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聖)이란 글자의 본래 뜻은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을 일컬음.
공자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려거나 깎아내리려는 목적에서 여러 이야기가 생겨났다. 맹자시대에 이미 그러한 공자 설화로 불릴 만한 것들이 많이 만들어졌던 것 같다. 맹자는 그 가운데 바람직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일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다"(만장상)라든가, "제나라 동쪽의 시골뜨기들의 말이다"라고 배격하고 있지만, 맹자 자신이 주장한 공자의 언동에 대해서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지으니,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부모를 거역하는 자식이 두려워하였다"고 했다. 더 나아가 "공자가 말했다.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오직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고, 나에게 (월권했다고) 죄 주는 이가 있다면 그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라고 춘추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듯한 공자의 말을 인용하지만, 공자가 몇 번이나 체제 변혁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그 때문에 부득이 기나긴 망명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듯이, 맹자의 이 이야기는 명백히 허위다. 맹자가 말하는 춘추의 학문은 분명히 공자를 죄 주는 경우라 하겠다.
사마천은 아버지 담(談)이 황로(黃老)를 좋아했기 때문에 유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공자를 제후의 반열로 취급했던 것은 당시 국가 정책상의 요청이었던 듯 하며, 그 결과 사마천의 사필(史筆)은 일민(逸民)인 백이(伯夷)라든가 유협(遊俠)의 전기를 쓸 때 보이는 감개나 생채를 발하지 않는다.
공자를 치하하는 표현도 깊은 공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이미 성상화(聖像化)하고 있는 공자를 그는 다소 꺼림칙하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공자세가」의 공자 전기 자료는 사마천답지 않게 일관성이 결여되었고, 선택과 배열의 타당성을 잃고 있다.
또한 자료의 성질이 불분명한 잡설이 꽤나 많다. 품행이 좋지 못한 것으로 소문난 위나라 영공의 부인 남자(南子)와 회견한 장면 등은 치졸한 소설에 가깝다.
저자는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가 무녀이고, 공자 또한 젊은 시절 무축(巫祝 : 남자무당)이었을 것으로 추측함. 무녀의 사생아.
사(士)는 보통 서른이 되어야 아내를 맞이하고, 비로소 벼슬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사기는 공자가 스무살 무렵에 이미 관료가 된 것으로 기술.
공자의 전반생은 빈곤과 고뇌 속에서 뒹구는 삶이었을 것이다.
후세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것처럼 두각을 드러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공자가 점차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마도 마흔이 훨씬 지난 뒤일 것이며, 그 무렵에는 몇 명의 제자도 거느리고 있었던 것 같다.
노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소공은 제나라로 망명함.
공자도 제나라로 망명하여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 제나라 임금인 경공(景公)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하니, 이러한 행동은 분명 공자를 숭배하는 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악명 높은 고소자의 가신이 되어 타국에서 벼슬하기를 바라는 따위의 행동이라니, 공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노나라 소공의 뒤를 따르려 한 충신의 행동이었다는 해석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논어에 충신(忠臣)이라는 사고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충(忠)이란 성실하다는 정도의 의미인 것이다. 공자는 "만약 나를 등용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1년 안에 뭔가를 해내겠다"든가, 공산불요의 부름에 응하려 했을 때도 "만일 나를 써주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 나라를 장차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라고 자로에게 이야기한다. "만약 나를 써주는 이가 있다면" 상대가 누구라도 좋았던 것이다.
소공의 망명을 받아들인 제나라는 다음해에 노나라를 쳐서 운 땅을 빼앗고는 그곳에 소공을 머물게 했다. 그런데 공자가 운 땅으로 갔던 자취는 없다.
소공은 제나라에 인질로 잡힌 꼴이 되었고, 제나라는 노나라의 내정을 간섭했다. 그리하여 노나라에서는 조속히 소공을 귀국시키려는 운동이라든가, 차라리 진(晉)나라로 가버리게 하려는 계책이 꾸며졌다. 하지만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가고 관련된 이들은 잇달아 미심쩍게 죽어갔다.
소공이 망명했을 때 공자는 아직 서른여섯 살이었다. 당시의 정변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거취를 결정해야 할 만큼 그는 아직 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공자의 망명은 훨씬 뒤의 일이고, 그 이유도 딴 데 있었다.
당시 노나라 임금의 권력을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역대에 걸쳐 어리석은 임금이 많았고, 환공(桓公)에게서 비롯된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 삼환(三桓)씨가 오래도록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국토와 병마(兵馬)의 대부분은 그들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가신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하극상의 풍조가 뚜렷해지면서 정국은 끊임없이 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소공은 열아홉 살에 즉위했으나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순진했고, 즉위한 뒤 줄곧 초나라나 진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등의 굴욕 외교를 계속해 나라 안팎으로 멸시를 당했다. "만약 나를 등용해주는 사람이 있다면"하고, 벼슬할 기회를 노리던 공자라도 나라 형편이 이래 가지고는 벼슬할 길이 없었다.
공자가 제나라에 있을 때 소(韶)의 음악을 듣고는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몰랐다. 그리고 말하기를 "소(韶)라는 음악의 감동이 이런 정도로까지 깊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하였다.
