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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고 싶었다
부드러운 것들이 딱딱해지기 전에
결코하지 않으려던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색이 바래기 전에
망설임 끝에 말을 하려고 보니 손이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입을 열었더니 얼굴이 부수어졌다
망설이는 동안 백 년이 지나가버렸다
안간힘이 시간을 헤아리지 못하게 했다
입안엔 어느새 옥이 물려져 있었다
5천만 년 전의 박쥐 화석처럼
공허하고 아름다웠지만 살아 있지 않았다
백 년후에는 너무 끔찍한 말이 되었다
바오바브나무처럼 주목처럼 은행처럼
시간을 살아내는 말이 있다는 가설도
문자를 이겨내는 말이 있다는 풍문도
갸륵하고 향기로웠지만 그 색이 참담하였다
그 뜻이 공허하였다
말을 하고 싶었던 자는 누구일까
태어나지 않은 말들은 모두 어디에 웅크리고 있을까
젖지 않고 썩지 않는 그 말들의 세계는
수수만년 어떤 영토를 확장하고 있을까
- 조 용미 시 ‘태어나지 않은 말들 의 세계‘
*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침대 밑 가장 구석진 곳에 둥글게 모여 있는
민들레 씨앗 같은 먼지들의
외로움을 생각해 본다
열 개의 태양이 기억하고 있는
우주란 어떤 곳일까
내가 감각하는 나의 열 개의 태양이
기억하는 각각의 우주,
감각의 극지는 감각을 기꺼이 닫는
서늘하고 뜨거운 곳
몸이 나의 정신과 한 치의 빈틈없이 꼭 들어맞는 곳
가자, 우주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무성한 기억의 숲으로
몸을 데리고 들어가 보자
별이 내뿜는 빛들을 먼먼 우주의
어느 한 점에서 바라본다는 건
별과 내가 아주 커다란 한집에 산다는 것,
별과 내가 곧 우주라는 것
광역적외선탐사망원경으로 너의 운명을 엿보는 저녁은 없다
250만 광년 떨어진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기억이여,
너의 푸른빛들을 내게 오래 들려다오
- 조 용미 시 ‘열 개의 태양‘
[나의 다른 이름들], 민음사, 2016.
카잘스의 대나무
로스트로포비치의 전나무
다닐 샤프란의 백양나무
피에르 푸르니에의 플라타너스
야노스 슈타커의 느티나무
미샤 마이스키의 회화나무
뒤프레의 메타세쿼이아
요요마의 버드나무
린 하렐의 측백
오프라 하노이의 이팝나무 사이에
하이모비츠의 사과나무와
장한나의 미선나무가 자라고 있는
거대한 첼로의 숲
내 손길이 바람을 만들면
현의 울림이 온 우주에 퍼지지
그러면 새들이 공중에서 잠시
숨을 멈추지.
- 조 용미 시 ‘첼로주자를 위하여’ 모두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다],문학동네, 2021.
초록이 검은색과 본질적으로 같은 색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 언제였을까
검은색의 유현함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검은색 지명을 찾아 떠돌았던 한때 초록은
그저 내게 밝음 쪽으로 기울어진 어스름이거나 환희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는데
한 그루 나무가 일구어내는 그림자와 빛의 동선과 보름 주기로 달라지는 나뭇잎의 섬세한 음영을 통해
초록에 천착하게 된 것은 검은색의 탐구 뒤에 온, 어쩌면 검은색을 통해 들어간 또 다른 방
그 방에서 초록 물이 들지 않고도 여러 초록을 분별할 수 있었던 건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었기 때문
초록의 여러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서 몸은 느리게 회복되었고 탐구가 게을러지면서 다시 아팠다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꺼내어도 꺼내어도 새로운 다른 초록이 나오는,
결국은 더 갈 데 없는 미세한 초록과 조우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초록은 문이 너무 많아 그 사각의 틀 안으로 거듭 들어가기 위해선 때로
눈을 감고 색의 채도나 명도가 아닌 초록의 극세한 소리로 분별해야 한다는 것,
흑이 내게 초록을 보냈던 것이라면 초록은 또 어떤 색으로 들어가는 문을 살며시 열어줄 건지
늦은 사랑의 깨달음 같은, 폭우와 초록과 검은색의 뒤엉킴이 한꺼번에 찾아드는 우기의 이른 아침
몸의 어느 수장고에 보관해두어야 할까
내가 맛보았던 초록의 모든 화학적 침적을, 오랜 시간 통증과 함께 작성했던 초록의 층서표들을
- 조 용미 시 ‘초록을 말하다‘
_《기억의 행성》(문지, 2011)
심연은 풍덩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천천히 빠져들어야 하는 걸까
당신 없이 무척이나 고요한 하루다
영장류 인간의 고독을 신은 감히 이해하지 못한다 먹먹한 겨울 아침이 으스스 수 세기 동안 계속된다
당신이 누구인지 이제는 알기 어렵다
시는 그가 누구라도 순교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했지만
당신이 누구라도 내 존재를 바꾸지 못한다 슬픔은 나의 일관성을 지켜준다
나는 이 세계의 불화와 늘 조화롭게 잘 지내고 있다
마음 둘 데 없는 하루는
달까지 연장되곤 한다
나의 일관성은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
- 조 용미 시 ‘일관성‘
*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유월이 되니 구름이 많아지고 바람의 방향이 달라진다
음혈 부족으로 인한 허열로 수족 번열에 시달린다
낮이 길어지고 밤의 깊이와 너비가 줄어든다
계절은 왜 늘 비와 바람을 앞세우고 나타나는가
심과 신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몸 안이 소란하다
천기 순환이 몸을 어지럽히니 잠이 모자란다
가수면의 여름, 느릅나무 어린 잎으로 국을 끓여 먹을까
솔잎과 박하잎 넣은 베개를 만들어 볼까
알지 못하는 물속의 어둠을 다 마시고 아이들이
봄부터 여름까지
빛으로 끌려 나올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뛰어내릴 수 있는
나비 같은 가벼움이 우리에겐 부족하다
아름답고 허황한 약속들은 그러나 오로라의 빛처럼 분명하다
계절은 비와 바람을 앞세우고 나를 들쑤신다
- 조 용미 시 ‘가수면의 여름‘
[나의 다른 이름],민음사, 2016.
우수 지난 날
아현시장 좌판 아주머니들 앞에
마당의 작은 꽃인 양 모여 있는 것들
달래 냉이 씀바귀 두릅 봄동
향긋한 내음이
두꺼운 외투를 들추고
오랜 겨울 겪고 있는 시든 마음에
막무가내로, 막무가내로
돌미나리 생취 죽순 돌나물 비름을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면
오래전에 돌어가신 할머니 생각이 난다
냉이국 끓일까, 해물 다져 넣고
봄나물 전을 부쳐볼까, 초장으로
살짝 무칠까, 비닐봉지 안에서
나물들이 바스락거린다
봄나물이 지구를 슬쩍
들어올린다 마을버스가 갸우뚱한다
여릿여릿 세상 초록 것들
새순이 돋아난다
- 조 용미 시 ‘봄나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문학동네, 2021.
