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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 교회(계 2:18-29)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가운데, 네 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진리를 지켰지만,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 가운데서도 충성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지만, 세상과 타협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조금 달랐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이 많았고, 봉사가 많았고, 헌신도 많았습니다. 신앙도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가장 긴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왜일까요? 왜 칭찬받을 것이 많은 교회가 가장 긴 책망을 받아야 했을까요?
오늘 말씀은 현대 교회가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 역시 “사랑은 있으나, 분별력이 약해지는 위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특징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사랑과 봉사는 풍성했으나, 진리에 대한 분별력이 약해진 교회”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차가운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따뜻한 교회였습니다. 사랑도 있었고, 봉사도 있었고, 헌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지켜야 할 자리에서,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될 대상에게까지, 관용을 베풀고 말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사랑 없는 진리는 잔인해지고, 진리 없는 사랑은 배신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랑은 있었지만, 진리를 지키는 거룩한 경계선이 무너졌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우리가 믿고 있는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에베소 교회에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다니시는 주님”으로 나타나셨고, 서머나 교회에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으로 나타나셨고, 버가모 교회에는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주님”으로 나타나셨고, 두아디라 교회에는 특별히 “불꽃 같은 눈”과 “빛난 주석 같은 발”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시 두아디라에는 로마 황제 숭배가 강했습니다. 황제를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바로 나다.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주님의 눈은 “불꽃 같다”고 말씀합니다.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주님의 눈은 단순히 뭔가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는 눈입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봅니다. 그럴싸한 겉모습을 보고, 우리는 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불꽃 같은 주님의 눈은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동기까지 살피십니다. 왜 봉사하는지, 왜 기도하는지,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다 아십니다.
크리소스톰은 “인간의 법정은 행위만 판단하지만, 하나님의 법정은 우리의 마음까지 판단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눈은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그 앞에서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눈에는 사랑의 따스함이 스며 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다섯 가지에 대하여 칭찬을 들었습니다.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
이 다섯 가지는 건강한 신앙의 균형을 보여줍니다. 사랑만 있고 믿음이 없으면, 감상주의가 됩니다. 믿음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율법주의가 됩니다. 섬김만 있고 인내가 없으면, 쉽게 지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 모든 것이 함께 자라고 있었습니다.
두아디라는 정통 교리만 가진 교회가 아니라, 따뜻한 사랑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더 놀라운 말씀은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지만,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았습니다. 성장하는 교회, 성숙해지는 교회였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처음이 좋고 나중이 나빠집니다. 처음 기도할 때가 뜨겁고, 처음 예배드릴 때가 감격스럽고, 처음 헌신할 때가 순수합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반대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했습니다. 좋아졌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처음 예수 믿었을 때보다 기도가 더 깊어졌습니까?
처음 믿었을 때보다 말씀이 더 좋아졌습니까?
처음 믿었을 때보다 사랑이 더 커졌습니까?
처음보다 더 겸손해졌습니까?
처음보다 더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까?
“네 나중 행위가 처음보다 많도다”라는 주님의 칭찬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퇴보가 아니라 성장이어야 합니다.
신앙생활 오래할수록, 더 많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참된 성숙은 단순히 오래 믿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많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2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지만, 책망도 받았습니다.
그 책망의 핵심은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
이세벨은 누구입니까? 구약 시대 아합 왕을 꼬드겨,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를 끌어들인 왕비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안에 이세벨처럼, 신앙과 세상을 타협시키는 거짓 교사가 있었습니다.
왜 이세벨 문제가 심각했을까요?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두아디라가 어떤 도시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두아디라는 상업도시였습니다. 특별히, 길드(Guild)라고 하는 직업조합이 유명했습니다. 직물조합, 염색조합, 가죽조합, 상인조합 등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상공회의소, 경영자협회와 같은 조직이요, 요즘 말이 많은 축구협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물건을 사고팔 수 없었고, 철저히 사회적, 경제적으로 매장당했습니다. 이 도시에서 장사를 하거나 직장을 구하려면, 반드시 ‘길드’라는 동업자 조합에 가입해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이 길드의 정기 모임이었습니다. 그들이 수호신으로 믿고 있는 태양신 아폴로 신전에서 제사로 시작되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로 연회를 열었고,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신전 창기들과 함께, 음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생계가 막혔고, 가입하면, 신앙이 흔들렸습니다. 이것이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때 이세벨과 같은 거짓 선지자는 성도들에게, “괜찮습니다”, “마음만 하나님께 있으면 됩니다”, “현실적으로 살아야지요”,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타협이었습니다.
끓는 물 속의 개구리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개구리를 미지근한 물에 넣고, 서서히 온도를 높이면, 자기가 익어 죽어가는 줄도 모릅니다.
