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2일. ‘정치부 기자’로서의 내 삶은 파탄이 났다. 본회의장 방청석에 앉아 ‘상황’을 취재하는 게 그날의 내 몫이었다. 변조된 전기신호를 십수인치 화면을 통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악스러웠던 장면들을 두 눈 부릅뜨고 코 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그 심정을 다른 사람이 헤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방청석 제일 앞자리에 서있었던 마지막 한시간여 동안, 몇 번이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 했다. 폭력과 절규와 웃음과 울음이 뒤엉킨 아비규환의 현장이 ‘육성’ 그대로 가슴에 달려와 총탄처럼 박혔다. 국회의사당의 ‘탁월한 음향시설’은 그들의 거친 숨소리까지 생생히 전했다. 피범벅이 된 역사가 왈칵 달려들어 귀에다 대고 버럭 소리 지르는 듯 했다. 진저리치며 한가지 생각만 했다. “빨리 끝내라. 이 놈들아. 빨리 끝내라” 나는 그 현장에서 정말이지 빠져나오고 싶었다.
질끈 감기려는 눈을 한사코 치켜 뜨게 한 것은 오직 ‘의무감’이었다. 지금 여기를 뛰쳐 나가버리면 <한겨레>가 이 장면을 독자들에게 알릴 방도가 없다는 생각이 그 길었던 한시간을 버티게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의무를 저주했다.
방청석에 줄지어 서있던 기자들 중에 몇몇이 웃었다. 열린우리당의 어느 국회의원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향해 뭐라고 소리 지른 뒤였다. 차마 뒤돌아 보지 못했다. 이 현장을 직접 지켜보면서 왜 웃음이 나오는지, 그게 가능하게 하는 ‘멘탈’은 무엇인지, 그런 정신으로 기자생활하는 그 면면은 어떻게 생겼는지, 멱살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때, 나는 그들과 같은 ‘기자’라는 게 치욕스러웠다.
유독 한 사람, 한 정치인에게 ‘살의’도 느꼈다. 난생 처음 겪는 그 감정에 치를 떨었다. 끝모를 깊은 곳에서 울컥 솟구치는 무한한 적개심에 말초신경까지 파르르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상대를 제거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은 ‘본능’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비감했다. 더 이상 예전의 ‘그 기자’로 돌아갈 수 없음을. ‘평상심’이 몸에서 빠져나갔고, 그것은 좀처럼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하여 그것을 회복하지 못하는 한, ‘정상적인 기자노릇’을 할 수 없을 것임을 무섭게 예감했다.
그 날. 세 번을 울었다. 방청석 맨 앞에 서서 정신없이 취재수첩에 상황을 써내려갈 때, 눈물이 앞을 가리는데 그걸 훔쳐 닦는 모습을 ‘웃고 있는 다른 기자들에게’ 보이기 싫어, 국회 본회의장 가득한 텁텁한 공기에 맡겨 그걸 말리느라 참말 힘들었다.
본관 1층 각 언론사별로 마련된 부스로 돌아와 ‘1시간여의 장면’을 스케치하는 기사를 쓸 때였다. 도저히 글을 쓸 수 없는 내 연약한 감성을 질책하고 따지느라 한시간여를 혼자 꽁꽁 씨름하다가, 세상에 대한 분노인지 자신에 대한 연민인지 모를 무엇에 사로잡혔다. 다른 언론사 사람들이 눈치챌까봐, 부스의 문을 걸어 잠궜다.
그리고, 마감을 다 끝내고 점심도 못 먹은 허기를 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로 채우다가 여러 선배, 후배들 앞에서 꺽꺽 거렸다. 그런 게 있다면, 세상의 섭리가 나에게 부여한 ‘숙명’같은 게 있다면, 지난 2년 동안의 그것은 한나라당을 제대로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이었을 텐데, 그 일을 다하지 못해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부끄러웠다.
`살기 위해’ 글을 썼다. ‘살의’의 날카로운 비수가 끝내 가서 박힐 곳을 찾지 못해 나에게 돌아와 폐부를 찌르는 데, 그냥 있으면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그 필설들이 고스란히 돌아와 또 다른 비수가 됨을 절감한다. 지혜는 언제나 기대보다 부족하고, 세상은 언제나 희망보다 암울하다는 것을, 왜 마지막 순간에서야 깨닫게 되는지 원망스럽다.
돌아보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절망’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어느 정치학자는 “보수세력의 자폭적·자멸적 선택이 있을 때마다 민중의 거대한 저항이 있었다”며 60년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79년 12·12사태와 광주항쟁, 87년 4·13 호헌과 6월 항쟁 등을 거론했다. 3·12 탄핵기도와 국민저항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거다.
그러나, 보름여전 그 ‘탁월한 분석’을 읽으며 나는 ‘절망의 징조’도 함께 발견했다. 그 학자가 거론한 ‘저항’ 가운데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완결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없었다. 저항은 언제나 실패한 채, 그 씨앗만 남겼다.
