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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시121:1-8)-2018.11.11
인생은 순례자와 같습니다. 그리고 순례자의 길은 외롭고 힘이듭니다. 순탄하지 않고 장애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누군가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길을 두려운 마음으로 가야 하고, 때로는 가고 싶지 않지만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자기를 도와줄 대상을 찾습니다. 물론 그것이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으며, 혹은 자기 영혼을 의탁할만한 신적인 대상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이 정말 당신의 인생에 어떤 도움을 주던가요?
우리 인생은 강한 것 같지만 너무 약한 존재입니다. 힘의 세기로 승부한다면 코끼리와 비교할 수 없고, 투기로 승부한다면 사나운 맹수와는 게임이 안됩니다. 오래 사는 것으로 승부한다면 거북이 근처도 못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런 것들을 지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 모든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그런 피조물에 굴복을 당하고 오히려 의지하려는 종교성까지 갖고 삽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인간의 종교성은 어리석은 정도가 아닙니다.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우상을 만들어 자기 도움을 삼으려고 합니다. 우상이 어떤 것입니까? 성경은 우상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시편115편4-8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우상의 실체입니다. 그러면 우상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요? 우상의 범주는 하나님을 대체할만한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는 일체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롬1:23).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든지 안보이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우리 인생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시편 기자는 인생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를 분명히 아는 자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고 고백합니다. 자기가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인생의 가장 어려운 문제를 풀어줍니다. 그는 자기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입니다.
(1)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요?
기자의 이 질문은 도움의 주체를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도움의 주체를 누구보다 확실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분명한 자기 도움의 주체를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화법입니다. 인생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상호간에 부대끼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지요. 아무리 혼자 잘난 척하며 살아가는 것 같아도 결국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부모님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도 육신으로 탄생할 수 없고, 스승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깨달을 수 없으며, 당신이 없으면 나라는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인생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요? 오직 하나님만 인생의 도움이십니다. 하나님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시146:3).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5)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는 자는 복된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내 인생의 도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속담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면 거미줄도 철벽같고,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철벽도 거미줄과 같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세상 것이 완전하게 보일지라도 넘어지는 담과 같고, 흔들리는 울타리와 같습니다(시62:3).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가장 안전하고 완전합니다. 때문에 세상에 불타 없어지고 썩어질 것에 도움을 삼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도움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행위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 어떤 것을 하나님처럼 숭배하고 도움을 삼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손으로 거짓된 신을 만들고 허탄하고 망령된 것을 쫓아다닙니다. 그런 것들이 자기 인생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드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을 완전하게 도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간단한 원리를 아십니까? 도움을 주는 자는 도움을 받는 자보다 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른바 도울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힘이 있는 자가 힘이 없는 자를 도와주는 것이 상식이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돕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들이 우리를 돕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얻으려면 반드시 도움의 대상이 분명해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 자의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하나님 외에는 이런 조건을 갖춘 것이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산을 향하여 눈을 들겠다고 했습니다. 왜 시편 기자는 눈을 들어 산을 보겠다는 것일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산은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대부분의 종교적인 행위가 산에서 일어납니다. 기독교 신앙도 예외는 아닙니다.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일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제단을 쌓았고,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전수받았으며, 엘리야는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으며,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의 대업을 완성하셨습니다.
물론 산이 항상 긍정적인 의미로만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부정적인 의미로도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산당이 있던 곳이 산입니다. 작은 산이나 큰 산위에 떠드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높은 산에 오르며 푸른 나무 아래서 행음하였습니다. 때문에 신앙을 불문하고 높은 산을 선호하며 의지하는 경향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시편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임을 감안해 볼 때 산은 영적인 산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임재가 서려있는 성전 산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시온산은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의 산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백미터 이상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곳에 여호와의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은 여호와의 법궤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민족적인 정기와 능력을 기대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정신적인 보금자리였던 셈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땅을 보는 민족이 아니라 산을 보는 민족입니다. 결국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는 말은 하나님을 향하여 도움을 간구한다는 말입니다.
(2) 여호와는 어떤 분이십니까?
시인은 자기 도움이 여호와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가요? 천지를 지으신 분이시오, 모든 만물을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여호와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오,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발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는 것은 악한 범죄행위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되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아래 수고하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직간접적으로 받고 삽니다. 찬송가 460장 가사처럼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감히 우리가 어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실족치 않게 하십니다(3절). 그리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4절). 우리 우편에서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5절). 한마디로 가장 완전하고 완벽하게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그분의 도우심을 받으면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로부터도 안전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롬8:35).