이세벨의 교훈은 미지근한 물이었습니다. 성도들을 경제적 번영과 쾌락으로 서서히 데워, 영적으로 질식사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성도에게, “그 정도는 괜찮아”, “다 그렇게 살아”, “너무 원칙적으로 살지 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을 포기한 경제적인 번영을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회개 없는 용서, 순종 없는 믿음, 십자가 없는 신앙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큰 배가 침몰하는 이유는 거대한 폭풍 때문만이 아닙니다. 작은 구멍 하나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물 한 방울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방치하면, 결국 배 전체가 가라앉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교훈은 처음에는 아주 합리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결국 복음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21절 말씀입니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주님은 심판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회개의 기회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즐거워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마지막 수단입니다. 주님의 첫 번째 손길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직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아직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아직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문제는 죄보다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왕도, 사울도, 가룟 유다도, 죄만으로 망한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내가 너를 회복시키겠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였지만,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주님은 그를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주님은 그를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탕자는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매일 문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순간 달려갔습니다. 기뻐했습니다.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심판보다 회복을 먼저 원하십니다.
24-25절 말씀입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여기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당시 헬라 철학과 영지주의 이단들은 “진정한 영적 고수가 되려면, 죄의 깊은 바닥까지 경험해 봐야 한다. 사탄의 소굴에 직접 들어가, 그 깊은 악을 맛보고도, 내면의 평안을 유지해야, 진짜 성숙한 자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얼마나 사악한 궤변입니까? 마약을 이기기 위해 마약을 해봐야 하고, 도박을 이기기 위해 도박의 소굴에 들어가 직접 도박을 해봐야 하고, 음란을 이기기 위해 음란의 늪에 빠져보아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단호하게 “사탄의 깊은 것”이라고 정죄하셨습니다.
진정한 깊이는 죄를 경험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깊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깊이, 말씀에 순종하는 깊이입니다.
주님은 타협하지 않고, 이세벨을 거부한 두아디라의 남은 성도들에게 놀라운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굳게 잡으라”는 말은 “강하게 움켜쥐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새로운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에게 이미 있는 것”
이미 받은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들은 진리의 말씀을 놓치지 말고, 끝까지 움켜쥐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가진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굳게 붙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는 “나는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진리를 다시 붙들었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새 진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탄의 깊은 것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진리를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승리는 새로운 것을 찾는 데 있지 않습니다. 끝까지 붙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하게 움켜쥐어야 합니다.
빨리 달리는 사람이 승리자가 아니라, 끝까지 붙드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26-28절 말씀입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환난과 유혹 속에서도, 끝까지 복음을 굳게 잡고, ‘이기는 자’에게, 주님은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주님은 두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첫째,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길드 조합에 들어가지 못해, 가난하게 살고, 무기력하게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짓밟히던 성도들에게 주시는 통쾌한 역전의 약속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둘째, 새벽 별을 주십니다.
새벽 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새벽별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분, 바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천국의 가장 큰 복은 황금길이 아닙니다. 생명수 강도 아닙니다. 천국의 행복은 장소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새벽별이 뜨면, 밤이 끝납니다. 눈물이 끝납니다. 질병이 끝납니다. 죽음이 끝납니다.
새벽별이 뜨면, 길고 긴 고통스러웠던 밤이 끝나고, 찬란한 아침 해가 솟아오를 것입니다.
우리는 캄캄한 어둠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새벽별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29절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업이 있고, 사랑이 있고, 믿음이 있고, 섬김이 있고,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를 지키는 거룩한 분별력이 약해졌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네 나중 행위가 처음보다 많아져라”, “죄와 타협하지 말라”,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 “내가 올 때까지 굳게 붙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믿음을 붙드십시오.
유혹이 아무리 강해도 진리를 붙드십시오.
환난이 아무리 깊어도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끝까지 이기는 자에게, 주님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무엇보다도 새벽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복음, 진리의 말씀을 끝까지 굳게 부여잡고, 어두운 세상 한가운데서 새벽별이신 주님을 가슴에 품고, 영광스런 승리를 맞이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시는 주님, 우리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까지 살피시는 주님 앞에 겸손히 서게 하옵소서.
주님, 두아디라 교회가 많은 칭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타협하고 거짓 가르침을 용납하여, 책망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세상의 유혹과 타협 앞에서, 믿음의 순결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편리함을 위해, 진리를 버리지 않게 하시고, 성공을 위해, 거룩함을 포기하지 않게 하시며, 사람을 기쁘게 하려다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삶을 살지 않게 하옵소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안에 숨겨진 죄와 교만과 욕심과 미움이 있다면,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지금 이 시간 온전히 돌이키게 하옵소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눈물로 회개할 때,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시험과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붙들어 주시고, 믿음의 줄을 놓지 않게 하옵소서.
세상이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유혹이 찾아와도 넘어지지 않게 하시며,
끝까지 주님만 바라보며 충성하게 하옵소서.
특별히 우리 교회가 사랑과 믿음과 섬김이 더욱 풍성해지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처음보다 나중이 더 아름다운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성숙해지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복음을 굳게 붙들게 하시고,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옵소서.
어둠이 깊어 보이는 시대이지만 새벽별 되신 주님이 이미 오고 계심을 기억하게 하시고, 절망보다 소망을, 두려움보다 믿음을, 낙심보다 순종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새벽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