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에그베르트 반 헴스케르크 2세(Egbert van Heemskerck II, 1634~1704)의 원화를 각판(刻板)한 잉글랜드 판화가 윌리엄 헨리 탐스(William Henry Toms, 1700~1765)의 1730년작 판화 〈동물들에 비유된 교사들과 학생들의 교실(A Schoolroom with Animals as Teachers and Pupils)〉이다.
18세기초엽 유럽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무분별한 갑질을 일삼은 교사들의 무지(無知)를 풍자한 이 그림은 한국에서 현대에, 적어도 지난 수십 년간, 시행되거나 자행된 학교 교육의 역사, 이력, 내력 따위를 에둘러 상기시킬 만한 작품이라고 간평될 수 있을 성싶다.
윗그림에 묘사된 어린 남학생들은 원숭이머리를 가졌고 어린 여학생들은 고양이머리를 가졌다. 목제 칸막이 뒤에 서서 커다란 목제 국자로 남학생을 때리는 당나귀머리를 가진 자는 학교장이다. 그의 뒷벽에 매달린 종이에는 라튬어(Latium語; 라틴어; Latin)와 영어를 짜깁기한 얼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을 글귀들이 적혔다.
“흉측한 괴물!/ 글을 또박또박 쓰되,/ 나뭇가지로 쓰지 말고 철필(鐵筆)로 써야 한다니/ 벗들이여, 그대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리.”
여기서 “벗들이여, 그대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리(Risum teneatis Amici)”의 출처는 고대 로마 서정시인(敍情詩人)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Quintus Horatius Flaccus; 호러스; Horace, 서기전65~서기전8)의 장시(長詩) 〈작시법(作詩法; 아르스 포에티카; Ars Poetica)〉이다.
윗그림에서 고양이로 묘사된 여학생의 엉덩이를 자작나뭇가지회초리로 때리는 고양이머리를 가진 여인은 여교사이다. 목제출입문에는 다른 학생들을 감시하는 당나귀머리를 가진 남교사와 고양이머리를 가진 다른 여교사가 붙어 서있다. 윗그림의 왼편 목제 칸막이 곁에 앉아 책읽는 남학생의 오른발목에 채워진 족쇄는 목제좌대에 고정되었다. 맨오른쪽에는 여학생이 무릎을 꿇은 채로 징벌을 기다린다. 교실바닥과 학교장의 뒷벽선반에는 자작나뭇가지회초리가 하나씩 놓였다. 교실천장의 들보에는 돼지고기 세 덩이와 소시지 서너 줄, 새장 하나가 매달렸다.
윗그림의 하단에는 얼추 다음과 같이 해설될 수 있을 설명문이 영어로 참부되었다.
“그러니까 무분별한 매질을 일삼는 어릿광대들이 이 시대의 학교 교사들이라니. 학식이든 지혜든 쥐꼬리만큼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자유교양학과(기초학문 ☞ 후미 참조)들을 가르치겠답시고 거들먹거리는 저 당나귀들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타인들에게 가르친다니, 정녕 해괴하다! 저따위 작태야말로 어릿광대들을 좋아해버릇하는 눈먼자(소경)에게나 어울릴 인류의 미치광이짓(광증; 狂症 ☞ 참조)이다.”
윗그림은 물론 약300년 전쯤 유럽이나 잉글랜드의 학교들에서 자행된 무지하고 무분별한 폭력교육이나 반면교육(反面敎育 ☞ 참조)을 풍자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저따위 교육은 근래에까지, 아니면 적어도 한 세대(30년 쯤) 전까지, 한반도의 “학교 대다수”에서도 숱하게 자행되었다(☞ 참조).
그런데 저따위 교육을 강제당했던 학생(피교육자) “대다수”는 정작 저따위 교육을 자행한 자(반면교사; 反面敎師; 폭력교사; 악질교사) “대다수”에게 감히 즉각 직접 대항·반발·반항·반격하거나 항의·항변·항거하지 못했고, 나머지 몇몇 학생도 개인으로든, 비겁하게 집단으로든(떼지어), 자신들보다 약한 동급생들이나 하급생들을 따돌리고 괴롭히든지 아니면 비행(非行; 범죄흉내), 탈선, 일탈, 악행 따위를 일삼은 이른바 ‘문제아, 비행청소년, 일진 따위’로서 에둘러 비뚤리게 방황했을 따름이었다.
그랬던 학생 대다수는 자라서 학부모들이 되었지만, 저따위 교육을 자행한 교사 “대다수”는 이미 퇴직했고, 나머지 몇몇도 교육계에서 승진하여 교장이나 교감 따위라고 호칭되는 고위직들을 꿰차고 앉았으니, 그런 학부모들의 해묵은 억하심정이나 울분을 파종하거나 배양한 저따위 교육의 부작용이나 악효과는 약하게(만만하게) 보이는 엉뚱한 애꿎은 하위직 과녁(말단 교사)들을 막무가내로 공격하고 집요하게 괴롭히는 무분별한 갑질을 뒤늦게야 발증시킨다.
그러니까 근래에 적어도 한국의 교육계와 언론계를 흉흉하게 뒤흔드는 이른바 ‘학부모 갑질’은 한두 세대 전에 숱하게 자행된 ‘교사(교육자) 갑질’의 ‘엉뚱한 애꿎은 과녁을 뒤늦게 괴롭히는 격세부작용(隔世副作用)이나 격세악효과(隔世惡效果)’일 것이라고 억측될 수 있다.
이쯤에서 으레 발끈하여 “모든 교사가 갑질을 일삼은 반면교사나 폭력교사나 악질교사가 아니었듯이, 그들한테 교육받은 모든 학부모가 갑질을 일삼지는 않을뿐더러, 오직 극히 일부 학부모만이 맑은 물을 흐리는 미미한 미꾸라지처럼 그리해버릇할 따름이다”고 히스테릭하게 고함칠 개체도 아예 없지는 않으리라.
그런데 극히 일부에 불과한 미꾸라지처럼 미미한 개체들이 대관절 어떻게 일국의 교육계와 언론계를 흉흉하게 뒤흔들 수 있을까? 그리고 그따위 미꾸라지들이 진짜 과녁들을 ㅡ 한두 세대 전에 갑질을 직접 자행한 교사들, 속칭 ‘찐’갑질교육자들, 진적(☞ 참조)들을 ㅡ 고의로든 불지불식간에든 망각하거나 착각하거나 오인하거나 모른 체하다가 뒤늦게야 약하게(만만하게) 보이는 엉뚱한 애꿎은 과녁들을 막무가내로 공격하거나 지독하게 괴롭히는 무분별한 갑질을 일삼는 까닭이나 원인은 왜 “거의” 의문되지도 분석되지도 반성되지도 않을까? 더구나 그따위 갑질을 직접 자행한, 그래서 처절하게 반성하고 책임져야 할, 진짜 원흉들은 왜 “거의” 지목되지도 지적되지도 적발되지도 않을까?
그러나 이 질문들의 정답은커녕 가답(假答)조차 죡변처럼 얄궂도록 게을러터진 냉소꾼(☞ 참조)의 미미한 역량을 아득히 상회하는 대업이나 거업(巨業)일 것이다. 다만, 요컨대, 한국의 교육계와 언론계를 흉흉하게 뒤흔드는 이른바 학부모 갑질은 ‘해묵은 교사 갑질의 뒤늦은 엉뚱하게 비틀린 무책임하고 비열한 격세반면갑질(隔世反面甲질)’일 수 있다고 억측될 수 있을 따름이다.
(2023.09.1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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