노나라 소공 26년에 주나라에서 수년 동안 계속된 왕자 조(朝)의 반란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 왕자 조가 주나라의 전적을 가지고 초나라로 망명하는 바람에 주나라의 예악은 많이 산실되어버렸고 왕실의 악관(樂官)들도 난리통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미자」편에 "악관의 우두머리인 태사(太史) 지(摯)는 제나라로 갔다"는 기사가 있는데, 공자는 아마도 지가 연주한 음악을 들었을 것이다. 시편의 「관저」의 연주에 대해서도 비평한다. 이때 공자가 처음으로 태사가 연주한 음악을 들었다면, 『사기』에 공자가 서른 이전에 노나라 임금에게서 수레와 말을 하사받아 주나라로 가서 예악을 배우고 노자와 만났다는 이야기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공자가 소공의 망명을 뒤따라서 제나라로 갔다면, 경공 31년에 공자는 서른여섯 살, 경공은 쉰 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였다. 이 무렵에는 안자(晏子)도 건재했다. 젊은 망명자인 공자를 경공이 삼환의 계씨와 맹씨의 중간 정도로 대우하면서 맞아들이려 했을 리가 없다. 또한 경공은 "내가 늙어서 쓰지 못하겠구려"라고 말을 할 만한 나이도 아니었다. 만약 이 말에 신빙성이 있다면, 공자의 망명 시기는 10년 이상 이후 시기로 내려와야 한다.
공경이 공자를 등용하려 했을 때 재상 안자가 이를 막았다는 이야기들...
안자는 여기서 유자(儒者)는 오만하고 정치 지도자로서 부적합하다는 점, 그들의 예악에 관한 주장은 사치일 뿐이며,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오래도록 복상(服喪)하는 것은 백성의 삶을 해치고 겉치레뿐으로 내용이 없다는 점 등을 논했다. 그러면서 "지금 공구는 음악을 열심히 하여 세상을 사치스럽게 만들고, 현가고무(絃歌鼓舞)를 행하면서 무리를 규합하며", 그의 교설이 정치에는 실익을 주지 않는다는 점 등을 비판하고 있다. 이때 공자는 이미 교단(敎團)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이렇듯 새로운 형태의 정치활동은 기성 정치가들에게 상당한 위협감을 주었을 것이다. 『묵자』「비유」편에 따르면 공자는 제나라에서 등용되지 못한 일에 분노해서, 제나라의 실력자인 전상(田常)의 집 문에다 치이자피(鴟夷子皮)를 세워놓고 떠나갔다고 한다. 치이(鴟夷)란 신판(神判)에서 패한 쪽의 신양(神羊)을 싸서 유죄가 확정된 이와 함께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내기 위한 가죽으로 만든 부대로, 신을 모독한 독신(瀆神)의 죄를 물어 추방한다는 뜻을 나타낸 저주의 방법이다. 공자가 죽고 난 6년 뒤, 월나라 임금인 구천을 도와 회계의 치욕을 설욕했던 범려는 이름을 치이자피로 바꾸고 바닷가로 떠나, 훗날 도주공으로 또 다른 세계에서 활약을 벌이는데, 이때의 치이자피는 망명자로서 자기 자신을 내버린다는 뜻을 나타낸 방법이다. 이런 일들을 무축의 무리는 잘 알고 있었다.
공자가 양호(양화)의 초빙을 받았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공자는 이 독재자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양호와 함께 일을 벌이려 했던 공산불요에게 가담하려는 태도를 취해서 자로의 불만을 샀다는 이야기가 「양화」편에 나온다. 인물 됨됨이로는 양호가 훨씬 수완가였던 듯하다. 이 인물은 교양도 상당했고 공자에게 건넨 말은 보(寶)와 방(邦), 사(事)와 시(時)라는 글자로 운을 맞춘 아름다운 말이었고, 해와 달이 등장한 구절도 시편에 실려 있음직한 구절이다.
공자와 나눈 문답에서 운어(韻語)라든가 복서(卜筮)를 잘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양호는 아마 사유(師儒)의 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비자』「외저설좌하」편에는 "양호가 말하기를 '군주가 현명하면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기나, 어리석으면 나쁜 마음을 겉만 구미고는 군주의 의향을 떠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양호는 노나라에서는 쫓겨났고, 제나라에서는 의심을 받고 조나라로 달아나니, 조나라의 간주(簡主)가 맞아들여 재상으로 삼았다. 좌우의 신하들이 '양호는 남의 나라의 정권을 잘 빼앗는데 어째서 재상으로 삼습니까?'라고 하니 간주가 대답하기를 '양호는 애써 정권을 빼앗으려 하고 나는 애써 정권을 지키려 하느니라' 하고는 마침내 술(術)을 서서 양호를 다스렸다. 그래서 양호는 감히 나쁜 일을 저지르지 못하고 성실하게 간주를 잘 섬기면서, 주군의 세력을 성하게 만들어 거의 패자와 대등한 수준까지 이르게 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가 기존의 세신(世臣) 형태로는 통제하기 어려운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양호는 공자와 같은 인물.
그는 공자처럼 고매한 이상주의를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삶의 방식이 동일했다. 고전에 관한 교양을 지니고 문하에 제자를 거느리며, 세족정치에 도전해 정권을 빼앗기도 하고, 실패하면 망명해 도(盜)라 불리면서 어느 나라도 자신의 조국으로 삼지 않았다.
공자는 양호를 경쟁상대로 인식했고, 양호가 노나라에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을 때 공자는 노나라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공자가 제나라로 망명한 지 2년 후에 이번에는 바로 양호가 제나라로 망명해 왔다. 공자는 제나라를 떠나야 했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양호가 떠난 노나라에서 공자는 활약을 시작했지만, 그가 어느 정도 뜻을 이루었던 시기는 채 3년도 이어지지 못했다.
공자는 어째서 실패했던 것일까? 그가 양호와 같은 정치수완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자가 노나라의 대사구(大司寇)로 승진한 시점
공자가 제나라와 노나라의 회맹에서 제나라 임금의 술책을 칼부림으로 제압하고 사과를 받아냈다는 전승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음.
공자가 그의 생애에 정치적으로 성공한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더 화려하게 꾸미려는 기술.
협곡의 회맹은 노나라가 원교근공 정책에서 근린우호 정책으로 전환하는 시발점.
노나라가 제나라가 빼앗아간 영토를 반환받은 것은 그같은 우호정책을 수용하겠다는 뜻.
