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김대봉(金大逢)은 문득 담배라도 한 대 피고 싶어졌다. 기껏 끊은 담배, 취임하자마자 닥친 지난 2년 간의 고난 속에서도 참아온 금연이었으나 이번만큼은 현실이 쓰다 못해 아려왔기 때문이다. 지금 자료가 막 나가는 참이지만, 국무회의에 임하는 다른 위원들도 몇몇은 대강 사태를 예상했는지 표정이 어둡기는 매한가지였다.
비록 지금 전시상황이라지만, 이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우리가 지금 서부전선의 영불군이나 동부전선의 러시아군처럼 직접 피를 흘려가는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1차"세계"대전이 한창이라지만, 정작 유럽에서 멀어질수록 싸움의 강도는 약해졌고, 우리가 사는 이 땅은 대륙에서 유럽하고는 정반대 극단에 붙어있었다. 오히려 물 들어오니 노 젓느라 신나야 정상이건만, 이 순간 다루는 주제는 전쟁보다도 훨씬 암울한 이야기였다.
생각이 복잡하니 주변 소음과 시야가 들어오지를 않는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실까. 어차피 다들 자료 확인하느라 시간이 걸릴 테지. 잠시 지난 시간들을 복기라도 해보자, 하면은, 그래도 처음 일이 벌어졌다는 그 말도 안돼는 사실 자체만 빼고 본다면 의외로 퍽 수월하게 흘러온 편이었다.
갑작스레, 21세기의 한반도는 1910년 경술국치 직후로 전이―그러니까 소위 "트립"을 하였다. 이 초유의 사태에 당대 세계인과 현대 한국인 너 나 할 것 없이 당혹스러워했으나 상황은 빠르게 흘러갔다. 하루 아침에 다스릴 자에서 하릴없는 자가 되어버린 한국 주차군은 각 부대가 개별적으로 이 정체불명의 조선계 세력에 대한 무력 진압(?)을 시도하거나 상황파악 및 상부지시를 기다리며 주둔지에 칩거하였고, 이들은 곧 국군과 경찰에 의해 무장해제 후 총독부 인원들과 함께 억류되었다. 공식적인 병합을 선언하고 희희낙락한 참에 날벼락을 맞고 제대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일본 정부는 기습적인 조선인들의 봉기(??)로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하여 육해군 긴급 증파를 결심하였으나, 자칭 주일한국대사(???)로부터 접견 요청을 받고 이를 일시 중단하였다. 이것이 그 정신 없었던 1910년 8월 29일 첫날의 상황이었다.
영토 내 적대세력, 그러니까 일본군을 일소하고 계엄령을 내린 후 정보수집부터 나섰던 한국정부가 대외적으로 처음 착수한 작업은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리 오래지 않아 세계각국에 뿌려둔 외교관들로부터 연락이 닿은 까닭인데,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일단 파악한 바로는 원래 세상에 존재했던 조선인들은 모두 사라지고 남한인과 북한인만 남은 모양이었다. 자산 쪽은 훨씬 더 해괴해서, 외교공관과 문화원 등 각종 시설도 그대로 존재했는데,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시설들이 옆 공간으로 밀려나면서 전체적인 지리가 뒤틀리게 되었다는 모양이다. 이는 한반도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국내외를 막론하고 예외없이 한국계 시설이 공간을 선점하고 있었다.
기실 가장 싱겁게 끝난 것은 다름아닌 북한과의 관계였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자기보신에 관해서는 가장 경제적인 동물이었던 북한 지도층은 은밀하게 먼저 연락을 시도해와서는 대뜸 망명과 통일의 등가교환에 대해 교섭해와서 각료들을 당황케 했다. 그들도 나름 여러 방안을―개중에는 만주 침략과 만주국 수립 같은 것도 들어있었으나, 정작 공산 혁명 유도는 없었다.―고심했던 모양이나, 작금의 처지로는 도저히 홀로서기를 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내던지고 갈 곳도 없다보니 이런 발상을 떠올렸던 것이었다. 몇몇 인사들은 이렇게 악질적인 죄상에 대한 심판도 없이 보내주는 게 맞느냐며 속이 끓었으나, 국민들에게 안전보장을 해주어야 할 의무가 너무나도 무거웠기에 그 제안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충 김씨 왕실과 젠트리들(¿)을 적당히 남미 어딘가로 치워버리고 나니 세계각국에서의 연락이 쇄도하고 있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난데없이 낯선 건물에서 자기가 한국 외교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오니 자잘한 촌극이 벌어지는 곳도―특히 옛 식민지 국가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이 고역을 겪었지만, 대체로 무난하게 국교를 정상화할 수 있었다. 비록 시장 개방의 문제가 많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주조선외교관·사업가·통신원 등에서 주한대표부 대표로 벼락승진한 이들이 아득바득 긁어온 정보를 본 각국 정부는 감히 어깃장을 놓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국제법을 방패삼아 장벽을 최대한 올려보든가 받을 수 있을 만한 것은 확실히 챙겨가려는 태도를 보였기에, 한숨 돌리고 산업체계 전환에 좀 더 노력을 할애할 수 있었―
―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일본 정부는 불신 반 부정 반으로 끝내 식민지 반란 진압을 위한 출병(¿¿)을 결행하고는 대사를 억류하였고, 한국으로 하여금 트립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쟁"을 벌이게 만들었다. 뭐, 그래도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트립 직후 주차군 상대로 벌여야 했던 "우발적 충돌"에서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진 근접전이나 군경 출동 이전에 벌어진 대민공격으로 뜻하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여기서는 대규모 탄도탄·순항미사일 찜질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일방적인 고기밥을 만들어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체력적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최고의 시술만을 찾던 일본제국은 의료선진국 대한민국의 최첨단 의학과 전통 한의학이 결합된 물리-화학치료(¿¿¿)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폭발사산하고 말았던 것이다.
