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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우리가 꼭 주목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 | 정치/사회/세계 | 2005/06/20 20:53 |
<제삼노총에서.펌> 첫째, 미국의 패권주의를 예의 주시(注視)해야 한다.
본래 패권(覇權)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자의 권력'이란 뜻이며,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비난한 1968년 8월 신화사(新華社) 보도에서였다. 그 후 1972년 2월 미국-중국 공동성명(上海 공동성명)에서 다시 사용되었는데, 중국 신문은 영문 표기 헤게모니(hegemony)를 <패권주의(覇權主義)>로 표기하였다.
중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거부감은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973년 8월 중국 제10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미-소 양 초강대국의 패권주의에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발언하였으며, 75년 1월 제정된 중국의 신헌법에는 아예 "초강대국의 패권주의에 반대해야 한다.'는 규정이 들어갔다.
이 같은 중국의 태도는 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에 더 곤고(困苦)해진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의 국제 질서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을 중심으로 판이 짜여져 있고 미래의 강대국으로 점쳐지는 중국은 이 같은 구조, 즉 미국의 헤게모니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미-중 수교 20 년을 맞는 1999년 1월 1일 장쩌민(강택민) 국가 주석은 신년 담화를 통해 '현재 세계는 다극화와 경제 글로벌 화(化) 흐름 속에 새로운 희망과 도전을 함께 맞고 있다'면서, '지금 세계가 안정되지 못한 것은 패권주의와 강권주의가 여전히 존재하며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국제 정치-경제의 구질서가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패권주의>와 <강권주의>는 미국을 겨냥한 중국의 외교 용어이다.
미국이 패권을 흔들고 있다는 정황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1991년의 걸프전은 물론이고 최근 들어서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중동 평화협상과 영국-북아일랜드 분쟁 타결에 주도적으로 나섰고, 1998년 10월 코소보 사태 때는 30 만 명에 가까운 알바니아 난민들이 그 해 겨울 동사(凍死)할 지경에 이르자, 미국은 NATO 회원국에게 전시 편제 명령을 내리고 4백30대의 전투기와 항모(航母)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지중해 6 함대 전력을 배경으로 밀로셰비치 유고 대통령을 굴복시켜 유엔 결의안을 준수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게다가 그 10월이 가기도 전에 이라크는 '유엔 무기사찰단과 협력 관계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하였고 이미, 지난 2월 이라크 측이 유엔의 무기 사찰을 거부함으로 34 대의 군함과 430대의 전투기, 4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가 흐지부지했던 클린턴 행정부는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각오로, 엔터프라이즈 항모 전단, 일본에 배치된 헬기 항모 벨로우 우드를 급파하고, 걸프 해역에 있던 아이젠하워 등 군함 23척과 수백 대의 전투기를 모두 집결하여 이라크에 대응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세계 정치 구도 하에서는 무력 침공에 의한 타국의 점령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경선의 변화도 없을 것이다. 새로운 천년에 국가간의 전쟁이 있다면 그것은 경제 전쟁의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다. 국가의 민주주의는 있어도 국가간의 민주주의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유럽 통합이 많은 나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이루어지는 것 역시 미국의 패권주의에 따른 구도 변화이라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사실, 엄청난 무역 적자를 내고 있는 미국은 경제대국으로 군림하면서 여전히 세계 경제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컬한 사실이다. 반면에 제조업 기반이 튼튼하고 무역 흑자 행진을 지속하고 있는 일본이 불황을 겪고 있는 이유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굳이 해석하자면, 미국은 무역적자국 임에도 불구하고 금융 시스템이 발달해 있고 헤지 펀드 등 국제 투기 자금을 지배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금융 시스템이 취약한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이야기하자면 지금 미국이 세계 경제를 주도하기 위해서 쓸 수 있는 무기는 오로지 투기 자금뿐이라는 것이다. 아시아 금융 위기를 미국의 패권주의와 유태계 자본가들의 합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 우리는 유태인의 행보(行步)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의 또 다른 전쟁의 형태는 경제전과 더불어 종교전(宗敎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한쪽은 유태인이고 다른 쪽은 아랍을 포함한 반(反)유태인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 같은 종교전의 시작을 유럽 통합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여하튼 우리는 경제적 측면에서, 또 정치적 측면에서 유태인들을 주시해야 한다.
필자가 언급하는 유태인은 지금의 이스라엘과 그 이스라엘 국민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누가 유태인인가 하는 문제는 미묘하기까지 하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스스로 자신을 유태인이라고 생각하고 남에 의해 유태인으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이 유태인이다. 유태교의 종교 사상은 여호와라는 유일신(唯一神)을 신봉하고 유태인을 선택받은 민족 즉, 선민(選民)으로 자부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유태인들은 예수를 일반 민중을 상대로 하는 종교적 인격체로 간주하며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으며, 다른 메시아가 나타나 지상천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유태인들이 방랑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紀元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울과 다윗 왕으로 시작되는 고대 이스라엘의 왕조(王朝)는 BC 6세기 초 건국된 신(新)바빌로니아 왕국에 의해 무너졌다. 신 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 왕)는 유태 왕국을 침입하여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그 지배 계급을 포로로 데려 온다. 이어 2 차례 더 침공하여 무려 4만5천명의 상층 계급인, 기술자, 지식인을 포로로 삼아 바빌론에 정착시킨다. 신 바빌로니아 왕국은 1 세기도 못 가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되었고 바빌론 포로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키로스 2 세에 의해 석방된다. 바빌론 포로 시절의 시련기에서부터 유태인들은 공동체(共同體) 운동을 시작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 신명기와 열왕기 등의 성경이 이때 쓰여졌고, 창세기의 천지창조도 이 시기에 유래되었으며 천지창조를 통해 그들의 종말론을 역투영(役投影)해 보려고 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바빌론 포로 시절 이후 유태 왕국은 멸망했으며 포로로 잡혀갔다 고향에 돌아온 이들을 유태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유태인의 디아스포라(Diaspora) 즉, 분산(分散)은 BC 4 세기 초,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더 제왕에 의해 망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19세기까지는 세계 유태인의 80%가 유럽에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 절반이 미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태인의 존재에 대해 인정해주려는 유럽의 분위기는 세계 1 차 대전 이후 영국의 전략적 견지에서 발표된 벨 푸어 선언(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 건설을 약속)과 1948년 이스라엘의 공화국 수립으로 이어진다. 산업 혁명을 겪으면서 몰락하는 귀족에게는 급진적 사상의 소유자로, 신흥 중산층에게는 직접적인 경쟁자로, 노동자 계층에게는 자본가로 백안시되고 문제 거리였던 유태인들이 중동 지방에 국가를 건설하게 되면서 유럽은 조용해졌을지 모르지만 중동은 난로 위의 주전자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일부 신학자들은 유태인이 세계 정복을 획책하고 있다는 증거를 들이대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시온 의정서(Zion Protocol)>이라는 책이다. 이는 1897년 스위스의 바젤(Basel)에서 열린 제 1차 시오니스트 회의의 회의록으로 알려져 있고, 그 의정서에는 유태인들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제안된 마키오벨리적(的) 전략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그들이 장차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의 식량과 연료와 정보망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료가 알려진 후 전 세계인들은 유태인들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히틀러는 이를 유태인 박해의 구실로 삼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온 의정서가 실제 시온 주의자들의 회의록이건, 아니면 반(反)유태인들의 음모이건 간에 의정서의 내용이 현실화되었다는 것이다.