그 전해에 제나라는 양호를 붙잡아 국외로 추방했고, 이로써 두 나라의 국교 회복의 조건은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한 우호관계를 맺는 외교 회의석상에서 공자가 그런 어설픈 연극을 할 리가 없다. 만약 임금을 수행했다라도 그것은 제나라 임금과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전(史傳)에서 특별히 다루어진 협곡의 회맹에서 공자가 행한 역할은 제나라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소개자의 역할, 오늘날로 치자면, 우호협회 회장 정도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공자가 두 번째로 노나라를 떠남
전승에 따르면 제나라가 공자를 몰아내기 위해 술책을 부려 노나라 임금 계환자를 타락시켰다고 한다.
가희와 무녀들의 여악(女樂)을 보내서 계환자가 국정을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는 것.
이 이야기 역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음.
실제로는 모종의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국외추방을 당한 것.
국외추방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고, 고대 중국에서도 악신(惡神) 사흉(四凶)을 벌하는 극형이다. 이 시대에도 정식으로 거류권을 인정받지 못하면 도(盜)라고 불리는 신분이었다.
정공 12년조에 따르면 공자 문하의 자로가 계씨 휘하에서 고위 관료인 재(宰)가 되었다. 그리고 자로의 계책이 받아들여져 삼가(三家)의 사읍(私邑)들의 성벽을 허물고 무장 해제를 하기로 결정했다. 삼가를 대표한 이들은 수도에 살면서 사읍에 재(宰)를 두고 관리했는데, 종래의 경험에 따르면 가신들이 종종 그러한 사읍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사읍은 반역자들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자로의 이러한 게책은 쉽게 삼가에게도 받아들여져 얼마 후 실행에 옮겨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반발이 없지 않았다. 공산불요가 저항하면서 숙손씨의 불평분자와 합세하여 노나라의 도읍까지 쳐들어오는 등의 대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실패하여 공산불요는 제나라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일으킨 자로가 입안한 계책은 실제로는 배후에 있는 공자의 계획일 가능성 높음.
이 계책은 삼가가 가신들의 참람한 행위에 고민하던 실정을 역으로 이용해서 삼가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한 음모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사건에서 공자는 미묘한 입장을 보이며 양다리를 걸침.
제자인 자로는 지키는 편에 서고, 공자 자신은 공격하는 측인 공산불요의 세력에 가담하려 시도함.
이 가공할 음모자를 삼가가 용서할 리 없다. 공자는 아마도 '관을 벗을' 겨를도 없이 벼슬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를 당했을 것이다. 삼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양호가 무력으로 이루고자 했던 일을 공자는 책략으로 하고자 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공자는 혁명자라는 딱지가 붙은 채 노나라에서 쫓겨나 14년간 망명생활을 하게 됨.
『사기』에 기록된 공자의 망명기록은 완전히 소설이며 사실로서의 신빙성도 거의 없다.
기록된 전체 여정은 수천 킬로미터에 달함. 도저히 감당해낼 수 있는 여정이 아니다.
『사기』는 이러한 십수 년 동안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지에 대해 고심할 뿐이다.
공자가 광 땅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 말씀하시기를 "문왕(文王)이 이미 돌아가시고 난 뒤로는 그가 만든 예악과 제도가 여기 내게 있지 않은가. 하늘이 장차 이 문(文)을 없애려 하신다면, 뒤에 죽을 내가 이 문(文)에 관여하지 못할 것이거니와, 하늘이 이 문(文)을 없애시지 않을 터라면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셨다. -「자한」(子罕)
공자는 두번째 망명으로 인해 이제는 더 이상 정치적인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광 땅의 사건은 사람들이 공자를 양호로 착각했다는 것인데, 날조한 이야기일 가능성 높음.
사람을 잘못 보고 닷새씩이나 포위했을 리가 없다. 안연이 살해되지나 않았을까 불안해할 만큼 위험은 절박했다.
추측의 여지는 남기지만 아마도 이 일은 양호의 책략이었는지도 모른다.
양호가 광 땅에 왔다면 그것은 위나라 왕위 계승 문제가 일어났을 때 조간자의 명을 받고 송나라에 망명 중인 태자를 위나라 영토인 척 땅에 잠입시켰던 일이 있었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자취가 지워질 정도로 배척당했다"는 것은 양호가 위나라로 들어오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일어나가 공자에 대한 대우도 정지되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의 일생은 어떤 의미에서 이 양호라는 인물과 벌인 대결이라 할 수 있다.
광 땅에서 포위된 일은 일단 사람을 잘못 보았던 것으로 되어 있으나, 송나라에서 당한 재난은 명백히 공자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것이었다.
환퇴가 공자를 죽일 요량으로 큰 나무를 뽑아 들었다고 한다. 공자는 물러서지 않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맹자는 이 사건을 훨씬 조촐하게 기록한다. 송의 대부 환사마가 공자를 죽이려 하므로, 공자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변복을 한 채 송나라를 지나갔다고 한다.
정말로 환퇴가 나무를 뽑아 휘두르고, 공자가 호통을 쳤다면 호사가이자 호변가인 맹자가 이런 이야기를 대서특필해서 다루지 않았을 리가 없다. 맹자 이후에 날조한 기록임에 틀림없음.
초나라의 섭공은 은의(恩義)를 중시하지 않는 법치론자였던 것 같다. 초나라의 현자라고 알려진 섭공에게 절망한 공자는 곧바로 진나라에 되돌아온다.
"돌아가야겠다! 돌아가야겠다!"는 탄식은 아마도 이때 내뱉은 말로 여겨진다. 이제 공자에게는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일흔 살에 가까운 고령의 공자에게는 이제 안식이 필요했을 것이고, 고향에서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공자의 귀국을 맞이하려는 준비도 진척되고 있었던 것 같다. 계씨의 초빙을 받은 제자 염구가 착착 지반을 구축해갔고, 새로운 교단도 형성되고 있었던 것 같다. 젊은이들은 공자의 덕망을 사모하며 새로운 이상을 불태웠다.
