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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눈부시지만 2
2012. 10. 금계
10월 15일 오후, 나는 다시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맨다. 오늘은 뒷개 다녀오기로 했다. 왕복 서너 시간이 걸리는 꽤 먼 거리이지만 이 좋은 가을 날씨에 한두 시간 걷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구름이 살짝 끼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해님의 은총이 좀 덜할 것 같다.
동민 어린이집. 햇살을 잘 받는 양지 담벼락에 붙은 안내판이 참 이채롭다. 여러 가지 색깔이 떠들썩하게 어울리고 글씨체가 부드러워 쏙 눈에 들어온다. 지난 날 동민 어린이집은 고아원이었다. 옛날에는 전쟁과 가난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아무리 잘해준다 해도 부모만 할까. 고아원 아이들은 늘 수심이 가득했다.
웰빙 공원을 조성하면서 담장 일부가 헐리기도 하고 산책로 주변의 가옥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새 단장을 했다.
옛날에는 참 허술한 집도 많았다. 그러니까 철로가 뜯기고 산책로가 들어서면서 주변의 주택들은 알게 모르게 덕을 좀 본 셈이었다. 동목포 전신전화국 부근의 건널목을 건너면
‘향기 날리는 꽃집’이 나타난다. 나는 그 가게 안을 들어가 본 적이 없지만 간판만 보아도 향기가 솔솔 풍길 것만 같다. 산책로 주변에 중형버스가 한 대 서 있는데 옆구리에 ‘자연의 따스함 속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는 자연생태어린이집이라고 써놓았다. 어린이들은 자연에서 놀아야한다. 우리 손자 똘남이가 광주에서 3년이나 다니던 곳도 친환경적인 살구나무 어린이집이었다. 요즘은 초등 1학년 담임들이 요런 아이들을 한글도 안 배워왔다고 눈치 준다고 하니 본말이 전도된 셈이다. 기적의 삼나무로도 불린다는 메타세쿼여는 고장도 안 나고 탈 없이 엄청 성장 속도가 빠르다.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나는 무럭무럭 한 해가 다르게 몸피를 부풀리는 메타세쿼여를 보면 세월이 훨씬 더 빠르게 달려가는 것 같이 겁이 덜컥 난다.
옥상에 꽤 많은 소나무 분재가 올라 있다. 날마다 물주고 순 짚어주기만도 손이 꽤 갈 터인데 주인의 정성이 대단하다. 덕분에 오명가명 공짜로 관상하기는 좋지만 무엇이든 한 가지를 오랜 동안 꾸준히 한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림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오감을 만족시켜 새미난다. 가까이 가보니 바로 튀밥집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튀밥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옛날에는 튀밥이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쌀은 너무 호사여서 보리튀밥을 많이 먹었다. 어쩌다가 쌀튀밥을 튀는 날이면 목구멍에 걸치적거리는 것도 없이 아조 보드랍게 넘어갔다.
동목포 웰빙공원 공중화장실. 옛날에는 동목포역이라는 간이역이 있었지만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화장실을 보면 그 나라의 살림살이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화장실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상당히 선진국 수준이다. 외양도 산뜻하고 현대적이지만 화장실 안의 시설도 그렇고, 게다가 우아하게 스피커에서 잔잔한 음악까지 흘러나온다.
목포고등학교 뒷모습. 목포고등학교는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명문 학교다. 나는 기회 있을 적마다 학벌 문벌 따지지 말고 재력이나 고향이나 나이도 따지지 말자고 역설하지만 세상이 그런 게 아니다. 지금도 엄연히 학벌을 중시하는 것이 우리나라다. 아니, 무엇보다도 먼저 학벌을 옴니암니 따지는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름을 몰라도 좋다. 소박한 가을꽃들이 소풍객 눈을 즐겁게 해준다. 저들도 온몸으로 빛살을 받으며 땅위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쌍끌이 어선. 한쪽은 신이 끌고 한쪽은 인간이 끌고 가운데 십자가를 모시고 하늘나라를 향하여 금방이라도 출항을 서두를 기세다.
