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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창작 연구 스크랩 * 오탁번 시인 ( 시모음 )
은하수 추천 0 조회 223 16.03.05 08: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오탁번 시인 ( 시모음 )

 

 

오탁번 시인

 

 

출생 1943년 7월 3일 (충청북도 제천)

 

소속 한국시인협회 (회장) 

고려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고려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데뷔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중앙일보(67), 대한일보(69) 신춘문예 당선. 

 

경력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 역임
육군사관학교, 수도여자사범대학,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수상      1994년 동서문학상 1997년 정지용문학상

 

대표작  1미터의 사랑, 서사문학의 이해, 오탁번 시화,

          순은의 아침
시집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겨울강>

 

 

 



연못가에 돌 하나를 갖다 놓았다
다 썩은 짚가래 같이 어둡기도 하고
퇴적되어 오묘한 결과 틈이
꼭 하느님이 지시다 만 시루떡 같은
충주댁 수몰지역에서 나왔다는 돌,
어느 농가 두엄더미에 무심히 서 있다가
몇 십 년 만에 수석쟁이의 눈에 띄어
수석가게 뜰에서 설한풍 견디던 돌,
이끼와 바위솔이 재재재재 자라고
나무뿌리도 켜켜이 엉켜있다
화산과 지진이 지구를 뒤덮고 난 후
태고의 적막을 가르며 달려온 돌,
비 오면 비에 젖고 눈 오면 눈에 맞는
지 아무렇지도 않은 껌껌한 돌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일은 쏠쏠하기만 한 데
물을 주고 금세 파랗게 살아나는 이끼!
검버섯 많은 내 몸에도
무심결에 파란 이끼나 돋아나면

 

 

 

 

고욤나무



갑사 들어가는 아름드리 숲길에서 문득 만난


키만 싱겁게 큰 비쩍 마른 고욤나무 한 그루


잎사귀도 고욤도 없이 빈 손 하늘까지 펴고


계룡산 깊은 울음소리 염주알처럼 헤아린다



봄 여름 다 보내고 단풍잎 어지러운 하늘에


꿈속에서도 그리운 뺨 눈물 머금은 저녁노을


고욤나무의 적막한 꿈이 가지 끝에 이울고


부처님의 금빛 손가락 목탁소리에 무심하다

 

 
소쩍새는
밤 이슥토록 울고
조롱조롱 금낭화
붉은 꽃잎이 짙다

너비바위 틈에 피어난
개미딸기
오종종오종종
노란 꽃잎이 여리다

하늘 높이 뜬
솔개 눈씨에
참새도 오목눈이도
찔레넝쿨 사이로 숨는다

하느님이
수염에 묻은 황사를 턴다
붕어들이 알 낳느라
몸을 떨며 피 흘린다

 

너의 별에서



너는 어느 별에서 태어났기에
이토록 무서운 광속으로 다가와서
나도 모르는 나의 생애를 불밝혀 놓고
눈물빛 핏빛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가
겨울 철새 모두 떠난 한강 물결
봄이 오는 소리 선연한 노을 아래
물 속 깊이 숨은 누치 보이지 않고
하늘 멀리 떠난 나의 아기는
깃 하나 남기지 않고 나를 울린다
흰 수염 가득한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기고 또 잠기지만
아아 또는 오오
이러한 모음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내 운명이 벼랑 끝에 홀로 서는 소리
무좀으로 썩어가는 새끼발톱까지도
너의 별에서 날아온 사랑의 빛 앞에
까뒤집어져서 탄로가 났다
나는 전생에서부터 은닉했던 증거 앞에
모두 모두 자백하였다
너의 별이 내뿜는 사랑의 빛은
1초에 우주를 일흔 바퀴씩 돌면서
나의 전생에서부터 오늘 한강 물결까지
완전하게 발가벗기고 있다
오오 자백의 황홀과 나체의 쾌락으로
너의 별이 검은 구멍으로 빨려들어가서
그곳에서 살고 싶다
죽고 싶다!