애공 11년 봄, 계씨의 재(宰)인 염구는 노나라를 침공한 제나라와 싸워 무공을 세웠다. 계씨와 화해하면서 공자는 노나라에서 맞아들여진다. 그해 가을에 공자는 노나라로 되돌아왔다.
양호 역시 공자처럼 사유(師儒)의 계통에서 일어나 현실정치의 개혁에 나섰고, 문도를 거느리고 당시의 귀족정치에 도전했던 인물.
그는 일찍부터 계씨에게 벼슬을 했으나 삼가의 정치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삼가를 억누르고 전횡을 했던 일도 그에게는 혁명의 행동이었다.
양호는 3년 후에 실각했다. 삼가가 일치단결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회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양호는 노나라 군위(君位)의 상징인 보옥과 대궁을 훔쳐 제나라로 망명했다. 상징물이 있는 곳에 정당한 군권(君權)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나라에서도 그는 임금 곁에 자신의 문도를 두고 상당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양호가 망명해오자 공자는 황망히 노나라로 되돌아왔다. 이윽고 협곡의 회맹으로 인해 노나라와 제나라의 고나계가 개선되자, 제나라에서는 양호를 눌러 있게 할 수가 없어 사로잡으려 했으나, 그는 용케도 빠져나가 송나라로 망명했다가 다시 진(晉)나라로 가서 조간자의 휘하에 정착한다. 양호가 멀리 가버린 뒤로는 공자의 세상이었다. 자로가 계씨의 재(宰)가 되었고, 공자도 국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공자의 삼환 억제책도 양호의 경우와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었다. 자로에게 계책을 주어 그들 사읍(私邑)의 무장해제를 꾀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일이 순조로웠지만 결국 실패로 끝남으로써 공자도 양호와 같은 운명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나라로 갈 수 없어서 연고를 찾아 위나라로 달아났던 것이다.
『설문해자』권8하를 보면 도(盜)는 선(羨)의 아랫부분을 포함해 '탐내어 부러워한다)'(貪羨)는 뜻을 가진 글자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릇 속의 물건을 탐내어 부러워하고 훔치는 행위를 도라고 하지만, 이상에서 든 예들만 보아도 그름 속의 물건을 탐내는 좀도둑의 부류는 아닌 것이다. 조간자(趙簡子)는 양호가 제나라로 갔다가 다시 진(晉)나라로 달아났을 때 그를 받아들였는데, 양호에 대해 "양호는 남의 나라 정권을 잘 빼앗는다"고 평한다. 당시의 도(盜)의 실체를 잘 나타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진(秦)나라 진공박의 명문에도 도(盜)라는 글자 모양이 보이는데, 수(水)의 모양 둘과 사람이 입을 벌린 모양인 흠(欠)을 그릇 명(皿) 위에 더하고 있다. 명(皿)은 맹세할 때 쓰는 그릇으로 고대에는 이것을 이용해 피를 마시고 맹세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물을 탄 상태나 모멸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흠(欠)을 덧붙인 것은 맹세를 더럽히고 파기한 주저(呪詛)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도(盜)는 맹세의 파기자이며, 맹세로 성립된 공동체로부터 이탈한 자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이탈이 빈번하게 행해진 것은 당시의 귀족사회가 이미 붕괴 직전의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징조라 할 수 있다.
도(盜) 은나라 말기부터 기록에 나타난다.
시경 「소아」「교언」편에 당대 정치혼란의 원인이 다름 아닌 도(盜)의 정치 참여에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임금님이 맹약을 자주 바꾸시니 어지러움이 그래서 더해지며,
임금님이 도(盜)를 믿으니 어지러움이 그래서 심해지며
도(盜)의 말은 매우 달콤하여 어지러움이 그래서 늘어만 가네.
족외의 망명자, 이른바 이객(異客)은 씨족적인 형태를 취한 당시의 귀족사회에 출현하여 도(盜)라 불렸다. 혈연 공동체로서 강한 전통을 지닌 귀족사회에 이미 해체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본향에서 벗어나 씨족의 유대를 잃어버리고, 종래의 질서에서 탈락한 자들이 외도(外盜)가 되고, '불평분자의 무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사회 불안의 주요한 원인을 이루게 되었다.
서주의 멸망으로 왕실에 속한 백공(百工)들은 유력한 귀족에게 의탁하거나 자립해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꾸려나갔다.
병기나 용기의 제작자들은 시인(矢人), 함인(函人)과 같이 대체로 인(人)이라고 불렸다.
특정한 생산물을 독점한 지능자 집단의 부강함은 세족 세력을 압도하는 경우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제나라 환공의 패업을 도왔고,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알려진 포숙(鮑叔)은 아마도 『주례』에서 보이는 포인(鮑人), 곧 피혁업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백공 출신의 세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가 천명을 자각한 것도 아마 그 때였을 것이다. "오십이 되어 천명을 알았다"고 한 말은 반드시 연령적인 한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문(斯文:유교의 도의나 문화)에 대한 자각이었다. 현실의 틀 속에서 반체제자로 출발했던 공자는 여기서 현실을 뛰어넘는다. 공자의 망명생활은 공자를 반체제적인 주박(呪縛)에서 해방시켰던 것이다.
『한비자』에서는 "유(儒)는 문(文)의 지식을 가지고 법을 어지럽히고, 협(俠)은 무(武)의 폭력으로 금령(禁令)을 깨뜨린다"고 유와 협으로 나란히 불렸다.
『한비자』에는 또한 "유자의 복장에 칼을 찬 무리가 많다"고 하니, 당시 유협의 무리가 천하에 횡행했던 듯하다.
