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2600년 전에 북인도에서 살았으며 불교를 전해 준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이 위대한 종교적 스승이 실존했었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들로 알 수 있다.
(1) 붓다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서이다. 이 증언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돌비명(石碑銘), 석주(石柱) 그리고 탑에 기록되어 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한 이들 증언이 새겨진 기념비는 붓다의 시대를 충분히 증언할 수 있을 만큼 그 시대 전후에 살았던 왕들이나 사람들에 의해서이다.
(2) 그 시대의 설화(說話)에 언급된 건물의 유지(遺址)나 장소의 발견에 의해서이다.
(3) 붓다가 세운 성스러운 교단인 승가(僧伽)가 현재까지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어왔다. 승가는 그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실상(實相)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실상들을 세계 여러 곳에서 대대로 전승해왔다.
(4) 붓다가 죽은 바로 그 해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적으로 그의 삶과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해서 승가의 모임과 결집(結集)이 개최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의해서이다. 이 때 확인된 가르침은 붓다의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승으로부터 제자들에게 전해져왔다.
(5) 붓다가 열반한 이후 그의 몸은 화장(茶昆)되었고, 그의 사리(舍利)는 인도의 여덟 왕국에서 나누어 가졌다. 각 나라의 왕들은 사리를 보관하기 위해서 탑을 세웠다.
아잣타삿투(Ajatasatthu)왕이 가져간 사리는 왕사성(Rajagriha)의 탑 속에 안치(安置)되었으며 2세기도 채 못되어서 아쇼카(阿育, A oka)왕이 일부를 가지고 갔으며 이렇게 해서 세워진 조각과 여러 탑들이 고타마 붓다의 사리(舍利)가 실존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6) 최고로 우수하고 신빙성이 있는 고대의 역사책으로 알려진 「대사(마하밤사)·Mahava sa」는 불교사에 언급된 여러 왕들과 함께 아쇼카 왕의 전기(傳記)의 세세한 부분과 붓다의 전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7) 불멸 후 수 백년 정도 지나서 불교를 받아들인 여러 나라, 예컨대 스리랑카, 미얀마, 중국, 티벳, 네팔, 한국, 몽고, 일본,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문학적, 전통적인 면에서 생생한 기록과 증거물을 통해 인도에 고타마 붓다라는 종교적 대지도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8) 붓다의 45년간에 걸친 가르침의 생생한 기록인「삼장, 三藏·Tripitaka」은 붓다가 실제로 이 세상에 살았음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삼장」은 불멸 후 500년 뒤 스리랑카에서 처음으로 책으로 만들어 졌으며 예수 탄생 80년 전에 기록되었다.
-그의 출가 (出家)
남을 흠잡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정과 나라를 버린 싯타르타의 태도에 대해 비난을 퍼부어 왔다. 혹자는 그의 출가를 아내와 가족을 무정하게 버린 것으로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아무도 모르게 떠나지 않고 그의 주위사람들에게 정식으로 이별을 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태자의 마음을 돌리려고 전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상황이 더욱 복잡하게 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아버지 숫도다나왕(Suddhodana)의 소왕국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따라서 싯타르타 태자가 아버지와 아내에게 자신의 출가(出家)를 일부러 말하지 아니한 것은 그들을 내버리려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출가를 막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싯타르타 태자는 다혈질인데다 인생의 전성기에 있는 청년이었다. 따라서 진리를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유혹이 매우 컸었을 것이다. 왕궁에서의 마지막 밤, 깊이 잠든 그의 아내와 새로 태어난 아들을 바라보았을 때, 도리어 머무르고 싶은 충동으로 번민했을 것이다.
그 당시 인도에서는 집과 사랑하는 사람을 내버리고, 고행자나 은자(隱者)가 되는 것이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싯타르타 태자가 그의 계획을 대담하고도 재빠르게 실행에 옮긴 것은 옳은 행동이었다. 또한 그가 출가(出家)한 동기는 자신의 안일이나 자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싯타르타는 온 인류를 한 가족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며 당시로써 싯타르타 태자의 출가(出家)는 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발걸음이었다. 세속에 대한 무집착은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이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집착함이 없어야 가능하다. 대부분의 인생고는 집착에 의해서 일어난다. 우리는 화를 내고, 걱정하고, 욕심을 내고, 불평을 하게 되는 때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불행, 긴장, 아집, 비통으로 생기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집착이 원인이 되는 것이다. 누구나 걱정거리가 생겼을 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중요한 원인이 집착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싯타르타 태자도 그의 아내와 아들, 왕국 그리고 세속적인 쾌락들에 대해서 집착이 많았다면 고통받는 인간들을 구제할 수 있는 진리를 깨우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이 조금도 산란하지 아니하고 보다 자유스럽게 명상하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쾌락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으며, 그 결과 그는 인류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젊은 태자의 눈에는 온 세상이 욕망, 분노, 탐심, 그리고 고통을 더욱 가열시키는 많은 번뇌의 불이 타오르는 곳으로 비쳤다. 그는 그의 아내와 아들을 포함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단을 내렸고, 고통받는 인간들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해답을 찾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여기 어떤 유명한 시인이 붓다의 출가에 대해 쓴 시가 한 편 있다.
