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명(金重明:1614年(光海君6)~ 1685年(肅宗11)
金重明省基(김중명성기) 蹴虎殺之(축호살지) 金重明(김중명)은 淸風人(청풍인)이니
字(자)는 而晦(이회)라.
父親(부친)이 當丙子胡亂(당병자호란)하여 以氷庫別提(이빙고별제)로 奔問南漢(분문남한)
할새 遇淸兵(우청병)하여 力戰而死(역전이사) 하니 贈戶參(증호참)하다.
重明(중명)이 負父屍(부부시)하여 返葬楊州金村(반양주금촌)하다.
乙酉(을유)에 中武科(중무과)하여 除宣傳官(제선전관)하여 唱名省基(창명성기)할세
有大虎在基後(유대호재기후)하여 從者喪魄(종자상백)에 莫敢前(막감전)이어늘
重明(중명)이 下馬大呼直前(하마대호직전)하여 蹴殺之(축살지)하니 人莫不服其勇(인막불복기용)이러라.
上(상)이 召試重明力(소시중명력)하니 重明(중명)이 取沙土三苞(취사토삼포)하여 左佑腋(좌우액)에 各挾一苞(각협일포)하고 又擔其背一苞(우담기배일포)하고 從閥外至殿前(종벌외지전전)하니 上(상)이 壯之(장지)하고 由是(유시)로 眷注日重(권주일중)이러니 濯屛使(탁병사)하고
乙亥(을해)에 孝廟賓天(효묘빈천)하니 重明(중명)이 撫臂大慟曰(무비대통왈) 吾今己矣(오금기의)라 하고 逐退居淸風白峙(축거청풍백치)하여 以終身(이종신)하다. -梅山集(매산집).
김중명 1614년(광해군 6)~1685(숙종 11)
김중명은 청풍 김 씨로 자는 이회였다. 아버지 김전은
병자호란 당시 빙고의 별제 벼슬을 지내던 사람으로,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문안하려고 급히 가던 길에 청병을 만나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호조참판을 추증받았다.
그때 중명은 부친의 시신을 메고 양주 금촌까지 가서 장사 지냈다.
인조 을유년 무과에 올라 선전관에 발탁되었다.
과거에 급제한 후 성묘 갔던 길에 묘 뒤에 숨어 있던 큰 범을 만나게 되었다.
따라온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중명이 말에서 내려
고함을 크게 지르며 곧장 나아가 발로 그놈을 차서 죽여 버리니 그 용맹에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효종이 중명의 힘을 시험해 보고자 부르자, 중명은 모래흙 세 포대를 가져다 양쪽 겨드랑이에 한 포씩 끼고 나머지 한 포는 등에다 지고는 대궐 밖에서부터 전각에까지 걸어오니 임금이 장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날로 총애가 깊어져 병마절도사 벼슬까지 받게 되었다. 기해년 효종이 승하하자 중명은 팔뚝을 어루만지며 “내 일은 이제 끝났구나!”하고 크게 울부짖더니 결국 청풍 고을의 백치에 물러나 살다가 생을 마쳤다.
출처: 『매산집』 - 조선문신 홍직필(1776~1852)의 유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