 

초겨울 아침



첫눈이 내린 초겨울 아침
지난 봄에 시집간 제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저 아기 가졌어요
눈을 뒤집어쓴 나뭇가지들이
아기 예수의
하얀 배내옷 입고
옹알옹알 옹알이 한다
크리스마스트리의 꼬마전등알처럼
나뭇가지마다
눈송이들이 반짝인다
―저 아기 가졌어요
첫눈이 내린 초겨울 아침
지난 봄에 시집간 제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애기똥풀

1
개구리밥 자라는 둠벙가에서
눈 깜박이며 살레살레 고개젓는
애기똥풀의 가녀린 꽃잎 위로
문득 떠오르는
진외육촌 누나의 얼굴이여
아직 눈도 못 뜬 내 사타구니에
새끼자라의 연한 살결 간지럼 태우며
애기똥풀 柑黃빛 꽃물 발라주던
누나의 눈웃음이
봉숭아물 곱게 든 손톱만큼 예뻤다
둠벙도 먼 강물도 꿈꾸지 못하는 나에게
누룽지처럼 맛있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마련해 주고 떠난
누나여

 

 

장마

푸렇게 일어서는 천둥산의 아침
예배당의 지붕 위에서
귀 달린 구렁이가 꿈틀거린다
돌담의 냄새 옆에는
푸득거리는 한 그루 느티나무
여름벌레들이 떨어져 흘러간다
산수숙제는 정말 어려웠다
순이의 몽당연필도
곤두서서 산으로 뛰어가고
모두 다 입을 다물고
벌레가 개울을 이룬다
얼마 곱하기 얼마는 얼마
얼마 곱하기 얼마는 얼마
아침은 발목까지 빠져서
다 젖는다 다 젖는다.
귀를 앓은 구렁이가 기어다닌다

 

끈끈이 주걱

 

 

뒷개울 건너 공동묘지 가는 길은
작은 벌레 잡아먹는
끈끈이주걱 흰 꽃이
고수레 밥풀처럼 하얗게 피었다
낙향한 선비의 콧수염 같은
제비붓꽃이
촉루가 된 주검들의 보랏빛 사연을
하늘 멀리 띄울 때
하루살이 애벌레 잡아먹는
끈끈이주걱 홍자색 털이
내 어린 종아리에 자꾸 달라붙었다

하늘이 오리알 빛으로 물들 때면
끈끈이주걱에게 잡아먹힌
이름 모를 벌레들의 영혼이
송장메뚜기 뛰어오르는 풀섶에서
동글동글한 열매로 익어
껍질을 터뜨리고 길섶에 흩어졌다

서리병아리 울음 따라 가을이 깊고
긴 겨울 지나 봄이 돌아오면
보리누름은 아직도 먼데
쌀뒤주는
바닥이 났다

뒷개울 건너
공동묘지 가는 길은
끈끈이주걱이 어지럽게 피었다
나도 한 마리 벌레가 되어
밥주걱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살고 싶었다
흰 쌀밥
여름 내내 냠냠 먹다가
통통하게 살찐 벌레의 영혼이 되어
이승의 하늘 아래
깜장 열매로 흩어지고 싶었다

 

 

 

선운사에서


1
선운사 입구
민박집 마당에서 모이를 쪼아먹는
토실토실한 암탉도
나팔꽃 우산 쓰고 선운사 찾아가는
어린 여학생들의 맨종아리도
다 선운사 기운을 빼다 박았다
암탉이 갓 낳은 피묻은 달걀이나
송곳니로 톡톡 구멍 내어
쭉 빨아 먹어봤으면
솜털 보송보송한 뺨이나
그냥 한 번 만져봤으면

2
동백꽃은 다 떨어져
서녘 바다로 흘러가고
빽빽한 동백숲이
엿 먹어라 엿 먹어라
헛손뼉을 친다
금동불상 앞에 합장은 하지 않고
해우소에 들러
근심걱정 모두 버린다
똥오줌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비 오는 선운사에서
내 몸도 모두 버린다
나는 이제 몸이 없다
간절한 생각뿐이다

 

하관(下館)



이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 모를 풀꽃들의 뿌리로 돌아가고
향불 사르는 연기도 멀리멀리
못 떠나고
관을  덮은 명정의 흰 글자 사이로
숨는다
무심한 산새들도 수직으로 날아올라
무저미재는 물소리가 요란한데
어머니 어머니
하관의 밧줄이 흙에 닿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모음을 부르는 나는
놋요강이다 ?마루끝에 묻힌
오줌통이다 오줌통에 비치던
잿빛 처마 끝이다
이엉에서 떨어지던 눈도 못뜬
벌레다
밭두럭에서 물똥을 누면
어머니가 뒤 닦아주던 콩잎이다 눈물이다
저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 모를 뿌리들의 풀꽃으로 돌아오고

