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문헌에 정식으로 실려있는 확실한 바둑이야기가 하나 있다. 이것은 바둑이 관련된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중 하나이며, 기록으로 볼 수 있는 것 중에서는 설화인 동시에 정확한 사실의 기록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삼국시대의 백제 개로왕(蓋鹵王)과 고구려의 승려이자 바둑고수인 도림(道琳)이다. 모두 역사의 실존인물임에 틀림이 없고. 이야기 전개도 바둑의 실재적인 특성과 백제와 고구려의 군사분쟁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전설속의 우아함이나 고매함과는 거리가 있다.
시대는 고구려 20대 장수왕(長壽王 서기475년경)이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뜻을 받아 왕성한 확장책을 펴고 있을 때이다. 당시 백제는 한성백제, 즉 지금의 서울부근에 자리잡은 고대왕조였으며 정권을 잡고 있던 것은 개로왕이었다. 고구려의 왕실과 약간의 상관 관계가 있을 법도 한 백제는, 그 초창기부터 강성한 대륙의 고구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으며, 한반도 남반부에서 독자적인 문화권과 해상세력을 구축하여 만만치 않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를 넘지 않고서는 고구려의 남하는 불가능했다.
싸움이 교착상태에 이르거나 힘의 균형에 이르면 평화가 오게된다, 하지만 적극적인 확장정책과 남하정책을 펴던 장수왕은 첩자를 파견하여 사태의 반전을 노리게 되는데, 이때 고구려땅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둔다는 승려 도림이 장수왕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도림은 "백제의 개로왕이 바둑을 무척 좋아하며, 소승은 일찌기 바둑을 배워 적수가 없을 정도이니 백제에 들어가면 바둑으로 개로왕의 신임을 얻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장수왕의 허락을 받은 도림은 큰 죄를 저지른 고구려 승려로 위장하고 백제에 잠입하여 백제 개로왕을 알현하게 되었다. 도림은 알현장소에서 바둑이야기로 교묘하게 대화를 유도하는데 성공하였고 왕과 도림은 결국 여러판을 두게 되었는데. 왕은 도림의 수준이 높은 것을 보고 그를 마음에 두게 되었다.
개로왕은 이에 도림의 소원을 물었는데, 도림이 "바둑이 유일한 낙이며, 대왕을 모시면서 바둑이나 두면서 사는 것이 소원이라" 답하자 크게 기뻐하며 더 이상 의심치 않고 궐내에 머무르게 하면서 가까이 두고 자주 바둑을 두게 되었다. 이 후로 몇 년이 지나가며 개로왕과의 바둑교분으로 도림에 대한 왕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져갔으며 왕은 벼슬까지 하사했다.
그러던 어느날 풍수(風水)에 관해 대화하던중 도림이 왕에게 궁궐터에 대해서 이와같이 충고했다. "소승이 보기에 좌청룡(左靑龍 右白虎)가 분명하고 앞에는 강이 흐르며 뒷산은 병풍이니 틀림없는 왕도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왕궁은 협소하여 체통이 서지 않고 선왕의 묘가 빈약하니 사람의 도리(人道)에 어긋나는 일이며, 장마철에는 하천이 범람하니 제방을 두텁게 쌓아 왕도(王道)의 체통을 세우셔야 합니다"
- 예나 지금이나 잘못된 방향의 거대한 토목공사(과잉투자)는 자칫하면 국가전체를 위험으로 내몰 수 있다. 특히나 백성의 삶이나 국방에 큰 상관이 없는 왕궁의 확장과 선왕묘의 대대적인 확장 개보수, 한반도에서 가장 큰 강인 한강에의 제방쌓기같은 토목공사는 한강에 뿌리박았던 백제 왕권의 힘을 급속히 소진시켰다. 그러나 개로왕이 처음에 이말을 들었으면 그러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 때는 바둑에 중독되어 눈이 멀어서 도림을 너무 신임한 나머지 그의 말을 전부 믿고 만 것이다.
백제의 개로왕은 결국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북방의 군대까지 동원하여 대규모 토목공사에 왕권을 집중하게 되니, 백성이 궁핍해지고 군사력은 허술해졌다.
도림은 자신의 임무가 거의 저절로 완수되었음을 보고 고구려로 도망쳐 백제의 사정을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보고하니 장수왕은 '손에 무기도 없고 부하도 없으면서 상장군(上將軍)보다도 더혁혁한 공을 세웠으니 진실로 훌륭하다'며 큰 상을 내린다음 475년 9월에 정예부대 3만여명을 이끌고 백제의 수도로 물밀듯이 쳐들어갔다.
개로왕은 결국 고구려의 대규모침공을 보고 크게 탄식했으나 국력이 쇠약해진 것이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왕은 자신의 태자(훗날 문주왕)를 피신시키고 고구려와 맞서 싸웠으나 고구려군에게 생포되어 피살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고구려의 침공으로 한강유역의 수도를 잃은 백제의 문주왕은 웅진(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수도를 옮겼다. 웅진은 땅이 좁으나 금강을 끼고 있어 당시로서는 교역에 편하고, 또한 사방이 산으로 막혀있어 일단 급한 적을 방어하기에 수월한 곳이었다. 이후 문주왕은 나라에서 바둑두는 것을 금했다고 하는데, 백제의 왕권이 쇠약해지고 왕조의 기세가 꺾인 것은 바둑을 법(法)으로 금한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둑고수 도림에 대한 평가
고구려의 바둑 고수 도림(道琳)은 아마도 바둑 자체의 수법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바둑에 빠져드는 사람의 속성과 심리파악에도 뛰어났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엄청난 고급 스파이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점은 첫번째로'바둑이 중독성'이 있는 게임이라는 것을 적국의 왕의 신임을 얻는데 적절히 사용한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둑에 빠져 있는 개로왕은 자신보다 고수인 도림을 발견한 이상 바둑을 두기위해 계속해서 부름을 줄 것이며 그와 대국을 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할 것이니까..
또한가지로는 바둑고수가 세상일에도 고수인것처럼 왕이 믿게 만든 것이 있을 것인데 적국의 왕에게 바둑을 청하며 접근하는 배짱을 가진 바둑고수 도림이라면 어쩌면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개로왕은 결코 무능한 왕만은 아니었을 듯 한데, 그가 바둑에 깊이 빠져 현실감각을 잊은 것이 그의 인생의 가장 큰 패인일 것이다. 즉 자세히 말하자면 그가 바둑에 심취한 것이 잘못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주지육림에 빠진 폭군보다는 바둑을 취미로 즐길 수 있는 현명한 군주가 바람직하니까 말이다.) 엄청난 실수는 바둑의 고수인 도림(道琳)을 현실 정치의 고수인양 착각하고 신임했다는 데에 있다. 바둑에 빠져 있었더라도 도림을 바둑고수에만 한정하는 냉정한 군주로서의 시각을 유지했다면. 개로왕과 백제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해지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역사에 실존하는 바둑고수 승려 도림(道琳), 바둑의 중독성과 심리를 일찌감치 파악한 그의 아이디어(IDEA)와 개로왕을 파멸로 이끈 솜씨는 고대뿐 아니라 현대의 시각으로 재조명해도 빛을 잃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