믿음이란 참 좋은 것이다. 나는 종교가 없어서 허전하다. 아니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태양이다. 하느님이 있는지는 몰라도 교회 옆구리 벽을 환히 비추는 것은 태양의 은총이요 섭리임이 분명하다. 먼발치에서 꽃을 발견하고 교회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교회당은 서먹하지만 꽃은 눈물 나게 반가웠다. 그것도 요즘에는 보기 어려운 해 바라기와 백일홍이었다.
동초등학교. 왼쪽이 체육관. 옛날 학교와 요즘 학교의 다른 점. 요즘에는 엔간하면 체육관이 있는데 옛날에는 엄두도 못 냈다. 체육관은커녕 교실도 부족해서 콩나물교실이었다. 나는 1966년에 봉래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는데 담임을 맡은 5학년 2반이 80명을 넘어섰다. 그래도 그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도 차고 고무줄놀이도 하고 씩씩하게 자랐는데 요즘 아이들은 운동 잘 하고 사는지 궁금하다.
여기가 젊은 오빠들의 소굴이다. 주전 종목은 장기.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여러 장졸들을 거느리고 자웅을 겨룬다. 제갈공명은 지형지물과 날씨를 중시했다. 동초등학교 부근의 정자도 날씨가 좋은 날에만 장이 선다. 장기? 어지간히 심각한 승부가 아니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에 장기를 배워 친구와 물려주라느니 못 물려준다느니 우의를 상한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글 읽는 소리, 아기 우는 소리, 대강 이런 소리들이 들려야 그 동네가 싹수가 있다는 법인데 목포라는 소도시는 아직 놀이터 손님이 있어서 천만다행이랄까. 농어촌에서는 아이들 울음소리가 그친 지 이미 오래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소년 소녀의 동작을 카메라에 담는다. 저 아이의 아버지, 내가 오래 살면 저 아이까지가 내 노후 연금을 떠맡을 직계 후손들이다. 나는 일찍이 경주 불국사 주차장 부근의 한옥 기와집 화장실에서 기념 촬영을 한 바 있거니와 날렵하고 말끔한 산책로 화장실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동초등학교를 조금 지나간 화장실 옆면 벽에는 노적봉 ‘천년의 종’을 찍은 커다란 사진이 아로새겨 있다. 옛날 우리의 삶은 팍팍하고 무겁고 버거웠지만 요즘은 만화와 사진과 비디오와 텔레비전으로 삶이 훨씬 다양해지고 가벼워졌다. 시청에서는 꽤 큰 맘 먹고 산책로에 장미 화원을 조성했다. 꽤 신기한 품종을 여럿 재배하고 꽃 이름까지 친절하게 적어놓았다.
그러나 꾸준한 배려가 부족했다. 몇 년 지나자 품종은 퇴화하고 화려했던 장미화원에는 잡초가 우거졌다. 그래도 뼈대 있는 유전자들이 노량의 충무공처럼 최후의 장렬한 꽃송이를 요염하게 피워내고 있었다.
도회지에서도 새들은 짹짹 깍깍거리지만 못 듣는 사람은 못 듣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듣는다고 한다. 가을꽃도 산책길 곳곳에 피어나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지만 보이는 사람한테만 보일 테제. 카메라를 들이대면 사방이 꽃 천지다.
어디나 지천으로 돋아나는 풀이지만 나는 강아지풀을 만나면 언제나 감개가 무량하다. 저 풀은 개천가에서 고무신 한 짝을 거센 물살에 떠내려 보내 엄마한테 호된 꾸중을 받으면서 피라미를 체포하여 꿰미를 꿰던 풀이요, 추수 무렵이면 B-29처럼 통통해진 몸통을 가누지 못하는 메뚜기들을 거저먹기로 낚아채서 꿰미로 꿰어 무쇠 솥에 소금을 뿌려 볶아먹던 너무나 고맙고 소중한 풀이었다.