 

 

 

죽음에 관하여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뜻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
바지 속에서 문득 일어서는 뿌리!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했다
.바다 하나 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바다 하나요
바지바지 말해도 바다바다가 되었다

 

벙어리 장갑

 

 

여름내 어깨순 집어준 목화에서

마디마디 목화꽃이 피어나면

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렸다

---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서리 내리는 가을이 성큼 오면

다래가 터지며 목화송이가 열리고

목화송이 따다가 씨아에 넣고 앗으면

하얀 목화솜이 소복소복 쌓인다

솜 활끈 튕기며 피어나는 솜으로

고치를 빚어 물레로 실을 잣는다

뱅그르르 도는 물렛살을 만지려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 손 다쳐서 아야 해도 좋으니?

까치설날 아침에 잣눈이 내리면

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

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한다

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

내 손은 눈꼽만큼도 안 시리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에서

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

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

실 잣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사랑의 깊이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둠의 깊이만큼 비애가 끝간 데 없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어쩔 수 없이 젖어드는 그리움의 얼굴

바람이 불고 눈이 오고 또 꽃이 피고
천둥 번개 요란한 새벽마다 눈을 뜨고
너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알몸에 알몸을
가까이하고 여름 여치가 날개를 비벼대며 울 듯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사랑의 깊이만큼 우수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빛나는
너의 흰 손 흰 이마 가슴 적시는 눈물 방울

 

춘일 ( 春日 ) 

 


풀귀얄로
풀물 바른 듯
안개 낀 봄산

오요요 부르면
깡종깡종 뛰는
쌀강아지

산마루 안개를
홑이불 시치듯 호는
왕겨빛 햇귀

 

 

 

응가

 

 

어린 아기 똥누듯
냄새 풍기면서도 예쁜 것이 詩다
젖몸살 앓는 엄마의 아픔처럼
눈물과 미소가 얽힌 것이 詩다
홍등가에서 사랑을 파는 여자들의
곪았지만 자꾸 파들어 가고 싶은 어둠이
그 냄새 나는 절망이 예술이다

 

                               京春街道

 

 

京春街道에는
계절따라 별별 露店이 다 생긴다
밭에서 막 따 온
수박과 참외도 팔고
'멜론'이라고 쓴 깃발을 내걸고
서양참외도 판다
아이들이 혓바닥 쏙 내어밀고
'메롱'하며 놀리는 듯 하지만
멜론은 맛이 참 좋다
'산수박' '산오징어'라고 쓴
露店의 간판도 보인다
산수박? 산오징어?
살아 있는 수박?
산에서 잡은 오징어?
한순간 헷갈리기도 한다
가을이면
사과와 배가 탐스럽고
뺨붉힌 약호박과
노랗게 익은 모과가
가을 햇귀 아래 곱다
귀여운 모과가
가으내 은은한 향기 풍기다가
쭈글쭈글 검정이로 변하면
京春街道에 눈이 내리고
露店에서는
빙어회를 판다
팔딱거리는 얼음빛 빙어를
초고추장에 찍어먹고
핸들을 잡으면
京春街道 빙판길도
겁날 것 없다


 

 

굴비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잠지 

  

  

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


밤나무 아래서 아빠와 쉬를 했다

아빠가 누는 오줌은 멀리 나가는데

내 오줌은 멀리 안 나간다

  

내 잠지가 아빠 잠지보다 더 커져서

내 오줌이 멀리멀리 나갔으면 좋겠다

옆집에 불 나면 삐용삐용 불도 꺼주고

황사 뒤덮인 아빠 차 세차도 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호호 웃는다.

