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 8일 이미 이 세상을 떠났지만 화인들의 마음속깊이에 새겨져있는 이름-《등려군》을 다시 기억속에 떠올리게 된다. 이날은 그녀의 8주년 제사날이자 탄생한지 50주년되는 해이다.
이 시각 우리는 그 이름과 함께 그녀가 이 세상에 남겨놓은 음악의 지난날과 지금을 돌이켜보게 된다.
등려군은 화인가수가운데서 전기인물이라고 할수 있다. 그녀의 노래소리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잊게 하는 감미로움을 가져다주고 활짝 핀 미소는 부드럽고 따뜻하기로 사람을 녹아버리게 한다. 그녀의 시대는 이미 멀리 갔다. 하지만 어둠이 깃들고 조용할 때 다시금 그녀의 음악을 감상한다면 그 어떤 안위같은 따뜻함과 달콤함이 그대의 마음속으로 흘러드는걸 느끼게 될것이다.
신분증에 본적이 하북성 대명현으로 등록되여있는 그녀는 중국대륙에서 제일 먼저 청중들의 인정을 받았던 대만녀가수이다. 등려군의 부친 등구는 국공내전후 국민라 대만으로 이주해온 1세대 이민이므로 등려군은 《동포2세》로 인정되여있다. 이는 그녀가 순수한 대만인이 아니라는걸 의미하고 있다. 하지만 등려군은 대만의 운림현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출생하여 일가 일곱식구는 아버지의 부대를 따라 대만의 각 현을 거의 다 돌아다녔다. 어린 시절의 등려군은 대만현 로주향(지금은 로주시로 진급되였음)에 거주해있으면서 아주 류창한 대만어(민남어)를 할수 있었다. 20세기 50∼60년대에 태여난 대만의 허다한 애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어릴적 교회에 다녔다. 한자루의 밀가루를 얻기 위해서이다.
량안의 복잡한 력사적문제의 배경하에서 등려군과 같은 사람들은 대만인과 외성인 이 두가지 신분에 서로 모순듸였었다.
20세기 80년대의 등려군은 기포(치포)옷차림을 하고 일본을 휩쓸었었다. 일본사람으로 놓고 말하면 그 노래소리는 중국에서 왔고 그녀는 대만에서 온 중국사람이였다. 또한 등려군이 갖고 있는 그런 다종신분은 중국에서 발전했던 음악인들의 종합체이기도 하였다.
등려군의 고향으로 가보면 이웃사람들마음속의 등려군은 텔레비에서 본바와 같이 겸허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어릴때부터 연기에 천부가 있었던 그녀가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을수 있은것도 어머니-조수계의 계획적인 배양의 성과란다. 등씨집에는 아이가 모두 다섯인데 아버지의 봉금만으로 생활을 유지해가는 형편이였다. 등려군이 학교를 그만두고 노래를 배우는 일도 교육을 중시했던 당시 대만사회에로는 불가사의한 일이였다. 예술에서 재능을 닦아주려는것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에서 놓고 보면 가정의 생계를 위해 할수 없었던 상황도 있었다.
등려군이 가수로 데뷔한 시기는 곧바로 대만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기에 당시 대만의 민중들은 이미 충족한 경제실력으로 자기 마음속의 스타를 수립할수가 있었다. 등려군은 대만에서 태여났지만 량안지역을 련결시킬수 있는 그런 화인초인기연예인의 특수한 기질을 갖고있어 마침 대만민중들의 기대에 벅차는 마음을 달래줄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 대만민간의 창작능력이 대만당국이 제출한 《정화가곡》의 예속을 받고있었으나 이미 일정한 에네르기를 축적하고있어 작품의 특점이 가사가 아름다운것인데 등려군의 노래는 더구나 선률이 부드럽고 아름다울뿐만아니라 매 글자마다에 정이 다분해 선률과 가사가 모두 극치에 달했다고도 말할수 있다.
등려군의 노래는 70∼80년대뿐만아니라 30여년래 작품의 지구성과 계발성을 충분히 증명해주고 있다. 목전 허다한 가수뿐만아니라 인기가수들도 등려군의 노래를 부를수 있는걸 영광으로 생각하며 홍콩의 왕비같은 인기가수도 음악의 길을 걷는데는 등려군의 노래가 계몽선생님이였다고 여러번 말했었을 정도이다.
