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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4:1-11
▣ 신자의 아들됨-갈라디아서 4장-
바울은 구원이 율법으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세가지 논점에 대해 계속 설명한다.
1. 경륜적인 논점(4:1-11)
성경을 주의깊게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시대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다루셨음을 시인할 것이다. 우리가 “경륜적인 진리“라고 말할 때, 이는 유대인을 위한 시대, 이방인을 위한 시대, 교회를 위한 시대 등 각 시대별로 짜여진 하나님의 계획과 연관된 말씀의 진리를 의미한다(고전 10:32).
이 부분에서 바울은 율법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목적을 두고 특별히 다루셨음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율법을 이방인들에게는 결코 주지 않으셨다. 유대의 규율을 이방인들 또는 오늘날의 유대인들에게 부과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경적이지 못한 일이다.
유대인들은 상속자들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러한 약속들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수 세기가 지나야 했다. 바울은 계속해서, 교사가 돌보는 로마나 헬라의 어린이와 유대인을 비교한다. 어린이는 행운의 상속자일 것이지만 법적인 상속 연령이 되기까지는 그를 보살피는 노예와 다를 바가 없다. 바로 그대로,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서 “영적 유년기“에 있었다. 율법의 규례와 의식들은 그들이 온전한 유업을 받을 수 있도록 “졸업“할 수 있기 앞서 배워야 할 영적인 기초였다.
율법주의는 모세의 체제(세상의 초등학문-골 2:8/골 2:20)로 속박한다. 이 율법의 시대는 그리스도가 오실 준비를 함으로써 그 과정을 모두 마쳤다. 그리스도는 정확한 때에 정확한 방법으로(여인에게서-동정녀 탄생), 인간을 자유롭게 하려는 정확한 목적을 위하여 출생하셨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에 있게 되어 율법에 순종하셨으며,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율법을 성취하셨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들을 율법주의적인 굴레에서 자유롭게 했으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만일 베드로가 오순절에 그리스도를 제시했을 때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영접했다면(행 2-7장에서 다시 기회가 주어짐)이 민족은 성인의 단계로 들어갔을 것이며, 축복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인에게로 넘쳐 흘러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약속들이 성취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민족이 결정적으로 그리스도를 거절하자,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개별적인 바탕에서 축복하기 시작하셨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흥왕을 통하여 구원을 받지 않고 이스라엘의 패망을 통하여 받았다(롬 11:1-12 참조). 이제 유대인들은 민족적으로서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양자가 된다. 곧, 하나님의 가족에서 성숙하고 성장한 자녀로서의 아들의 지위로서 이제 더이상 가정교사의 안내를 받는 어린 아이들이 아닌 것이다. 신자들(특히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유업을 누리는 자녀들이지 종들이 아니다.
바울은 이제 그의 논점에 적용시킨다. “왜 다시 굴레 속으로 돌아가 재차 어린 아이가 되려고 하는가? 기초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온전한 유업을 누리라.“ 세상은 성일을 지키는 등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젖먹이라고 말씀하신다."
갈 4:12-18
2. 정서적인 논점(4:12-18)
“형제들아 내가... 되기를 구하노라!“ 이것은 사랑에 찬 영적인 종들의 호소이며, 자기의 영적인 자녀들에게 보내는 관심깊은 아버지의 말이다. 바울은 “내가 처음으로 너희에게 전파했을 때 나는 너희들 중의 하나와 같이 되었었는데, 이제는 너희가 나와 같이 되어 그리스도께 진실하라“고 쓰고 있다.
바울은 그가 처음으로 그들에게 갔을 때 육신의 고통을 가지고 있었으나 천사와 같이 취급해 주더니 이제는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원수처럼 취급한다고 상기시킨다. “너희의 거짓 교사들이 너희를 향하여 사랑을 나타내었으나(열성적으로 영향을 끼침) 그들의 동기는 순수하지 못하다. 그들은 너희들을 영적인 전리품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어한다“(6:12-14 참조).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을 구세주께로 인도한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은 슬픈 일이다."
갈 4:19-31
3. 풍자적인 논점(4:19-31)
“풍자“란 의미를 숨긴 채 사건이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들의 이야기를 사용하여(창 16:1-16/창 21:9-21) 은혜의 새 언약이 율법의 옛 언약을 대신하였음을 증거한다. 다음과 같이 대조할 수 있겠다.율법의 옛언약 은혜의 새언약
여종 하갈로 상징됨 자유로운 여인 사라로 상징됨
이스마엘-육신을 따라 낳은 아들 이삭-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기적
적으로 탄생한 아들
바울시대의 예루살렘-여전히 하늘의 예루살렘-자유롭고 영광스러움
영적으로(또한 정치적으로) 속박을
받고 있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이다(4:23). 따라서 자유하는 이의 자녀들이다(4:31).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오래 전에 아브라함에게 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스마엘은 마치 율법이 그러하듯(3:19) “더해진“ 육신의 아들이요 노예의 아들이었다.
