 지금 햇빛과 사귀는 중야,
불안의 울타리에도 꽃은 핀다고 눈물 고인 바닥에 돋아난 새싹! 백지에 찍어놓은 마침표처럼 눈은 그쳤는데 내린 눈만큼 겨울을 지난 네가 '나'였다
눈사람을 지나간 '최소의 자립형식'이었다.
- 『너머의 새』(한국문연, 2024)
***
아침부터 처리할 일이 많아서 이제야 시편지를 씁니다.
아픈 사월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오늘은
강영은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너머의 새』에서 한 편 띄웁니다.
- 단어單語의 세계
이 시를 읽기 위해서는 '단어'와 '비유'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국어사전에서 단어와 비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 단어(單語) : (명사) (언어) 분리하여 자립적으로 쓸 수 있는 말이나 이에 준하는 말. 또는 그 말의 뒤에 붙어서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는 말. “철수가 영희의 일기를 읽은 것 같다.”에서 자립적으로 쓸 수 있는 ‘철수’, ‘영희’, ‘일기’, ‘읽은’, ‘같다’와 조사 ‘가’, ‘의’, ‘를’, 의존 명사 ‘것’ 따위이다.
¶ 비유(比喩) : (명사)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아니하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일.
어떤가요? 시인이 말하는 "단어의 세계"와 "비유의 세계"가 좀 이해가 되는가요?
그렇다면 문제 나갑니다.
1. 이 세계는 단어의 세계입니까? 비유의 세계입니까?
2. 눈사람은 단어입니까? 비유입니까?
3. 당신은 단어의 세계에 태어난 눈사람입니까? 비유의 세계에 태어난 눈사람입니까?
시인은 이렇게 답을 합니다.
"눈사람을 지나간 '최소의 자립형식'이었다"라고 말입니다.
단어가 무너지면 비유도 무너지는 세계, 비유가 없으면 단어도 사라지는 세계, 그 너머로 비유를 지나간 최소의 자립형식으로 새가 날아갑니다. 아무래도 시집을 좀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사월이 다 지기 전에 말입니다.
2024. 4. 22.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