작품뿐만아니라 그보다 더 소중했던것은 연예인으로서 당시 전통적인 관념하에 연예계에서 오염됨이 없이 사람들을 대함에 겸허하고 부지런하며 자기관리를 잘하는 인품인것이다. 뿐만아니라 언제나 적극적으로 자선활동과 의연활동을 벌렸던 그녀의 인덕은 많은 청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량안의 복잡한 력사적문제의 환경하에서도 그는 자신의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었다. 등려군이 세상을 떠난후 미국의 유명한 billboard음악잡지에서는 상세하게 등려군의 이야기를 보도했었다. 그 글에서는 등려군을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량안의 문화를 통일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런 거대한 평가에도 제일 유감스러웠던것은 그녀가 평생 대륙의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한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대륙의 40대중반의 사람들 거의 모두가 그녀의 팬이란다. 그녀의 노래는 한세대 사람들의 정신적력량이였을뿐만아니라 세계를 통하는 통행증이기도 하였다. 매년 그녀의 생일과 제사날이면 곳곳에서 그녀의 노래가 담긴 음반이 유유히 돌아가면서 사람들을 지나간 추억에로 서서히 끌고 들어간다.
등려군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녀의 짧은 인생을 돌이켜보면 14살때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목소리로 온집식구를 먹여살리고 20여년동안 수백장의 앨범을 내였으며 감정사 에서도 랑만적인 소문이 그칠새 없었지만 항상 소심한 태도였으며 진정으로 공개인정한 사람은 곽공승뿐이였다. 그녀는 승벽심이 강하여 《가짜여권사건》의 심한 좌절을 받았을 때도 그 자리에서 일어나 새 출발하여 국제상의 성적으로 자신의 형상을 다시 세웠으며 중국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화인여가수의 모범으로 되었다.
초인기가수의 고향을 찾아서…
등려군의 유일한 졸업장의 학교―로주초등학교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등려군은 학력이 높지 못하다. 금릉녀중의 중학부를 채 졸업도 못한 그녀의 유일한 졸업장은 백년력사를 갖고있는 로주초등학교의 졸업장이다.
로주초등학교는 대북의 로주시에 자리잡고있는데 예전엔 태풍의 피해를 자주 입는 가난한 곳이였다. 하지만 로주는 적지 않은 인기인물들을 자래운 곳으로 유명하다. 등려군이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는가 하면 지금 인기높은 신세대가수 주걸론의 아버님이 살던 곳이였고 성룡의 안해 림봉교의 어머님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로주초등학교에 들어서면 건교백주년 경축기념비가 한눈에 안겨온다. 여전히 등려군이 학교다닐때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낡은 학교교실가운데서 한칸은 전문 학교전람실로 쓰고있는데 거의 대부분은 등려군과 관련되는 사진이 아니면 중외음반 및 화첩과 잡지 등이다. 진렬방식이 간단하긴 하지만 등려군의 팬들로 놓고 말하면 《윤원》(등려군의 묘지소재지)외 제일 그녀를 그릴수 있는 곳으로 된다. 매년 등려군의 제사날전후면 세계각국에서 먼길을 마다하고 이곳으로 찾아와 참관하고 사진을 찍으며 기념을 남기고 그녀를 추모한다. 근 몇년 대만이 대륙인사들에 대해 점차 긴장정도를 낮춤에 따라 많은 대륙인사들도 이곳을 드나드는걸 볼수 있다.
올해 64세인 장한권선생님은 래년에 퇴직하게 된다. 그는 등려군의 초등학교 3,4학년때의 미로과 선생님으로서 등려군의 어릴적의 여러가지 일들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계시며 자부감을 갖는다. 그의 말씀에 따르면 등려군은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경상적으로 반급을 대표하여 운동회나 노래시합에 참가하였으며 나이는 어리지만 다른 애들에 비해 일찍 헴이 들었으며 특히 언어방면에서 남다른 재주를 보여주어 여러차례 학교를 대표하여 각종 시합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장한권선생님의 회억에 따르면 등려군의 어머니는 종종 애더러 음악을 듣게 하고 노래를 배우게 하였다. 초등학교 6학년때 그의 어머니는 경상적으로 등려군을 데리고 외지에 노래하러 다녀 학업에 영향주었길래 어머니께 그래도 학생이라면 학업에 중심을 둬야 하지 않겠는가고 여쭌적도 있다고 한다.