그 사각형 안에는 수십 가지 뉘앙스의 미묘한 색들이 있다 붉은색만 보려 한다면 붉은색만 보인다 당신이 그 안에 갇힌 얼음 같은 붉은 색은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는다
위아래로 붙어 있거나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사각형, 어떤 사각형도 그렇게 명상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주홍색이거나 검은색이거나 짙은 초록색이거나 퍼져 나가는 노랑이거나 자주색이거나 군청색이다 때로 서너 개의 사각형이 앞뒤로 겹쳐 있거나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붉은 사각형은 우기의 저수지처럼 여러 가지 색들을 다 빨아들였다 그 붉음 안에 동일한 양의 다른 색들이 웅크리고 있다 붉은색 사각형 안에 어른거리는 것들은,
모든 색들의 진정한 기원은 무엇인가
깊은 색을 천천히 뚫고 나오는 나른하고 고요한 밝은 색의 소리들을 다 걷어 내고 나면, 그것은 고요하거나 소란하거나 적대적이거나 온순하거나 신성한 그저 하나의 둥그스름한 붉은 사각형
- 조 용미 시 ‘붉은 사각형‘
[나의 다른 이름들],민음사, 2016.
세상의 수많은 약속 중에
이렇게도 이쁜 약속이 또 있을까
싱할리어.
달팽이가 나뭇잎을 건너는 듯한
구슬을 바늘에 꿰는 듯한
돌 안 지난 아기 엉덩이 같은
활성 스님 써놓으신
알 수 없는 문자들
시냇물 아래 씻기며 조금씩 굴러가는
저 말간 글자의 속을
나는 아주 모르고 싶기도 하지
싱할리어 앞에서 문맹이 되어버린
내 눈빛의 즐거움.
우수에 녹는 언 땅이 내는 물소리 같네
유소보장 안에 든 사람의 희미한 그림자 같은
문자와, 오는 봄볕을
門 앞에서
나를 그리 밀어 넣을까 살며시 딛고 돌아설까
이쁜 문고리를 잡고서
原音도 佛音도 모르는 채 나는
- 조 용미 시 ‘門을 열다‘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학과지성사, 2009(2007).
용서하고 싶은 사람이 있네
용서받고 싶은 사람이 있네
나는 너를 이렇게 그리워 하고
너는 나를 아마 증오하고 그리워하고
우리는 서로 못 잊네
어떻게든 못 잊을 것 같네
그때는 네가 참을 수 없는 가해자였는데
지금은 내가 너의 참을 수 없는 가해자
그렇게 소중한 인연이 어긋났네
너와 나 한 하늘 아래 치를 떨며
그리워 하며 살아가고 있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나
서로 간혹 생각하지만
생각만으론 결코 알 수가 없네
- 조 용미 시 ‘ 길 ‘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문학동네, 2021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눈 가나
땅에 내려앉아 쌓여 있는 눈 아풋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눈 픽써폭
바람에 휘날려 무더기로 쌓여 있는 눈 지먹석
에스키모가 사용하는 눈에 관한 표현은
그들이 사용하는 흰색에 관한 말은 30개
아일랜드에는 초록에 관한 말이 25개
2071년에는 지구의 온도가 4도 상승
고산식물이 멸종한다
어떤 순간을 떠올릴 때면 체온이 1도 하강한다
멸종되는 것들의 목록에 하나씩 빠르게 추가되는 것들
희귀한 새나 식물이 아닌
최후의 목록인
지구라는 소의경전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눈을 바라보는
당신과 나의 심장
초록을 말하는 당신의 입술
눈을 맞고 있는 속눈썹 같은 떨림의 말들,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눈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불가능에 가까운 순간들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가나, 아풋, 픽써폭, 지먹석
- 조 용미 시 ‘흰색에 관한 말‘
[당신의 아름다움],문학과지성사, 2020.
내가 보고, 내게 보이는 것들
내게로 와 내 눈에만 살며시 보이는 헛것들
속삭이며 귓속을 우리는 내 것이 아닌 이 숨소리들
나의 감각이 구축한 튼튼하고 허약한 세계
내가 설계한 기이한 건축물
나는 죽을 사람을 보고 당신은 죽은 사람을 본다
나는 빛의 어둠을 보고 당신은 암흑의 광휘를 뽑아낸다
나는 침묵의 굉음으로 아프고
당신은 소리 없는 곳에 산다
능소화를 밟고 여름을 지나온다
독이 많은 꽃들이 피뢰침처럼 피어난다
노랗고 붉은 큰 꽃들의 목이 다 비틀어져 있다
- 조 용미 시 ‘나의 사랑하는 기이한 세계‘
* [나의 다른 이름들],민음사, 2016.
카르투지오 수도원 입구에 있는 표지판
 ̄침묵지대 (Zone de Silence)
암벽이 병풍어럼 둘러싸여 있는 봉쇄수도원
여행객들은 왜 침묵을 엿보려 하는가
수도사들의 침묵과 고독을 넘보려 하는가
카르투지온들의 하얀 언어를 훔치고 싶어 하는가
침묵을 위대하다고 말하면 수다가 되어 버린다
침묵을 고요하다 말해 버리면
즉시 언어의 이중구조 안에 갇혀 버린다
침묵지대는 툰트라지대처럼 추운가
낮게 가라앉은 빛들이 들끓는가
침묵은 규정될 수 있는가
침묵 예찬, 침묵의 소리, 위대한 침묵, 침묵의 세계
모두 다 침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침묵에 대해 그렇게 많은 말들이 필요한가
침묵을 들을 수 잇는가 침묵은
느낄 수 있는가 침묵이, 침묵을 ¨¨¨괴롭히지 말자
침묵을 그냥 침묵이게 놔두자
침묵지대라는 표지판을 걸어 두면 침묵이
샘물처럼 생겨나게 될까 침묵이 오래 머무를 수 있을까
침묵 아닌 것들을 막아 낼 수 잇을까
침묵이 숙연해질까
수다스러운 침묵이 꽝꽝 고요해질까
하여간 침묵지대가 필요하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 조 용미 시 ‘침묵지대‘
[나의 다른 이름들],민음사, 2016.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모든 일이 다 일어난
것 같다, 이렇게 하루를 요약해본다 우리에겐 은유가 절
실하다 눈 밑에 검은색이 웅크리고 있다 오늘은 가득 차
서 부푼 달, 윤달 구월, 다시 겨울이 온다 시간과 공간이
슬쩍 뒤섞인다
미혹과 깨달음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여름 가을 겨울
이 쉼표도 없이 의문도 없이 차례로 밀려온다 어김없이
모든 것이 반복된다 눈이 오고 또 비가 내린다 어둠이
찾아왔다 물러간다 사람을 얻었다 잃는다 풀이 시든다
꽃이
피고 진다 이 지루하고 장엄한 우주적 반복에 안심이
된다 여기엔 불안이 없다 여기엔, 그 누구라도 몸을 숨
길 만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행성에 겨울이 다시 찾아온다 당
신은 어디에 있나 내가 이곳을 버리고 떠나기 전에 당신
은 오지 않겠지 당신은 나를 찾아 수 세기를 떠돌겠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나였던 당신을 기다
릴 테다 내 앞만 뚫어지게 바라볼 테다
은목서에 꽃이 피려면 어떤 다른 시간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 모든 것이 금방 또 사라질
텐데, 당신과 나는 자꾸 만나지 못하지 은목서꽃이 피어
만나지 못하지 은목서 흰 향기가 당신 이름을 지나 머뭇
머뭇 내게로 와도 우린 알지 못하지 기어코 알지 못하지
내 기다림이 언젠가 이 어둠을 돌파할 수 있을 때까지
- 조 용미 시 ‘불귀 ‘
*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퍼붓는 빗속에서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헤매 다녔다
비는 지나치게 굵고
막 쏟아진 눈물처럼 뜨거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가 근심스러운 눈길로 나를 내
려다보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무언가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가지
고 있다
그녀는 따뜻하고 아름답고 다정한데
나는 그녀가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품고 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깨어났다
그녀는 누구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비밀은 무엇인가
그녀는 고요히 내 이마를 짚었다
왜 빗속을 비명을 삼키듯 울먹이며 걸어 다닌 것인지
꿈속의 나는 내가 다 알 수 없는 나이다
내 이마를 짚었던 그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
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꿈속의 나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내가 아닌 누구인가
그 여인이 나인 것만 같다
꿈속 나의 마음은 늘 나를 조심한다
- 조 용미 시 ‘ 마음’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마늘과 꿀을 유리병 속에 넣어 가두어두었다 두 해
가 지나도록 깜박 잊었다 한 숟가락 뜨니 마늘도 꿀
도 아니다 마늘이고 꿀이다
당신도 저렇게 오래 내 속에 갇혀 있었으니 형과 질
이 변했겠다
마늘에 緣하고 꿀에 연하고 시간에 연하고 동그란
유리병에 둘러싸여 마늘꿀절임이 된 것처럼
내 속의 당신은 참 당신이 아닐 것이다 변해버린 맛
이 묘하다
또 한 숟가락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줄 마늘
꿀절임 같은 당신을,
가을밤은 맑고 깊어서 방 안에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어앉는다
- 조 용미 시 ‘ 가을밤‘
[기억의 행성], 문학과지성사, 2011.