세계 5대 식량 메이저 중의 상위(上位) 3 개 그룹은 모두 유태인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또한 석유의 7대 메이저 중의 '엑슨', '모빌', '스탠더드', '걸프'는 록펠러 집안이 지배하고, '로열 더치 셀'은 로스챠일드 가(家)에서, '텍사코'는 노리스 가(家)가 장악하고 있으며 영국의 '브리티스 패트로리엄'도 국책회사이기는 하지만 유태계 자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또 세계 정보망도 그들의 손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AP, UPI, AFP, 로이터 등의 세계 유수의 통신사들과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의 신문사, NBC, ABC 등의 방송사가 모두 유태인의 소유이다.
게다가 월스트리트는 이미 유태인이 장악하고 있으며, 아시아 금융 위기의 주범으로 서서히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헤지 펀드의 50% 이상이 유태인(이에는 조지 소로스도 포함된다)의 손에서 나온 것이며, 전 세계 인구의 0.3%에 불과한 1천4백만 명의 유태인 중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30%가 유태인이라는 사실, 미국 내 인구의 3%에 불과한 5백80만 명의 유태인 중 포춘지가 선정한 1백대 기업의 30 내지 40%가 유태인의 기업이라는 점, 상원의원의 10%, 백만장자의 20%, 아이비리그 대학 교수의 60%가 유태인이라는 수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러시아 역시 비슷한 추세이다. 유태계 러시아인들이 러시아의 정치, 경제, 언론, 학계를 주무르고 있다. 러시아 7대 신흥 재벌 중 6 명이 유태인이다.
여담이지만, 유태인과 한민족의 유사성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유태인과 한민족의 인사법이 "샬롬(평화)", "안녕"이라고 하는 점 (대개의 국가들은 Good morning, Bon jour 식으로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한다), 유태인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Abbi(아비)"라고 부르는 점, 글을 쓸 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점 (이 점은 아랍, 몽고, 일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흰 옷 입기를 좋아하고 모자 쓰기를 좋아하는 점, 음력 8월 15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한민족의 추석과 유태인의 초막절)로 지내는 점 그리고, 무궁화의 학명이 "Hibiscus syriacus" 즉, <시리아에서 온 꽃>이며 별명이 <Rose of Sharon. 샤론의 장미. 샤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라는 점등을 예를 들어 두 민족간의 유사성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셋째, 중국을 변화를 주시해야 한다.
1978년 덩샤오핑(등소평)의 권력 장악을 신호탄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의 기치가 올랐다. 덩샤오핑의 국부론은 '부유한 자본주의보다 빈곤한 사회주의가 낫다.'라던 마오쩌둥(모택동)의 평균(平均)주의와는 달리, '다같이 배고픈 것보다는 누군가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이 낫다.'는 <선부론(先富論)>이다. 덩샤오핑의 사상을 상징하는 <흑묘백묘론 (黑猫白猫論)>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경제)를 잘 잡는 고양이가 낫다는 실용주의다. 이렇게 시작한 개혁개방은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88년의 극심한 인플레 위기, 89년의 천안문 사태, 97년 덩샤오핑의 죽음도 이 거대한 흐름을 돌리지 못했다. 연평균 10%의 세계 최고의 경제 성장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세계 은행은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향후 25년간 평균 6.5 %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견한 바 있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은 15 배 늘었고 지난 20년간 식량 생산은 1억5천만 톤이 늘어 기아가 해결되었으며 중국 통계에 의하면 20년간 인구는 2억8천만 명이 늘었지만 빈곤층은 2억5천만 명에서 5천만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중국의 높은 경제 성장을 보여 주는 통계는 즐비하다. 중국 인구의 8천만 명 내지 1억 명이 95년 기준으로 40 만 위안의 재산을 가진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연간 소득 1 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층이 3천만 명에 이른다.
세계 은행에 의하면, 1997년 말 이미 중국의 GNP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7 위를 차지했다. 78년 206 억 달러이었던 대외무역액(세계 27 위)은 97년 3,251억 달러를 기록해 10위로 껑충 뛰어 올랐고, 78년 1억 7천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던 외환 보유고는 97년 1,399 억 달러로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이다. 게다가 홍콩의 외환 보유액 (928억 달러)을 합치면 세계 1 위이다. 이 같은 중국 본토의 고도의 경제 성장, 도시화, 강력한 리더십 외에도 중국에게는 <화교(華僑)>라는 또 다른 '중국인'이 있다. 화교들은 본국을 떠나 세계 각처에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하면서 중국과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유기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화교의 수는 줄잡아 6천만 명이며 이들이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은 약 3천 억 달러로 추산된다. 화교들의 2, 3 세까지 합치면 그 위력은 추정조차 불가능하다.
이들은 혈연과 지연을 통해 화상 경제권(Chinese based economy)을 구성하고 경제력을 성장시켰다. 이들은 자기 자본을 투자해 중국에 공장을 만들고, 중국을 공장으로 하여 제품을 생산한 후 전세계 화교 네트워크를 통해 제품을 판매한다. 많은 화교들은 서구 국가에서 태어나 그곳의 교육을 받았지만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며 중국에 투자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지난 1993년 11월 전 싱가포르 총리인 이 광요는 세계화상대회(世界華商大會)를 주최하여 25 개국의 800 여 화교 거상(巨商)이 참석한 가운데, '전세계 화교 기업인은 뭉쳐야 한다. 혈연과 지연을 통한 화교 기업인들간 무역 네트워크는 개인적 차원에서 끝날 게 아니라 조직화하고 체계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중국을 화교기업인의 공장으로 키워야 한다는 민족적, 역사적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고 역설했다.
동남아 경제에 대한 화교들의 영향력을 막대하다. 일본 노무라 증권에 의하면, 아시아 국가 중 화교 인구는 6%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장악하는 자본은 전체의 70%가 넘는다고 분석한 바 있다. 태국의 경우 인구 10%인 화교가 80% 이상의 자본을 가지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의 경우 중국계는 단 3%이나 75%의 경제력을 쥐고 있고, 필리핀은 15%가 60%의 경제력을 쥐고 흔든다.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막대한 달러가 중국에 유입된 것은 당연한 일이고 금년에는 마카오 역시 중국으로 반환될 예정이다.
1990년을 전후해 세계는 격변(激變)을 겪었다.
1989년 6월 4일, 중국 북경(北京)에서는 100 만 명이 넘는 학생, 노동자, 지식인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였고 정부 당국은 계엄군과 탱크, 장갑차를 동원하여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 군인들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소련에서는 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함께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 및 그라스트노스트를 기초로 한 일련의 개혁 정책의 여파로 자유화 물결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90년 9월 12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은 <대(對)독일 화해조약>을 조인, 독일의 통일을 인정하였고, 다수의 공산 국가들이 자유주의 시장 경제를 지향하게되면서 소련은 마침내 1991년 공산주의 포기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실감이 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해도 좋다. 96년 9월 당시 아시아에는 2억 달러 이상의 자산 가치를 갖는 회사가 1천3백 개이었다. 그러나 <전쟁>이후 5 백 개의 회사가 자기 자본 총액 이하로 떨어졌다. 투자전문회사 버크셔 헤데웨이 사(社)의 회장이며 월(Wall)가의 큰손인 워런 버펫의 자산은 약 430 억 달러이고, 그의 자산으로 아시아 전체 경제를 사들일 수도 있었다. 또 만일 미국의 GE(제너럴 일렉트릭) 사(社)를 구매할 수 있는 2천 430억 달러를 손에 쥐고 있다면, 동남아는 물론 한국과 중국의 모든 주식을 살 수 있고 남는 돈으로 인도 주식 시장의 대주주가 될 수도 있었다.