무엇보다 낮의 해가 우리를 상치 않게 하십니다(6절상). 사막의 태양은 샘의 근원을 마르게 하며 머리에 쬐면 일사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실제로 선지자 요나의 머리에 태양이 내리쬐므로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욘4:8). 누가 감히 자연의 재앙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비바람이나 폭풍우, 한재나 설해, 가뭄이나 홍수 등 자연재해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느 누가 자연의 재해를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을 통해 낮의 해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또한 밤의 달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6절하). 밤의 달도 사람에게 큰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적도 지역 같은 곳에서는 달빛이 눈에 치명상을 입히기도 한답니다. 노천에서 달빛아래 잠을 잔 사람은 현기증을 느끼고, 심하면 정신이상이 들기도 하며,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답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자연재해로부터 우리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도우심 밖에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조상 적부터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그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살았던 민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한시도 살아 갈 수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보십시오. 430년 지긋지긋한 애굽의 노예생활을 끝내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추격하는 애굽 군대를 물리치고 넘실대는 홍해를 건너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40년 광야에서 수없이 많은 대적들을 물리치고 먹이시고 입히시며 인도해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죽음의 강 요단을 무사하게 통과케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입성케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이스라엘만 그리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도우심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3) 하나님의 최고의 도우심은 지켜주심입니다(3-8절)
본문에서 지키신다는 말은 적의 외침으로 막기 위해서 울타리를 치고 높은 망대에 올라가 망을 보며 보초를 선다는 의미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요, 벌레만도 못한 나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보초를 서주시고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황송한 말씀입니까? 보초의 생명은 사방을 감시하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불철주야로 지켜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빈틈없는 경계를 서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지켜주신다는 말씀이 무려 6번이나 나옵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만유의 주되신 하나님이 철통같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말씀이지요. 한 치의 흐트러짐이나 실수가 없이 지켜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능력이 없으면 지켜 줄 수 없고, 권능이 없으면 지켜 줄 수 없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지켜 줄 수 없고, 사랑이 없으면 지켜 줄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울 것이 없고 겁낼 것도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키시되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십니다. 구체적으로 그분은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주십니다(3절). 그래서 실족치 않게 하십니다. 사실 인간은 어디 가야 좋을 지를 잘 모릅니다. 어디에 깊은 수렁과 헤어 나오지 못할 웅덩이가 있는지, 어디에 죄악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지, 어디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지켜주시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십니다(7절). 사실 사단은 우리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우는 사자같이 때로는 광명한 천사같이 쉬지 않고 활동합니다. 때문에 자칫하면 사단에게 물리고 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영혼이 쉴 틈이 없고, 쉴 자리가 없습니다. 항상 우리 영혼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내 영혼을 내가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내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합니다. 내 영혼은 주의 품속에 있을 때만 절대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성전 삼고 내안에 계실 때 가장 안전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사단이 내 영혼을 유혹해도 주님 안에 보호받는 자는 안전합니다. 주님이 내 영혼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만 깨어서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내가 스스로 내 영혼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모한 짓입니다. 내 영혼은 주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요일5:12).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적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녀의 생명을 영원토록 보존해주십니다. 영원히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또한 출입을 지켜주십니다(8절).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는 어디론가 부지런히 출입한다는 말입니다. 출입을 지키신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도와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나의 출입을 지켜주신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자신 있게 세상을 활보하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어느 때까지 지켜주신다고 말씀하십니까? 지금부터 영원까지입니다. 끝까지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배신해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려면 눈을 들어야 합니다. 눈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하루는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의자 곁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개가 루터의 식사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더랍니다. 루터의 손이 밥그릇으로 가면 개의 눈이 밥그릇으로 가고, 루터의 손이 입으로 가면 개의 눈이 입으로 가며 루터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개의 눈이 따라갑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터가 큰 은혜를 받았답니다. ‘저토록 열심히 눈이 뚫어지도록 바라보아야 하는구나’.
그래서 루터는 개에게 고기 한 점을 주었답니다. 그랬더니 개 눈 감추듯이 먹고 또 다시 루터의 눈을 쳐다보더랍니다. 그 때 루터가 큰 깨달음을 얻고 말하기를 ‘개가 내 손을 쳐다보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만 바라보았다면 하나님은 나에게 더 큰 감동을 주셨을 텐데, 나는 개보다 못하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고,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말입니다. 날마다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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