만일 그 열매로서의 ‘역사의 진보’란 게 있다면, 그것은 저항의 당대가 아니라, 그 후대에 이뤄진 길고긴 ‘우회로’를 통해, 그것도 아주 간접적이고 비본질적적인 방식으로 이뤄졌을 뿐이다. 다수의 분노는 그저 ‘변수’에 불과하고, 소수의 결심은 곧바로 ‘권력’이 되는 세상의 이치는 많은 이로 하여금 스스로를 ‘비주류’라 일컫게 했다. 비주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그저 분노하다가 제풀에 절망할 만큼의 ‘자유’만 누렸다. 그것이 이 땅의 역사다. 절망의 기억이다.
이번만은 예외적인 경우가 될 거라는 믿음은 그 역사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장을 보태려는 의지와 맞물린 것이었지만, 철학은 빈곤했고 의지는 과잉했나 보다. 이번 일로 수구세력의 결정적 패퇴가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은 부질없는 소망이 돼버렸다.
그러나 나를 절망케 하는 것은 따로 있다. 어차피 역사의 진보란 ‘한판의 싸움’으로 매듭지어질 수 없는 것이란 걸, 일찍 알았다. 알았으나, 그래도 절망적인 건, 여전히 내가 부여잡고 있는 대상이 30여년 전의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데 있다.
온전히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수많은 이의 피땀을 바쳐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더디게 개척해온 ‘진보’의 영토가 있음을 믿었는데, 그 믿음의 근본부터 산산이 부서지는 오늘의 상황에 절망의 실체가 있다. 그동안 뭘 했나. 뭘 했기에 아직도 박정희의 망령과 용쓰며 씨름하고 있나.
최근 방송토론에서 몇 차례에 걸쳐 ‘경부고속도로의 리더십’에 대해 말하는 한나라당 쪽 인사들을 봤다. 그 때는 다수가 반대했지만 이를 강행한 리더십 때문에 이만큼 먹고살게 됐다는 거다. ‘독재와 권위주의’를 합리화시키는 전형적 논리에 대해 누구 하나 대놓고 반박하지 못하는 꼴을 보며, 나는 한심했다. 그러고도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건가. 박정희의 시대와 당당히 맞서지도 못하면서, 그 그림자인 ‘수구세력’과 선을 긋고 ‘진정한 보수’의 탄생을 도모하겠다는 건가.
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성취 가능한 가치란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에는 없다. 더디게 가더라도 다수의 참여와 토론을 통해 방향타를 잡아 가는게 민주주의 원리다. 갈등은 숨기고 억압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내고 공론화시킬 대상이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먹고 자라는 나무다. 민주주의 정치에 ‘술수’란 게 있다면 오직 하나, 그 갈등을 가장 원활하고도 온전하게 공론화시키는 방법에 대한 고민일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적이었던 것은, 그가 ‘존재하는 갈등’을 폭압적 국가기구를 동원해 철저히 억압하고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한국의 경제발전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은 터무니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검증되지도 않은 것이다.
"그때 경부고속도로 안 만들었으면 어떻게 됐을 뻔 했어?”라고 되도 않게 묻는 이들이 돌아서서 오늘도 ‘다수’를 배제한다. “지금 청계천을 까뒤집어 놓고 후딱 끝내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야?”라며, 흉물스런 철골구조물 사이로 만원버스를 타고 다니는 나같은 ‘강북시민’은 물론, 그곳에 평생의 생계를 의탁했던 영세민들과, 그 아래서 신음해온 수많은 역사유물의 복원을 통해 일제와 독재시대의 청산을 꿈꾸는 학자들과, 친환경적 도시공간에서 저녁 산책이나마 즐길 수 있는 안온한 일상을 꿈꾸는 수많은 서민들을 깔아뭉개고 있다. 그들은 30년 뒤, 또다시 우리 아이들에게 말할 것이다. “그때 반대를 무릅쓰고 그거 안했으면 이 정도를 누렸을 것 같애?”
그들이 ‘선전’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박정희 대통령은 ‘갈등과 이견의 배제’라는 폭압을 휘둘러, 한국 자본주의가 ‘민주적 경로’를 통해 충분히 면역력을 길러 치유할 수 있었던 후유증을 끌어안고 20년째 신음하게 만들었다. 오늘 우리가 겪는 모든 종류의 고통의 밑바닥에 그가 똬리틀고 있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거치며,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착각했었다. 친일과 독재의 잔재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그 과오를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성숙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생존한 전직 대통령들이 한낱 사회면 ‘뉴스거리’로, 사실은 그저 시장판의 ‘우스개거리’로 대접받을 때, 그보다 앞선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는 굳이 말해 무엇 할 것인가 하며, 방심했었다. 심지어 정치권이 ‘친일청산법’을 누더기로 만들어 버릴 때조차도, 머지 않아 그들에 대한 ‘상식’의 심판이 이뤄질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란 시민들이 쟁취해 숙성시킨 것이 아니라, 보수야당 정치인들의 발 빠른 술수로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외투를 덧씌운 것에 불과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독재로부터 단절했다는 그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이 이토록 민주주의를 모르고 오직 정치술수에만 능통할 리가 없다.