투기 자본을 무기로 삼은 헤지 펀드들의 무차별 폭격의 대가이었다. 미국자본 대 아시아자본의 제 1차 세계 경제 대전은 미국자본의 승리로 끝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의문은 이런 점에서 시작한다.
그 첫째는, 냉전(冷戰)이 막 내린 지금 우리는 과연 Pax Americana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Pax Romana는 200년, Pax Britannica는 채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했다. 그런데, 만일 첫 번째 의문의 대답이 '예스'라면 미국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점이 두번째 의문이 될 것이다.
또 이에 관련하여 97년에 불어닥친 아시아 금융위기는 자연발생적인가, 아니면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서곡(序曲)이었는가 하는 점이 세 번째 의문점이 될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다극화 시대, 글로벌(Global) 경제 시대에 무엇을 주목하여야 하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 또 다른 의문점이다.
역사(歷史)의 특징은 그것의 영속성(永續性)에 있다. 역사란 토막토막 잘려진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토대로 펼쳐지는 미래의 이야기이다. 1867년 유태계 독일인인 칼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는 함부르크에서 그의 대표적 업적인 <자본론>을 출판하였다. 마르크스는 그 이전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도덕적 감정으로 설명한 것과는 달리 자본제 생산 방법의 필연적 붕괴 과정을 변증법으로 설명하였다. 마르크스의 경제학 연구의 목적은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여 그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힘으로써 자본주의 모순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노동가치설을 설명 원리로 삼고 잉여가치론을 분석장치로 삼아 자본주의의 경제적 운동 법칙을 밝힘으로써 그 필연적 멸망을 증명하려는데 반생을 바쳤다.
어찌 보면 마르크스나 엥겔스, 바뵈프, 블랑퀴 등의 공산주의자의 출현은 시대적 업보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성공으로 평등 이념이 확산되고, 산업 혁명 이후 산업화를 겪으면서 자본가 계급이 출현하고 양산되는 과정에서, 마치 프랑스 혁명이 반봉건적 전제군주제를 전복하고 시민적(市民的) 자유와 인권을 천명하였던 것 같이, 마르크스주의(主義)는 산업 혁명의 여파로 유럽의 정치와 사회에 격심한 파동을 일으킨 자본가 계급(부르주아지)에 대립하는 새로운 이념 철학이 되었다.
그러나 염두에 둘 것은 마르크스가 애초부터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 계급)를 혁명의 주체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의 3 대 이념에 크게 고무 받았던 마르크스는 자신의 조국 독일에서도 프랑스식 민주 혁명을 수행하는 것을 실천적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프랑스에 비해 뒤떨어졌던 독일에서는 자본가 계급이 취약했고 이런 상황에서 부르주아지가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대신 노동자 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130년 후, 공산주의는 붕괴했다. 이는 공산주의의 한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우월성 혹은 자본주의의 극성(極盛)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역으로 말하자면, 공산주의(共産主義) 대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이념 대립에서 공산주의가 패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로 포장된 자본주의에 패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계자본주의의 거장(巨匠)이며 세계 금융계의 살아있는 신화(神話)라 불리는 또 다른 유태인인 헝가리 출생의 조지 소로스는 그의 최신 저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The crisis of global capitalism)>에서 현(現) 자본주의의 한계성과 불안정, 그것의 오류 등을 예를 들어 20 세기 최후의 승자로 불리는 자본주의의 약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두 유태인들의 자본주의에 대한 시각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소로스는 우선 고전 경제학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고전 경제학의 평형이론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때 공동의 이익이 극대화되고, 집합적 의사 결정으로 규제를 하면 시장 메커니즘이 왜곡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을 19세기에 <자유 방임(laissez-faire)>라고 했고, 소로스는 <시장 근본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시장 근본주의는 감상적이며 순진한 생각이고,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하면 세계 자본주의는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즉, 자본가들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움직이며 이를 견제하지 못하면 자본 축적이 불균형 형태에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점은 이미 마르크스도 간파한 사실이다. 소로스는 마르크스 이론의 결함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견제하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고 한다. 반면에 소로스는 세계 자본주의 붕괴의 또 다른 원인이 낙후하고 비효율적인 정치의 탓으로 돌린다.
소로스의 추구 점은 <열린 사회(Open Society)>이다. 열린 사회란 용어는 비판적 합리주의 인식론의 제창자이며 역시 유태계 오스트리아 출신인 칼 포퍼(Karl Popper)에 의해 쓰여진 <열린 사회와 그것의 적(Open society and its enemies) 1944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열린 사회의 의미는 나치나 소련 등의 전체주의 사회가 만든 <닫힌 사회>의 반대 개념이며 이런 열린 사회의 개념은 1989년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서방은 닫힌 사회(공산주의)에 대립하는 열린 사회였다. 그러나 냉전의 종식 이후 열린 사회는 더 이상 호소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이제는 전체주의보다 시장 근본주의가 열린 사회의 더 큰 위협 요소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8. 지금은 PAX AMERICA
우리가 과연 Pax Americana의 시대에 살고 있는 가를 추론하기 위해서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인구 세계 4위(중국, 인도, 러시아, 미국의 순), 국토 크기 4위(러시아, 캐나다, 중국, 미국의 순)의 국가이다. 경제력은 세계 1위이다. 미국은 풍부한 천연 자원 등 자연적 요소 조건을 충족하면서 동시에 제조업에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전세계에 단 2 나라(미국, 스웨덴) 중의 한 나라이다.
1620년 영국의 청교도(Puritan)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이주한 이래 제 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기 전까지 미국은 세계의 변방(邊方)에 지나지 않는 2등 국가이었다. 종전 이후 1929년, 세계 대공황을 겪으면서 미국 경제는 전면적인 구조 조정을 하게되었고,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연합국의 리더로서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냉전을 시작되고, 한국전쟁의 발발에 이르러서는 미국은 최대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64년 미국의 베트남 전에 참전한 이후 미국은 악몽과 같은 10년을 보내게 되었다.
급증하는 전쟁 비용으로 인플레는 심화되고 달러 가치는 하락하였으며, 미국은 경제뿐 아니라 사회적인 자신감을 잃게 된다.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뿐 아니라 1973년 연이은 1,2 차 에너지 파동으로 경기 침체(Stagnation)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이 장기화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도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의 통치기구는 경제력, 정치력으로 권위를 실추하였고 1976년 당선되어 <도덕 정치>를 내세운 지미 카터는 소련에 외교적으로 끌려 다니면서, 한반도 미군 철수 정책 등정치, 외교에 혼선을 빗고 경제도 살리지 못했다.
1981년 당선한 로널드 레이건은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를 주창하며, 군사력에서 소련을 누르고, 경제 침체를 타파하여 미국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목표 아래 개인과 기업의 세금을 줄이고, 고금리 정책과 금융 긴축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런 정책의 결과 물가가 안정되고 경기도 어느 정도 회복되고 실업률이 하락하면서 그 후 몇 년 동안 미국 경제는 다시 부활하는 듯 싶었다.