“네 색시한테 매일 따스운 밥 얻어 먹겠네”

 

 

 

엘레지

    

 

말복날 개 한 마리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그날 밤 나는 꿈에서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폭설(暴雪)

          

 

삼동 (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 (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 (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 (宇宙)의 미아 (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어머니

 

봄 햇살 아기손처럼 고물고물
물레, 낮달맞이, 술패랭이, 현호색 간질이며
연노랑 분홍빛 보랏빛 웃음을 터뜨리는 곳
차를 몰고 온 석탄빛 손들이 놀라
길 옆 오이넝쿨 아래로 숨는 곳



나는 방금 돌 지난 앉은 뱅이꽃이에요
나는 그저께 이사 온 우산꽃이에요
에헴, 나는 60년 전 애련분교 때부터
이 학교를 지켜 온 부처꽃이지
우리 모두 할미꽃에게 큰절을 드리기로 할까요
까르르 웃음소리에 연못 속 청개구리 수련

위로 뛰어오른다



교실 차양 아래 서 계시던 어머니
흰 수건 벗으시며 들판을 향해 손을 흔드신다
탁번아 이제 그만 놀고 들어와 저녁밥 먹으야제
초가집 위 저녁연기 피어오르고
풀물 든 손을 힘껏 쳐들고
봄아지랭이 가물거리는 논둑을 뛰어온다



쑥빛 검은 손 잡으며 반기시는
청동빛 주름진 얼굴
병성에 누워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만히 손을 내민다
어머니, 자리 후훌 털고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고란사에서



고란사 뒤안 절벽 바위 틈에서
한사코 몸을 숨기는
눈썹만한 그대여
낙화암 푸른 전설 다 안다는 듯
천년 묵은 소나무는
굵은 뿌리를 바윗가에 드러내고
강물결 춤출 때마다
금빛 솔잎 따갑게 흔들리는데
눈씻고 보아야
겨우 눈에 띄었다가는
햇빛 비치면 다시 몸을 숨기는
고란초여
이제는 다 흘러가버린
천년 전의 사랑
아직도 못 잊겠다는 듯
그늘에 숨어서도
제 모습 부끄럽다 하네
비에 젖은 눈썹 훔치며
목숨과 바꾼 사랑
남 몰래 속삭이고 있네


 

 

이별

 

 

푸르른 하늘 노을빛으로 물들고
저녁별이 눈시울에 흐려지면
이제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그전 같지 않아
삼겹살 곱창 갈매깃살 제비추리
두꺼비 오비 크라운
아리랑 개나리 장미 라일락
비우고 피우며 노래했는데
봄 여름 지나 가을 저물도록
얼굴 한 번 못 보다가
아들딸 결혼식장에서나
문상 간 영안실에서나
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나누지
오늘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까
영영 오지 않을 봄을 기다리듯
다 헛말인 줄 알면서도
자주자주 만나자
약속하고 헤어지지
그래그래 마음으로야
좋은 친구 자주 만나
겨울강 강물소리 듣고 싶지만
예쁜 아이 착한 녀석
새 식구로 맞이하는
아들딸 결혼식장에서나
그냥 그렇게 또 만나겠지
이제 언젠가

영안실 사진틀 속에
홀로 남아서
자주자주 만나자고
헛약속한 친구를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겠지
다시는 못 만날 그리운 친구야

죽음이 꼭 이별 만이랴
이별이 꼭 죽음 만이랴


 

 

감자밭


흙냄새 향기로운 감자밭 이랑에
하양 비닐을 씌우는
농부 내외의 주름진 이마에는
따사로운 봄볕이 오종종하다
서방은 비닐을 앞에서 끌고
아낙은 뒤에서 그걸 잡고 있는데
비닐 끝을 흙으로 덮기도 전에
자꾸 앞으로 나가니까
소를 몰 때 하듯이 아낙이 말한다
- 워! 워!
그 말을 듣고
서방이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 워, 라니?
흙을 다 덮은 아낙이 말한다
- 이랴! 이랴!

신방에 들어가는 새댁처럼
가지런한 감자밭 이랑은
물이랑 되어 찰랑이는 비닐을
비단 홑이불처럼 덮고
제 몸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린다
농부 내외는
바소쿠리에 가득한 씨감자 눈을
비닐을 뚫고 하나하나 꾹꾹 심는다
멧돼지와 고라니들이 내려와
감자를 반나마 나눠먹을 테지만
주먹만한 감자알을 떠올리며
새흙을 덮어 다독여준다
감자밭 이랑은
아기를 잉태한 새댁처럼
다소곳이 엎드린 채
감자알이 여무는
하지 날 긴긴 해를 꿈꾸고 있다


 

 여기 쯤에서

 

 