유가의 주변부에 불평분자 무리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사회사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공자 문하에는 광간의 무리가 많았다. 광간의 사(士)란 '진취적이고', '하지 않는 바가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공자는 그래서 광간의 무리를 깊이 사랑했다.
공자는 다른 무엇보다 "고집쟁이를 미워했고", 교조주의자를 구제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보았다. 다음으로 향원(鄕原)을 미워했다. "향원은 덕을 해치는 도적이다"라고도 했다. 향원이란 겉모양만을 꾸미는 형식주의자다. 이런 종류의 인간보다는 광간의 무리 쪽이 훨씬 높은 등급이다. 그러나 광(狂)에도 옛날과 지금의 차이가 있어 "옛날의 뜻 높은 이(狂)는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고 거리낌이 없었는데(肆), 지금은 방탕하기만 하다(蕩)"고 한다. 사(肆)란 자유롭고 활달하다는 뜻이고, 탕(蕩)은 자기 억제가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공자 문인 가운데서 예를 든다면 자로 같은 사람은 옛날의 광(狂)이었다. 그러나 광간의 무리는 공자가 죽은 뒤에 "마름질할 줄을 모르게 되었고", 차츰 협(俠)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묵자의 무리가 뒤에 묵협(墨俠)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자 교단의 성격은 그와 같은 출발로 미루어보면 당연히 반체제적이었다. 공자가 지도하는 교단은 처음에 현실의 장에서 정치를 다투었다. 그러나 현실의 장에서 다툰다는 것은 대립자와 동일한 차원에 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의 망명은 교단이 새롭게 태어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공자의 위대한 인격, 그의 사색과 실천에 따라 생사를 넘나들며 얻어진 것이지만, 사정을 아는 이는 안회 등 두세 명의 고제들에 지나지 않았다. 천명 · 덕 · 인 등과 같은 유교의 근본 사상은 그러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획득된다. 이것을 체험적으로 파악하기란 실제로 거의 불가능하다 하겠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학이」) 세계인 것이다. 거기서 권회의 도가 생겨난다.
권회란 주어진 조건을 초월하는 일이다. 주체가 주어진 조건을 규정한다. 단순한 퇴은(退隱)이 아니며 패배가 아니다. 하물며 개인주의적인 독선은 더더욱 아니다. 뒤에 장주(莊周)가 그 사상을 심원한 철리로 조직화한다. 또한 유묵이 유협(儒俠), 묵협(墨俠)으로 타락해가는 가운데 권회자의 계보는 사상적으로 커다란 역할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비판이란 자타를 구별하는 일이다. 그것은 타자를 매개로 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인데, 자타의 구별이 처음부터 분명한 경우에는 비판이란 행위가 생겨나지 않는다. 비판이란 자타를 포괄하는 전체 속에서 자기를 구별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것은 타자를 매개로 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비판 근거를 묻고, 스스로를 비판하고 형성된다. 사상은 그렇게 형성되는 것이다. 유가의 비판자로 생겨난 묵가, 그러한 묵가의 대립자로 일어난 양주, 또한 양묵의 비판자로 등장한 맹자, 맹자를 유가의 정통이 아니라고 주장한 순자 등, 제자백가로 불리는 전국시대의 다채로운 사상가들의 활동은 이같은 비판과 재비판을 통해서 전개되었다.
노예를 동(童)이라고 했다. 고대 가요 형태로 보이는 동요(童謠)는 이들의 노동가였다.
묵자는 약소국을 지원하는 활동을 통해 겸애와 비공의 실천을 끊임없이 추구해갔지만, 시대가 통일을 향해 나아감에 따라 묵가의 후학은 드디어 상동(尙同)과 천지(天志)의 설을 주장하면서 도리어 강대국을 지원하는 대규모 기계화 군단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초나라나 진나라에서 활약한 묵가 가운데는 일정한 성읍의 수비를 청부 맡는 자가 나타났다. 묵가 최후의 거자(巨子)였던 맹승도 초나라 양성군(陽城君)을 위해 집단을 이끌고 양성의 수비를 맡았던 인물이다.
여씨춘추 상덕편에 따르면 이때 맹승은 양성을 지켜내지 못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진 채 자살한다. 묵가의 전통이 단절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이를 말리는 부하들에게 맹승은 "묵자의 의를 행하는 일이야말로 업을 잇는 것이다. 거자의 지위는 송나라의 전양자에게 맡기고 싶다"면서 죽었다. 이때 따라 죽은 제자가 183인이었다. 전양자에게 사자로 갔던 두 사람도 전양자가 만류하는 것을 듣지 않고 돌아와서는 맹승을 위해 죽었다. 공자 문하의 심상 3년과는 사뭇 이야기가 다르지만 장렬함이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공자의 시대는 로고스의 시대.
묵자나 맹자의 시대는 노모스의 시대.