그러나 레이건의 경제 정책은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라 대응요법이었으므로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즉, 세금은 줄어 국고 수입은 급감 한데 비해, 소련에 대응하기 위해 국방비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 1982년 이후 미국의 재정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미국 정부는 국채와 공채를 무제한 발행하고 이를 팔기 위해 은행 금리를 인상하기에 이른다. 전세계의 돈은 이자를 쫓아 미국으로 쏠리고, 달러 값이 폭등하게 된다. 달러 값의 상승은 미국 수출의 감소와 수입의 증대로 엄청난 무역적자를 의미한다. 이 같은 미 정부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는 레이거노믹스의 결산이었다.
80년대 일본의 경제 부흥의 보이지 않은 천사(天使)가 바로 로널드 레이건인 것이다. 그러나 달러화의 붕괴를 우려한 서방 국가들은 달러 가치의 하락을 유도하였고 덕분에 엔화 가치의 절상으로 일본은 엔고 불황 시대를 맞게 되고, 그 덕으로 우리는 한 때 엄청난 수출을 맛 볼 수가 있었다.
레이건에 이은 부시 역시 레이건의 <재정 적자, 무역 적자>의 쌍둥이 적자를 해결하지 못했고, 레이건-부시의 12년 재임 기간동안 미국은 경제 불황에 허덕여야 했다. 게다가 소련의 붕괴로 미국의 방위 산업, 즉 무기 시장이 붕괴하면서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경제 역시 휘청거리게 된다.
1993년 47세의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된 클린턴은 <클리터노믹스(Clintonomics)>를 부르짖으며, 미국 경제 우선 주의의 선봉이 된다. 레이건과는 반대로 기업과 고소득자에 대한 고율 과세로 재정적자를 감소시키고, 국가경제위원회(NEC, National Economic Council)를 구성해 통상 전략을 짜고, 한 손엔 우루과이 라운드를 들고 개도국의 시장 개방을 강압하고, 다른 한 손에는 자유 무역이라는 깃발을 들고 오히려 미국 내 무역 장벽을 높여 수입을 제한하면서, 슈퍼 301 조를 들먹이며 타국의 무역 장벽을 무제한 허물기 시작했다. 클린턴이 요란한 성추문과 위증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직을 내놓지 않고 꾸준히 인기를 유지하는 이유 역시 이 같은 경제적 성과에 힘입은 유래 없는 미국 경제 호황의 덕분인지도 모른다.
사실 미국은 오랜 불황과 적자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경제의 요소 조건이나 수요 조건 모두 우수할 뿐 아니라 경제 발전의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는 나라임에 분명하다.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쥘 만한 요건을 '타고 난' 국가라는 것이다.
한 국가의 지도자 혹은 리더들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미국의 입장에서 오랜 시간 동안 지금과 같은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해 왔다고 한들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닐 것이다. 미국의 제국 건설이 그들의 바램이건 아니면 운명적 역할이건 세계 구도는 미국의 헤게모니의 서막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패권 유지에 아시아권의 국가 특히 중국이나 화교 자본이 방해가 된다면 이를 조절하거나 혹은 제거하거나 억압하려 할 것이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예측이 아니다.
1997년 느닷없이(?) 불어닥친 IMF 사태라 불리는 외환 위기는 어찌 보면 필연적이며, 미리 예정되어 있었고 매우 치밀하게 기획된 수순의 일환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래서 국내외의 일부 경제학자들은 IMF 사태의 원인을 <음모론>에 두고 있다.
그 음모론의 맥락은 이러하다. 냉전이후 정치적, 이념적, 경제적 라이벌을 상실한 미국은 Pax Americana 즉, 미국 패권주의(覇權主義)와 신 제국주의(帝國主義)를 갖게 되었고 미국으로 하여금 새로운 국가전략이라는 판을 짜게 하였다.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의 투기 자본을 이용한다는 것은 매우 전략적이며 동시에 전술적이기도 하다. 더욱이 90년 초만 해도 미국은 아시아의 대약진에 대한 일종의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 장기 전략 연구소 등 미국 정부 보고서를 보면, 세계의 GNP는 유럽, 미국, 동아시아와 기타 지역이 각기 4분의 1 식을 나누어 갖게 될 것이며, 특히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 동아시아의 비중은 더욱 커지게 되며, 한국은 2008년에 미국을, 2010년에 일본을 능가할 수 있게 되고, 중국은 2010년에 미국 다음의 경제 대국이 되며, 미국 경제 규모를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황색 인종에 대한 미국의 공포는 우리의 상상 이상인 것이다.
더욱이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약 800 억 달러의 자본이 순식간에 중국에 유입되었고, 대만과 화교권의 막대한 자본도 중국에 유입되었다. 현재 중국은 대만과 일본을 제치고 최대 달러 보유국으로 상승하였다.
게다가 유럽은 단일통화권을 구성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유로 랜드라는 단일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의 국제경제연구소의 프레드 버그스텐 소장은 이렇게 지적했다. '유러화 체제의 출범은 지난 45년간 유럽이 추진해온 경제적 통합의 종착점이요,나아가 유럽의 패권지향을 의미하는 정치적 통합의 출발점이다.' 즉 경제적 실익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유러화 체제는 Pax Americana의 구도에서 단일 패권의 지위를 누려온 달러화에 대한 통화 전쟁을 포고하는 것이며 나아가 유럽이 NATO의 핵우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 안보, 군사 노선을 채택할 것이라는 신호탄이다.
이 같은 동아시아 국가의 고도 성장이나 유럽 통합이 미국의 패권주의에 막대한 위협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에서 150 만 명이 넘는 실업자와 수천의 기업 도산을 유발한 IMF 사태의 시작은 이미 1997년 초부터 시작된 아시아권 국가의 증시의 폭락에서 유발된다.
1997년 초로 거슬러 가보자. 97년 4월 홍콩 증권 시장은 96년 10월 이후 최저 수준의 증시하락을 경험한다. 당시 홍콩뿐 아니라 호주,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한국 등 거의 대부분 국가의 증시가 큰 폭으로 하락하였으며 이 같은 아시아권 국가의 증시 폭락의 원인은 다름 아닌 미국 금리 인상이었다. 그러나, 4월 당시만 해도 IMF나 OECD 같은 외국 자본관련 단체나 한국은행이나 KDI (한국개발원) 등은 한국 경제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입장을 보였고, 다만 홍콩의 최대 증권회사 중 하나인 페레그린 증권사의 입장이 달랐을 뿐이다. 한국은 자산 디플레이션(주식 부동산 등 자산 가치의 급락)의 발발 가능성이 높으며, 200 억불 이상의 경상수지 적자를 보일 것으로 예측한 것이다.
홍콩 경제의 특징은 "정글 자본주의"라 할 수 있다. 마치 정글에 각종 동식물이 어울려 생존하는 것처럼, 홍콩에는 수많은 대기업, 중기업, 소기업, 영세기업들이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칙에 따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자유방임(自由放任)주의라는 것이다. 홍콩 정부의 기업에 대한 규제나 통제는 극히 미약하다. 기업을 꾸려나갈 수 있으면 살아남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수밖에 없다. 거의 한 세기동안 이 같은 방식의 경제 원리로 기업을 운영하던 홍콩인 들은 그 해 7월의 홍콩 중국 반환이라는 대 사건에 적지 않은 불안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 년 가까이 지난 지금의 결론은 홍콩의 중국화가 아니라, 중국의 홍콩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더 적절한 판단일 것이다.