루트, 라고 대답했어요
좁은 골목을 지나자 나타난 늦가을 장미가 두 송이 피어 있는
작은 정원의 벤치에서
그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어요
당신의 연주는 훌륭했어요
이 악기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그에게 물었어요
기타도 만돌린도 아닌 내가 알았던 어떤 사람과 닿아 있는 것 같은
이 악기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누군지 모를 어떤 사람을, 오래전 잊은 어떤 말을
감추어 둔 어떤 마음을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이 낯선 도시에서 문득 만나게 된 거예요
당신은 이 악기와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하나이군요
내게 이 악기의 이름을 말해 주겠어요
당신은 왜 이 머너먼 곳의 거리에서
곧 져야 할 목이 긴 분홍 장미 옆에서
다른 악기도 아닌 루트를 연주하고 있나요
당신은 아주 춥고 아름답고 먼 나라에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군요
누군가에게 루트, 라고 말해
그의 심장을 터트리기 위해
- 조 용미 시 ‘그 악기의 이름은‘
* [나의 다른 이름],민음사, 2016.
비 오는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다
숲의 벚나무 가지들이 검게 변한다 숲 속의 모든
빛은 벚나무 껍질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흑탄처럼 검어진 우람한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 빛이 은
밀히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른 연못에 물이 들어차고 연못에 벚나무와 느티
나무의 검은 가지와 잎과 흐린 하늘 몇 쪽과 빗방울
들이 만드는 둥근 징소리의 무늬들 가득하다
계류의 물소리는 숲을 내려가는 돌다리 위에서 어느
순간 밝아지다가 뚝 떨어지며 이내 캄캄해진다
현통사 霽月堂의 月자가 옆으로, 누워 있다 계곡 물
소리에 쓸린 것인지 물 흐르는 방향으로 올려 붙은
달, 물에 비친 달도 현통사 옆에선 떠내려갈 듯하다
비 오는 날의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 뒤에 숨는다
- 조 용미 시 ‘소리의 거처‘
[기억의 행성],문학과지성사,2011.
물에 주름이 잡혔다 물의 주렴이 모여 물의 주름이 되
었다
개울물 흘러내리다 멈춘 자국
여러 겹
얇은 망사 커튼이 흘러내린 듯 순간과 순간이 겹쳐져
있다
강추위가 물의 형태를 바꾸었다
영하의 온도가 물의 체적을 바꾸었다 물의 길이 비중
을 바꾸었다
스스로 밀도를 변형시켰다
마른 나뭇잎들이 드문드문 무늬처럼 끼여 있다
무게는 바뀌지 않았다
그림자가 바뀌었다
물 위의 그림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얼음 언 개울 위는 투명한 물색 아래쪽은 맑은 회색
강추위가 물의 색을 바꾸었다
공은 그대로인데 색이 바뀌었다
물과 얼음은 같은 것일까
물 위에 서서 물을 느껴본다 물에서 물을 바라본다
물의 한가운데에서 물을 만져본다 물 위에 떠서 글자
를 써본다 물과 만나는 손끝이 시리다
흐르는 물의 정지 화면을 밟고 서 있다
물과 물 사이 나뭇잎처럼 투명해지고 있다
- 조 영미 시 ‘물의 주름‘
*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연못에 나뭇잎 화석이 떠 있다
서걱서걱 얼음이 끼어 있다
저 화석은 깨어지지 않을 것 같다 부서지지 않을 것
같다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우두커니 들어가 서 있고 물속의
나무가 놓아준 나뭇잎 몇 장은
죽은 사람의 살 대신 위로 떠올랐다
회색 하늘과 차가운 새 울음 몇 그루는 최근에 들어
갔다
소리는 깊이 가라앉지 못하고 잠시 떠다니다
물 밖으로 걸어 나온다
소리가 물속 깊이 들어가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
지 생각해보다 항상 멈추었다
생각은 바닥에 닿지 못한다
이제 겨울나무들이 들어가 있는 곳에
얼굴 같은 걸 비추어보지 않는다
연못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누군가의 목을 걸었던 밧줄의 무게를
밤새 늠름하게 감당해냈던 검은 나뭇가지만 보인다
살얼음이 끼었다
무엇을 가두는 얼음이 아닌 나뭇잎을 오래 살려두려는
얼음이다 얼음의 살이다
빗살, 물살, 빛살, 문살 다 살이 없다
죽음은 살과 친근하다
- 조 용미 시 ‘물속의 나무‘
*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이 도시는 왜 이렇게도 조용한 걸까 거미줄처럼 길은
안으로 안으로 향한다 작은 성당에 들어갔다 노인 한 사
람이 제단 앞 측면 자리에 앉아 있다 문 앞에서 천장과
창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노인과 나는 다른 공간으로 멀
어졌다 잠시 후 청년이 들어와 천천히 그의 앞으로 가 섰
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았다
아무리 멀리 떠나도 거기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이 있다
노인이 일어나 그를 껴안았다 그들 앞에 죽은 이가 놓
여 있음을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노인이 앉아 있던 시간도
청년이 내 옆을 지나 앞으로 걸어 나간 순간도 그저 고요
했기에 그들의 호흡에 조금의 일렁임도 없었기에 슬픔의
기류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
그들은 나란히 앉아 말없이 관 속에 누워 있는 죽은 자
를 바라보았다 내가 성당에서 들은 소리는 아무것도 없
었다 누군가 죽은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고, 그 죽음은
아무런 소리도 필요치 않았다
하루쯤 지난 누군가의 손을 잡아보려 한 적 있다
이 도시는 어떤 죽음을 침묵으로 애도하고 있다 식당
도 텅 비어 혼자 달그락거리며 짧은 식사를 마쳤다 발을
겨우 디딜 만큼 좁은 계단이 위로 구불구불 이어진 미로
의 흰색 골목은 깊이를 높이로 대신한 걸까
제단을 향해 누워 있던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두 사람이 침묵으로 지키고 있는 자의 죽음이란 마침
표처럼 단정하여 내가 품고 있던 말줄임표는 낯선 도시
에서 죄 없이 자꾸 무거워졌다 치스테르니노의 골목과
흰 집과 계단들은 모두 침묵의 복잡한 기호들, 검은색 슬
픔을 흰색으로 완고하게 덧칠한 계단과 골목들이 나를
포위했다
- 조 용미 시 ‘흰색, 침묵‘
*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09
09
2018년 1월 0일 9시 9분에서 10분 사이 60초 동안 나
는 검은 바탕에 위아래로 배열된 휴대전화 꺼짐 화면의
평면에 나타난 몹시도 조형적인 아라비아숫자를 숨죽
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순간을 영원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천변엔 검게 마른 가막사리 열매가 찬바람을 맞으며
있고
진눈깨비가 스으스윽 지나가고
나는 갈대숲에 서 있고
09에서
10으로
숫자가 바뀌었다
생활은 아라비아숫자와 겹쳐진다
눈은 자꾸 내려와
하늘은 먹빛이고
새의 커다란 날개 속에 덮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삶이 계속되리라는 환幻이
우리를 살게 만든다
- 조 영미 시 ‘09시 09분‘
*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해바라기를 들여다본다 씨들은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휘어져 있다 나선형의 매혹은 흡입력 때문인가 어떤 마
음은 파고들고 어떤 마음은 빠져나오고 마는
앵무조개, 달팽이 껍데기, 잠자리 날개, 벌집, 솔방울,
어떤 나선은 그 애절함 탓에 다른 쪽으로 더 심하게 휘
어진다 오늘 바라보았던 꽃잎과 나의 발걸음이 그렇다
오른쪽으로 흰 나선과 왼쪽으로 흰 나선의 숫자들 우
리의 걸음걸이는 피보나치수열에 속하는 수에 이르게
된다 얽히고 교차하면서도 겹쳐지지 않는 순간들