「귀여운 아이들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사랑스런 아내가 미워서도 아니었다. 그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불성(佛性)을 더 사랑했기에 그는 그 모든 것을 포기했다.」
부처님 탄생에서 출가까지
- 탄생 -
B.C. 623년 5월 보름날(인도력), 네팔의 인도 국경지대인 카필라 성의 룸비니 동산에서 고귀한 왕자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샤카족의 숫도다나왕이었으며, 어머니는 마하 마야부인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 7일만에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동생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다시 왕과 결혼해서 태자를 양자로 삼았으며 유모인 난다가 태자를 보살폈다.
어느 날 아시타와 칼라세말라라는 선지자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왕자를 보려고 왕궁을 방문하였다. 숫도다나왕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왕자를 데려오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왕자가 발을 움직여 선지자의 헝클어진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선지자는 왕자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예를 표했다. 숫도다나왕도 마찬가지로 경의를 표했다. 위대한 선지자는 처음에는 기뻐하더니 곧 슬픔에 잠겼다. 옆에서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 왕자가 장차 완전히 깨달은 부처가 될 것이므로 기뻐서 웃는 것이고, 자신은 그 전에 죽어서 무색계에 태어나기 때문에 부처님의 수승한 가르침을 배울 수 없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이름을 짓다. -
태어나서 닷새 후에 왕자에게는 '바라는 것이 충족되다'라는 뜻을 지닌 싯타르타 라는 이름이 지어졌고, 그의 성은 고타마였다. 고대 인도의 관습에 따라서 많은 박식한 바라문들이 작명의식을 위해서 여덟 명의 특출한 사람들이 왕궁에 초대되었다. 왕자의 특징을 조사한 후 그들 중 일곱은 두 개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두 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전세계를 지배하는 왕이 되거나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장 젊고, 지혜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콘다나는 이마 위에 있는 머리카락이 오른 쪽으로 돈 것을 가리키면서 한 손가락을 들고, 이 왕자는 출가하여 부처가 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하였다.
- 파종제 -
태자의 어린 시절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농사일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숫도다나왕은 파종 의식을 제정하였다. 정해진 날이 되자 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들로 나갔는데, 어린 왕자 또한 유모와 함께 왕을 따라 나서게 되었다. 왕이 참가한 파종제에서, 유모는 왕자를 덮개 달린 유모차에 뉘인 채 한적한 나무 밑의 시원한 그늘 아래에 자리 잡았다.
파종제가 최고조로 흥겨워졌을 때, 유모는 잠깐 이 흥겨운 장면에 정신이 쏠려서, 태자로부터 한 눈을 팔았다. 축제의 흥겨운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잠부나무 밑은 지극히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주위는 조용한 명상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고, 나이는 어리지만 지혜가 뛰어난 태자는 깊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가장 중요한 수행법인 수식관, 즉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에 집중하여 삼매로 알려진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첫 번째 선정에 몰입했다.
유모들은 축제에 한 눈을 팔면서 태자를 돌보는 것을 깜박 잊었다가 갑자기 태자가 생각이 나서 황급히 돌아왔다. 태자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깊은 명상에 잠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숫도다나왕은 명상에 잠겨 있는 태자를 보자, 태자에게 예를 올리면서 "귀여운 태자야, 이것이 내가 너에게 두 번째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결혼 생활 -
열 여섯 살이 되어서, 같은 나이인 아름다운 야쇼다라 공주와 결혼했다. 행복한 결혼생활 이후에 거의 13년간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궁궐 밖의 변천하는 삶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채 행복에 빠졌다. 후에 부처님께서는 왕자로서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 하셨다.
