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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개요
고린도는 그리스의 항구도시로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물질적인 풍요와 도덕적인 타락이 극심했습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을 통해 고린도에 교회를 개척해 약 18개월 동안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제 제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에베소에 머물러 있었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수많은 도덕적인 문제에 봉착해 있음을 들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기들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에 더 이상 얽매어 있지 않다고 확신하고 도덕적인 타락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러고도 자기들이 성령 안에서 행한다고 자부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상을 고쳐줄 목적으로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름받아 고린도교회에 문안한다고 하면서 골치 아프고 문제 많은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안에 그리스도의 증거(언변, 지식, 은사)가 풍성하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또한 주께서 결국은 고린도교회를 완전히 변화시키실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절).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내의 분파에 대해 책망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말씀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기들이 선호하는 설교자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게바(베드로)파’가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파’라는 것도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이용한 파도 생겼던 것입니다. 이런 분파운동은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입니다( 절). 몇몇 사람들이 바울을 높이자 그는 자신이 세례를 주어 자기 사람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복음전파를 위해 부름받았다고 말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복음입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리끼는 것으로, 이방인들은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절). 고린도교인들이 이렇게 교만을 부리자 바울은 그들의 과거를 들먹입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절).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지혜, 즉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십니다. 자랑하려면 오직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몇몇 이들이 바울의 말재주를 높이면서 추종하고 있지만 바울은 자신이 말 잘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절). 심지어 그는 복음을 전할 때에 겁내면서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을 설득하려고 말장난하지 안고 오직 성령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자기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바울에게서 세상의 지혜로운 말을 기대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내용이 은밀한 가운데 있다가 마침내 드러난 것인데, 이 십자가의 복음이 오직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영광의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이 오래 전에 정해진 복음의 비밀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스캔들이자 추문이지 자랑일 수가 없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절).
바울은 이 하나님의 지혜가 오직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못 박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에 하나님의 내밀한 것도 알아 차립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절). ‘육에 속한 사람’은 복음(하나님의 지혜)을 미련하게 생각하며, 또 깨닫지도 못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현대 교인들은 이 시대를 본받아 말씀을 순전하게 해석해주는 설교보다는 자신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이야기나 성공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에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고, 그 자신은 누구에게도 정죄를 당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어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너무 유치하게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 즉 영적으로 어린 아기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절). 고린도 교인들은 사역자들을 비교하고 재어 보았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가 복음을 위해 일하는 동역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낫고, 누가 못하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절).
교회의 터는 설교자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터이니 다른 터를 세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건축하는 이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설교한다 할지라도 마지막 날에 불타버릴 공적들도 많을 것입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절). 우리는 불타지 않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자랑해야 합니다.
무엇이 영광스럽습니까? 바울은 교회에서 사람이 영광을 받을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거룩하다고 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절)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존재들이니 한 사람을 내세워 높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을 인간의 기관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도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인간 지혜가 헛된 것임을 말합니다(욥 5:13; 시 94:11).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 것이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절).
고린도전서 4장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은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절). 판단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성령님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 높이므로, 바울을 깔아 뭉개므로 자신들이 높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자책할 것이 없다 할지라도 스스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마지막 날에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일입니다( 절). 그 판단만이 정확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선을 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마라’고 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 왕 노릇 하려고도, 자기 능력을 내세우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을 복음 전하는 이와 복음을 받은 이들의 모습을 대조합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세상의 조롱과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절). 반대로, 복음을 받은 이들은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 받은 이들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스승이 아니라 아비로서 고린도 교인들을 대했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완전하여졌다고 생각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가르치기 위해 편지 뿐만 아니라 디모데를 보내려고 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교회에서 가르친 것을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 후에는 바울 자신이 직접 가서 교만한 자들의 능력을 시험해 보겠다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절).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사도도 능력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바울은 글로에의 종들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 근친상간이 있었지만 교회가 권징을 시행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통탄할 노릇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교회를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몸으로는 떠나 있지만, 영으로는 고린도 교회에 함께 있어 그 사람을 이미 권징했다고 말합니다( 절). 바울은 그 사람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육체를 죽이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그의 몸을 죽이시는 것은 그들의 영혼은 살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징계없는 이들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교회에서 권징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가 다 죄인이지 않습니까?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다른 죄인을 정죄한단 말입니까? 죄악된 누룩이 교회에 퍼지지 않기 위해 권징합니다. 바울은 출애굽의 경험을 예로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므로 죽음의 재앙을 넘어가게(유월)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무교병(누룩없는 떡)을 급히 구워 출애굽했습니다. 이처럼 유월절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희생되셨습니다. 이제 교회는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제거해야 합니다. 반면에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떡처럼 행실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절).