시골 뚜부라는 간판을 내건 기와집 흙벽돌 벽이 눈부신 햇살을 담뿍 받고 있다. 나는 들어가 먹어보지 않았지만 두부보다는 뚜부가 훨씬 맛날 것 같다. 말맛이 다르다. 자장면보다는 짜장면이 더 먹음직스러운 기분이다. 표준어 자장면이 짜장면으로 바뀌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렸지만 표준어를 너무 과신하지 말자. 사투리가 진짜 살아 숨 쉬는 말일지도 모른당께.
연산초등학교가 먼저 생기고 서해초등학교가 나중에 생겼다. 두 학교가 담장을 사이하여 의좋게 나란히 붙어 있다. 보기 드문 상황이다. 그래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교육은 쪼개질수록 효과적이다. 거대학교, 많은 학생 수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학교도 작게, 학급당 학생 수도 적게, 교사는 많게. 이것이 우리나라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선결 과제이다. 남북이 통일을 전제로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국방비의 상당 부분을 교육비로 돌려서 교실을 많이 짓고 학생 수를 더 줄이고 교사 수를 더 늘리면 개별 학습도 충실해지고 학교 폭력도 줄어들 것 같은데 아직도 내 생각이 너무 빠를까.
花水木 아마 요일 이름에서 꽃집 이름을 본뜬 모양인데 화요일이 꽃으로 바뀐 데에서 창조성이 엿보인다. 정통 한국어는 아니지만 꼬부랑말보다는 훨씬 다정하고 정감 어린 간판이다. 옛날 어떤 높으신 분은 오렌지를 오륀지라 해야 맞는다고 해괴한 궤변을 늘어놓아서 실소한 적이 있지만 사실 우리 국내에서는 영어를 써야할 당위성이 전혀 없다고 봐야 옳다. 지기 근본도 모르는 고얀 놈들.
연산식육식당 한우정. 십여 년 전, 청호중 나와 동갑나기 교사 세 명은 한우정에서 한 달에 한 번꼴로 만나 부드러운 살코기에 소주 두어 병을 까면서 우의를 다졌다.
전란 직후 우리는 식량이 아쉬울 정도로 곤궁했다. 쇠고기 돼지고기는 명절이나 제사 때에야 겨우 한두 점 맛볼 수 있었다. 아무리 흔한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나는 고기 한 점을 덥석 집어먹기 죄송할 지경이었다.
한우정 옆 건물 그림이 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오메, 오메, 시상에나, 어쩌다가 현관문에다가 이토록 신나는 그림을 그렸당가. 글씨는 또 어떻고. 날아오르자고? 자율학습이다 보충수업이다 일제고사다 잔뜩 주눅 잡힌 학생들이 어깨를 못 펴는 우리들의 학교에는 왜 이 현관문보다 짜잔헌 벽화 쪼가리 하나 없당가.
태권도장 버스 그림. 미국은 왜 민주주의가 발달했는가. 집집마다 총을 들고 자기 집은 자기가 지키기 때문이라던가. 나도 다음 세상에서는 태권도를 배워 씩씩하게 내 몸과 자존심을 튼튼히 지키고 싶다.
그나저나 올림픽 중계 때 보니 태권도가 가장 재미없었다. 무슨 수를 내야겄다. 캥거루처럼 몇 번 껑충껑충 뛰다가 시합 종료 종이 울리고 말던 것이었다.
오리둥지. 쇠고기 돼지고기도 그렇고 닭고기 오리고기도 그렇고 요즘은 주머니 사정만 괜찮다면 육고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 참으로 한스럽다. 예전에는 돈이 귀해서 먹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비만이나 콜레스테롤 통풍 고혈압 때문에 선뜻 내키지 않는다. 늙어도 힘쓰려면 고기를 조금씩 먹어줘야 한다는데 이래저래 나는 고기와는 인연이 없는갑다.