정글 자본주의 막강한 위력이다. 여하튼, 홍콩 반환 이전의 홍콩 경제인들이 적지 않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갖았을 것이라는 예상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런 여파일까 ? 9월 들어 또 다시 홍콩 증시는 최저치를 기록한다. 이에 홍콩 정부는 '홍콩 증시는 훌륭하고도 투명한 조절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국제 투자가들의 투자 최적지이다.'라고 하며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홍콩 증시는 연일 계속 급락세를 보이며, 홍콩 당국은 긴급대책 수립에 들어간다.
9월의 홍콩 증시 폭락의 원인은 동남아 통화의 폭락사태에 맞물렸는데 태국 바트화는 38%, 인도네시아 루피화는 21%, 말레시아 링키트화와 필리핀 페소화는 15%, 싱가포르 달러화는 5% 하락하였다. 홍콩 달러 역시 들썩거렸고 홍콩금융관리국은 10억 달러 이상을 사용해 홍콩 달러 사수에 나섰다.
그 날은 목요일이었다. 10월 23일.
드디어 홍콩 증시는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불과 77일 만에 증시는 40%나 평가 절하되었다. 동남아 외환 시장을 공격해 큰 성공을 거둔 "큰 손(헤지 펀드)"들은 14년간 고정되어 온 <미화 1 달러=홍콩 7.78 달러>의 등식을 깨기 위해 무차별 공격을 감행했다. 홍콩 경제의 치명적 약점은 83년 미국 달러와의 연동 시스템을 채택하여 미화 1 달러=홍콩 7.78 달러라고 고정한데에 있었다. 즉 고(高)평가되어 있었고 무리하게 기존 환율을 유지하려던 것이 홍콩 정부의 실수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단기 금리는 무려 250%나 뛰어 올랐고 27일에는 미(美) 뉴욕 증시의 폭락과 더불어 유럽과 중남미, 일본, 호주 등의 모든 국제 증시는 폭락하기 시작했다. 뉴욕 증시의 폭락으로 빌 게이츠는 불과 몇 시간만에 무려 17억 달러 이상의 손해를 입었다.
그러나 미국 증시의 폭락이 홍콩 증시의 폭락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3년째 과열되어온 미국 주식의 과대 평가에 대한 조절 작업이라고 보는 것이옳다. 실제, 미국 증시의 하락은 예견되었던 것이었고 다만 그 시점을 알 수 없을 뿐이었다. 미국 증시가 폭락되었다고 하지만 97년 1월에 비해 여전히 20% 이상 높은 수준이었다. 즉, 폭락이라기보다는 조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 것이다. 실제로 뉴욕 증시는 하루만에 반등세로 돌아섰으며 안정을 찾았다.
미국은 일본의 홍콩 증시 개입을 원하지 않았고 은근히 경고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경우, 24일 이후 4일만에 1백 포인트 이상이 떨어지고, 28일 5백선이 무너졌다.
한국에 불어닥친 외환 위기의 궁극적인 원인을 집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하다.
그러나 나열하자면,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된 고비용 저 효율의 구조적 요인, 기아, 한보 그룹 등의 연쇄 부도 사태, 노사 제도와 금융 개혁 등의 실패, 금융 기관의 부실에 따른 대외신인도 하락의 내부적 요인과 아시아 국가의 외환 위기에 따른 우리 나라 대기업과 금융 기관의 타격 등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국내 단기 외채의 23%를 쥐고 있는 일본의 외환 회수가 외환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다. 국내 재벌의 도산으로 국가 신인도는 하락한데다, 홍콩 증시의 폭락으로 일본 금융 기관 중 8 개 기관이 도산하여 단기 차입이 완전히 막힌 상태에서 일본은 무려 130 억 달러를 회수해갔고, 전체적으로는 376 억 달러의 빚을 서둘러 갚을 수밖에 없었다. 왜 미국의 거대 투기 자본들은 아시아권 국가를 집중 공략하였을까 ? 왜 홍콩 증시를 연일 폭격하였을까 ?
한국이 그들의 직접적인 공격 목표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히려 파편에 맞아 제 몰에 쓰러져 버렸다는 것이 적당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아니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IMF 사태라 부르는 환란, 경제 위기는 우리들의 싸움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건, 미국 보다 정확하게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일부 유태인 자본가들이 영합한 세력과 중국, 보다 직접적으로는 화교 자본가간의 경제 전쟁인 것이다.
그럼에도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많은 국내 경제학자들은 한국 경제의 한계성, 한국 경제 구조의 결함, 나아가는 민족성까지 들먹이며 우리 스스로를 자학하고 있다. 정부와 몇몇 위정자들은 나서서 <착한 IMF 우등생 되기>를 자처하고 있다. 참으로 비극적인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10.위기의 중국
만일 IMF 외환 위기가 유태 자본가들과 미국의 패권주의가 오묘하게 결합된 <음모론>이라면 동아시아의 경제 위기의 끝은 명료하다. 즉, 중국 경제의 붕괴 혹은 커다란 타격으로 화교 자본가들이 주저앉을 때까지 진행될 것이다.
사실 지난 연말(1998년) 만 해도 질주하는 중국의 고속 성장에 그 누구도 브레이크를 걸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지금 중국을 상징하는 것은 북경의 천안문이 아니라 고층 빌딩을 올리는 수많은 대형 기중기 군단이다. 그러나 심심찮게 들려오는 중국의 경제 불안론과
미국-중국간의 갈등 구조는 새로운 천년을 앞 둔 중국의 또 다른 위기이다.
1998년 미 클린턴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장쩌민 주석은 '차이점은 인정하고 공통점을 찾아간다'라고 하며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유연한 외교술을 발휘했다. 이는 경제 발전을 국가 제 1 목표로 삼고 있는 중국이 서방의 자원과 기술을 포기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방 국가, 즉 미국의 중국 흔들기는 계속되고 있다.
98년의 대중(對中) 미국 무역 적자는 97년 보다 15.5%나 늘어난 529억 달러이며, 중국은 대미(對美) 무역 흑자가 210억 달러로 전년에 비해 28% 증가했다고 밝혔다. 99년 1월 26일, 미국은 불공정 무역 관행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슈퍼 301 조를 부활시켰으며, 무역 불균형을 시정하라고 중국에 경고하기에 이른다.
서방 언론은 광둥(관동)국제 신탁 투자 공사(GITIC)등 중국의 금융기관이 잇따라 파산하고, 99년 1월 브라질 경제 위기가 불어닥치자, 중국의 경제 위기를 확대재생산하여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점 외에도 1999년 2월 이후, 중국의 군사 위협에 대한 미국의 태도나, 중국 인권에 관한 부정적 견해의 보고서와 북한 미사일의 배후에 중국이 있다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라든지, 핵무기관련 장비 및 기술 유출을 둘러싸고 미국이 중국에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는 것, 중국이 대만을 겨냥한 600여기의 미사일을 배치했다는 의혹과 이에 반발한 미-일 주도의 TMD(전역 미사일 방위체계) 구축에 대한 중국의 성명, 중국의 오랜 숙원인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에 대한 미 의원의 반대 등등 중국과 미국의 관계는 급랭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한 중국 고위 당국자의 반응 역시 강력하다.