바울은 자신이 이미 보낸 편지(고린도전서 이전에 보낸 편지가 있었음) 중에 음행하는 자들과는 사귀지 말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 말을 잘못 해석하여 불신자들과는 아예 관계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말의 뜻이 불신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알려줍니다. 만약 그렇다면 교인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의도한 것은 신자 중 범죄한 자들을 권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절).
고린도전서 6장
고린도 교회에는 교인들끼리 분쟁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교인들이 교회에서 이 문제를 풀지 않고 세상법정에 들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불의를 당하거나 속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의 법을 적용해 판단해야지 세상법정에 고소해 교회가 세상의 판단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권고합니다. 바울은 세상법정, 법관을 ‘불의한 자들’이라고까지 말합니다.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절) 너희가 세상을 판단해야 하는데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를 판단해 달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냐고 말합니다.
세상법정의 결정은 교회의 결정보다 결코 우선될 수 없습니다. 세상법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이 자기들의 문제를 그 법정에 고발하는 것은 불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법정에 가지고 가지 않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자기 욕심을 위해, 보복하기 위해 세상법정에 끌고 가는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온갖 욕망에 소로잡힌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으로 죄씻음받고,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들은 세상이 판단치 못할 것입니다( 절).
한편, 고린도 교회에는 스스로 신령하라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결혼을 부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결혼 외의 성적인 관계를 자유롭게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음행은 한 몸이 되는 것이고,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몸은 그리스도께서 사셨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집이 되었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절)
고린도전서 7장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질문해온 결혼과 재혼에 대한 문제를 다룹니다. 우선, 바울은 결혼 내에서의 성적인 관계를 결코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1-5절). 사람은 성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적인 관계를 무시하고 소위 영적인 결혼을 주장할 때에 잘못될 가능성이 더 많다고 말합니다. 결혼하면 내가 내 몸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배우자가 내 몸을 주관한다고 말합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절).
두번째로 바울은 결혼하지 않은 이들과 과부들에게 말합니다(6-9절). 바울은 결혼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고 있습니다. 독신으로 살 수 있지만 정욕을 제어할 수 없다면 결혼해야 합니다. 혹, 합법적으로 이혼했다고 하더라도 정욕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재혼하는 것이 낫습니다( 절).
이미 결혼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10-24절) 우선, 결혼한 사람들은 서로에게 성적인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불신남편이나 불신아내가 있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상황은 처음에 결혼할 때에 양쪽이 다 믿지 않았다가 어느 순간에 한쪽이 믿게 된 상황을 말합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배우자가 갈라서기를 원하지 않는 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같이 살다보면 불신 배우자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독신이든지, 결혼한 상태든지 하나님이 부르신 그 자리, 그 모습 그대로 살면 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절).
바울은 약혼한 이들에 대한 문제를 언급합니다(25-39절). 바울은 ‘임박한 환란’ 때문에 현재 상태로 그냥 지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아내에게 매인 자는 놓이기를 구하지 말고, 아내에게 놓인 자는 매이기를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절). 또한 바울은 ‘때가 단축’되었기 때문에, 즉 말세를 살아가고 있기에 인간관계 자체나 세상 물질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절). 결국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
고린도 교회는 또한 우상에게 바친 제물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한편으로 우상이나 제물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강한 교인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우상이나 제물을 두려워한 약한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강한 이들이 자기들의 자유를 마음껏 행사하므로 약한 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의 자유라고 주장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행동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한다 할지라고 그것은 오히려 무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절)
십계명의 첫째 계명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한 분 뿐입니다. 우상은 없는 신을 만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도 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이 존재한다거나, 그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되어서 그 제물을 먹으면서 거짓신들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절). 양심이 약하고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약한 이들은 강한 이들이 거리낌없이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담력을 얻어 제물을 먹지만 죄짓는 것입니다. 양심이 더럽혀진 상태로 먹기 때문입니다. 이에 바울은 먹는 것을 가지고 약한 이들을 넘어지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절). 식물이란 것은 먹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이 늘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먹는 것으로 인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그 권리행사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8장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적용시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기에 고린도 교회로부터 먹을 것을 공급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율법도 인용합니다(신 25:4). 그러나 그는 스스로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해서 먹을 것을 벌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에는 말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먹을 것을 요구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가 오직 배를 불리기 위해 전도한다’고 비방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복음전도에 장애가 없도록 하기 위해 당연한 권리를 거부했습니다( 절).