질서와 균형을 멀리하는 사람도 간혹 그 자리에 딱
앉혀버리는 배열, 그 편안함을 익혀버리면 혼돈과 무질
서의 찬란한 아름다움에 대해 망각하기 쉽다
평균율음계에 친근해지면 몸이 둥글어질 것만 같아
파열음을 만들어내며 살아온 날들을 후회할 수 없다 질
서란 늘 무질서보다 더 거대한 법이지만 우주적 질서는
무질서의 다른 이름
십일월의 잘 익은 얼굴만 한 해바라기를 들고 씨를
하나 빼 먹으려면 질서의 구조에 감탄하고 나서 등
을 돌려야 하는 반짝이는 한 잎의 갈등이 있다
- 조 용미 시 ‘질서의 구조‘
모든 순간에는 끝이 있다
저 나비도 그걸 알고 있다
비 오는 날이면 늘 나비들이 어디 있는지 궁금했다
복사꽃 옆을 지나다 다시 돌아왔다
날개를 접고 꽃잎 아래 매달려 있다
더듬이와 꽃의 암술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
큰줄흰나비 날개가 다 젖어 있다
무거워진 날개가 나비의 영혼을 붙잡고 있다
몸이 곧 영혼인 걸 너도 이제 알게 되었을 테지
무거워진 날개도 날개일 수 있는지 생각에 잠겨 있다
날개 때문에 날 수 없게 되었다
접은 날개로 깊은 사유에 들었다
나비와 나는 서로를 느끼고 있다
젖어가는 옷을 입고 나도 조금씩 무거워졌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빗속에 함께 있다
- 조 용미 시 ‘날개의 무게’
컴컴한 임도 입구의 가장 어두운 곳에 서서 커다란
사각형 모양의 페가수스를 찾는다 다음은 안드로메다,
페르세우스……
여기 올 때마다 별자리를 찾아 헤매었어도 여태 단정
한 마음자리 한 칸 마련하지 못했다 자리라는 말에 과도
하게 의미를 둔 탓이다
별의 자리를 찾아서 무얼 하겠는가 거긴 내가 앉을
수 없는 곳 생활이 기운다 두 페이지를 넘겨 쓴 노트의
텅 비어 있는 양면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었을 때
물고기자리를 만나야 좋다는데 가장 나중의, 남쪽의
물고기는 물이 말라 있을 것만 같다 그 물고기가 내 목
을 축여줄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는데
나는 이제 모든 미래를 의심한다
자주 보는 별자리가 언어처럼 사고방식을 결정하는
걸까 이 암흑속에서 오로지 살겠다는 것도 죽겠다는 것
도 아닌 모호한 의지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전갈자리는 나를 어떻게 결정하는 걸까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도 하기 전에 자신의 최
종 목적지를 결정해야 하는 빛처럼, 외로이 매 순간의
결단을 믿으며
미래를 의심하느라 현재를 탕진하고, 암흑 속의 외로
운 한 점 얼룩* 지구에서 먼지처럼 발버둥치며 천 억 개
이상의 신경세포를 가진 외롭지 않은 우리는
- 조 용미 시 ‘각자의 고독‘
* "암흑 속의 외로운 얼룩"―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떨리는 눈꺼풀에 불두화 꽃송이를 끌어 당겨와 얹어
본다
불두화 푹신한 꽃들이
몸의 열을 조금씩 나누어 가진다
속눈썹을 움직여보니 꽃송이 안에 이상한 세계가 있다
이런 식으로 저들의 영역을 엿보려 했던 건 아니다
불두화들에겐 내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있다
둥근 꽃송이 안에 들어 있는 작은 꽃들
작은 꽃들 안에 들어 있는 더 작은 꽃들 더 작은 꽃들
안에 들어 있는
목성처럼 커다란 장소를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생각한 것처럼, 보였다
들어가 볼 수 있을까
불두화 속은 내가 볼 수 없었던 눈동자, 내가 감각할
수 없었던 피부, 내가 보아서는 안 되었던 우물의 속
눈꺼풀 위에 불두화를 올려놓고
고개를 들고 눈을 감고
반쯤 감고, 고요하게 소용돌이치는 노랗고 파르스름하
고 어룽거리는
불두화 속 마주 보는 눈동자의 고독을 생각해 보았는데
- 조 용미 시 ‘눈동자의 고독‘
자다 깨어 거울 앞 지나다 얼핏 보니
내가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잠깐 잘못 본 건가
다시 거울 앞으로 가기가 겁이 난다
거울 속의 나는 통증을 알지 못하여
이 시간까지 책상에 앉아 있다가
잠시 방심하고 내가 자고 있는 사이
자리를 비운 것이다
멀쩡한 몸을 감당하지 못하는 따분함도
그 아무 일 없음의 열락도 차마 모르는,
몸의 비루함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순정한 내가 저기 있다
여태 그가 보여주는 것만 보았다
누군가 아마도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살고 있을
진지함을 가장한 저 세계는
지금 이 순간의 나와 가장 먼 거리에 있다
일어나 거울을 들여다보아야겠다
나와 마주치기 꺼려 하는 차갑고
말이 없고 고독하고
복잡한 내가 저곳에 있다
몸을 씻고 나면 늘 마주 보게 되는
그 시간만은 정확하게 잊지 않고 나타난다
거울 속엔 몰래 사는 것들이 많다
내가 없는 거울을 들여다보아도 되는 걸까
- 조 용미 시 ‘내가 없는 거울‘
당신과 함께 연두를 편애하고 해석하고 평정하고 회유
하고 연민하는 봄이다
물에 비친 왕버들 새순의 연둣빛과
가지를 드리운 새초록의 찰나
당신은 연두의 반란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찬란이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유혹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확장이
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경제라 하고 나는 연두의 해법이라 했다
여러 봄을 통과하며 내가 천천히 쓰다듬었던 서러운
빛들은 옅어지고 깊어지고 어른어른 흩어졌는데
내가 아는 연두의 습관
연두의 경계
연두의 찬란을 목도한 순간, 연두는 물이라는 목책을
둘렀다
저수지는 연두의 결계지였구나 당신과 함께 초록을 논
하는 이 생이 당신과 나의 전생이 아닌지도 모른다
- 조 용미 시 ‘연두의 회유‘
당신은 늘 빛을 등지고 있다
내가 만든 구도이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더불어
당신의 아름다움은
윤리적이어야 한다
당신은 최종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빈틈없어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고독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나로부터 발생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내게 늘
가장 큰 시련이다
당신 뒤에는 빛이 있다
당신은 빛을 조금 가리고 있다
- 조 용미 시 ‘당신의 아름다움‘
이른 저녁을 먹는다 묵묵
어쩌다 여기 들어와 밥을 먹게 되었나
비술나무 세 그루
물끄러미 오래 밥 먹는 나를 바라본다
이곳은 넓고 환하고
테이블이 많다
비술나무가 나란히 서서 내려다보는 식사는
약간 목이 메인다
나는 밥을 먹고 비술나무는 가까이
옆에 있다
창은 나를 오래 상영한다
창밖의 나무는 세 그루
나는 한 사람
식당은 아주 밝고 지나치게 넓고 깨끗하다
이 식사는 영영 끝날 것 같지 않다
- 조 용미 시 ‘테이블’
우리가 보는 모든 색이 모두 幻은 아닐 것이다
저 물과 구름과 나무의 색이 모두 환이라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럼 지구의 밖에 있는 것들은, 빛나는 감마선이 철사
줄처럼 길게 이어져 있는 이 우주는
거대한 별의 뿌리가 내뿜는 뜨거운 에너지와 그 빛은 또
뭐란 말인가
여기 내가 편애했던 색과 빛이 있다
인디고 프러시안블루 코발트블루 세룰리언블루 피콕블
루 울트라마린 그리고 적외선 자외선 감마선
붉음의 바깥에 있다는 것 보라의 바깥에 있다는 것
바다의 저 너머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슨 빛과 색
이 별처럼 많단 말인가
큰 접시안테나로 우리가 저 너머에 있는 어떤 우주의 파
장을
그 미세한 빛과 색의 기미를 한 올 한 올 잡아낸다면 감
각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환일까
이 세상의 바깥에는, 푸른 밤의 공기가 숨기고 있는 수
많은 빛들은
우리가 보는 빛과 색은, 어둠을 만날 때마다 새벽
이 올때마다 변형되는 이 세계는
- 조 영미 시 ‘우리가 아는 모든 빛과 색 ‘
[나의 다른 이름들],민음사, 2016.