“나는 극도로 화려한 생활을 했다. 부친은 나를 위하여 궁궐에 세 개의 연 못을 만들어 주셨다. 각각의 연못에는 파란 연꽃, 빨간 연꽃, 그리고 하얀 연꽃이 피었다. 나는 카시의 특산 품인 백단향 이외는 사용하지 않았다. 나의 터어반, 튜닉 옷 그리고 망토는 모두 그 곳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낮과 밤으로 내가 더위, 추위, 먼지, 이슬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나의 머리 위에는 백산(百傘)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를 위해서 세 개의 궁궐이 지어졌다. 하나는 추운 계절, 하나는 더운 계절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장마철을 대비해서였다. 4개월의 장마 기간에 나는 장마철을 위한 궁전에 살면서 한번도 밖에 나오지 않고, 여자 무희들에 둘러싸여 하루종일 즐겁게 지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점차 진실을 알기 시작했다. 그의 사색적인 성격과 무한 한 연민의 정은 그를 왕궁의 덧없는 즐거움에 단순히 탐닉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고통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고통받는 인류에 대해서 깊은 동정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보편적인 고통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 출 가 -
"세속적인 생활은 속박되고 제한되어 있고, 투쟁의 연속이다. 그러나 출가자의 삶은 드넓게 열려 있는 하늘과 같다. 세속에 살면서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청정한 삶을 살아가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어느 화창한 날에 그는 바깥 세상을 보려고 궁궐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삶의 진실한 면을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다. 궁궐의 제한된 영역 안에서 그는 인생의 장미빛 모습만 보았다. 그러나 어두운 면, 인류의 공통적인 면은 의도적으로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마음 속으로만 생각해왔던 것을 처음 생생한 현실로 보게 되었다. 공원으로 가는 도중에 그의 관찰력 있는 눈은 늙은 사람, 병자, 시체, 거룩한 고행자의 이상한 모습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앞의 세 개의 장면은 삶의 엄연한 법칙과 인류가 겪는 보편적인 법칙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삶의 고통을 극복하고 고요한 평화를 얻는 길을 보여 주었다. 이 네 가지의 예기치 않았던 광경이 이 세상을 싫어하고, 출가하게끔 마음을 재촉하였다. 그는 감각적 즐거움의 무가치를 깨닫고, 진리와 영원한 행복을 찾아서 속세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사색에 잠기면서 마지막 결정을 내리고 막 공원을 떠나려 하는 순간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소중하고 유일한 자식을 하나의 장애로 생각했다. 평범한 아버지라면 이 즐거운 일을 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싯타르타 태자는 “아, 장애(r hu)가 태어났구나. 속박이 생기는구나!”하고 소리쳤다. 그래서 할아버지(숫도다나왕)는 어린 손자를 라훌라 라고 이름지었다. 궁궐은 싯타르타 태자에게 있어서 더 이상 명상을 하기에 쾌적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의 매력적인 젊은 부인도 사랑스러운 어린 아들도 출가하려는 그의 결심을 막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성실한 남편이나 아버지 또는 심지어 왕 중의 왕이 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고 유익한 역할을 무한히 하게 될 운명이 지워져 있었다. 궁궐의 유혹적인 것들은 더 이상 그를 기쁘게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이제 떠날 때가 무르익어 갔다.
그는 충실한 마부 찬다에게 애마 칸타카에 말안장을 얹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야쇼다라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갔다. 방문을 열고서, 그는 문간에 섰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아내와 자식을 침착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두 사람을 놔두고 떠나려는 순간에 두 사람에 대한 강한 연민의 정이 그의 마음 속에 강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이와 함께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연민의 정도 강하게 일어났다.
그는 부인과 자식이 풍족한 여건 속에서 잘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속세에서 행복한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출가하는 것은 그들을 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뒤로 남기고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 밤중에 궁궐을 몰래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먼길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홀로 외롭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진리와 평화를 찾기 위해서 떠났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이 세상을 포기(출가)한 것이다. 이것은 세속적인 생활을 다 살아 온 늙은이의 포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뒤에 아무 것도 남길 것이 없는 가난한 자의 포기도 아니었다. 이것은 젊음의 열정과 풍부한 부와 번영을 갖고 있는 -역사상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왕자의 포기였다.
나이 29세에 싯타르타 태자는 역사적인 여행을 떠났다. 그는 먼 곳으로 떠났다.
아노마 강을 건너서 그 둑에 쉬었다. 여기서 머리와 수염을 깎고 자신의 장신구와 의복을 찬다에게 건네주면서, "왕궁으로 돌아가서 고행자의 노란 가사를 걸치고 스스로 어려운 생활을 할 것이다."고 전하라고 말했다.