바울은 자기가 아무리 열심이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에(초대교회의 기둥이요 터였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값없는 것이기 때문에 값없이 전해야 하고, 자신이 누릴 권리를 주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즉 내 상(賞)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절).
바울은 어느 누구에게도 매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모든 사람의 종이 되려고 합니다. 바울은 많은 영혼들을 얻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나타났습니다. 카멜레온이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절). 그러면서도 그는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버림받을까봐 늘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바울은 사랑 없이 지식만 가지고 약한 자들을 넘어뜨린 강한 자들을 향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통해 경고합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바다 가운데로 지나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듯이, 고린도 교인들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석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 광야에서 멸망받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상숭배, 음행, 시험, 원망 등입니다. 이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절). 누가 약속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두렵지 않습니까?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 외에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절).
우리는 우상숭배를 피해야 합니다. 우상숭배가 무엇인지 말하기 위해 사도는 성찬상을 예로 듭니다. 성찬상은 그리스도의 피와 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절). 우리는 한 잔과 한 떡에 참여하여 하나됨을 누립니다. 이것처럼 아숭을 섬기고, 그 제물을 먹는 것은 귀신을 섬기고 귀신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한 몸이 되었습니까?
강한 이들은 우상과 제물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신전에 바쳐졌다가 시장에 나온 고기를 사서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신자의 초청을 받아 차려놓은 고기를 먹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물이라고 하는 말을 듣거나 그것을 주시하는 이들이 있으면 먹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마음대로 할 것이 아니라 남의 양심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유익보다는 남의 유익을 구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절).
고린도전서 11장
자유가 제한되어야 할 부분이 또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여자 교인들은 자유를 빌미로 스스로 남자같이 행동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예배시에 여자의 표시인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전부 벗어 버렸습니다. 사도는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으면 머리를 민 것처럼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단순히 패션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로마천주교에서는 미사시에 여자들이 머리에 무엇을 쓰도록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때 당시의 특정한 문화상황에서 나온 본문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오히려 본문의 의미를 왜곡한 것입니다. 바울은 창조섭리에 따라 여자들이 남자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절). 하지만 모든 남자가 여자로 인해 났기에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위해 났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성찬에 대한 분쟁도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성찬을 시행했습니다. 우선 그들은 먼저 먹을 것을 가지고 와 애찬을 나누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먹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종살이를 했기 때문에 늦게 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굶어야 했습니다. 교제의 도구였던 애찬이 오히려 사람들은 나누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뒤에 시행했던 성찬에 한 마음으로 참석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제정하는 것을 말하면서 성찬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성찬에 합당치 않게 참석하는 자, 즉 부주의하게 참석하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절).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가 하나되지 못하면 세상과 마찬가지로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어떤 사람이 신령한 사람일까요?(1-3절)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에 달렸습니다. 기독교인이야말로 신령한 사람인데 회당의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절).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 신령하다고 생각해 영과 육을 분리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과 말씀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를 받기만 하면 말씀이 없이도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받은 은사를 최고라고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은사를 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다양하며 다 한 성령께서 주신 것입니다(4-11절). 어떤 은사가 다른 은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은사주의자들이 깊이 깨달아야 할 부분입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절).
몸은 하나이지만 다양한 지체가 있듯이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붙은 지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 몸의 모든 지체들이 다양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듯이 성도들은 각기 다양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약한 지체와 천한 지체와 아름답지 못한 지체와 부족한 지체가 더 요긴하고, 귀하고, 아름답고, 존귀할 수 있습니다. 지체들이 자기가 잘났다고, 자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서로 싸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 안의 다양한 직분과 은사는 서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은사를 사모해야 하겠습니까?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절).