빗소리가 작아지고 있다 밤새 높았다 낮았다 하던 빗방울의 음계가 머리맡을 오래 어지럽혔다 문을 여니 수련이 한 송이 피어 있는 연못 저쪽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금방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소리들은 다 어디서 쏟아져 나오는 것일까
뿌옇게 비안개가 내려오고 있다 비안개는 대숲의 한쪽으로 총총 발걸음을 옮기다 바람이 몰아치면 소리를 퍼뜨리며 아무렇게나 여기저기로 흩어진다 진박새가 보라빛 꽃송이가 둥그렇게 피어 있는 수국 속을 포동포동 들락거리고 있다
몸을 가다듬는 것이 마음을 깨침만 하겠는가, 하겠는가…… 간밤의 글을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섞여버리는 산속, 계곡의 급류는 온갖 소리를 내며 흐른다 그날 절벽 구멍 난 바위틈에서 들은 목탁 소리는 내가 보지 못한 물거품이 세운 절,
흰 거품을 일으키며 쏟아지는 물소리에서 나는 여러 날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이냐 개안을 하듯 세상이 새로워지는 일은, 한 우주와 한 세계를 다시 얻는 일은 저 물소리에서 목탁소리를 듣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물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고요하다
- 조 용미 시 ‘두륜산 小記‘
*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학과지성사, 2009.
―백사시옹
어느 별에서도 삶과 죽음은 무한히 반복된다 다만 나의 죽음은 반복되는 마지막이길 바란다 기억되지 않는 삶의 소소한 내용들,
―이 삶을 팔백사십 번 되풀이하시오
첫 생을 받았을 때 신에게 받은 운명의 악보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만사輓詞는 어느 먼 전생의 무덤에서 나온 것이던가 기억되진 않지만 그 삶의 소리와 빛깔은 나의 것임이 분명하다
단 한 번이었던, 잔칫상에 오르는 수파련처럼 아리따운 한때의 생도 무자비한 시간의 세례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빠르게 반복되는 죽음,
뒤의 삶
팔백사십 번이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금방 지나간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지혜가 수승하면 한 번만 생을 받을 것이고 약하면 일곱 생까지 더 받게 된다 했건만
죽도록 되풀이해야 하는 악보 위의 음표 같은 생은 도대체 누구의 것일까 마지막 생을 다하고
마침내 불환과不還果 를 얻게 되었을 때, 운명의 악보 끝에는 깨알 같은 글자로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팔백사십 번의 상징을 밟고 사뿐히 그냥 지나가시오
- 조 용미 시 ‘악몽 ‘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문학과지성사, 2009.(2007)
헛되이 나는 너의 얼굴을 보려 수많은 생을 헤매었다
거듭 태어나 너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다
위미리 동백 보러 가 아픈 몸 그러안고서도, 큰엉해안이나 말미오름에서도, 빙하기 순록과 황곰 뼈의 화석이 나온 빌레못동굴 앞에까지 와서도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저 멀구슬나무나 담팔수, 먼나무가 당신과 아무 상관없다고 확신할 수 없는 이 생이다
너에게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가지 않으려고
헛되이 나는, 이 먼 곳까지 왔다
- 조 용미 시 ‘헛되이 나는‘
[기억의 행성], 문학과지성사, 2013,
올 봄 하릴없어 옥매 두 그루 심었습니다
꽃 필 때 보자는 헛된 약속 같은 것이 없는 봄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군요
내 사는 곳 근처 개울가의 복사꽃 활짝 피어 봄빛 어지러운데 당신은 잘 지내나요
나를 내내 붙들고 있는 꽃 핀 복숭아나무는 흰 나비까지 불러들입니다
당신은 잘 지냅니다
복사꽃 지는데 당신은 잘 지냅니다 봄날이 가는데 당신은 잘 지냅니다
아슬아슬 잘 지냅니다
가는 봄 휘영하여 홍매 두 그루 또 심어 봅니다 나의 뜰에 매화가 가득하겠습니다
- 조 영미 시 ‘봄, 양화소록‘
[나의 다른 이름], 민음사, 2016.
죽은 참새가 마당에 떨어져 있다
목련나무 아래
납작해진, 이미 며칠이 지난
새의 주검
질경이 위에 누워 있는
그 작은 것을 나는 그냥 둔다
목련나무 아래 잠든 새의 죽음을 보라고
꽃이 떨어지듯
풀이 마르듯
고요한 시간들을 그냥 두고 보려고
상복보다 더 하얀
새의 죽음
저 작은 새의 죽음만으로도
모든 봄을 기억해낼 수 있으리라
허공 속에 잠시 피어난
붉은 꽃들,
죽은 것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는다
- 조 용미 시 ‘작은 새의 죽음‘
* 시집『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중에서 / 문학과지성사
잠에서 깨어나면 늘 새벽 네 시의 희뿌윰한 달빛과
기차소리가 있다
기차소리가 지나간 다음 새벽 네시는
사람의 옆모습을 갖다놓거나 분홍빛 상사화의
꽃대를 분질러놓기도 한다
새벽 네시는 왜 나를 깨우는가
한때 자막 없는 흑백영화와 우울한 음악 사이를
지칠 때까지 헤매다니다가 쓰러지곤 한 시간,
그 시간이 나를 찾아와 머리맡에 검은 옷자락을
늘어뜨리고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
내가 네시의 전언을 다 헤아리지 못해
어느 시집의 곳곳을 하릴없이 돌아다니다가 그만
한사람의 가장 비밀한 부분을 보아버렸을 때,
나는 새벽으로 난 길을 끊어버리고 다시
내 안으로 깊숙이 돌아와버렸다
새벽의 끝에서 또 한번 기차소리가 들려왔고
내가 가지 못한 새벽길은
달빛에 희게 번쩍이며 멀리 구부러진다
사람이 가지 못한 모든 길은 새벽에
저 혼자 하얗게 빛난다
-조 용미 시 ‘새벽 네시는 왜 나를 깨우는가‘
*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창작과비평사, 2006.