그러나 미-중 관계의 기초인 '3개 연합 성명' 즉, '하나의 중국',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 '중국이 유일한 합법정부' 등 수교의 3원칙과 1999년이 이 원칙을 토대로 수교한지 20년째를 맞는 해라는 점을 감안하자면, 미국의 중국 흔들기는 과잉 대응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갖게 한다.
중국 경제에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이다. 98년 3월 하이난(해남)성 후이통(회통)국제신탁투자공사이 파산했고, 6월에는 하이난 발전은행과 중촹(중창)신탁투자공사가, 10월에는 광둥(광동)국제신탁투자공사(GITIC)가 차례로 쓰러졌다. 지난 1월 11일 중국 당국은 GITIC의 파산을 공식 선언했으며 국내 투자자들에게 우선 변제를 결정, 127 개에 달하는 외국계 채권자들을 실망시켰다. 또 따리엔(대련) 국제신탁투자공사(DITIC) 역시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졌다. 잇따른 국제신탁투자공사의 파산으로 대외 신인도가 추락하고 중국 금융계의 외화차입코스트가 올라가는 등 불안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지방 정부의 투자공사들의 파산이 중국 전체의 경제 위기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잇단 파산은 중국 중앙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금융 개혁의 일환으로 봐야한다. 현재 40 개에 달하는 신탁투자공사가 40개 정도로 정리됨에 따라 대외 신용 경색이 우려되나 이들 신탁투자공사의 금융 자산은 전체 금융 기관이 차지하는 비중의 3.5%에 불과하다. 게다가 중국 정부는 또 5개 국영투자신탁회사 역시 추가로 폐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중국의 경제 위기론은 99년 3월 들어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주룽지(주용기) 중국 총리는 99년의 경제 성장 목표를 98년의 7.8%보다 낮은 7%로 정한다고 밝혔고, 중국 상하이 증권 시장의 외국인 투자용 B주식은 연일 하락세를 보였고 3월 8일 미국의 신용평가회사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S&P)는 중국 투자에 대해 신중을 기하라고 경고했다. 중국 당국은 외자 유출을 막기 위해 3월 9일 외화 예금 금리 인상을 발표했다.
중국의 실업률은 건국 이후 최고 수준으로 고하를 막론하고 공무원의 48%가 해고되었고 중국 정부 기구의 25%가 축소되었다. 국유 기업에서만 1200 만 명이 해고되었고 금년에도 그만큼 추가 정리될 예정이다. 위안화의 환율 고수로 대외 수출 경쟁력은 크게 떨어져 올 2월까지 수출액은 전년 대비 10.5%나 떨어졌다. 만일 아시아 금융 위기가 미국의 음모라면 미국이 원하는 데로 움직이고 있는 꼴이다.
거기다 이번에는 일본 우익세력들이 군사대국을 지향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여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지난 5월 3일로 시행 54주년을 맞은 소위 평화헌법에 대하여 정치권과 언론, 시민단체들은 신문 지면과 거리 집회를 통해 열띤 개헌·호헌 공방을 벌여 개헌이 가시화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는 일본의‘평화헌법’은 태평양 전쟁의 도발과 패전의 대가로 1964년 미 점령군에 의해 부과되었다. 특히 제9조는 “일본 국민은 국권의 발동으로서의 전쟁과, 무력에 따른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의 해결 수단으로써 이를 영구히 포기한다. 육·해·공 기타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전쟁의 영구적인 포기와 ‘전수(專守)방위 원칙’을 담고 있다.
우익 세력들은 이 조항에 의해 자주 국가로서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인식 하에 국제 사회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개헌을 타진해왔다. 그래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도 80년대 초 개헌 문제를 언급한 적은 있지만 재임 중 정치일정에 넣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지난 4월 말 퇴임한 모리 요시로(森喜郞) 전 총리도 국회 헌법조사회를 통한 논의를 지켜봐야 한다며 개헌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작금의 사정은 완전히 다르다. 사민당(옛 사회당) 등을 중심으로 한 호헌세력이 퇴조하고 개헌을 주장하는 보수 우익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가운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59)는 총리의 신분으로서 취임 직후부터 헌법개정을 들고 나왔다는 점에서 일본의 우익화가 어느 정도 위험한 상태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 당시 “집단적 자위권을 실현시키기 위해 헌법 해석 변경을 검토하겠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戰犯)들의 위패가 보관된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총리자격으로 참배하겠다”고 공언함과 더불어 헌법 9조와 집단적 자위권 문제, 유사법제, 총리직선제 등 정치권에서 다루기 민감한, 우익세력의 주장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되었다.
보수 극우파인 고이즈미가 총재에 당선되자 한국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민주당 전용학 대변인은 4월 24일 총재 당선에 대한 논평에서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의 와중에 전개된 총재선거 과정에서 고이즈미 총재는 우경화한 역사인식과 대외관을 표출, 주변국들을 우려케 했다. 우리는 이러한 고이즈미 총재의 역사관과 대외관이 일본 정부 정책에 어떻게 반영될지 비상한 관심을 갖고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며 한국 정치권의 우려를 우회적으로 표했다.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자 고이즈미 총리는 4월 26일 취임 후 “(헌법 9조는) 정치과제로 논하기는 어렵다. 총리 직선제에 한해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다소 유화된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극우 보수적인 의지까지 변한 건 아니다. 국내외의 반발이 비교적 적은 분야부터 손을 대겠다는 심산이다. 한번 헌법을 개정하면 다른 조항도 쉽게 고칠 수 있는 전례가 생기게 되어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위한 각종 법제를 얼마든지 개정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있기에 그는 “자위대를 군대로 보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자위대에 경의를 가질 수 있도록 법을 정비하고 환경을 만드는 것은 정치의 당연한 책무”라고 강조했다. 결국 지금은 힘들지만 역대 내각 중 최고인 90%에 육박하는 국민의 지지도를 바탕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헌법까지 개정하여 평화헌법에 의해 제약을 받았던 자위대의 역할을 막힘없이 증대해 가겠다는 계산이다.
최첨단으로 무장한 자위대
일본 자위대의 역사는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항복 후 육·해·공 전군을 해체시켰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공산 세력이 강해지고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군정의 명령으로 일본의 치안유지를 위하여 7만 5천여 명으로 구성된 경찰예비대를 발족시켰다. 경찰예비대는 1952년 보안대로 재편되었다가 1954년 현재의 자위대가 되었는데 ‘자위대’라는 명칭은 군대가 아니라는 의지의 표시였다. 따라서 자위대는 군대로서의 헌병, 군법 회의를 갖지 않는다. 자위대원의 범죄는 일반인 범죄와 같이 취급되어 일반 법정에서 다루어진다.