로주학교의 맞은켠 한갈래 좁은 오솔길을 지나 작은 국수집옆모퉁이로 100여메터 들어가면 빨간 벽돌의 단층집옛건물이 보이는데 제일 구석쪽이 등려군이 어릴 때 살던 집이다. 워낙 너무 낡아 원래 있던 16호문패는 이미 봉해버리고 새로 든 집에서 옆에다 약4평되는 《위장건축》을 덛붙였는데 겉으로 봐도 퍼그나 허술하고 낡았다. 원래 집으로 들어가보면 입이 벌어질 정도다. 고작해야 30평밖에 안되는 집에 아무런 막이도 없이 일곱식구가 살았다니 상상도 못할 정도다.
로주의 문사공작자 양련복은 오랜 시간을 거쳐 등려군의 어릴적의 여러가지 자료들을 모았다. 그가 말하기를 이 옛집터는 원래 귤창고였다 한다. 지금도 천정을 보면 물건을 재워놓기 위해 박아놓았던 가름대를 뜯어낸 흔적을 보아낼수 있다고 한다.
등려군의 예전의 이웃들이 말하기를 국민당이 대만에 온후로 이 귤창고를 여러개의 작은 칸으로 막아 군사가족들에게 나누어주어 살게 하였다고 한다. 등려군의 가족이 바로 그중의 한 가족인것이였다.
67세의 대만현의원 진신의도 등려군의 옛이웃으로서 등려군의 집과 앞뒤로 울타리 한줄만 사이두고 살았다 한다. 등려군보다 16살 연상인 진신의가 말하기를 등씨네 집에서 이사올 때 그는 금방 부대에서 돌아왔을 때인데 집에서 밭일구고 채심고 할 때면 종종 등려군의 어머님이 뒤마당에서 애들에게 목욕시키는걸 볼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웃으며 《등려군은 어릴적에 매일 뒤마당에서 목욕하였지. 난 거의 어릴때부터 그녀가 목욕하는걸 보아온셈이네.》고 얘기하였다. 진신의는 이 역시 등려군은 평민의 출신이란 일면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진신의가 계속 얘기하기를 등씨네 집은 생활이 너무 쪼들려 아버지가 매일 손수 떡을 빚어 자전거뒤에 싣고 여기저기로 팔러 다녔는데 말에 토배기맛이 너무 짙어 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잘 못알아들었으며 평소에도 주위의 이웃들과 별로 거래하지 않았지만 등려군의 어머님 조수계는 입담이 좋아 경상적으로 이웃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애들이 하학한 무렵이면 거의 매일 등려군을 데리고 노래하러 다니는걸 볼수 있었다 한다. 진신의의 인상에 등려군은 초등학교를 졸업한후로 장기간 대북시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따라서 집근처에 나타나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고 이사간후로는 한번도 돌아온걸 본적이 없다고 한다.
수년이란 시간을 들여 등려군과 유관되는 문물과 자료들을 수집해온 양련복은 여러곳을 다녀보아 종합적으로 보면 등려군이 어머니와의 감정도 좋지만 군직에 있는 아버지가 엄숙하긴 했지만 생활이 그렇게 쪼들리는데도 초등학교를 졸업시키고나서 이리저리 돈을 모아 이름있는 사립여중으로 보낸걸 보면 그래도 아버지가 유일한 딸에 대한 감정이 더 애틋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양련복은 등려군이 어릴적에 철들고 얌전했지만 공부는 보통이였으며 특히 수학이 차했으나 음악에 대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등려군과 접촉해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녀는 인품이 좋고 위신이 높았다 한다. 이는 그녀가 이름을 날린후의 형상과도 어울릴뿐만아니라 평민의 출신으로서 상업적인 포장이 아니고 원바탕임을 더 절실히 보여주고 있다.