서해초등학교부터 농공단지까지는 산책로가 아니라 차량 통행이 빈번한 차도 귀퉁이로 뻗은 인도를 거쳐야 한다. 그래도 농공단지부터 뒷개까지 이어지는 환상적인 산책로를 걸으려면 부득이 그 인도를 거칠 수밖에 없다.
산책로를 걷다가 인도에 접어들면 차량의 소음도 소음이려니와 역겨운 휘발유 냄새에 금방 숨이 컥 막힌다. 그나마 굴처럼 위쪽을 가려주는 가로수가 위안이라면 위안이라고나 할까. 무소부재하신 해님은 또 어김없이 인도까지 달려와 길바닥에 빛과 그림자를 어룽지게 한다.
여기가 서울에서 목포까지 서해안고속도로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전에는 뒷개가 막장이었지만 이제는 목포대교를 통하여 진도 해남으로까지 연결된다. 뒷개 횟집 주인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외지 손님들 잘 대접허랑께. 남의 호주머니 돈 빼먹기가 결코 호락호락 쉬운 일이 아니랑께.
드디어 찻길을 건너 산책로에 발을 들여놓는다. 농공단지부터 뒷개까지 이르는 꽤 긴 산책로다. 찻길이 가까워서 그렇지 산책하기에는 더없이 넓고 숲이 우거지고 한가로워서 훌륭한 공원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이 공원 하나만으로도 복 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특히 내가 이 길을 좋아하는 까닭은 넓은 흙길이 자연스럽게 꼬불꼬불 펼쳐져서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다는 점이다. 노폭도 다른 산책길보다 훨씬 넓다. 게다가 고슬고슬한 흙길 은 금상첨화다. 운동화 바닥에 밟히는 흙의 촉감이 눈물 나도록 보드랍고 상쾌하다. 운동화 들고 다니려면 성가셔서 그렇지 맨발로 다니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은목서 하얀 꽃이 만발했다. 기품 있는 중년여인처럼 은근하고 아늑한 향기를 발산한다. 당단풍은 씨앗마다 프로펠러를 달았다. 늦가을 한 줄기 바람이 일면 상승기류를 타고 떠올라 자기의 유전자를 오대양 육대주에 퍼뜨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목마른 나그네 목 좀 축이라고 음료수대가 설치되었다. 재질이 스테인레스 스틸일까. 오후의 햇살을 받아 번뜩이는 반사광을 사방으로 찬연하게 되쏘고 있다. 해님의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치열하고 거룩한 능력을 의심하는 자들은 이 음료수대 앞에 서 볼 일이다. 왜 이 길을 산책할 때마다 번번이 눈길이 점잖지 못하게 화장실에 머무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산책로 주변의 화장실들은 죄다 깨끗하고 은은한 음악이 흐르지만 뒷개 화장실은 특히 겉모습이 기이하고 초현실적이다. 억지로 끌어다 붙이자면 달나라에 착륙하던 우주인들의 겉옷을 연상케 한다고나 할까.
드디어 뒷개에 도착했다. 만국기 어지러이 휘날리는 너머로 횟집 간판들이 호들갑스럽게 화려하다. 서해안 고속도로 개통되고 그래도 몇 년 동안 장사를 잘했다고 해야 하나. 애당초 시 소유지였다던가. 도로 정비 차원에서 모두 철거하고 뒤쪽 바닷가에 지은 현대식 건물로 이주할 예정이다. 벌써 철거 작업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어느 곳 무엇이든지 승승장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목포 북항. 비금, 도초로 차량과 승객을 실어 나르는 카페리들이 겉으로는 무사태평이지만 속으로는 한시바삐 외달도를 돌아 시하바다에서 두리둥실 너울을 맞으며 틀틀틀틀 쉬쉬쉭 스크루를 돌리려고 발싸심을 하고 있다. <계속>
첫댓글 위의 노란 '소박한 가을꽃'은 <미국미역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