자위대의 최고지휘권은 내각을 대표해서 총리가 지니고 있지만 통상업무는 방위청장관에게 있다. 육상·해상·항공자위대가 있으며 총 병력은 1999년 기준 30만 명으로 26만 명인 경찰에 비해 오히려 더 많은 인력이다. 지원제에 의거하여 모집하는 자위대원은 군대 편제도 하사관 이상 간부 중심으로 되어 있어 언제라도 100만, 200만의 부대를 양산할 수 있으므로 자위대의 잠재적인 규모는 엄청나게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은 자위대와는 별도로 경찰 소속의 해상보안청을 운영하고 있는데 세계 최대 규모의 순시선 ‘시마시마’(6500t)를 비롯한 총 14만 4000여t에 달하는 함정 570척은 유사시 일본 방위에 동원될 사실상의 군사력이다 .자위대의 전력은 장비의 국산화가 시작된 1958년 이래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일본의 막대한 경제력과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기술이 뒷받침되어 모두 최신무기로 무장한 자위대의 전력은 세계 5위 안에 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군사비 지출 분야에 있어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인 일본은 전차, 미사일, 호위함, 전투기의 첨단화에 박차를 가해 왔다. 이지스함 4척, 203밀리 자주포, 90식 전차, 실전 배치를 앞둔 차세대 지원 전투기(F2)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대형 수송함 오스미(배수량 8900t)는 경(輕)항공모함으로 전용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전통적으로 강한 일본 해군력은 강대국들의 해군력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세계에서 미국과 일본만이 보유하고 있는 이지스함은 일명‘전자사단’으로 불린다. 이 배에 내장되어 있는 이지스 시스템은 약 200개의 목표물을 동시에 추적할 수 있고, 전후좌우 사면에 배치되어 있는 SPY-1D 레이더는 한 개의 탐지 범위가 120도이기 때문에 360도 전방위 수색이 가능하다. 이지스 시스템은 18개의 상대방 목표물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가공할 무기체계이다.
일본의 주요 함정들은 함령이 20년 이상 지난 것이 없는 세계에서 가장 젊은 함정들이다. 한 척에 500억 엔(한화 약 5000억 원)이나 하는 잠수함을 매년 한 척씩 퇴역시키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이 모든 최첨단 함정을 건조하는데 일본은 독자적인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잠수함을 찾아내는 데 정평이 나있는 P-3C기도 한국은 8기밖에 없는데 일본은 무려 100여기나 보유하고 있어 작전 영역에 비해 세계 최다라는 평가다. 위성 정보수집 분야는 2002년 정찰4기가 발사되면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핵무기 분야를 살펴보면 일본은 현재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방위청 관계자들은 “만약 주일 미군이 철수한다면 일본은 즉각 핵무기를 개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토로한다. 일본은 핵무기 개발의 잠재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핵무기 개발 요건은 원료, 기술, 자금, 운반 수단, 지도자의 의지로 볼 수 있는데 일본은 이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우선 플루토늄은 민간용 고속증식로에서 태운다는 명분으로 이미 확보하고 있고, 50여기의 원자로를 가동 중인 원자력 대국으로서 기술과 자금도 전혀 문제가 없다. 특히 아오모리현(靑森縣)에 건설된 재처리 시설과 농축 시설은 자체적으로 플루토늄 생산이 가능하며, 일본에는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기술자만도 수백 명에 이른다. 핵무기 운반 수단도 이미 확보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국제사회의 불필요한 의심을 사지 않겠다는 계산하에 개발을 늦추고 있을 뿐이다.
2t 이상 되는 위성을 3만㎞가 넘는 고도에 쏘아올릴 수 있는 일본의 로켓 수준도 이미 세계 수준급이다. 주변국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연료 충전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액체 연료를 사용하고 있을 뿐, 미사일처럼 고체 연료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전환하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일본 과학기술청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이처럼 일본의 첨단화된 군사 기기의 우수성을 입증한 실례가 있다. 10년 전 걸프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스텔스 폭격기는 단 한 대도 격추되지 않은 채 이라크 방공 레이더의 추적을 피하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 폭격기에는 일본이 제공한 민간용 특수 페인트가 칠해져 레이더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다. 적 레이더 파를 흡수하는 이 페인트는 일본이 고층 빌딩 내의 TV 수신 감도를 좋게 하기 위하여 개발한 페인트였다.
해외로 팽창하는 자위대
전력면에서 세계 5위권 내에 속하는 자위대의 활동 영역은 이론상 국내에 한정되어 있다. 헌법 제9조는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므로 자위대는 어떤 경우에도 영토 밖으로 나가 실력행사를 해서는 안 된다. 즉 ‘국가의 `자위’를 목적으로 하는 최소한의 실력 조직으로 그 임무는 ‘전수방어’가 전부이다. 그러나 현재 보이고 있는 자위대의 활동 반경은 헌법규정을 사문화한 지 오래다. 일본은 1990년대 초부터 미국의 지원 요청에 의해 걸프전에 파병한 것을 필두로 ‘국제사회에의 공헌’과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자위대의 영역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1992년 유엔평화유지활동(PKO) 파병을 명시한 ?국제평화협력법?성립으로 자위대는 국제 공헌을 명분으로 내걸고 캄보디아·모잠비크 등에 요원을 보냈다. 1994년에는 자위대법 제100조 8에 명시하여 자국민 보호를 위해 자위대가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199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폭동 당시 자위대의 C-130 수송기 6대와 해상 보안청 순시선 2척을 싱가포르에 파견했을때 내건 명분도 ‘자국민 보호’였다. 당시 해외 언론들은 민간기가 정상 운항하는 상황에서 굳이 자위대를 파병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며 파병의 진의를 의심했다. 자국민 보호보다는 자위대의 활동 영역 확대를 위한 명분 축적용이라는 지적이 훨씬 설득력을 얻었다.
또한 올 가을에는 싱가포르 앞바다에서 열리는 다국적 서태평양 잠수함 구난 훈련에 참가할 계획을 세워 두었다. 일본의 자위대가 다국적 연합훈련에 참가하기는 처음이다. 그리고 2002년의 환태평양군사훈련(림팩)때도 미·일 협력을 넘어 다국적 훈련형태로 참가키로 계획을 세워둔 상태이다.
5월 14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한 카타니 겐(中谷元) 방위청 장관은 국제연합 본부의 평화유지활동국(局)의 증원에 따라 여기에 자위대 고관을 파견하는 문제가 거론되자 “헌법의 취지도 국제공헌이므로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혀 향후 자위대는 계속해서 세계로 팽창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어떤 명분으로든 계속되는 자위대의 해외 파병을 두고, 외교안보연구원 윤덕민 박사는 “일본이 지역협력과 유엔평화유지기능에 관심을 갖는 이면에는 미·일안보체제의 틀 속에 있으면서도 무리없이 외교안보정책상의 자주성을 넓힐 수 있다는 현실적 계산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일본의 유엔평화유지에의 참가, 안보리 상임이사국화를 위한 외교적 노력 등 유엔을 중시하는 일본의 자세는 미·일 안보체제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자주적 견지에서 국제문제에 접근하려는 의도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고 분석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이 한반도에 진주해 주요 지역을 점령했을 때 내건 명분이 “농민반란으로 일본 국민들이 위험에 빠져 있기 때문에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만주에 처음 주둔한 이유도 “자국민 보호”였다. 자국민 보호를 위한 파병과 침략을 위한 파병은 역사적으로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기에 일본의 해외 파병은 일제의 침략에 지난 세월 시달렸던 아시아 주변국들의 우려를 다시 낳고 있다.
군사대국화를 합법화할 제도정비 착수 정권을 잡은 우익 세력들은 법제도 정비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199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폭동 당시 싱가포르에 자위대를 파견할 때 “위헌이다”, “아니다”는 논쟁이 국내외에서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파병이 늦어져 실효성이 떨어졌다는 것이 일본 우익의 견해였다. 이때부터 우익 세력들은 유사시에 신속히 출병할 수 있는 ‘유사법제(有事法制)’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1998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 등을 계기로 유사법제 문제를 공론화시켰다.