양련복이 말하기를 등려군은 60년대 대만의 본토문화를 대표하며 외성인이지만 대만본토에서 자라 천성이 이쁘고 힘든 환경에서 자라고 학력이 높지 않지만 국제상에서 이름을 날릴수 있었다. 《그녀는 하나의 종합체이다.》고 평가했을뿐만아니라 그녀가 세상을 떠난 수년후에도 《등려군의 문화에네르기는 계속 발산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첫댓글좋은 자료 대단히 고맙습니다. 보아하니 중국에 사시는 동포분이 해주신 솜씨 같습니다. 어투도 그렇고... 저는 테레사가 결혼 직전까지 같던 곽공승(홍콩의 어마어마한 갑부집 아들이었음)과 테레사의 러브 스토리를 저의 형이 번역해준 신문 가십기사를 통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테레사가 곽공승과의 결혼를 결정적으로 못하게 된 이유는 테레사의 어머니가 결정적인 반대를 해서라고 합니다. 테레사와 성룡과의 연애설도 있는데 성룡과는 좋은 친구 사이였다고 합니다. 성룡이 1980년대 초반 미국에서 체류할 때 테레사도 미국에 있었는데 테레사가 성룡에게 노래부르는 법을 사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성룡이 음반을 내고 가수로도 데뷔하는데 테레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또 테레사가 성룡의 집에 직접 찾아가 성룡을 위해 콩죽도 손수 끓여줄 정도로 둘은 아주 친한 관계였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성룡이 몇 년 전에 음반을 낼 때 테레사를 회고하며 '워즈짜이후니'를 테레사와 함께 리믹스 합성버전
blues님이 올려주신 노래 늘 즐감하고있어용! 단지 요즘 갑자기 일이 무척 바빠진 이유도 있고(덩달아 맴이 바빠서..), 잘 알다시피 훼방꾼과 또 부딪치기 싫어서 그런것도 있고(요즘은 많이 얌전해졌네요..암튼 머리가 띵~함), 좌우간 스트레스받지않을려고 괜한 노력을 하고있는중이랍니다.. 별노력을 다하며 살아요글쎄
첫댓글 좋은 자료 대단히 고맙습니다. 보아하니 중국에 사시는 동포분이 해주신 솜씨 같습니다. 어투도 그렇고... 저는 테레사가 결혼 직전까지 같던 곽공승(홍콩의 어마어마한 갑부집 아들이었음)과 테레사의 러브 스토리를 저의 형이 번역해준 신문 가십기사를 통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테레사가 곽공승과의 결혼를 결정적으로 못하게 된 이유는 테레사의 어머니가 결정적인 반대를 해서라고 합니다. 테레사와 성룡과의 연애설도 있는데 성룡과는 좋은 친구 사이였다고 합니다. 성룡이 1980년대 초반 미국에서 체류할 때 테레사도 미국에 있었는데 테레사가 성룡에게 노래부르는 법을 사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성룡이 음반을 내고 가수로도 데뷔하는데 테레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또 테레사가 성룡의 집에 직접 찾아가 성룡을 위해 콩죽도 손수 끓여줄 정도로 둘은 아주 친한 관계였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성룡이 몇 년 전에 음반을 낼 때 테레사를 회고하며 '워즈짜이후니'를 테레사와 함께 리믹스 합성버전
으로 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도 테레사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쁘리비엣님,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다음 편이 기대되네요. Teresa Teng is forever!!!
문장이 쫌 낯설어서 이해하며 읽느라 한참걸렸네요^^ 암튼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중문자료만 찾아다니다가 한글을 대하니 이렇게나 쉬운걸~~
esder님.....등려군 노래 감상에도 리플 좀 달아요~
blues님이 올려주신 노래 늘 즐감하고있어용! 단지 요즘 갑자기 일이 무척 바빠진 이유도 있고(덩달아 맴이 바빠서..), 잘 알다시피 훼방꾼과 또 부딪치기 싫어서 그런것도 있고(요즘은 많이 얌전해졌네요..암튼 머리가 띵~함), 좌우간 스트레스받지않을려고 괜한 노력을 하고있는중이랍니다.. 별노력을 다하며 살아요글쎄
이런일들이 있었나요^^ 역쉬 !! 많은것 새로 알게 되어서 감사해요^^
너무좋은자료 감사합니다.스크랩합니다...
본문을 편집하여 [鄧麗君紹介年譜]방 21번 글에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재 원문과 링크했슴.[발췌]☜쁘리비엣님)
다음Daum 게시판에 등려군 소개 연보(鄧麗君紹介年譜) 1편과 鄧麗君傳記 (1)편 올렸는데
앞으로 쁘리비엣님의 번역문을 시리즈로 올릴 예정입니다.
(팬 카페를 찾지 못하는 네티즌 들을 위한 등려군에 대한 일반 정보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