한 때는 부족한 것이 없이 살던 고행자 싯타르타는 이제 돈 한 푼 없는 방랑자가 되어서 사람들이 주는 자그마한 보시에 의지해 살았다. 그에게는 일정한 거주처가 없었다. 그늘진 나무 또는 외딴 동굴이 밤낮으로 이어지는 추위와 더위를 막아 주었다.
맨발과 까까머리로 태양이 내리쬐는 길과 살을 에는 추위 속을 걸어다녔다. 그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다만 음식을 얻기 위한 바루와 몸을 덮기에 알맞은 가사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로지 모든 정열을 진리를 찾는데 집중하였다.
- 진리를 찾아서 -
이렇게 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가 된 싯타르타는 마음의 진정한 평화를 찾아서, 뛰어난 고행자의 알라 칼라마에게 가서 말했다.
“칼라마여, 나는 당신과 함께 성스러운 생활을 해 나가고 싶습니다.”
그러자 알라 칼라마가 말했다. “오, 존경하는 이여, 그대는 나와 함께 머물러도 좋소.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자신의 직관적인 지혜에 의해서 이 가르침을 깨닫고 오래되지 않아서 스승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오.”
오래지 않아 그는 가르침을 다 배웠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조금도 최고의 진리의 깨달음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하였다. 알라 칼라마는 “나는 스스로 깨닫고 그 얻은 상태에서 계속 머문다”고 말했다. 이것은 단순히 믿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알라 칼라마는 이 교리를 이해하고 중득하면서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에게 가서 말하였다. “알라 칼라마여, 당신이 스스로 직관적인 지혜로 깨닫아 얻은 경지가 어느 정도입니까?” 그러자 알라 칼라마는 깊은 선정의 단계인 무색계를 그에게 알게 해 주었다.
그는 다시 생각하였다.
‘알라 칼라마에게는 확신, 근면, 정진, 노력, 선정, 집중 그리고 지혜가 있다. 나도 이러한 것들을 닦아야겠다. 알라 칼라마는 스스로 깨닫고 그 얻은 상태를 유지한다고 말했다. 나 또한 그 경지를 깨닫기 위해 노력한다면 될 것이다.’
오래가지 않아서, 그는 자신의 직관적 지혜로 그 법을 깨닫고 몸소 증득하는 경지를 얻었다. 그러나 이것도 결코 그에게 최고의 진리의 깨달음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그는 알라 칼라마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알라 칼라마여, 이것이 그대가 말한 스스로의 지혜에 의해서 깨닫고 그 얻은 상태에 머무는 최고의 경지인가? 그러나 친구여 나 또한 이 법의 최상의 경지를 깨닫고 그 얻은 상태에 머물고 있다.”
질투심이 없는 스승은 그의 뛰어난 제자가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는 그를 자신과 동등한 수준으로 올려놓고 존경하면서 말했다.
“기쁘다 친구여 우리는 지금 너무나 기쁘다. 우리는 당신 같은 거룩한 고행자를 존경한다. 나의 지혜에 의해서 스스로 깨닫고 선언하고 얻은 경지에 머무르는 것과 똑같이 당신 또한 스스로 깨닫고 얻은 경지에 머무르고 있다. 그리고 당신 스스로 지혜에 의해서 깨닫고 그 상태에 머무르는 경지를 나도 나의 지혜에 의해서 스스로 깨닫고 선언하고 그 경지에 머무르고 있다. 이와 같이 내가 알고 있는 교리를 당신 또한 알며, 당신이 알고 있는 교리를 나 또한 안다.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그렇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렇다. 그러니 친구여, 이리 오게나. 우리들이 구도의 도반(道伴)이 되는 게 어떻겠나.”
그러나 고행자 고타마는 단지 높은 정신적 집중 단계로 이끌 뿐, 괴로움을 혐오하게 하고, 괴로움에 초연하게 하여 괴로움을 지멸(止滅)하게 하는 평온함, 통찰, 깨달음 그리고 니르바나로 이끌지 못하는 수련과 교리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완벽해지기 전에는 똑같은 정신적 상태를 얻은 또 다른 친절한 스승과 협조하면서 구도자들의 무리를 이끌어 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것은 눈봉사가 눈봉사를 이끄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알라 칼라마의 가르침에 만족을 못 느낀 싯타르타는 정중히 그의 곁을 떠났다.
정치적인 혼란이 없던 평화로운 시대에 인도의 지식인 계층들은 어떤 종교적인 체제나 다른 것들을 연구하고 수행하는 데 종사하였다. 고독하게 성스러운 생활을 해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편의시설이 제공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승들은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래서 고타마가 전의 스승보다 더 능력 있는 스승을 발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웃다카 라마푸타에게 찾아가서 그와 함께 수행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웃다카는 즉석에서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오래지 않아 지혜로운 고행자 고타마는 그의 교리를 다 배우고 스승이 보여 주었던 지각도 없고, 지각이 없음도 없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선정의 마지막 상태를 얻었다.
