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뉴스는 설민석 강사가 민족대표 33인을 폄훼하고 후손들이 반발했다는 뉴스를 보도했습니다. 설민석 강사는
동영상에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태화관의 성격과 민족대표 33인의 그 날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 있었습니다. 태화관이라고. 대낮에
그리로 간 거야. 그리고 거기서 낮술을 막 먹습니다.” “(태화관) 마담
주옥경하고 손병희하고 사귀었어요. 나중에 결혼합니다. 그 마담이 DC(할인) 해준다고, 안주 하나 더 준다고 오라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설민석 강사의 강의에 대해 후손들은 독립선언을 낭독한 장소를 룸살롱 술판으로 손병희의 부인 주옥경을 술집 마담으로
폄훼했다고 주장했고, SBS뉴스는 설씨의 강의에 일부 문제가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재밌는 역사 강의로 유명한 설민석씨의 주장이 타당한지, 그날 민족대표 33인은 왜 태화관을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로
정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태화관은 명월관 인사동 지점이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장소를 태화관이라고 하는데, 원래 ‘태화관’은 명월관의 인사동 지점이라고 봐야 합니다.
명월관을 세운 안순환은 광화문 명월관의 규모가 작아 이완용의 개인 집인 순화궁을 사들여 조선요리옥으로 바꾸었고,
사람들은 명월관 인사동 지점을 태화관이라고 불렀습니다.
“獨立宣言事件(독립선언사건)의控訴公判(공소공판)
一瀉千里(일사천리)로審問進行(심문진행) 最後(최후)의會議(회의)와明月舘宣言式(명월관선언식)의光景(광경)” (당시 동아일보
기사)
그러나 정식 명칭은 ‘명월관 인사동지점’이라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독립선언사건 공판에서도 태화관이 아니라
‘명월관’이라고 지칭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라도 정확한 정리가 필요할 듯 보입니다.
‘지금의 룸살롱과는 달랐던 기생들’
설민석씨는 태화관을 가리켜 ‘룸살롱’이라고 말했습니다. 태화관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룸살롱이라고 말하기는 무리가
따릅니다. 하지만 기생이 접대했던 사실은 맞습니다.
명월관이나 명월관 인사동지점(태화관)이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궁중 요리를 기생의 접대를 받으면서 먹는 마치 왕과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생이 접대한다고 해서 무조건 퇴폐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손병희의 아내 주옥경은 몸을 파는
이·삼패(二三牌) 기녀는 아니었습니다. 음악과 서화를 주로 선보이는 일패 등급으로 당시 일패 기생은 연예인급으로 봐야 합니다.
왜 설민석씨는 주옥경씨를 술집 마담이라고 칭했을까요? 손병희의 아내 주옥경씨는 명월관에서 기생 생활을 할 당시
기생조합을 만들어 수장인 ‘향수’를 맡았습니다. 마담은 아니지만, 기생들의 조합장은 맞습니다. 또한, 1919년에는 기생을 그만두고 이미
손병희와 결혼했던 시기였습니다.
‘왜 하필 태화관(명월관 인사동지점)이었을까?’
당시 명월관은 요릿집인 동시에 기생이 접대하는 곳은 맞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지금의 룸살롱과 같은 성격은 아니고
각종 모임과 만찬, 기자회견,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3월 1일은 유달리 청명한 날씨였다. 33인은 단정히 옷을
갈아입고 속속 뒤이어 명월관 지점(현 종로보안서)으로 모여 들었다. 그 전날 손병희 선생의 지시로 김종규 씨가 특별히 진수성찬을 준비할 것을
명월관 주인한테 주문하여 두었다. 33인은 차례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중앙식탁에는 흰 보에 싼 독립선언서를 올려놓았다. (중략) 이윽고 정각
12시가 되자 만해 한용운 선생이 우리 조선도 민족자결에 의하여 여기에 독립을 선언한다고 선창하고 저 유명한 독립선언서를 힘 있게 낭독한 후
일동이 같이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중략) 무장한 헌병과 경관들이 오기는 그 후 한 시간만이었다. 문 복도 할 것 없이 앞뒤를
이중삼충으로 겹겹이 경관과 헌벙 기마병이 물샐틈없이 둘러쌌다. 그때까지 옆방에서 흥탕거리며 질탕이 놀든 노름꾼과 명월관주 안씨 등은 어느 센가
모두 어디로 도망을 치어 벌 둥지를 건들인 것처럼 소란스럽든 노름장소는 갑자기 심산유곡처럼 삼엄한 고요로 뒤 쌓여지고
말았다.” 全洪俊, 「己未運動과 明月館事件」, 開闢 74,
1946.
축배를 들었으니 술을 마신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 시간 만에 경찰들이 왔기 때문에
흥청망청 술을 마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장소는 기생집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퇴폐와 향락이 있던 장소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의
호텔 연회장처럼 모임이 열리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즉 두 가지의 성격이 공존하는 곳이었습니다.
‘설민석이 주장하는 요지는 3.1운동 지도부의 부재였다’
설민석씨는 민족대표 33인 폄훼 논란이 일자 자신의 페이스북에 “그 날 그 사건에 대한 견해일 뿐이지, 민족대표
33인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다. 또한 그 날의 사건만으로 민족대표의 다른 업적들이 희석되거나 가려져서도 안 되며, 그분들을 추모하여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계신 유족 여러분들께 상처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설씨는 “역사라는 학문의 특성상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존재한다”며 “민족대표 33인이 3.1 운동 당일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자발적으로 일본 경무 총감부에게 연락하여 투옥된 점과, 탑골공원에서의 만세 운동이라는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만세 운동을 이끈 것은 학생들과 일반 대중들이었다.”면서 “그 날, 그 장소, 그 현장에서의 민족대표
33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설민석씨가 주장하는 요지는 간단합니다. 민족대표 33인이 유혈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자수를 하면서 지도부가
부재함으로 3.1운동이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부분입니다. 그의 비판처럼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그 날 행적은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모두 변절했다? ’
민족대표 33인을 말할 때 ‘한용운을 빼고 모두 변절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33인을 포함해 3.1운동의 계획과 조직 등에 가담했던 민족대표 48인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변절자는 ‘최린, 박희도, 정춘수, 최남선, 현상윤’ 등 5명에 불과합니다.
물론 일부 인사들 중에는 아직도 친일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친일 논란과 정확한 친일 부역자를 제대로 구분할
필요는 있습니다. 특히 민족대표 33인을 포함한 48인 모두가 변절자라고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합니다.
독립선언서 모임에 불참해서 논란이 됐던 길선주 목사는 무죄를 선고 받았다고 훈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길
목사는 미결수로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고, 이외 다른 민족대표들도 대부분 1~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역사는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많은 자료를 접하는 길이 최선입니다.
수능 정답만을 암기해야 하는 교육 현실에서는 힘들 수 있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