여기 쯤에서 그만 작별을 하자
눈 뜨고 사는 이에게는
생애의 벼랑은 언제나 있는 법
거기 피어 있는 이름모를 풀꽃
하나 따서 가슴에 달고
뜻없는 목숨 하나 따서
만났던 그 자리 그 어둠 앞에
우리의 죄로 젖어 있는 추억을 심고
그만 여기 쯤에서 작별을 하자
똑같은 항아리가 어느 한쪽에
깨어져서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도 아니다
우리의 입술은 아침 저녁 비가 오고
내 몸에 묻어있는 눈썹 하나
머리칼 한 올이 나의 새벽까지
따라와서 죄를 짓자고 속삭인다 해도
너의 찬 손이 뜨거워지고
나의 안경이 흐려진다 해도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작별을 하자 그만 여기 쯤에서 생애의
벼랑에서 뛰어내려 젖은 입술을
입술에 부비며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작별

                                                             

오늘 아침 그대들과 작별하고 싶다
꿈꾸며 바라본 설핏한 저녁 노을
진토닉에 몸을 푸는 빨간 체리
서해 바다 노을 한강까지 밀어올리며
얼음 밑에서 겨울을 나는 누치 한 마리
그대들과 선선히 작별하고 싶다
미끈미끈한 비늘도 모두 흩어지고
목마른 입술 닿은 종이컵도
재활용 봉투 속에서 잠들고 있다
첨탑에서 종소리 아득해질 때마다
내 눈썹 시리게 한
생애의 벼랑도
뜨거운 알콜 목구멍에 쏟아
나의 욕망 연소시킬 불씨로
이젠 그만 사그라지면 좋겠다
아무리 불러봐야 메아리도 없는 아침
떠나간 빈 자리 메워줄 슬픔 하나로
텅 빈 자리에 호젓이 남고 싶다
면도한 두 볼에 스킨로션 바르고
구겨진 넥타이로 목을 감고
죽어가는 관절을 일으켜 세워
그대들과 절뚝거리며 작별하고 싶다

 

 

 그대의 별자리 


  
   비상등 켜고 전조등 밝혀도
     그대가 가는 길 보이지 않는다
     네거리에 가까스로 왔지만
     직진해야 하는지 우회전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황도 십이궁도 광막한 어둠에 싸여
     전갈자리인지 사자자리인지
     북극성 곧바로 보이는
     오리온 자리인지
     분별할 수가 없다
     길은 뚫린 곳에서 스스로 막힌다

     그대가 가는 길 찾는
     나의 그리움은
     저 혼자 시간의 강물로 빠지며
     내 생애의 길을 지워버린다
     울고 싶을 때
     나는 울고 싶다

 

낙향을 위하여


까마득하게 흐려져버린
내 사랑의
호적등본만한 빈 터가
실은 내 생애의 전부였음을
이제야 알겠다
술지게미 먹고
깨금발로 뛰어놀던
내 사랑의 빈터에
말 안 해도 마음 다 알아줄
아주 예쁜 사람이
살고 있음을
이제야 알겠다
지에밥에 누룩 풀어 담근
술항아리에서
상강날 해거름쯤
술이 익으면
첫서리 내린 들창문
반쯤 열어놓고
마주앉아 잔 비우고 싶은
내 마음의 노른자위가 될
아주 예쁜 사람을
아주 예쁜 사람을
전생의 꿈을 꾸듯
찾아가야겠다


 

 

1미터의 사랑

                                                              

석 자 가웃 되는 1미터의 정확한 길이는
빛이 진공 속에서 2억 9천 79만 2천 4백
58분의 1초 동안 진행된 거리라고 하는데,
그대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그리움의 거리는
베틀 위의 팽팽한 눈썹줄이 잉아에 닿을 때
북에서 풀리는 비단실의 떨림이라도 되는지,
우리들 사랑의 이 영겁과도 같이 멀기만 한
닿을 수 없는 허기진 목숨의 허공속에는
칠월 초이렛날 미리내를 날으는 까막까치의
하마하마 기다리던 날갯질 소리 가득하지만,
내 약지를 그대의 약지에 마주 비벼서
10조분의 1미터의 목마름 죄다 지우고
운석 떨어지고 화광 박히는 우주 속에서
미리내를 건너는 그리움이 금빛으로 물들 때,
아스라한 길녘 어느 1미터의 물이랑 위에
지필묵과 궁시(弓矢)와 실타래 가지런히 놓아서
애비에미 이별은 나비잠 속에서도 꿈꾸지 않을
외씨 같은 젖니 난 우리 아기의 첫 돌을 잡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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