율법의 옛 언약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축복이 결코 아니었다. 이것은 이스마엘처럼 더해진 것이며, 속박과 슬픔을 가져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것은 이스마엘과 하갈을 쫓아버리는 것이었다. 율법과 은혜, 믿음과 행위, 약속과 명령, 이들은 결코 한 집에서 살 수가 없다. 유대주의자들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다시 가족으로 초대하기를 원하였다.
바울은 이사야 54장 1절을 언급하며 이를 교회에 적용한다. 사라가 잉태하지 못함으로써 아들을 보기까지 여러 해를 기다려야 했듯이, 이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여러 해를 기다려야 했다. 이사야는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후 예루살렘에 기쁨이 넘쳤던 일을 설명하고 있는데, 바울은 박해와 고난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보다 깊은 기쁨을 본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보았던 위험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다. 육은 촛불, 의식, 분위기, 옷 등과 같은 것으로 “영적인 흥분“을 좋아하며 갈망한다. 사람들은 사순절, 성 금요일, 부활주일, 성령강림절 등을 지킬 달력을 원한다. 이것은 이스마엘을 다시 가족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은혜와 율법의 혼합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단순한 하나님의 은혜만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갈 5:1-15
▣ 성령에 의한 성화-갈라디아서 5장-
우리는 이제 본 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이동하며,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신자들의 생활에 실제적으로 적용시킨다. 여기 두 장에서는 네 가지 대조점이 연속해서 나온다.
1. 속박이 아니라 자유(5:1-15)
“은혜와 자유에 대한 당신의 교리는 위험스럽다!“ 바울의 적들은 이렇게 논쟁을 벌인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율법에서 자유롭다면 그들은 사악한 삶을 살게될 거야, 우리에게는 삶을 통제할 율법이 필요하다.“ 그처럼 사람들은 은혜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생이요 “조절자“라는 사실을 거의 모르는 채, 세기를 내려오며 논쟁을 해 온 것이다(딛 2:11-12).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굳게 서 있을 것을 권고한다. 만일 우리가 율법주의로 돌이킨다면 그것은 얽매이고 굴레를 쓰게 되는 것을 뜻한다. 바울시대의 유대인들은 율법의 굴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행 15:10).
할례는 옛 언약의 징표였으므로, 바울은 옛 언약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값주고 사신 축복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를 거절하고 율법을 의지하는 죄인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없으시며, 은혜 대신 율법대로 살려고 하는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실 수가 없다. 2-3절에 나오는 “할례“는 모세의 제도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자신을 율법 아래 두는 사람은 전 율법에 빚진 자가 된다.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은 “구원에서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구원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잃는다는 것은 있을 수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놀라운 은혜의 영역에서 떠나 율법의 부담스러운 영역으로 옮겨간 성도들에게 쓰고 있다. 워치만 니(Watchman Nee)는 “율법은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고, 은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어떠한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은혜의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 이것은 로마서 7장의 부담스러운 속박에서 로마서 8장의 영광스러운 자유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5-6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행보에 대해 묘사하는데, 우리의 능력은 성령 안에 있어 믿음으로 이 능력을 받으며, 이 믿음이 우리의 생활가운데서 사랑과 행위를 산출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교리는 사람을 사악한 생활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 자유가 그를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매어 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신자를 통하여 그의 삶을 사시는 것이다(2:20).