침 한 방울 삼키기에도 힘이 든다
죽어서도
이렇게 외로울까 숨이
막히지는 않겠지
아아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웠다 일어났다, 눈을 떴다 감았다,
나는 죽어 있다
어서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더 이상 시간은 더디게 가지 않는다
아무리 아파도, 비명을 삼켜도 이제 시간은
더 이상
더디게 지나가지 않는다
스르륵 스르륵 손에서 모든 것이 빠져나간다
피로 씌어지는 生이라는 책,
나는 호흡을 고른다
오늘 안으로 숨을 제대로
다시 쉬어야 한다
- 조 용미 시 ‘더 이상 시간은‘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문학과지성사, 2004.
長明燈장명등 불빛을 오래 밝혀다오
자줏빛 남빛 깃을 단 소렴금 대렴금으로
나를 꽁꽁 묶어다오
皐復* 고복일랑 하지 말아다오
살아도 살아도 고통은 새록새록 새로웠다
나뭇잎 말라비틀어져도
치욕은 파릇파릇 잎을 틔웠다
이제
이른 봄에 돋아나는 새싹 같은 그것들을
데리고 간다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도록
마음이 타올랐다 꺼지고 또 타오르고
그렇게 쌓인 재들이 수북하게
가슴을 메웠던
내 사랑은
살아서 단 한 번도 나의 것이지 않았던 죽음은,
기억하지 말아다오
살아서 단 한 번도 나의 것일 수 없었던
모든 그리운 것들의 거처를
- 조 용미 시 ‘終生記‘
*皐復* 고복 : 초혼하고 발상하는 의식 . 사람이 죽은 5-6시간 뒤 그가 입던 웃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거나, 마당에 서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 손으로 허리를 잡은 후 , 북족을 바라보고 [누구가 몇 월 며칟 날 몇 시에 별세(別世) ]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을 시체 위에 덮는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 , 문학과지성사, 2004
왜 모든 것은 반복되는 것일까 왜 모든 감각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것일까 이 별의 모든 것들은 왜 끊임없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걸까 반복되는 삶이 지루하지 않고 무시무시하다
인간은 반복되는 존재다, 라고 말해도 겸손을 위장할 수 있을까 어느 생에선가 내가 살아낸 적 있는 삶을 당신이 지금 왜 똑같이 살아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가장 무서운 형벌은 반복을 반복하는 것
오래전 내가 살았던 삶은 지금의 삶과 너무 다르지만 결국 같은 것을, 당신과 내가 다음 생에도 무언가 이상한 일을 반복하리라는 것을, 그러기 위해 꼭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검고 희고 붉고 푸르고 밟고 어두운 것들의 세계에 들어 회오리치며, 당신과 나는 여러 생을 지나도록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반복을 기다리고 여러 생이 지나도록
- 조 용미 시 ‘墨白 ‘
* 기억의 행성
어느 날은 기시감에 어느 날은 미시감에 시달렸다 그것은 전생의 기억이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 독백탄은 기시감이 앞섰고 족자섬은 미시감이 먼저였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해도 일치하지 않아도 매번 기시감과 미시감 사이에서 시달린다면 어디서 무엇이 얼크러진 것일까
고흐는 단지 찬란한 노란색을 얻기 위해 매일 압생트를 마셨던 것은 아니다 그토록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스스로를 조금 속일 필요가 있었던 것, 그는 노란색을 완전히 장악했던 걸까 노란색의 심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압생트가 아니라 고독과 광기와 섬세함과 난폭함이 고루 필요했다
녹색과 노란색 사이를 수백 번 왔다 갔다 하고 나니 두 귀밑머리가 허옇게 변하더라, 귀 있는 것과 귀 없는 것 지나간 것과 오지않는 것이 하나더라
- 조 용미 시 ‘압생트’
<현대시학> 2011년 3월호.
그 많은 열쇠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까마득한 벼랑 위
비오는 날 옥상의 빨랫줄에 걸린
빨래집게들처럼 걸려 있는 녹슨 자물쇠들은
배운정(排雲亭) 앞 펼쳐진 운해보다 더 기이한 풍경
쇠사슬의 구멍마다 빈틈없이 매달린
자물쇠에 새겨진 이름과 날짜들
무엇을 기약하는 문자들,
그들은 황산에 올라 자물쇠를 채우고
하나씩 열쇠를 절벽 아래로 던져버린다
던졌던 열쇠를 찾아와 자물쇠를
열기 전까지는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다 믿는다
그토록 많은 헛된 맹세들이 다
열쇠 탓은 아닐 것이다
누가 사랑을 저버리기 위해
벼랑 아래로 내려갈 것인가
험한 곳에 올라 숨결을 걸고
맹세한 인연이 걸어놓은 자물쇠들은
굳건하리라
그 많은 열쇠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 조 용미 시 ‘열쇠의 행방‘
언젠가 살았던 생을 다시 한 번, 똑같이
살아내고 있다는 분명한 느낌
이 생을 알 것 같다, 이제야 알겠다
내일도 과거인 이 생을
모든 슬픔이 낯익다
뼛속까지 다 들여다보이는 아픔이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하루다
겪지 않아도 다 알겠는 사랑이다
이렇게 뻔히 만져지는 삶을
나는 새카맣게도 모르고 살았구나
이전의 누군가의 삶을, 그 누군가의 나였던 삶을
나는 왜 또 되풀이하여 살고 있는 것일까
몸서리치는 생이다
- 조 용미 시 ‘타인의 삶‘
내 책 읽는 방 窓 앞으로 나가면
산자락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절과 나무들, 지붕들
커다란 둥지를 이고 있는 여위고
키 큰 나무 두 그루
지나는 구름들 볼 때 앉는
觀雲席이라 이름 붙인
자그마한 나무의자 하나 놓여 있어
봄눈 온 새벽부터 앉아
새파란 하늘과, 소나무에 얹힌 무거운 눈이
바람에 흩어지는 걸 바라보며
온갖 새소리 마음 모으고 가만 듣다가
자작나무 흔들리는 걸 볼 땐 몸이
한쪽으로 저도 모르게 기울다가
날 갠 낮부터는 뭉게구름이 지나는 걸
종일 살펴보고 있지
이 동그스름한 나무의자에 앉을 수 있는 이는
오직 마음이 한가로운 자,
오늘은 종일 구름 공부를 하네
관운석 접어두고 들어오니
내 공부는 오늘 많이 진척되었네
- 조 용미 시 ’관운석‘
*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학과 지성사, 2007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최고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동시에 보아버리고
알아버린 생이
다시 올까 두렵다
너무 많은 아름다운 풍경이
내 눈을 멀게 했다
끔찍하다
이 세상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위해
무엇을,
살고자 하는 의지는
죽음으로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
너무 많은 아름다운
풍경이