맹묵의 시대는 전통이 사라지고 기나긴 분열과 항쟁이 모든 것을 황폐화시켰다. 문제를 인간성 내면의 문제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제 천하를 정치적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명확하게 객체화할 수 있는 것 같은 새로운 원리가 요구되었다. 묵자에게 의(義)는 하늘의 뜻으로 무조건 절대화되고 있다. 겸애와 교리야말로 하늘이 의로써 실현됨을 추구하는 것이다. 맹자에게 하늘의 뜻은 민의를 매개로 해서 표현된다. 거기에 천 사상, 새로운 시대적 의미가 발견된다. 어느 경우나 하늘과 인간의 관계가 주제다. 인간은 누구나 하늘 아래서 평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하늘의 뜻을 대신할 수 있는 이가 천자가 되고 왕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천하적 세계관의 질서 원리를 묵자는 법(法) 또는 법의(法儀)라 하고, 맹자는 인의(仁義) 또는 왕도천하(王道天下)라고 일컬었다. 그것은 노모스(nomos)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노모스는 분배(分配)를 어원으로 하는 말이다. 그것은 공공성의 원리였다. 구체적으로는 도덕이나 법률이 그것에 해당된다. 묵자가 말하는 법의는 거의 그러한 개념에 가깝다. 노모스는 개인에 대해 앞서 존재하는 것이고, 개인을 포괄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일반자다. 그것은 집단 자체가 지닌 권위 위에 성립하는 것이므로 개인적인 계기를 포함하기는 어렵다. 유가가 그같은 노모스적 체제에 대응하는 충분한 학설을 준비한 것은 순자에 이르러서다. 거기에 맹자의 반(反) 시대성이 있다. 또한 묵자는 의의 근거를 한르의 뜻에서 구하는 신수설(神授說)을 취했는데, 거기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일반자로서의 노모스에 대한 반동이 있었다. 집단의 권위를 대표하는 것은 왕이 아니면 안 된다. 그것은 선왕이 아니라 현재의 왕, 곧 후왕(後王)이 아니면 안 된다. 후왕주의(後王主義)를 설파한 순자, 왕권의 절대성을 주장한 한비자의 법가 사상이 이러한 노모스적 세계의 최후 승자가 되었다. 그리고 묵자는 강고한 폐쇄성으로 말미암아 노모스적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이다. 묵가 최후 집단이었던 진묵(秦墨)은 진(秦)의 통일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멸망했다.
도척이 말하는 인정(人情) - 눈은 아름다운 색을 보려 하고, 귀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려 하며, 입은 맛있는 것을 맛보려 하고, 마음의 욕망은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안회는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깨닫는 사람이다. 자기 스승에게 "인의를 잊어버렸습니다"라고 하자 스승은 '좋기는 하다'라고 평하면서도 '아직 멀었다'고 한다. 다른 날 또 이번에는 "예악을 잊어버렸습니다"라고 한다. 인의와 예악은 당시 유가의 근본 주장이다. 그러나 스승은 여전히 '아직 멀었다'고 한다. 공자는 이 준재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후학에 의해 노모스화한 유가 학설의 초극을 바란 것은 아닐까.
다른 날, 다시 공자를 뵙고 안회가 말했다. "저는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중니가 말했다.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좌망(坐忘)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중니가 깜짝 놀라서 안색을 바꾸면서 말했다. "무엇을 좌망이라 하는가?"
안회가 말했다. "사지와 백체를 다 버리고 이목의 감각작용을 물리치며, 육체를 떠나 지각 작용을 없애 대통의 세계와 같아졌을 때, 이것을 좌망이라고 합니다."
중니가 말했다. "대통의 세계와 같아지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주관이 없어지며, 이대한 도의 변화와 함께하면 고정 상태에 집착하지 않게 되니, 너는 과연 현명하구나. 나는 청컨대 너의 뒤를 따르고자 한다."
「대종사」
좌망이란 지각적인 것, 이성적인 것의 방기를 뜻한다. 말하자면 직관이다. 그것은 노모스적 원리인 인의와 예악을 버리는 데서 생겨난다. 공자에서 명확해진 이데아 세계는, 이윽고 유묵 무리에 의해 노모스적 사회의 일반자로 전화되었다. 그것은 집단의 규범성에 모든 사람이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다. 묵자나 맹자의 학설은 그러한 사상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반자는 집단의 초월성 때문에 주체적으로 삶의 자유를 숨쉬는 행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생에 대한 충동은 극도로 억압된다. 따라서 노모스적 세계의 부정은 개체의 주체성 회복의 주장이 되고, 좀더 근원적인 생의 해방의 주장이 된다. 생철학, 실존철학이라 불리는 것이 생겨난 것은 대체로 그러한 사상적 요구 때문이다. 장주의 사상이 종종 생철학, 실존철학으로 취급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다.
묵가의 학문은 장주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천도편에서 "널리 천하 사람들을 사랑해 사심이 없는 것(겸애무사), 이것이 인의다"라는 주장에 대해, "널리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도 너무나 먼 얘기 아닌가? 게다가 사심을 없앤다지만 그것이 바로 사심이다"라고 말한다.
서무귀편에서 위나라 무후가 "나는 백성을 아끼고자 한다. 정의를 행하고 전쟁을 그만두고자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묻자, 서무귀는 "안 됩니다. 백성을 아끼려는 것이 백성을 해치는 시초입니다. 정의를 행하고 전쟁을 그만두려는 것이 도리어 전쟁을 일으키는 근본입니다."라고 논파한다. "널리 천하 사람들을 사랑해 사심이 없는 것", "정의를 행하고 전쟁을 그만두고자 하는 것"은 묵가가 주안점으로 삼는 주장이었는데, 이러한 평화 애호자의 실체가 기계화 군단과 같은 조직을 지닌 전투 집단이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대로다.
장주의 철학은 절대론적 철학.
절대는 대자(對者)를 거부한다. 그러나 대자의 거부가 단순한 부정에 머무르는 한 그것은 끝없이 대자를 낳을 것이다. 대자의 부정이란 대자를 포용하고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장의 형식은 내용을 반영한다.
"양식이란 반드시 자기 자신을 내걸게 하는 것이다"(『문학론』제30장)라고 프랑스 철학자 알랭은 말한다. 사상 또한 사상 그 자체가 그것의 양식을 결정한다. 다른 양식을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절대 형식을 지니고 있다. 사상은 표현 양식, 즉 문체와 나누려야 나눌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논어』에는 어록체 풍의 문장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어록체 문장에서도 배경을 느낄 수 있다. 무언가의 사실에 입각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대화에서 나왔던 말임이 틀림없다. 그런 대화에서 비롯된 공자의 말이 그대로 격언이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공자의 말에는 이데아가 있다. 전통의 집약화와 내면화가 있다. 그것을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일컫듯이, 공자 자신의 엄격한 실천과 사색이 뒷받침되어 있다. 그래서 그러한 이데아는 일상의 문답 사이에서도 아름다운 운율이 되어 흐르는 것으로 보인다.