이 거짓된 가르침이 어떻게 그들의 생활에 끼어들게 되었는가? 누룩이 좋은 음식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끼어들었다. 누룩은 언제나 악한 것에 비유된다(마 13:33/고전 5:1-7 등). 거짓 교리는 교회 안에 적은 누룩으로 심겨졌으나 불어나서 몸 전체에 퍼졌던 것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에 이르러, 이제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있어 방해를 받고 있는 정도에까지 달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어떻게 고난을 당하였는지를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바울의 적들은 아마도 그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여 그가 할례(구약 율법에 순종하는 일)를 전파하였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만일 그가 율법을 전파한다면 유대인들이 그를 핍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논박하였다.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란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세주를 영접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라는 뜻이다(고전 1:23-25 참조). 바울은 할례를 예로 사용하여 “나는 너희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베어져 버리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유가 방종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 부분을 끝낸다. 그는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사랑으로 생활할 때에 율법을 이루는 것이다. “내게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의 십자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갈 5:16-26
2. 육체가 아니라 영(5:16-26)
바울의 첫번째 권면은 “굳게 서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두번째로 그는 “성령으로 행하라“고 권고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지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행실을 결정한다. 5-6장에서 육체와 성령이라는 단어가 각기 10회씩 사용되어 있다.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신의 힘에 의존하지만 은혜로 사는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의존한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매일의 삶이 주님의 조절 아래 있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뜻은 율법주의에 속박된 생활에서 구조를 받는다는 뜻이다. 탕자의 비유에서(눅 15장), 형은 속박된 중에서 살았으므로 행동이나 섬기는 데에서 기쁨을 가질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와 같이 살고 있는가!“육체“는 신자가 여전히 지니고 있는 타락한 본성을 가리킨다. 몸 자체는 죄가 없으며 식욕이 반드시 죄악된 것은 아니지만, 옛 본성의 성향은 하향적이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옛 본성은 십자가에 못박혔으며(갈 2:20)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양도함으로써 육신을 정복할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신자의 두 가지 본성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은 몇 일 또는 몇 주간 동안 놀라운 승리를 누리지만 그리고 나면 유혹과 좌절이 그를 강타하여 용기를 잃게 된다. 누군가는 그의 옛 본성이 되살아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17절의 마지막 부분은 신자가 승리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따라서 너희는 너희가 원하는 바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입장에서 단순히 결심만 가지고는 결코 육신을 조절할 수가 없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에 대해 부언하고 있는데,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신자의 결심은 실패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행위와 열매 사이에는 참으로 큰 대조점이 있다. 열매는 살아 있는 연합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기계는 일을 해낼 수는 있으나 열매를 맺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율법은 행위를 산출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죽은 행실이라고 부르신다(히 6:1). 율법은 결코 여기서 묘사하는 바와 같은 은혜로운 열매를 산출할 수가 없다.
“육신의 일들“에 대한 목록을 현대 번역판으로 읽으면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얼마나 무서운 죄의 목록인가! 이러한 일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조차 얼마나 많이 발견되는가!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면으로부터 생긴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우리를 변화시키려 하신다(고후 3:18/롬 8:29/롬 12:1-2). 우리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에 대하여 여러 시간 묵상할 수 있지만 특별히 사랑이 목록의 최상단에 나오는 것을 유의해서 보자. 바울은 어떤 율법도 이와 같은 종류의 성품을 산출해 낼 수는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결심이 그리스도인들을 성화시킬 수는 없는 것임을 언제나 배울 것인가?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산다면“(이것은 구원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게 되었다), “또한 성령으로 행하자“(이것은 성화이며,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명령하시고 조절하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 18-24절과 골로새서 3장 15-19절을 비교해 보면,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절을 받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어떤 정서적인 경험이 아니다. 말씀을 먹고, 기도하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순종하는 신자의 일상적인 경험인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며 세 가지를 변호하는데,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들을 부르셨으며(5:13), 성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5:24), 성령 하나님이 그들 안에 거하신다(5:16-23)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각 위가 육체에 대항하여 싸우는 우리를 지원하고 계신다."
갈 6:1-10
▣ 하나님의 피할수 없는 법-갈라디아서 6장-
이 마지막 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는 대조점들을 두 가지 더 제시한다. 그가 지금 율법 아래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신자의 신령한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 것임을 명심하자. 이것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의 생활이며(5:1-15), 육신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생활이다(5:16-26).
1.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6:1-10)
신자가 순종할 율법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의 법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나님의 영은 사랑의 영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는 자유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성령께서 그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돕도록 허용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란 말은 위대한 복음의 단어이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사셨으므로 우리는 그의 본을 따라야 한다. 율법에서 독립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 독립적이란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형제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도움(1-5절)-어떤 형제가 갑자기 원수에게 붙들려 죄에 빠졌다고 가정하자. 아니면 그가 죄에 사로잡혀 다른 신자들에게 발견되었다고 하자. 우리의 태도는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가 신령하다면, 곧 성령으로 행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을 통하여 열매를 맺는다면, 우리는 그를 회복시키려고 힘쓸 것이다.
