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누나 요한네 소피 뭉크가 결핵을 앓다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을 그린 작품 ‘병실의 죽음’. 가운데 창백한 얼굴의 옆면만 보이는 인물이 뭉크이고 나머지는 뭉크의 가족들이다. 노르웨이국립미술관 소장.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방이 그려져 있다. 이곳엔 사람이 7명이나 되지만, 어딘가 허전하고 텅 빈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림 속 인물 중 1명은 정면을 보고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고개를 떨구고 있다. 무엇보다 누구도 서로 눈을 맞추거나 쳐다보지 않는 것이 인상적이다. 손을 잡거나 기댄 사람도 없이 모두가 섬처럼 뚝 떨어진 모습. 사람으로 가득하지만 모두가 저마다의 외로움에 잠겨 있는 이 작품은 에드바르 뭉크가 1893년 그린 ‘병실의 죽음’이다.
누나 소피의 죽음
이 그림은 아픈 사람이 머무는 곳인 ‘병실’을 묘사하고 있다. 병실의 주인은 뭉크보다 한 살 많은 누나 요한네 소피(Sophie, 1862∼1877)인데.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그녀는 마지막 순간 답답함을 호소하며 의자로 옮겨달라고 한 뒤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거의 보이지 않는 인물이 소피이다.
소피를 마주 보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는 사람은 뭉크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뭉크이다. 그리고 의자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숙인 여성은 이들의 어머니가 아닌 이모 카렌이다. 어머니가 그림에 없는 것은, 소피가 세상을 떠나기 9년 전 같은 병으로 그녀도 사망했기 때문이다. 뭉크의 어머니와 누나를 모두 앗아간 것은 결핵이었다.
그러면 그림 속에서 뭉크는 어디에 있을까? 그림 중앙에서 조금 왼쪽에 텅 빈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와 침대 사이 납작하게 끼어 잘 보이지 않는 옆모습의 인물이 바로 뭉크이다. 정면을 보는 여자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여자는 모두 소피의 자매이다. 또 그림 왼쪽 벽에 손을 기댄 남자는 역시 뭉크의 남동생 안드레아스. 즉 이 그림은 소피의 죽음을 마주하는 온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
불안과 외로움의 방
이 그림에서 뭉크가 어떻게 불안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표현했는지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이 작품의 주제는 소피의 죽음이지만, 텅 빈 침대와 소피의 뒷모습만 그려졌을 뿐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또 싱그러운 초록색이 아니라 시퍼런 멍이 든 것 같은 녹색, 검은색을 그림의 주된 색채로 사용하면서 죽음과 질병의 느낌을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마룻바닥과 벽이 만나는 선은 그림의 중앙보다 더 위쪽에 그려져 있다. 이 선을 기준으로 침대와 의자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혹은 아래로 쏟아져 내릴 것처럼 불안감을 자아낸다.
여기다 그림 중앙에서 유일하게 앞을 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불안감을 극단으로 치닫게 한다. 앞을 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쳐다보고 있지 않은 듯한 공허한 눈빛. 뭉크의 대표작인 ‘절규’에서처럼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 같은 얼굴의 여자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넘어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결말인 죽음을 마음 깊이 느낀 것처럼 말이다. 뭉크는 이 그림에서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외로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두렵고 불안한 그림을 그려야 했을까?
에드바르 뭉크, '아픈 아이(The Sick Child)', 1927년, 캔버스에 유채, 118.7×121cm, 뭉크 미술관 소장.
죽음은 나를 지킨 검은 천사
뭉크가 소피의 죽음을 묘사한 것은 이 그림이 처음은 아니다. 22세였던 1885년 처음으로 소피의 죽음을 ‘아픈 아이(The Sick Child)’라는 작품에서 그린 뒤 뭉크는 64세가 된 1927년까지 40여 년간 ‘아픈 아이’를 여러 작품으로 그렸다. 공개된 작품으로는 유화가 6점, 판화가 8점에 달하고 드로잉까지 합하면 더 자주 천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소피의 죽음을 괴로워하며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계속 곱씹은 걸까? 그림을 보면 뭉크는 단순히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기보다는 그때 느꼈던 처절한 외로움과 불안, 두려움을 표현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흐르는 눈물처럼 물감을 세로선으로 그어 내리거나, 공허한 얼굴을 묘사하거나, 쏟아질 것 같은 방을 그리면서 말이다.
즉, 아픈 기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학자처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분석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본질에 접근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문학가는 그런 탐구의 결과를 시와 소설 같은 문학 작품으로, 음악가는 음악으로 만들어 내듯 뭉크는 그것을 시각 언어로 풀어 놓기를 시도했다. 이러한 깊은 탐구가 ‘절규’와 ‘마돈나’ 같은 세기의 명작을 낳는 토대가 되었음을 의심할 수 없다.
뭉크는 “어릴 때부터 내 요람은 아픔, 광기, 죽음이라는 검은 천사가 지키고 있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검은’이라는 말은 두렵고 불안한 느낌을 자아내지만 ‘천사’는 나를 지켜주는 존재라는 말이다. 삶에서 겪는 고통과 상처, 외로움은 나를 시련에 들게 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를 직면하게 해주는 인생의 수호자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아픔을 끈질기게 파고들고 극복하면, 자신만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단단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그는 슬픔을 담은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2024년 04월 18일(화)[영감 한 스푼(김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