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불교 종파 - 선종, 교종
1) 교종
교종은 불교의 수행 방법의 하나로 특정한 불교경전에서의 가르침을 불교의 진수로 간주하여, 이것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주력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교종은 불교교리와 경전을 중시하고, 이 가운데 불교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고 이것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교종의 가르침에는 인간과 자연이 현실적으로 연기의 법칙에 따라 서로가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를 깨닫고 실천하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불교가 삼국시대에 도입되었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불교를 도입하게 됨으로써 정신적 통일을 이루고, 이를 왕권 강화와 삼국 통일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다. 특히 신라 시대의 불교는 교종이 주를 이루었는데, 당시 귀족 사회의 특성 때문이다. 귀족은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고, 평민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귀족들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난해한 불교 교리를 배우고 그를 통해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종의 논리는 귀족들의 요구와 일치하게 되고, 귀족층을 중심으로 교종이 발전하게 된다. 신라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화엄종도 교종의 일파 인 것이다. 특히 화엄종을 이끌었던 의상대사는 귀족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귀족들의 후원을 많이 받게 된다. 그래서 의상대사는 대규모 불사를 행할 수 있었고, 천년 고찰의 많은 곳이 의상대사와 연관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려 시대 중기까지 교종이 발달하게 되는데, 고려 사회가 귀족 사회였기 때문에 교종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려에 들어서는 신라 말에 형성된 선종과의 대립이 잦아지고, 교종과 선종의 대립은 종파 통합의 노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조선에 이르러서는 성리학적 사상아래 불교를 탄압하게 됨으로써, 교종도 교세가 많이 축소되게 되고, 세종 6년에 하나로 통합된다. 교종은 흥덕사를 총본사로 하였는데 조선의 억불 숭유 정책의 영향으로 많이 쇠퇴하였다.
2) 선종
선종은 교종에 비교되는 불교수행의 한 일파이며 선불교라고 하기도 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장하는데, 선종에서는 인간은 원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품성을 지닌 존재라고 전제하고, 개인이 수행과 해탈을 통해 부처의 성품임을 깨달을 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종은 언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 부처의 마음을 온 세상에 전하므로 불심종 - 부처의 마음이 통한다 - 이라고도 하며, 수행법으로 주로 참선을 중시한다.
하지만 선종은 참선 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동작에서도 선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고, 노동을 통해서라든가 혹은 속어를 사용하는 일상적 문답법으로 그 이념을 실현코자 하였다. 이 종파는 인도 승려 보리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는데, 이후에 혜능이 남종선을 개창하면서 더욱 발달하게 된다. 선종이라는 명칭은 당나라 중기부터 그 종파가 크게 발달하여 교종과 대립하기에 이르게 되고 교세가 확장되자 교종에 대비하여 선종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한국의 선종은 법랑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 선종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 고려 초 선종은 교종의 기세에 눌려 다소 침체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지눌과 보우의 출현으로 중흥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13세기 초 지눌이 조계산에 수선사를 짓고 선종이 크게 부흥하면서 선종 내에 조계종파가 성립되었다. 14세기 중엽에는 보우가 불교계를 장악하면서 사실상 조계종이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던 시기에는 조계종의 나옹이 조선 왕실의 후원을 받아 불교계를 주도하였고, 하지만 조선 왕조의 억불 정책은 불교계의 큰 타격이었고, 선종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 중기 서산대사가 활동하여 교선 일치를 주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종 - 선종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한림학사)
교종과 선종의 구분
구분 | 교종 | 선종 |
성격 | 불경, 교리 중시, 전통 권위 강조 | 종교적 각성 중시, 형식과 권위 부정 |
분파 | 5교 | 9산 |
지지 세력 | 중앙 귀족 | 지방 호족 |
융성기 | 신라 중대 | 신라 하대 |
영향 | 조형미술 발달, 중앙집권 강화 | 조형미술 쇠퇴, 한문학 발달 |
[네이버 지식백과] 교종과 선종의 구분 [敎宗-禪宗-]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2001. 12. 20., 강동효)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시공 불교사전 선종
교종
불교의 한 종파로 일반적으로 참선을 위주로 하는 선종에 대하여 경전을 중시하고 특정 경전을 토대로 하여 교리를 체계화 시킨 종파라는 의미로 쓰여지는 말입니다. 조선초에 화엄종. 도문종. 중도종. 신인종. 자은종. 시흥종의 6개 종파는 태종 7년에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으로 축소되었다가 세종 6년에 하나로 통합되어 교종이 되었다. 이에 따라 태종 7년에 119사(寺)로 통합되었다가 세종 6년에는 18개 절과 1,800명의 승려만이 남게 되었다. 교종은 흥덕사(興德寺)를 총본사로 하였는데 선종이 탄압에도 불구하고 선맥을 이어온 데 반하여 교종은 경전을 소의로 삼는 까닭인지 맥을 잇지 못하고 끊어졌다. 현재 우리나라의 교학이 부진한 것도 이에 원인이 있지 않은가 추측해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종 [敎宗]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선종
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 등 교학(敎學)을 중시하는 교종(敎宗)에 대하여, 직관적인 종교체험으로서 선(禪)을 중시한다. 원래 선종은 석가가 영산(靈山) 설법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迦葉)이 그 뜻을 알았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불립문자(不立文字)를 종지(宗旨)로 삼는다. 종파로 성립된 것은 개조(開祖)로 전해지는 달마(達磨)가 650년경 중국에 입국하면서 비롯되는데, 혜가(慧可)·홍인(弘忍)·혜능(慧能) 등으로 계승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한국에 들어온 것은 784년(선덕왕 5) 중국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법맥(法脈)을 이은 도의(道義)가 821년(헌덕왕 13) 귀국한 뒤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하고 선(禪)을 전하면서부터였으며, 이후 선종 9산문이 성립되면서 크게 번창하였다. 고려 전기에는 화엄종·법상종 등의 교종이 번성하면서 쇠퇴하였다가, 고려 명종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조계산(曹溪山)에 수선사(修禪寺)를 세우고,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설립하면서 다시 번성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에 의해 점차 쇠퇴하였다. 1424년(세종 6)에는 당시 불교 7종파를 선종과 교종의 두 종파로 폐합하면서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총남종(摠南宗)의 세 종파가 선종으로 단일화되었다가, 1565년(명종 20) 양종제도가 폐지되면서 국가권력에 의해 종파가 폐지되었다. 불교 암흑기로 불리는 산중 불교시대를 거쳐 휴정(休靜)과 선수(善修)에 의해 중흥되어 이후 활발하게 선법의 계통을 이어가다가, 포교활동이 자유로워진 한말 이후 원종(圓宗)·임제종(臨濟宗) 등으로 불렸으며, 1941년에는 조계종이라는 종파의 명칭을 확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종 [Chan Buddhism, 禪宗]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