이것은 선정의 최고 단계로서 의식이 매우 미세하고 순화되어서 의식이 존재한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경지이다. 고대의 인도 성현들은 이 이상 더 정신적인 경지로 깊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거룩한 스승은 훌륭한 제자가 수행에 성공했음을 전해 듣고 매우 기뻤다.
이전의 스승들과 달리 지금의 스승은 그를 모든 제자들의 스승으로서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는 말했다. “친구여 우리는 즐겁다. 너무 즐겁다. 당신 같은 거룩한 고행자를 만나게 되어서! 내가 알고 있는 경지를 당신도 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경지를 나도 안다. 내가 했듯이 당신도 그렇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렇다. 자 친구여 지금부터 자네가 고행자들의 무리를 이끌어 주게나.”
그러나 그는 아직 최고의 진리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는 마음의 완전한 통제를 얻었으나 궁극적인 목표는 여전히 멀리 있었다. 그는 지고의 니르바나,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 모든 갈망의 완전한 근절을 찾고 있었다. 웃다카의 이 교리에도 또한 만족하지 못한 그는 다시 떠났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그가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높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것-최고의 진리-을 충분히 가르쳐 줄 능력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최고의 진리는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된다고 생각하고 외부의 도움을 바라는 것을 포기하였다.
부처님이 깨달은 후 7주간
역사적인 깨달음의 새벽이 밝기 바로 전에, 붓다가 되기 전, 보살이 보리수와 가장 유사한 아자팔라 바니안나무의 옆에 앉았을 때, 순진한 소녀 수자타가 예기치 않게 그를 돌보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약간의 우유죽을 가져다 주었다. 보살은 이 우유죽을 먹고 깨달음을 얻은 후, 한 번 결가부좌한 그대로 7일동안 해탈의 기쁨을 누리면서 보리수와 그 근처에서 고요하고 깊은 명상 속에서 보냈다.
- 첫째 주 ―
첫 주간 내내 부처님은 보리수 밑에 한 자세로 앉아서 해탈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1주일이 지나간 후의 초경에, 깊은 선정으로 들어가서 철저하게 연기(緣起)의 일어남을 차례대로 관찰했다.
“이것(原因)이 있으므로, 저것(結果)이 있다.
이것(原因)이 일어나므로, 저것(結果)이 일어난다.”
무명(無明)에 의해서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조건지어진 행위(行: 결합)가 일어난다.
조건지어진 행위에 의해서 의식(識)이 일어난다.
식에 의해서 마음과 명색(名色)이 일어난다.
명색에 의해서 감각의 여섯 가지 영역(六處)이 일어난다.
육처에 의해서 접촉(觸)이 일어난다.
접촉에 의해서 느낌(受)이 일어난다.
느낌에 의해서 갈애(愛)가 일어난다.
갈애에 의해서 집착(取)이 일어난다.
집착에 의해서 생성(有)이 일어난다.
생성의 의하여 탄생(生)이 일어난다.
탄생(生)에 의해서 늙음, 죽음, 슬픔, 비참, 고통, 비탄, 절망이 일어난다.
이것이 모든 고통의 덩어리와 그 기원이다.
그래서 세존은 이 의미를 깨닫고 그때 기쁨에 넘쳐서 사구게송을 읊었다.
진지한 열성을 다해 사유하던 성자에게, 만법의 이치가 확실해 졌을 때, 그의 모든 의심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진리와 함께 그것의 원인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 밤중에 연기의 법칙을 거꾸로 다음과 같이 관찰했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다. 원인이 소멸됨에 따라 결과도 소멸된다.”
무명(無明)의 소멸에 의해서 조건지어진 행위(行)가 소멸된다.
행위(行爲)의 소멸에 의해서 의식(意識)이 소멸된다.
식(識)의 소멸에 의해서 명색(名色)이 소멸된다.
명색(名色)의 소멸에 의해서 육처(六處)가 소멸된다.
육처(六處)의 소멸에 의해서 부딪침(觸)이 소멸된다.
촉의 소멸에 의해서 느낌(受)이 소멸된다.
느낌(受)의 소멸에 의해서 갈애(愛)가 소멸된다.
갈애(愛)의 소멸에 의해서 생성(有)이 소멸된다.
생성(有)의 소멸에 의해서 탄생(生)이 소멸된다.