맹자가 제나라 선왕을 만났을 대의 일이다. 맹자는 입을 열자마자 곧장 왕에게 질문을 했다.
"임금님 신하 중에 자기 처자를 벗에게 부탁하고 초나라로 여행하는 이가 있다고 하십시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처자가 얼고 굶주리고 있다면, 임금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친구와는 절교하지요."
"재판관이 공평하게 재판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파면시키지요."
"나라 안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현대의 정치가라면 가정(假定)의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다"고 했겠지만, 정직한 선왕은 "좌우를 돌아보며 딴 소리를 하였다"(「양혜왕하」). 곧 대답이 궁한 태도를 보였다. "좌우를 돌아보며 딴소리를 하였다"는 구절은 속담은 될지언정 격언이 되지는 못한다. 맹자의 말에는 격언이 될 수 있는 경우가 적다. 로고스가 이미 상실되어버렸다. 그는 '『시』에 이르기를', '『서』에 이르기를'이라는 방식으로 고전 문구를 인용한다. 뛰어난 철인이 말에 자기 정신의 온 무게를 싣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다.
『묵자』 문장은 대체로 한 편의 주제가 정해진 논문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서술도 논리적이다. 그 때문에 '그러므로'(是故), '그러므로 이르기를(故曰), '그렇다면'(然則)과 같은 추론이나 귀납적인 논법이 많다. 그러나 소박하고 어설프다.
묵가는 유가에 대해 대체로 반감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다. 만일 공자였다면 "이단을 공격하면 해로울 뿐이다(「위정」)"라고 했을 것이다.
『장자』의 문장은 사상의 문장으로는 거의 전무후무한 경우다. 제나라 직하의 여러 학사자의 정치한 이론을 구사하고, 분방하면서도 박대(博大)하기 그지없는 수사법을 동원해 초월자의 자유자재한 정신세계를 표현해냈다. 초인은 공자가 죽은 뒤 잃어버렸던 로고스를 소생시켰다. 언어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활력을 회복했다.
『논어』에서는 『맹자』와 같은 능변가의 습기 같은 것을 볼 수 없다. 노히려 노모스적 사회에 대한 뿌리 깊은 반항이 있다. 『논어』에, 특히 공자 말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그 같은 노모스적 사회와 조화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공자의 고고한 정신은 『논어』의 편찬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노모스적 사회를 부정하는 것 = 정치를 부정하는 것
고대 그리스에서 규칙ㆍ습관ㆍ법제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그 위에 넓은 의미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ㆍ인습적인 것ㆍ단순히 상대적이고 본래적이 아닌 것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인위가 개재할 수 없는 피지스(physis, 자연) 그 자체에 대립하여 사용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모스 [nomos]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논어』의 최종 편집자가 누구였는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미자」라는 한 편을 덧붙임으로써 『논어』는 노모스로부터 탈출을 의도하는 새로운 정신으로의 가능성을 약속했다. 공자가 죽은 뒤 유가는 파벌 대립을 안은 채 노모스적 세계로 몰락해갔지만, 그러한 인위적인 균질의 세계에 가장 과감하게 저항을 시도했던 이들이 장주 일파다.
공자는 노모스화하려는 사회 속에서 인(仁)을 설파했다. 그러나 이미 이데아의 복음이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아니었다.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고야 비로소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공자세가」)고 안회가 말한 그대로다. 공자는 노모스의 밖에 서려 했다.
그러한 이데아의 장으로서 인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안회뿐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안회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안회는 먼저 죽어버리고 만다. 남은 제자들은 대체로 벼슬길에 나아가 급속히 형성 · 강화되어 갔던 노모스적 사회 속에 파묻히고 만다. 그리고 이제는 돌아가신 스승의 언행록을 전승하고, 또는 스승의 일상을 규범화하여 거기에서 스승의 정신을 구하려고 했다. 가장 어리석은 기록이 '상론'의 결말을 장식하는 「향당」편이다.
(내 생각)
규칙은 본래 삶을 더 잘 살기 위한 도구다.(혹은 인간의 본성을 더 고양하기 위한 도구다)
그런데 그런 규칙이 사람을 핍박하는 사회가 노모스적 사회다. (혹은 인간의 본성을 저급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사회가 노모스적 사회)
안회가 죽자 공자는 스스로 세운 규칙을 깨고 육친이 아닌 안회를 위하여 지나치게 애통해했다. 왜냐하면 그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노모스에 반하는 삶이다.
이것은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가 국가의 규칙을 어기고 반역자인 친동생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려 시도한 것과 유사하다.
그처럼 대단하던 공자가 마침내 "내가 추구하는 도가 틀렸는가. 어째서 내가 이러한 곤경에 빠지고 말았는가!" 하고 한탄했을 때 "용납되지 않고야 비로소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스승을 타이르듯 위로한 것이 젊은 안회였다.