- 조 용미 시 ‘단 한 번의 풍경‘
# 나무는 풍경을 길들인다 (장 그르니에)
사이프러스는 마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균형잡힌 아름다운 나무라고 고흐가 말했을 때
그는 저 나무를 빛과 색채로 감각함과 동시에 균형으로 파악했던 걸까 가지가 위로만 향하는
타오르는 촛불 같은 저 나무는 넓이 대신 깊이를 존재 방식으로 했다
사이프러스는 언제나 검은 초록으로 불타고 있다
사이프러스가 양옆으로 도열하듯 서 있는 어느 먼 곳의 한적한 정류장에서 내 영혼은 나무들에
완전히 압도당하여 그 기이한 풍경 속으로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사막으로
접어드는 늙은 낙타처럼 걸어들어 갔다
바람의 어느 세찬 손이 나무를 저렇게 높이 휘감아올렸나
흩뿌려 놓은 진홍색 물감처럼 펼쳐져 있는 들판의 개양귀비와 첨탑처럼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어두운 초록빛 사이프러스 사이에서 나의 번민은 깊어갔다
막 불이 붙기 시작한 듯한 밀밭과 초저녁의 소용돌이치는 하늘은 모두 저 사이프러스로 인한 것
사이프러스가 있는 풍경에는 지독한 아름다움에 대한 번민이 슬픔처럼 가만히 숨어 있다 사이프러스가
층층이 쌓아올린 검은 초록의 탑은 오벨리스크보다 더 높다
- 조 용미 시 ‘사이프러스‘
[ 제23회 2008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08.우수상 수상작 중에서
가슴속에서 검은 담즙이 분비되는 때가 있다 이때 몸속에
는
꼬불꼬불 가늘고 긴 여러 갈래의 물길이 생겨난다 나뭇잎의 잎맥
같은 그 길들이 모여 검은 내, 黑河를 이루었다
흑하의 물줄기는 벼랑에서 모여 폭포가 되어 가슴 깊은 곳을
가르며 옥양목 위에 떨어지는 먹물처럼 낙하한다
폭포는 검은 담즙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의 죄는 비애를 길들이려 한 것이다 생의 단 한 순간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비애는 그을린 태양 아래 거칠고 긴 숨을 내쉬며
가만히 누워 있다
쓸갯물이 모여 생을 가르는 검이 되기도 하다니 검은 폭포
아래에서 모든 것들은 부수어져 거품이 되어버린다 거품이 되어
날아가는 것들의 헛된 아름다움이 너를 구원할 수 있을까
비애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너의 죄는 비애를 길들이려 한 것이니 幻이 끝나고 滅이 시작
되는 지점에서 삶은 다시 시작되는 것을 검은 담즙이 모여 떨어
지는 흑하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이 지상에서 가장 헛된 것이라 부르겠다
지상에서 가장 헛된, 그 아름다움의 이름은 絶滅이다
- 조 용미 시 ‘검은 담즙‘
*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학과 지성사
높은 곳에 서 있으면
바람의 힘을 빌려 몸을 날리는 꽃잎처럼
뛰어내리고 싶었다
허공으로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봄 저물녘의 흰 꽃잎들
삶이 곧 치욕이라는 걸,
어떤 간절함도
이 치욕을 치유해주지 못한다는 걸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소나기처럼,
붉은 땅 위로 내리꽂히는 장대비처럼,
어둑한 겨울숲에서 혼자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는
동백의 모가지처럼
높은 곳에 서 있으면
발 아래 까마득한 것들 다 공중으로
불러들이고 싶다
역류하는 것들의 힘으로
떨어지는 나는 폭발물이다
- 조 용미 시 ‘꽃잎’
내가 보낸 삼월을 무엇이라 해야 하나
이월 매화에 춘설이 난분분했다고, 봄비가 또 그
매화 봉오리를 적셨다고
어느 날은 춘풍이 하도 매워 매화 잎을 여럿 떨어
뜨렸다고
하여 매화 보러 길 떠났다 바람이 찬 하루는
허공을 쓸어 담듯 손을 뻗어 빈손을 움켜쥐어보며
종일 누워 있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저 한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의 빈틈에서
별똥별이 두 번이나 떨어졌다고 해야 하나
무슨 귀하고 애틋한 것이 지상에서 사라지는지 별
똥별이
몸을 누이고 있었던 그 적막한 날의 客窓으로
한 번은 길에 또 한 번은 짧게 안으로 쏟아지듯 스
러졌다고 말해야 할지
내가 알 수 없는 그 일이 여러 날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어릿어릿 사람을 아프게 했다고 할까
내가 보낸 삼원은 그리하여 그늘도, 꽃도, 적막함
도, 가파름도 함께였는데
삼월이 간다고, 괜히 봄비 내리는 저녁을 탓한다네
별똥별이 떨어진 그날 무엇이 내게로 와 사라진다
말할 건지
긴 저녁의 빗소리로 삼월을 마저 보내면 나는 또
누구의 눈앞에서 별똥별 같은 것이 되어
삼월이 아주 간다고 그렇게 말하며 스러지게 되는
걸까
내게 그리움이 찾아들었다고, 서러움이 다시 시작
되었노라고
알 수 없는 가파른 그 높이를 천천히 한 걸음씩 다
걸어가보아야 할 거라고
나는 내게 나지막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속
삭일 뿐
- 조 용미 시 ‘봄날은 간다‘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中>
天象列次分野之圖, 오래전 천체의 궤도는 이 돌의 거대한 둥근 원 안에 굳어버렸다
해와 달과 천상의 모든 별자리들이
이 검은 대리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무덤을 지키고 있는 묘석들처럼
오래 침묵을 삼켰다
별자리를 이은 선들은 부적처럼 어둠의 수면에 빛나는 길들을 이어놓았다
입김을 불어넣어 검은 대리석 안의 별들을 조심조심 불러내면
밤하늘이 서서히 움직이는 소릴 들을 수 있다
음하수에서 흘러나오는 천상의 음악을 들을 수도 있다
하늘은 글자 없는 경전을 펼쳐 보인다
그걸 읽다 보면 주문처럼,
별들이 몸에 와 박힐 것이다
누구도 이 검은 대리석 경전을 다 읽을 수는 없다
- 조 용미 시 ‘천상열차분야지도‘
향을 피우고
눈을 감는다
향을 듣는다
가만히 눈썹을 들어 올린다
푸르게 피어나는
연꽃
흰 비단 두루마기 자락을 반듯이 펼치는
길고 여윈 손
명주실 위에서 침묵을 가르는
찬 바람 같은 손가락들
침향이 흐르는 걸 보며, 물속에 누워
향이 내 위를 천천히 흘러
밖으로 나가는 걸 보며
멀리 자금우 잎에 다다라서야
흩어지려는지
너울너울 푸른 길을 따라가며
추는 시간의 춤
신라의 오투는 무덤 속에서 가야금은 뜯고 있었다
천여 년 동안 가야금을 타고 있었다
- 조 용미 시 ‘침향무 - 황병기 가야금‘
저수지 위로 얼음이 솟았다
물이 산 그림자를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
바람이 싸락눈을 마구 쓸고 지나갈 때마다 저수지 위로 흰 길이 생겨났다 지워졌다
얼음의 두께로 상처의 깊이를 헤아려보며
그는 물 위를 걸었다
심장 근처를 더듬던 손이 멈추었다
물에 닿지 못했다
물의 한 가운데로 짐작되는 곳에 다물어지지 않는 상처가 불쑥 솟아 있었다
물의 바깥에서 그는 저수지의 일부가 되었다
물의 표면이 되었다
물의 안에는 표정을 잘 알 수 없는 그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물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물속을 걷지는 못했다