탄생 소멸에 의해서 나고, 늙고, 죽고, 슬픔, 비탄, 고통, 절망이 소멸된다.
이렇게 해서 모든 고통의 응어리가 소멸된다.
이와 같이 해서 세존은 위에서 언급한 뜻을 알고 그때에 기쁨이 넘쳐 사구게송을 읊었다.
“진지한 열성을 다해 사유하던 성자에게 만법의 이치가 확실해 졌을 때 의심은 깨끗이 사라졌다. 그 원인을 제거하는 법을 깨달았기 때문에”
새벽에, 세존은 연기의 법칙을 순서적으로 그리고 역으로 이와 같이 명상했다.
“원인이 있을 때 결과가 있다. 원인이 일어나면 결과가 일어난다. 원인이 없을 때 결과도 없다. 원인이 소멸되면 결과도 소멸된다.”
무명에 의해서 조건지어진 행위가 일어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고통의 덩어리가 일어난다.
무명의 소멸에 의해서 조건지어진 행위가 소멸한다. ……
이와 같이 해서 고통의 모든 덩어리가 소멸된다.
그래서 세존은 이 의미를 이해하고 그때에 이처럼 기쁨에 넘치는 사구게송을 읊었다.
“진지한 열성을 다해 사유하던 성자에게 만법의 이치가 확실해 졌을 때 그는 사악한 자의 무리들을 물리친다. 마치 태양이 어둠을 밝게 비추듯이.”
- 둘째 주 ―
둘째 주는 특별한 일이 없이 평온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고요히 인류에게 위대한 도덕적인 교훈을 가르쳤다. 그는 깨달음의 고행을 하는 동안 자신을 보호해준 보리수나무에 깊은 감사의 표시로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앉아서 일주일간 눈 하나 깜짝 않고 나무를 응시하면서 앉아 있었다.
그의 거룩한 예를 따르는 제자들은 그의 깨달음을 기억하면서 지금까지도 원래의 보리수뿐만 아니라 또한 그 나무의 다음 세대들도 존경하고 있다.
- 셋째 주 ―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밑에서 계속 머물게 되자 천신들은 그가 깨달음을 얻은 것을 의심하였다. 부처님은 그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의심을 씻어주기 위하여 신통력을 써서 보석으로 행선 하는 곳을 만들고는 그 안에서 거닐었다.
- 넷째 주 ―
세 번째 주에 부처님은 보석으로 된 행선하는 곳에서 아비다르마(勝法)의 오묘한 이치를 명상하면서 보냈다.
경전들은 그가 아비다르마의 일곱 번째 논(論)인 연기론에 대해서 깊은 명상에 잠겼을 때, 그의 몸과 마음이 지극히 순수한 상태가 되어서 몸에서 여섯 가지 색의 광채가 나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 다섯째 주 ―
부처님은 다섯째 주에도 해탈의 기쁨을 누리면서 보리수나무 가까이 있는 유명한 아자팔라 바니얀나무 아래에서 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부처님께서 선정의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자만심이 강한 바라문이 그에게 와서 관례적으로 상냥하게 인사를 나눈 후에 다음과 같이 물었다.
“존경하는 고타마여, 바라문(사악함을 버린 자)이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사구게송을 기쁘게 읊으면서 대답했다.
“어떤 자가 자만심이 없고, 번뇌로부터 자유롭고, 자신을 제어하고, 지식에 정통하고, 거룩한 삶을 올바르게 이끌어 가면 그 자신을 바라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자타카(本生譚)에 의하면 이 기간에 마군의 딸들인 탄하, 아라티, 라가가 부처님을 유혹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 여섯째 주 ―
여섯째 주에는 아자팔라나무에서 나가수나무로 가서 다시 해탈의 기쁨을 누리면서 보냈다. 그 때 갑자기 큰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비구름과 우중충한 날씨 속에 며칠 간을 계속 내렸다. 그런데 나가수의 왕이 뱀의 모습으로 주거지에서 밖으로 나와 부처님의 몸을 일곱 겹으로 칭칭 감았다. 그리고 우산 모양의 넓은 뒷목으로 부처님의 머리를 덮어서 폭풍우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했다.
일주일이 되었을 때 뱀은 맑게 개인 구름 없는 하늘을 보고 부처님의 몸을 감았던 것을 풀고 원래의 젊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합장하면서 세존의 앞에 섰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사구게송을 읊었다.
“행복은 오로지 스스로 만족하는 자, 진리를 들은 자, 그리고 진리를 본 자에게만 한정된다. 이 세상에서 행복은 집착을 떠나는 것이며, 감각적 욕망을 뛰어넘는 것이다. ‘나’라는 자만심의 억제는 실로 가장 큰 행복이다.”