심지어 이후 벌어진 신해혁명의 여파에 은근히 개입하여 여러 조각으로 쪼개어 놓고는 열강들과 사이좋게(?) 하나씩 나누어 가지면서 자원 수급도 원활하게 만들었을 터였다. 북경에서 산지직송으로 실어다가 만주 황야에 내던져진 청나라 황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신축년에는 실패했던 신정이 성공"된"(??) 만청국의 입헌황실이 되어있었으니, 그렇게도 불안함에 떨며 폐쇄적인 자금성에 갇혀 지내던 선통제 푸이는 비로소 마음 놓고 "아, 산듯한 동쪽나라! 여기가 바로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늑한 동쪽나라로다!"라고 외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칭유전. 바로 이곳이, 우리가 정상화(???)해준 대가로 받아낸 이곳에서 날아온 보고서가, 지금 여기에 앉은 모두의 우울감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각하?"
"아, 미안합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요. 그러니까…우리가 어디까지 했지요?"
"네, 별첨1 다칭유전 보고서를 참고하시면은 당초 우리가 예상해온 것보다 원유생산량이 저조하고, 재조사 과정에서 매장량도 기존 추정치보다 상당히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측지정보들을 살펴봐주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전이 이전까지 보유하고 있던 자료들이고, 이것은 전이 이후에 측정하고 수집하여 종합한 자료들입니다."
"달라진 것이… 없군."
"예, 그렇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수집한 타국의 1차자원 지표들을 주목해주십시오. 세계 각국의 생산량이 전이 전년도 대비 크게 하락했고, 임농업 분야에서는 우리로부터 비료 수입과 기술 도입이 재개된 이후로 회복세에 접어들었으나, 특히 광업 분야에서는 여전히 수치적으로 크게 밑돌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쯤되니 모두들 지금 처한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인지한 모양새였다. 하나같이 당혹감과 착잡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잠정적으로 도달한 추론으로는…, 우리는 이곳으로 전이해온 것이 아닙니다. 전이는… 저들이 해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원주민이고, 저들이야말로 이방인입니다."
대영제국 산업계의 최전선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역군, 존스는 요즘 영 세상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당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순히 전쟁통이어서가―그는 고급 기술자라 하여 징집되지 않는단다.― 아니었다. 전쟁이 터지기 몇 해 전부터 갑자기 세상은 요상해졌다. 어느날 갑자기 몇몇 석탄 광산이 문을 닫지를 않나, 몇몇 선박은 뭍에 좌초되기도 하였고, 날씨는 엉망진창이어서 종래의 경험과 정보는 쓸모가 없어졌다. 나날이 폭염에 시달리는 해가 많아지는가 하면 동네의 그 나이 지긋하신 하퍼 영감도 생전 처음보는 폭우가 유럽 전역을 휩쓸기도 하였다. 신문에서는 분명 조선을 합병하고 승승장구하던 동맹국 일본이 갑자기 망했다는 흉흉한 소식이 들리더니, 뜬금없이 그 조선이 미래의 한국이라는 나라가 되어서는 우리와 동맹을 맺는다지 않은가? 참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보니 요즘 또 사회가 뒤숭숭했다. 한동안은 전시체제 탓에 군수체제로 전환한다고 정신이 없었는데,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사회에 사람이 너무 적다. 물론 이번 전쟁에서 군인이 유독 많이 죽어나간다고는 하지만, 그들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어째 많이 죽는 것 같았다. 그 하퍼 영감도 기침 몇 번 하시더니 결국 얼마 못가 유명을 달리하였고, 그의 손자 젊은 퍼킨스도 똑같이 기침을 달고 다니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요절하고 말았다. 자기 주변에서도 그나마 자신은 불현듯 뜻 모를 불안감에 가족들에게 마스크를 만들어 쓰게 하고 알코올과 비누를 쌓아두고 쓰면서 틈틈이 여유분을 비싸게 팔아치워 재미를 보기도 하였으나, 이 의문의 독감은 너무 독하고 또 오래 지속되었다. 요 며칠 전부터 자신과 가족들도 슬슬 기침을 하기 시작하는 듯한데, 이제는 쓸 필요가 없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피로감을 뒤로한 채, 존스는 오늘도 산업전선에 나선다.
사실 "트립한국"이 아니라 "세틀한국"이었던 세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