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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봉화의의성김씨팔오헌종택(해저리)
이장희 추천 0 조회 30 14.07.20 20: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의성김씨팔오헌종택(봉화해저리)

원경

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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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 팔오헌종택(義城金氏 八吾軒宗宅)

팔오헌(八吾軒)

안분지족하는 삶의 8가지 규범

팔오헌명(八吾軒銘) :

경오전(耕吾田 : 내 밭에서 난 식량을 먹는다.),

음오천(飮吾泉 : 내 샘의 물을 먹는다.),

채오령(採吾嶺 : 내 산에서 난 나물을 뜯어 먹는다.),

조오천(釣吾川 : 내 시내에서 낚시를 한다.),

피오편(披吾編 : 내가 엮은 책을 보고 공부를 한다.),

무오현(撫吾絃 : 내 거문고를 탄주한다.),

수오현(守吾玄 : 내 고요한 생활을 지킨다.),

종오년(終吾年 : 내 수명을 다 산다.)

김여건(金汝鍵)
- 안분지족 하는 마음


의성김씨 팔오헌종택을 처음 지은 사람은 의성김씨 팔오헌 김성구이다.

김성구는 의성김씨 개암공파가 해저마을에 자리 잡게 한 입향조인 셈이다. 의성김문의 중시조는 첨사공(詹事公) 김용비(金龍庇)이다.

김용비는 4남을 두었는데 3남이 김영(金英)이다.

김영의 아들은 김지예(金之銳)이고,

김지예의 2남은 김용초(金用超)이다.
김용초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개국원종공신이다.

김용초의 시대에 이들, 의성김문의 한 갈래는 경기도 용인에서 낙남하여 성주로 옮겨 앉았다.

김용초는 의성김씨 세계상 13대에 속한다.

이 계열은 19대 김희삼이 4남을 둠으로써, 본격적인 번성의 길로 들어선다. 해저의 개암공파의 파조가 되는 것은 2남 김우굉이다.
개암공 김우굉은 성주를 떠나 상주 개구암(開口巖)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호 개암은 이것으로부터 기인된다.

개암공 김우굉이 상주로 이거하는 것은 배위인 남양홍씨의 친정 부근을 찾아든 탓이라 할 수 있다.

김우굉의 아들은 김득가(金得可)이고,

김득가의 아들은 김율(金?)이다.
김율은 임진왜란 때 모친을 등에 업고 피난을 다니다가 봉화의 호평(범들이) 마을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호평은 지금 해저마을 앞을 흐르는 물길 너머에 있는 너른 들이다.

김율의 2남은 김추길(金秋吉)이다.

김추길은 우복 정경세의 문인이다.

김추길의 2남이 의성김씨 팔오헌종택 김성구이다.
김성구는 자가 덕휴(德休), 호가 팔오헌이다.

팔오헌이란 앞의 기명에서 알 수 있듯이,

“내 밭을 일구어 먹고, 내 샘물을 마시고,

내 산에서 나물을 뜯고,

내 시내에서 고기를 낚고,

내 책을 펼쳐 보며 공부를 하고,

내 거문고를 뜯으며 즐기고,

내 그윽한 마음의 평정을 지키고,

내 수명을 다하리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안분지족하는 마음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명문이라 하겠다.

그는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사성에까지 이른다.

문집이 있다.

배위는 정부인 권씨로, 충재 권벌의 후손이다.

그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자손들이 오래 머물러 살만한 땅을 구하였는데,

그의 눈에 든 곳이 바로 해저마을이다.

김성구는 의성김씨 세계상 24대에 속한다.
김성구의 아들은 김여건(金汝鍵, 1660-1697)으로,

그의 자는 천개(天開)였다.

문과 출신으로 수찬에 이르렀다.

조덕린이 지은 행장이 있고,

이광정이 쓴 묘갈명이 있다.

그로부터 10대를 내려오면 현 종손인 김호충(金鎬忠)이 있다.

김호충의 자는 서백(恕伯), 1927년생이다.

부인은 진성이씨인데, 선산부사 이정의 주손인 이용순(李容純)의 딸이다.

차종손은 김흥원(金興源)으로, 1949년생이다.

해저리이야기.

매봉산 남쪽 줄기에 자리잡은 큰 마을, 해저리

해저리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에 속해 있다.

봉화읍의 서쪽, 봉화에서 영주 나가는 2차선 도로의 봉화 쪽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해저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분지는 동북 남서 방향으로 길게 찢어져 있다. 분지의 한 끝에는 봉화읍이 자리 잡고 있으며, 다른 한 끝에는 해저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해저마을에서 봉화읍은 동북 방향으로 물러나 있다.
해저마을 앞으로는 2차선 도로와 영주 태백 사이의 철길이 종으로 가로지르고 있고, 그 너머로 멀찍이 물러나서 고만고만한 산들이 횡으로 늘어서 있다.

해저마을의 북쪽은 해발 587m의 응방산(鷹坊山)이 버티고 서 있다.

그리 높은 산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해저 마을의 북방을 옹위하고 있는 주산인 셈이다.

그러나 해저마을에서는 응방산의 600여 m 남짓한 높이도 실감할 수 없다. 응방산은 해저마을에서 북쪽으로 멀리 물러나 있고, 응방산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들이 나지막이 한참을 흘러내려 해저마을을 품고 있는 산자락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응방산 정상은 해저마을에서는 볼 수 조차 없는 것이다.

해저마을 사람들은 응방산을 매봉산이라고 한다.

매는 응의 한자 의미로부터 온 것이고,

봉은 방의 음이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해저마을은 그 응방산, 또는 매봉(방)산의 발치에서 흘러내린 나직한 산줄기의 그 끝에서 남면하고 있는 제법 큰 마을이다.

해저마을에 서서 보면 앞의 도로와 철로 넘어 펼쳐져 있는 벌은 호평들이다.

호평들의 서쪽으로는 학정봉이 막아선다.

영주 나가는 길은 그 발치를 휘돌아 숨은 듯이 뻗어나간다.

앞쪽 멀리 일선을 이루고 있는 산줄기 속에서 가장 높은 것은 조금 서쪽으로 치우진 지점을 장악하고 있는데, 호골산이라고 불린다.

서쪽은 넓게 열려 있어 봉화읍이 그 끝을 차지하고 있다.
봉화와 해저 사이의 북쪽 산줄기는 해저마을의 서쪽 부분에서 나뉘어 있다. 그 사이의 골짜기 안은 개터밭골 또는 개따밭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해저는 바라미·바래미의 한자 이름이다.

바다 밑을 뜻하는 의미일 터인데, 아마 지대가 낮다는 점을 취해서 이름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의성김씨 개암공파 해저문중이 펴낸 『해저(海底)』라는 소책자의 일절을 여기 옮겨 보자.
“일설에는 ‘파라밋’이라 하여 논보다 내가 깊어서 물을 파라로 퍼 올렸기에 그 파라가 있는 밑에 위치한다고 해서 파라밋이란 음이 평음화 되어 바라미가 되었다는 속설도 있다.

바라미마을은 뒤로 태백산맥의 지맥인 해발 600m의 응방산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 상류인 을자강 내성천의 푸른 물이 감돌아 흐르는 산수 좋고 풍광 좋은 산자수려한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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