밤이면 울음소리를 내는 저수지가 있다
그는 저수지 위에 있다
저수지 위에서 몸이 식어간다
천천히, 저수지가 된다
저수지는 그의 일부가 된다
밤이면 울음소리를 내는 그 저수지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
- 조 용미 시 ‘죽어가는 자의 고독*‘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차용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폭우가 쏟아지는 밖을 내다보고 있는
이 방을 凌雨軒이라 부르겠다
능우헌에서 바라보는 가까이 모여 내리는
비는 다 直立이다
휘어지지 않는 저 빗줄기들은
얼마나 고단한 길을 걸어 내려온 것이냐
손톱이 길게 쩍 갈라졌다
그 사이로 살이 허옇게 드러났다
누런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치마를 펼쳐 들고 물끄러미 그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입은 두꺼운 삼베로 된 긴 치마
위로 코피가 쏟아졌다
입술이 부풀어올랐다
피로는 죽음을 불러들이는 독약인 것을
꿈속에서조차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일까
속이 들여다보이는 窓봉투처럼
명료한 삶이란
얇은 비닐봉지처럼 위태로운 것
명왕성처럼 고독한 것
직립의 짐승처럼 비가 오래도록 창밖에 서 있다
- 조 용미 시 ‘삼베옷을 입은 自畵像‘
저물녘, 집으로 돌아오는 당신을
멀리까지 마중 나가보고 싶습니다
어스름이 깔린
집 근처의 나무들이 눅눅해지는 그곳으로
따스한 외투와 목도리를 두르고
차가워질 여윈 손은 주머니에 넣고서
조금 멀리, 당신이 오고 있을
푸른빛이 짙어서 깊어가는 어둑한 그 길을 따라
그런 날이 오겠지요
아마 오겠지요 그런 날을 기다린 줄도 모르게
햇살이 커튼 뒤에 불을 켜듯 화안하게
푸른 연꽃을 피워 올렸다 꺼뜨리는 저녁 무렵
하루가 열렸다 닫히고 또 열리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어쩌면 당신을 마중 나가는 일도 깜빡할 날들이
아마 오겠지요
그런 날들을 기다린 줄도 모르게
푸른 연꽃이 커튼 자락에
밤낮으로
세상에 없는 그 꽃들을 수미단에서처럼
크고 화안하게 피워 올리겠지요
햇빝이 그 일을 도와주겠지요
나는, 햇빛 따라가겠습니다
- 조 용미 시 ‘햇빛 따라가다‘
*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불행이란 몸을 가짐으로써 시작되는 것
몸이 없다면 어디에 불행이 있을 수 있을까*
봄날 나의 침묵은 꽃 핀 나무들로 인한 것,
하동 근처 꽃 핀 배나무밭 지날 때만 해도
몸이 다시 아플 줄 몰랐다
산천재 앞 매화나무는 꽃 피운 흔적조차 없고
현호색은 아직 벌깨덩굴 곁에 숨어 있다
너무 늦거나 빠른 것은 봄꽃만이 아니어서
한잎도 남김없이 만개한 벚꽃의
갈 데로 다 간 흰빛을 경멸도 하다가
산괴불주머니 텅 빈 줄기 푹 꺼져들어가는 속을
피리소리처럼 통과해보기도 하다가
붉은 꽃대 속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몸이 견딜 만하면 아팠던 때를
잊어버린다 내 몸이 늘 아프고자 한다는 걸,
누워 있으면 서 있을 때보다 세상이 더
잘 보이는 이유를 또 잊어버린다
통증이 살며시 등뒤로 와 나를 껴앉는다
몸을 빠져나간 소리들 갈데 없이 떠도는
꽃나무 아래
- 조 용미 시 ‘봄날 나의 침묵은‘
* 노자 [도덕경]에서 인용
겨울 서해에서 사막을 보았다
지도를 펼치지 않아도 사강이나 비인쯤이면
벌써 바다 내음이 난다
뻘밭 위로 눈보라가 몰아쳤다
섬은 삽시간에 눈도 뜰 수 없는 흰 모래폭풍에 휘말렸다
뻘밭을 하얗게 뒤덮고 살갗을 파고들며
머리칼을 공중으로 치솟게 하는 흰 모래바람의 세례,
몸 숨길 데 없는 사람들을 떠밀어 쓰러뜨리는
저 억제할 수 없는 광포함을, 뿌옇게 시야를 가로막는 막막함을
무엇으로 다스려야 하나
물위로 난 길을 건너 어둡기 전에 사막을 빠져나오는
낙타의 행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 있는 불빛들,
사강을 벗어나기란 머리카락이 다 희어지도록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저물녘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창 밖 풍경이 어느덧 창 안 풍경이 되어 있다
어둠의 저쪽에서 이제 안을 들여다보는 시간,
손바닥으로 불빛을 가리면 손바닥만한 밖의 어둠이
겨우 드러날 뿐
젖은 아스팔트 위를 느리게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들이 내는 음울한 소리들,
우리는 사강에 갇혀 있다
사막의 입구인 사강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빠져나갈 수 없는 법
제부도를 가리키는 이정표에 내 한해를 물어보았던 날 저녁,
길 위에서 밤은 깊어
- 조 용미 시 ‘사막의 입구인 사강에서는‘
바하와 브람스에 경도된 나를 파가니니가 일깨웠고
첼로에 경도된 나를 대금이 일깨웠다
죽음에 경도된 나를 삶이 일깨웠고
요통에 경도된 나를 가끔
두통이 일깨워주었다
베르히만에 경도된 나를 파스빈더가,
한영애에 경도된 나를 그가
나무에 경도된 나를 어쩌다 꽃들이,
길에 홀린 나를 집이,
집에 갇힌 나를 길이
일깨워주었다
일깨운 것보다 경도된 것들의 힘이 더 세다
- 조용미 시 ‘경도된 것들은 힘이 세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실천문학사, 1996년
반곡역 가는 길에 지났던 황새쟁이 사거리, 황새와 사람을 말하는 쟁이가 만나 황새쟁이가 되었나
황새처럼 큰 사람 황새처럼 다리가 긴 사람을 말하는 건 아닐 텐데
크게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는 황새가 옛날부터 좋았다 목과 다리를 쭉 뻗고 일자로 나는 그 자세가 나는 더욱 좋았다
검은색 날개깃은 먹으로 휘갈긴 문장 같아
겨울에 찾아오는 귀하고 보기 드문 조용한 황새가, 멸종위기종이 된 황새가 나는 좋았다
이른 봄 밭둑에서 만나는 황새냉이도 솜털 같은 북극황새풀도 좋았다
올겨울은 황새를 보러 어디로 가야 하나 황새 날개를 보면 또 먹을 듬뿍 먹은 붓을 들고 무언가 그리고 싶겠지
희고, 검고, 붉은 황새는 아주 크고 아주 고요해서 가까이 갈 수 없겠지
- 조 영미 시 ‘먹으로 휘갈긴 문장‘
* 애지 2024년 봄호에서
** 조 용미 : 1962년 11월 17일, 경북 고령군.
1990년 한길문학 '청어는 가시가 많아' 등단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2021.11. 제24회 동리목월문학상
2020.10. 제20회 고산문학대상
2012.05. 제19회 김준성 문학상
2005. 제16회 김달진 문학상
첫댓글 전세계 우주공간의 모든 사물을 시재로 사용하여 독특한 시어로 완성한
보배같은 조용미 시 밭에 한참 머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조 용미 시인은 세계관과 담는 그릇이 매우 크게 느껴지는 시인 입니다. 그녀의 시를 읽다보면 많은 자료조사와 리딩, 그리고 사색으로 쓰여진 시 라는 것이 느껴 집니다.
그래서 다시 되짚게 되고, 스스로가 다시금 깨달음의 미소를 짙게 되는,, 그래서 시인의 시를 다시금 읽으며 ‘걸러내는 시’가 아깝게만 느껴져서 미안 했습니다. 몾 올린 시가 자꾸 밢혀서요. ^^;;
항상,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