유사시(일본이 직접적인 무력공격을 받았을 때)에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유사법제 제정은 일종의 `‘전시동원법’으로 일본이 염원하는 교전권을 확보하게 된다. 일본 우익세력들은 지금도“독도는 일본 땅이다”, “러시아는 북방 영토를 조속히 반환하라”는 주장을 펴고 있으므로 교전권을 갖게 될 경우 무력 충돌도 불사할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런 선상에서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당선되자마자 카타니 겐(中谷元) 방위청 장관에게 “유사법제는 자위대가 문민 통제하에서 국가 국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하다”면서 입법화를 위한 작업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방위청에 유사법제 문제를 담당하는 방위정책과 소속인력을 10여 명 늘리고, 관방 부장관 밑에 방위청, 외무성 등 관계부처 담당자 10여 명이 참여하는 유사법제 검토팀을 설치하기로 했다.
게다가 일본 정치계의 제2인자인 자민당의 야마사키 다쿠(山崎拓) 간사장은 군대 보유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지난달 3일 ?헌법개정 - 도의국가를 향하여」란 제목의 책으로 발간했다. 이 책자에는 현행의 헌법 9조 `‘육·해·공군 전력을 보유하지 못하며, 교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삭제하고, 교전권포기 앞 문장에 ‘자위권 행사의 경우를 제외하고는’라고 항목을 추가하여 사실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자위권 속에는 동맹국이 공격을 받거나 자국 주변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도 교전에 참여할 수 있는 ‘집단적 자위권’도 포함된다.
또한 ‘총리 최고 지도권 아래 육.해.공군 기타 조직을 보유한다’고 명시해 군대의 보유를 가능하도록 했다. 이와 더불어 ‘국가의 안전을 지킬 의무 조항’을 신설하여 ‘국민은 국가의 안전에 기여할 의무를 진다’고 명시하여 국방의 의무를 강조했다. 일본의 헌법개정안이 군사대국화를 지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자 북한은 “해외침략에 환장이 된 자의 망동”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5월 4일 노동신문은 “군국주의 부활과 재무장화에 주력하면서 재침야망을 버린적 없는 일본이 지금에 와서는 어벌(배포)이 커져서 전쟁행위를 법적으로 명문화하고 그에 맞는 국가체제를 수립해 임의 시각에 해외침략기도를 실현하려 한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매우 위험한 침략세력으로서의 두각을 더욱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7일에는 “일본 대내외 정치에 깊이 간여하는 자민당 간사장이 헌법 수정을 공공연히 요구하고 헌법개정 책까지 제작, 배포하는 것을 보면 일본에서 평화헌법의 폐기와 전쟁헌법 조작이 정치화되고 그것이 국가 및 사회적으로 허용되고 있으며 일본 집권층이 그것을 공감·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며 전체 일본 사회가 우익화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정치권이 개헌 논의를 공개적으로 한다고 지적했다.
조선중앙통신도 논평을 통해 “일본 우익세력 사이에서 평화헌법 폐지 논의가 오래전부터 진행돼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지만 집권 자민당의 제2인자라는 간사장이 공공연히, 그것도 공식적으로 군사대국화를 합법화할 헌법개정안을 들고 나왔다는 것은 현 일본 정부의 정치·군사적 경향성을 특징지을 수 있게 하는 스쳐 지날 수 없는 사건이다.
야마사키 간사장의 주장대로 헌법이 수정될 경우 범죄적인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 침략야망에 가득차 있는 일본은 곧바로 군사대국화와 해외침략에로 질주할 수 있는 합법적인 토대를 완비하게 될 것이다. 특히 정규무력 보유와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헌법적으로 인정될 경우 일본은 걷잡을 수 없이 군사대국화가 되고 미국의 세계제패 전략에 가담해 아시아 재침에 나서게 되리라는 것은 과거 행적과 오늘의 정치·군사적 경향으로 볼 때 기정 사실이나 다름없다”고 경계했다.
동북아 평화에 새로운 냉기류 흘러
사실상 전쟁포기를 명시한 헌법 9조는 현재 위태롭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곧 개헌의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의회에서는 지난해 1월 ‘헌법조사회’를 구성하여 2008년까지 개헌을 완결할 것이라는 일정까지 마련했다. 물론 그 핵심은 제9조의 수정이란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고이즈미 총리는 5월 15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하여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에 관하여 “국회 결의(에 의한 행사 용인)도 하나의 방법이다”라고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 우회적인 길을 제시했다. 개헌에는 시간이 걸리므로 입법부인 국회가 결의하는 형태의 편법을 취해서라도 집단적 자위권, 즉 동맹국이 공격을 받거나 자국 근처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교전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겠다는 것이다. 군사대국화를 위한 각종 제도의 정비가 끝나면 견제장치가 없어지므로 열도의 강경파들은 본격적으로 군사대국화의 길로 나설 것이 분명하다.
우경화된 일본 정치가들의 개헌 움직임에다, 설상가상으로 ‘평화헌법’이란 굴레를 씌웠던 당사자인 미국이 나서서 개헌을 요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취임 후 미국은 일본에게 지역안보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해 왔다. 5월 13일자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일본을 방문한 리처드 아미타지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고이즈미 총리를 예방했을 때 “현재 일본의 헌법 해석은 미-일간 협력관계에 장애가 된다”며 미국 정부는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현행 법해석을 변경해 줄 것을 은근히 요청했다. 세계의 경찰을 자청해온 미국이 일본에 집단 자위권(동맹국이 공격을 받거나 자국 근처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교전할 수 있는 권리)을 요청한 까닭은, 최근 미국의 경제 위기에 따른 부담으로 중국과 동북아권의 안보는 일본에게 담당시키려는 뜻을 피력한 것으로 해석된다. 더욱이 일본의 방위청이 발표한 ‘2000년 방위백서’에 일본의 가상 적군으로 중국이 설정된 사실은 중국을 빌미로 미일간 동맹이 강화될 것임을 보여준다.
일본은 미국이 겨냥하는 동북아 질서에 편승하고 있어 새로운 대립과 긴장감이 형성되고 있는 이 때 한반도에 닥칠 파도가 더욱 걱정스럽다. 한양대 국제정치학과 김경민 교수는 “마치 19세기 말을 연상케 하는 대립 양상은 동북아와 한반도의 평화와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중국을 견제하고 미일간 동맹관계를 강화하면서 동북아를 둘러싸고 흐르는 새로운 냉기류에 대해서 우려했다.
미일 양국의 연대는 한반도 냉전구도의 청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한국의 정책과 배치되는 것으로 한국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지 주목된다. 한국 정부가 ‘교과서 왜곡 사태’에서 보여준 대로 정교한 전략적 마인드 없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의 뒤늦은 정책을 폈다가는 언젠가 공룡만해진 `제국주의 성향의 일본` 앞에서 국가 운명이 위태로워질 때가 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강대국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그 강대국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세계관과 역사관을 지니지 못하고 자국의 실리만을 추구하는 가운데 폐쇄적이고 국수적인 성향을 드러낸다면 그 주변국은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강대국이 전쟁을 도발한 적이 있는 데다가 그 역사마저 지우려 한다면 말이다. 일본은 개헌을 통한 군사대국화와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태평양전쟁에 대한 충분한 반성과 보상으로 과거를 청산하고 평화수호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랬을 때 진정 미래 지향적인 아시아의 동반자로, 도덕성을 갖춘 강대국으로 국제사회의 신뢰를 받는 일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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