- 일곱째 주 ―
일곱 번째 주에 부처님께서는 라자야타나나무 밑에서 해탈의 기쁨을 누리면서 평화롭게 보냈다.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 중의 하나
“많은 윤회를 거듭하면서 나는 방랑했네.
열심히 찾았건만, 찾을 수 없었네.
이 집을 지은 자를.
다시 태어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네.
오! 집을 지은 자여(渴望), 그대가 보이는 구나.
그대여 이제 다시는 집을 짓지 말게나.
그대의 모든 서까래(煩惱)를 짓지 말게나.
그대의 마룻대(無明)는 산산조각이 났다네.
마음은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닙바나)을 얻었다네.
갈애의 끝은 이루어졌다네.”
깨달은 직후인 새벽에 부처님께서는 그의 뛰어난 정신적 승리와 내적인 경험을 위의 사구게송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부처님은 과거 생에서의 방랑이 고통을 수반했다고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분명히 윤회에 대한 믿음을 증명해주는 하나의 사실이라 볼 수 있다. 그는 방황하면서 고통을 겪어야만 했는데, 왜냐하면 육체 즉, 집을 지은 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지막 탄생에서 혹독한 고행 끝에 홀로 명상에 몰입하고 있는 동안에 자신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는 고요한 건축가를 찾아냈다. 이것은 갈애 또는 집착, 자기가 창조한 정신적인 요소였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이 갈애가 최초로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자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은 자신에 의해서 제거될 수 있다. 아라한을 얻음으로써 집을 지은 자가 발견되었고, 갈애는 뿌리 채 뽑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이 구절 뒤에서 ‘갈애의 소멸’로 언급되고 있다.
자신이 지은 집의 서까래는 번뇌, 즉 집착, 혐오, 망상, 자만심, 잘못된 견해, 의심, 나태, 불안, 몰염치, 거만함 같은 것들이다. 서까래를 지탱하는 마룻대는 모든 번뇌의 뿌리인 무명을 나타낸다. 무명의 마룻대가 지혜에 의해서 산산조각 나면서 마침내 집이 완전히 파괴된다.
서까래와 마룻대는 건축가가 바라지 않는 집을 지은 재료이다. 그것들의 파괴에 의해서 건축가는 원하지 않는 집을 다시 지을 재료를 빼앗겨 버린다.
집의 파괴에 의해서 마음에는 어느 것도 비교할 수 없는 조건지어지지 않은 상태, 즉 닙바나를 얻는다.
부처님의 하루 생활
붓다는 반열반에 드시기 전까지 45년간이라는 기간을 쉬지 않고 자비심으로 중생들 한 사람이라도 더 미망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숨김없이 가르쳐 주고자 했으며. 높은 자리에 앉거나 군림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청정하게 모든 출가자들과 똑같이 좋은 친구로서 자리 매김을 했다.
붓다의 하루 생활은 육체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가르치는데 보냈으며 하루 일과도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이었다.
붓다의 내적 삶은 주로 수행과 그 기쁨(열반)을 경험하는 것이 모두였고 외적인 삶은 모든 사람들의 도덕심을 향상시키기 위한 자비심의 생활이었다. 붓다 그 분은 스스로 깨달았고 또한 최선을 다해서 남들을 깨우치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온 힘을 쏟았던 분이셨다.
붓다의 하루 생활은 크게 다섯으로 구분된다.
⑴오전 ⑵오후 ⑶초저녁 ⑷한밤중 ⑸새벽녘
⑴ 오전 (오전6시∼12시)
이른 아침, 혜안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아 알아보다.
붓다의 정신적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초청하지 않아도 직접 걸어서 찾아가서 그 사람을 올바른 길로 귀의시키고, 때때로는 신통력으로 공중을 이용하시기도 한다.
순수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붓다를 찾아왔고, 타락하고 악한 자가 있을 경우엔 직접 찾아갔다. 살인자 앙굴라말라는 직접 찾아가 귀의시켜 아라한의 경지까지 이르게 하였으며, 반면 지혜로운 위사카, 베품이 후한 아나타핀디카 장자, 지혜와 신통력을 갖춘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는 정신적인 가르침을 얻기 위해 직접 붓다를 찾아왔다. 모든 이들에게 지위, 계급, 성별, 출신에 상관없이 필요한 정신적 도움을 베풀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선 불자로부터 공양초대가 없으면 임금도 그 앞에 엎드리는 붓다였지만 제자들과 직접 발우를 들고 집집마다 탁발을 하였다. 팔십이 다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에 아랑곳없이 베살리로 자신의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탁발을 다녔다.