모든 정치행위를 ‘선거 전략’ 수준으로 이해하는 우리의 유권자들은 세계 어느 공화국의 시민보다 예민한 ‘정치적 감각’을 지녔으되, 거기에 자신의 삶을 결부시킬 진정성은 누군가에게 양도해 버렸다. 그들에게 민주정치는 논평의 대상이되, 토론의 주제가 아니다. 구경꺼리이되, 참여할 가치는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참여와 책임을 요구하는 공화주의의 정신과, 개인의 천부인권을 누구에게도 양도하지 않겠다는 자유주의의 철학과, 권력은 오직 인민/민중으로부터만 비롯된다는 직접/참여 민주주의의 근간에서 자란다.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는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공유하지 않은 채, 대통령의 ‘리더십’을 통해서만 민주의 시대와 독재의 시대를 구분해 왔나 보다. 그런 게 아니었다고 믿었는데 정말 그랬나 보다. 대통령이 끊임없이 바뀌었어도 그 ‘신민’은 변하지 않았으니. 그 책임을 집권자에게 물어야 하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나.
박근혜 대표와 한나라당이 ‘거듭남’을 이야기하려면, 그래서 수구이면서 보수인척 했던 과거의 독재잔당과 ‘단절’을 이야기하려면, 그것은 무엇보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박 대통령의 ‘공과’를 이야기하면서도, 과오에 대한 심판없이 공에 대한 것만 취하겠다는 ‘편의적’이지만, 사실은 ‘의도된’ 입장으로는 ‘거듭남’은 없다.
그럼에도, “어쩜 엄마와 꼭 닮았네”라며 ‘단절’과 ‘청산’없는 정치세력에게 손 내밀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현기증을 느낀다. ‘국민체조’ ‘잘살아보세’ ‘새마을운동’ ‘국기강하식’ ‘나의 조국’과 함께 1970년대의 대표적 상징코드인 ‘조국찬가’가 오늘, 유력 정당의 로고송으로 울려 퍼지는 지경 앞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아니다. 말을 잘못했다. 그 노래를 듣고는 저절로 가사를 흥얼거리며, 심지어 내 ‘잠재의식’ 깊은 곳에도 살아있는 조국찬가의 실체를 발견하고 전율했다.
많은 이들과 같은 시대를 산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차라리 이 모든 일이 나의 ‘시대착오’에서 비롯된 것이기를. 그렇다면 세상은 나 하나쯤 방 구석에 처박히는 것만으로도 무사태평할 것이다.
‘평상심’을 잃은 뒤, 수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염려가 무능하고 둔한 기자 하나를 그나마 사람구실하게 만들었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로 인해 충분히 견딜만 했던 지난 한 달 동안의 수모와 자괴는 죽는 순간까지 필설로 내뱉지 않겠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담아 이 부족한 글 나부랭이에 과분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독자와 벗들의 힘이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오늘 절망한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해답을 갈구하는 세상의 무게를 짊어졌던 그동안의 시간에 절망한다.
어쩌면 애시당초 이 길에 나설 자격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떳떳한 세상을 물려주겠노라고 함부로 약속할 자격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여 그날, 질질 짜며 폭음하고 소리지를 자격 따위도 아예 없었는지 모른다. 세상과 ‘불화’하는 게 아니라, 세상과 ‘따로’ 놀았던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분노의 권리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나, 아직 4월15일을 기다리는가. 안수찬 기자
선거 막바지에 이를수록 하는 일 없이 몸과 마음이 바빴던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한나라당의 최후’라는 연재글 제목이 주는 중압감이었습니다.
약 열흘 전부터 이 제목은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분석과 전망’이라기 보다는 ‘의지가 개입된 주장’이 돼버렸습니다. 언론인이라는 레떼르를 붙이고 있는 저로선 분석이 아닌 주장으로 매번의 글을 메울 자신이 없었습니다.
불과 한달여 뒤의 일도 예측하지 못했느냐고 따져 물으신다면 저로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지혜가 부족한 제가 마련한 ‘대화의 틀’이 그 대화 자체의 질곡으로 등장한 상황 앞에서 그저 처연해질 뿐입니다. 이 모순을 해결하느라 한동안 깊이 고민했습니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선거 때까지 저는 두번의 글만 쓸 작정입니다. 그것은 ‘최후’ 시리즈의 연속인 동시에 단절입니다. 한나라당에 대한 분석인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성찰의 이야기입니다. 정작 끝을 봐야 할 것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그저 이 연재글의 ‘최후’를 준비하는 저는, 또다른 고난의 길을 예감합니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어느 선배가 말했습니다.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걷다가 뒤돌아 보면 그것이 길이라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여러분을 향해 우선 오늘은 ‘절망에 대하여’ 주절거리겠습니다. 그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며칠 뒤 쓰게될 두번째 이야기도 읽어봐 주십시오.
첫댓글 에휴...표달라고 단식하는 정동영을 보면, 열우당에도 희망이 업다.. 역시 민노당에 찍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