“회복시킨다“는 단어는 부러진 뼈를 맞추는 데에 사용하는 의학용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 그리고 죄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몸 전체의 사역을 방해한다. 물론 어떤 형제가 회복할 것에 순복하지 않으면 마태복음 18장과 고린도전서 5장에 요약된 징계의 방법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짐을 서로 져야 하지만 우리 자신의 짐 또한 져야만 한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질 수 있는 짐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 자신이 홀로 져야만 하는 짐이 있다.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도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죄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 할 때는 온유한 영이 있어야 한다.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보상하시게 하자.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
물질적인 도움(6-10절)-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신자는 그를 가르치는 자와 물질적인 축복들을 나누어야만 한다는 것이 6-8절이 주는 간단한 교훈이다. 우리는 죄에 대한 개념에서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할 때에 이 구절들을 사용하는데, 사실 이 원리는 진리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교훈은 “주는 일“에 대한 것이다. 6절의 “함께 하라“는 말은 단순히 “나누라“는 뜻이다. 이 원리는 로마서 15장 27절에 언급되어 있는데, 우리가 영적인 축복을 받는 데에는 물질적인 축복을 나눌 특권과 의무가 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은 육적인 일에 시간과 재물을 투자하여 육신을 위하여 산다는 뜻이며,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신령한 일들에 시간과 돈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시간과 돈(돈은 주조된 시간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다시 사용할수 있다)을 육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왜 은혜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영적인 열매들을 거두지 못하는지를 이상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성령으로 심기 위해서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거둔다고 약속하신다. 영적인 일을 추수하기까지는 성장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갈 6:11-18
2. 인간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6:11-18)
편지의 끝까지 바울은 심중에 은혜를 간직하고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에 의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나 그 반면에 “종교를 실천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인간의 인정을 얻을 것이다. 참으로 세상은 “종교적인 사람들“은 존중하면서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은 미워한다.
바울은 대개 글을 쓸 때 비서를 두어 편지를 불러 주고는 끝에 그의 개인적인 “은혜 서명“을 첨부하였다(고전 16:21-24/골 4:18/살후 3:17-18).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그가 개인적으로 쓴 것이 분명하며, 그의 시력이 약하기 때문에(갈 4:15) 큰 글씨로 써야만 했다.
“이렇게 큰 글자로“라는 말은 단어의 수가 많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서신은 비교적 짤막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각 글자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육체적인 장애가 하나님을 순종하며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율법주의의 악함을 경고하는 일에 방해가 되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바울은 “이 유대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영광을 위하여 너희를 이용하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너희의 유익을 위하여 너희를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칭찬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를 전파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박해를 피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들 자신도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다“.
참으로 쏘는 듯한 책망이다. 그리스도 당대의 바리새인들처럼 유대주의자들은 개종자를 얻기 위하여 땅을 횡단하고 바다를 건넜다(마 23:15). 그러나, 이는 개심자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에 영광을 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유형이 아니었다. 그는 십자가를 영화롭게 했고 기꺼이 십자가에 따른 모든 수치와 박해를 감내하였다. 바울은 십자가의 인격과 목적, 그리고 그 능력을 알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
다시금 바울은 자신의 십자가에 대하여 언급한다(6:14/2:20 참조).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뜻하며(대속), 성화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 즉 그리스도와 동일시됨을 의미한다.
“이 거짓 교사들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을 위하여 살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나에게는 아무런 매력이 없다. 나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세상은 내게 대하여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바울은 진술한다.
오늘날 십자가는 빛나는 보석 조각들로 번쩍거리지만 바울의 시대에는 고통과 죽음과 수치의 도구였다. 종교는 십자가를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었지만, 성령은 십자가를 은혜로 말미암아 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나타나는 하나의 실재가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에 속하며(고후 5:17)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에 속한다. 이 말은 신약 교회가 구약 이스라엘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종족적인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3:28). 오히려 이는 이 유대주의자들이 참된 이스라엘, 곧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은 종족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니지만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3:7).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인 것은 하나님의 고대 백성은 불신앙으로 제쳐졌으며 “내 백성이 아니라“는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호 1:9-10/호 2:23/롬 9:25-26). 어느 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리워질 것이며, 그들의 민족적인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좇아 행하는 “규례“는 은혜에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창조에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선의이기는 하나 모르기 때문에 다른 규례에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이들은 왕국을 세우고자 하거나 세상을 개혁하려 한다.
바울은 율법을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불과 한 귀절로 일소해 버린다. “너희의 거짓 교사들은 할례로 표를 하지만 나는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표식)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바울의 몸에 그리스도의 상처와 비슷한 다섯 상처들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그의 몸에 상처들이 있어서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하여 비난을 견디었음을 입증한다는 뜻이다. 바울 시대에는 군사들, 노예들 그리고 어떤 이방신에게 헌신한 사람들에게 표식을 하였는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군사요, 그리스도의 노예이며 그리스도께 헌신한 추종자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의 심령에 있을지어다.“ 참으로 놀라운 축복 기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