붓다는 정오 전에 공양을 마쳤다. 끝난 직후에 매일 재가 신자들에게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지키도록 법을 간단히 설하셨으며 승가에 귀의하고 싶은 자가 있으면 허락해주고 난 다음에 처소로 다시 돌아가셨다.
⑵ 오후 일과(12시∼오후 6시)
비구들이 법당에서 법문을 듣기 위해 모인다. 법문 후 각자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묻고 거기에 답하신다. 붓다께 예를 올리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수행으로 오후를 보낸다. 붓다께서는 처소로 돌아와 필요하면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누워서 의식이 완전히 깨어있는 상태로 잠시동안 잠을 잔다.
그 후 대자비삼매(大慈悲三昧:mahakaruna Sannpatti)에 들어가서 혜안으로 관찰하여 정신적 도움이 필요한 비구들, 잘못을 범한 자가 충고를 필요로 하면 신통력으로 그 곳에 가서 충고해 주고 처소로 되돌아오신다.
늦은 오후가 되면 재가 신자들이 법문을 듣기 위해 모여든다. 불안(佛眼)으로 각자의 타고난 기질과 근기를 파악해서 약 한시간 정도 법문을 해 준다. 부자와 가난한 자, 지위가 높고 낮은 자 모두 모였지만 붓다의 법문은 직접적으로 개인에게 특별히 와 닿게끔 생각이 들게 한다. 이것은 법을 가르치는 붓다의 탁월한 방법이었다. 붓다의 법문은 많은 이들을 귀의시키기 위해 예화와 비유를 들어서 가르치기에 법문은 감정보다는 이성에 많이 호소한다.
평범한 자들에게는 계율과 천상의 기쁨을 먼저 가르쳐 주고, 다른 경지에 있는 자들에게는 물질적인 즐거움의 어리석음과 출가의 기쁨을 가르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성제의 진리를 가르친다.
처음에는 다섯 비구로 시작되어 곧 수 백만 명으로 인도 중부의 전 지역에 평화롭게 전파되었다.
⑶ 초저녁(저녁 6시∼10시까지)
저녁에는 거의 비구들을 가르쳤는데 비구들은 자유롭게 붓다에게 가서 법의 심오한 부분을 질문하여 의심나는 것을 풀고 자신에게 맞는 수행 대상을 받으면서 법의 가르침을 들었다.
⑷ 한밤중 (밤 10시∼새벽 2시까지)
이 시간에는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천상에 있는 천신이나 범천이 내려와서 붓다에게 법을 질문하였다.
상응부 제 1권에 보면 "그때 한 하늘사람이 깊은 밤중에 아름다운 빛으로 제따바나를 두루 밝히며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세존께 예배를 올리고 한 쪽으로 물러섰다"라는 구절이 아주 많다.
⑸ 새벽녘 (오전 2시∼6시까지)
오전 2시부터 3시 사이에는 천천히 경행으로 육체적인 운동을 하셨다.
3시부터 4시 사이에는 오른편으로 누워서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로 잠을 자다
4시부터 5시 사이에는 열반에 들어 아라한의 기쁨을 누린다.
5시부터 6시 사이에는 대자비삼매에 들어 뭇 삶들의 괴로움을 보시고 자비스러운 마음을 보내어 그들의 마음을 온화하게 해 준다.
이 때에는 전세계를 불안(佛眼)으로 관하면서 어느 누구라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이 때 마음이 깨끗하거나 붓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비록 먼 거리에 있더라도 붓다 면전에 생생하게 나타난다.
붓다께서는 그들에 대한 자비심으로 직접 그들에게 가서 필요한 정신적인 도움을 아낌없이 베푸셨다.
붓다는 뭇 중생들과는 달리 밤에 1시간만 잠을 잤다 그리고 새벽 두 시간 동안은 모든 존재들에게 행복이 깃들게 무한한 사랑 (Metta)의 마음을 보낸다.
붓다께서는 스스로가 빈곤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어떠한 불편도 느끼지 않았고, 먹을 것은 스스로 탁발에 의지했었다. 장마철을 제외한 8개월 동안은 하루도 쉬지 않고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다녔으며. 일년 동안 쉬지도 않고 성스러운 법을 가르쳤다.
이렇게 최고의 완전한 일체를 모두 아신 깨달음을 얻으신 분의 하루 생활은 여든 살이 다 되도록 오로지 모든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서 지나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