맹자가 썼을 법한 공자의 말은 상당히 고쳐져 있고, 순자에 이르러서는 제멋대로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공자의 말로서 이 사도들이 전하는 말 외에는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더욱이 말은 제쳐놓고 정신을 문제로 삼았을 때 장주의 문장이 두 사람(안연과 자로)의 역할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죽은 뒤 유가는 각각 분파적인 견해를 고집하며 분열했다. 우 임금처럼 걷고 순 임금처럼 달리며,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웃어른의 부름이나 물음에 똑똑히 대답하는 쇄소응대(灑掃應對)의 예절만 번거롭게 문제삼는 자장씨의 천한 유자, 종일토록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사려 깊게 행동하려는 자하씨, 염치가 없으며 게으름뱅이인 자유씨 등 이른바 견유파(犬儒派)가 횡행한다. 도는 이미 사라져버렸고, 도를 추구할 기반도 없어져버렸다. 전통은 파괴되고, 거대화한 사회는 외적 규제의 압력에 의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하나의 물질적인 힘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노모스의 사회다. 『논어』는 그러한 노모스적인 시대 속에서 형성되어간다. 사도시대의 전승은 그러한 시대의 파벌적 이해에 의해 왜곡되어간다. 구슬과 옥들이 부딪혀 울리는 듯한 스승의 말도 잡음에 뒤섞여버릴 것 같았다. 그러한 노모스적인 것을 밑바닥부터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도 「미자」편을 덧붙인 것은 초광 일파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논어』는 허물어져 폐허가 될 운명을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노모스적인 사상의 완성자였던 순자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여전히 고대적인 교학을 형식적으로 답습하는 이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성악설의 차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노모스적인 지배는 완성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
노모스는 변하는 것이다. 시대가 지나면 낡아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공자의 정신은 오히려 장주 일파에 의해 재확인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유가의 정통임을 자임하는 순자가 공자를 얼마나 냉담하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점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유교의 노모스화는 맹자에 의해 촉진되고, 순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유가가 아니다. 적어도 공자의 정신을 전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교의 정신은 공자의 죽음으로 이미 종말을 고하고 있다. 그리고 안회의 죽음으로 그 후계마저 단절되고 말았다. 이데아는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
맹자와 순자가 따른 공자는 전기의 공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공자의 정신은 후기의 공자다.
장자가 어떤 생활인이었는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런 문장으로 미루어 보면 그가 제사자의 계통을 잇는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노모스적 세계 속에서 신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은 신을 내버려도 좋은 것일까. 만물을 만물답게 하는 것, 진재(眞宰)의 존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데아는 실재한다. 장자는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다채로운 변증법을 전개한다.
진실로 아는 이는 가벼이 말하지 않고, 이러니저러니 말하는 이는 진실로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말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히 감화시키는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한다. 도는 (말이나 행동으로) 불러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가 드러나는) 덕도 의식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진실한 도가 사라지고 나서 덕이 생겨나고, 덕이 사라지고 나서 인(仁)이 생겨나고, 인이 사라지고 나서 의(義)가 생겨나고, 의가 사라지고 나서 예(禮)가 생겨났다. 예라는 것은 도의 거죽을 장식하는 꽃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근본 원인이다." 그러므로 "도를 닦는 이는 매일매일 지혜와 작위를 줄여간다. 줄이고 줄여서 무위의 경지까지 이르게 된다. (일부러 꾸미는 부자연함이 없는) 무위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모든 일이 자연히 이루어지게 된다."
인(仁)은 순수한 의미세계다. 그것은 이데아다. 그 때문에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데아와 함께 있을 때 부귀빈천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공자는 아마도 그러한 의미를 지칠 줄 모르고 설파했던 것이리라.
공자는 만년에 권회의 인간이었다. 그리하여 권회자인 공자에게 접근하려 했던 것이 「미자」편의 전승자들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남방의 유자들로 장주학파와도 교섭을 가졌던 듯하다. 그들은 정치를 완전히 부정한다. 노모스적 사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서 공자의 정치적 방황을 비판하지만 그것은 공자의 삶을 부정한다기보다, 오히려 방황의 끝에 권회자가 되었던 공자에 대한 공감을 동반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논어』의 한 편으로 수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그러한 정치적 방황은 공자의 정신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처음부터 권회자인 인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쌓여가는 내면적 갈등을 통해 인간은 성장한다. 또한 위대해지기도 한다. 처음부터 체관자는 이른바 견유파(犬儒派)에 지나지 않는다. 공문 말년의 고제들이 공자의 높은 정신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은 망명에 따르는 표박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애초부터 순조롭게 벼슬길에 나아가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높은 교양을 지닌 그들은 노모스적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노모스적 사회에 있는 한 고제들은 천유가 되고, 견유파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시기의 대표자가 맹자이고 증자학파였다.
공자 사상은 결코 노모스적 것이 아니다. 공자가 추구했던 이데아 세계는 노모스적 사회와는 전혀 맞지 않으며, 공자의 고귀하고도 격렬한 인간 정신의 탐구는 끊임없이 반노모스적인 것이었다.
노모스적인 사회로 오늘날과 같이 거대화하고 물량화된 사회는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노모스가 사회적 초월자로서 가공할 지배력과 파괴력을 보여주는 시대도 없었다. 수천 만 또는 수억 명에 달하는 민중이 단지 하나의 규범에 복종하고 있다. 사람들은 완전히 노모스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더욱이 노모스는 보다 더 자신을 거대화하기 위해 거대 도시와 거대 국가를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거대 도시가 문화의 파멸로 이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거대 국가가 인간 삶의 방식에 어떻게 관여하는가에 대해서는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 "선생께서 구이의 땅에 살려고 하셨다"고 하듯이 공자가 탈출을 꿈꾸었던 권외의 세계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한 상황은 공간적 세계뿐만이 아니라 정신세계에서 한층 더 심각하다고 하겠다.
공자는 현실정치의 실패자였다. 그를 실패하게 만든 것은 현실의 노모스였다. 그래서 말년의 공자는 이 노모스의 한계성을 절감하고 그것을 돌파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것은 장주 일파의 것과 맞닿는 부분이 있었다. 따라서 후기 공자의 학맥은 맹순孟荀계열이 아니라 장주莊周계열로 이어진다는 것이 시라카와 시즈카의 주장이다.
첫댓글 혼자 보려고 정리했던 내용이라서 읽기 좀 난잡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