고린도전서 13장
고린도전서 13장은 불신자들도 잘 알고 있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이 사랑장은 세속적인 일반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내에서 다양한 직분과 은사를 받은 자들이 서로 연합하는 가운데 화합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방언과 신기한 예언을 한다 할지라도 서로 연합하는 사랑이 없으면 그 은사들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3절). 가장 좋은 길을 보여 주겠다고 하고는 사랑을 말하니 사랑이 제일 좋은 은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은사를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으로서의 사랑을 말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은사는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서로 세워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사랑은 어떻게 보면 단순하지만 다양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4-7절). 사랑은 오래 참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 사이에 진리가 등장합니다. 사랑의 특징 중의 한 가지는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절). 사랑과 진리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둘은 함께 갑니다. 사랑없는 진리는 냉혹하고, 진리없는 사랑은 맹목적입니다. 진리를 희생하면서도 사랑을 외치는 인본주의적인 교회들이 판을 치고 있는 이때에 이 특성에 특별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는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예언, 방언, 지식을 꺼집어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특별한 은사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고집하고 있지만 그런 은사들이 폐지될 때가 올 것입니다. 부분과 전체, 어린이와 성인, 지금과 완성된 때를 비교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지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3가지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 최고입니다( 절). 믿음과 소망은 사랑 안에서 구체적으로 살아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고린도 교회에는 특별히 방언과 예언의 은사가 지배적이었던 같습니다. 방언과 예언 중에 어느 것이 나을까요? 바울은 방언은 통역하지 않으면 예언만 못하다고 말합니다. 방언하는 자신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도 모르는 말을 아무리 많이 지껄여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 다 세우는 것이지만(원문에는 그냥 세운다는 말만 있지 ‘덕을’ 세운다는 말이 없음) 예언은 남을 세우고, 방언은 자신만을 세웁니다. 알아들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방언을 더 잘 말하는 것을 감사하지만 깨달은 마음으로 가르치는 말씀의 봉사, 그것이 더 중요함을 밝힙니다( 절).
방언의 역할이 무엇일까요? 바울은 이사야 28:11을 인용하면서 이 방언이 성령의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메시아되심을 확정하고, 메시아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저주를 확정하는 성격이 있다고 말합니다(21절).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 절)에서는 방언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예언은 믿는 이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라면 방언이 오늘날 폐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듣는 복음을 통해 불신에 대한 저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 개인적으로 방언이 계속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한편, 방언은 종교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예배할 때 여러 가지 은사가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왔습니다.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 등입니다. 그러면 방언이나 예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바울은 차례를 말합니다. 말하다가 다른 이들에게 무언가가 임하면 잠잠하라고 합니다. 혼자가 주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질서를 말합니다. 무슨 은사를 사용하든지 질서 있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절). 이와 연관해서 여자는 창조 규례상 예배시에 설교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품위있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교회의 예배원리, 교회정치원리를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스스로 신령하다고 주장한 고린도 교인들은 몸의 부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 결과 그들은 현재와 미래의 심판사이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렸습니다. 자기들은 이미 완전한 상태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몸의 부활에 대해 강조합니다.
우선, 바울은 예수님의 몸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강조합니다(1-11절). 자신이 받고 전한 것이 바로 복음인데 그 복음은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했다는 복음입니다. 성경에서 부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절). 목격자들이 있습니다. 바울 자신에게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 주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그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시고 사도로 세우셨으니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역설적으로 몸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하셨겠냐고 묻습니다( 절).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14-34절) 우선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이생이 전부이기에 우리는 죄 가운데서 망하였을 것이고,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절). 우리는 아담에 속해서 죽었고, 그리스도께 속해서 살아났습니다. 인생에 대해 왕 노릇하던 사망은 왕 되신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멸망 받았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모든 인생에게 위력을 떨치던 사망이 주의 발 아래 무릎꿇게 될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수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제일 좋은 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몸이 어떻게 부활할까요? 바울은 씨의 비유를 듭니다(35-49절). 씨는 죽어야 삽니다. 배아를 둘러싼 껍질부분이 썩어 씨 배아의 양분이 되어 주어야 씨가 발아하여 살아납니다. 씨앗에 장래 자라날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육체와 천체의 영광이 다 다릅니다. 썩을 것으로 심지만 썩지 않은 것으로 살아납니다( 절). 첫 사람 아담은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살려주시는 존재’이십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로 인해 영광스럽게 살아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혈과 육, 즉 옛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50-58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썩을 몸도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절). 우리는 사망을 향해 ‘너의 독침은 쓸모없다, 너는 사망했다’고 외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는 자들이니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바울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언급합니다. 안식 후 첫날에 헌금하여 모아 두라고 말합니다( 절). 급하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만에 빠져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범교회적인 사랑에 동참하라는 호소입니다. 바울은 지금은 고린도에 갈 수 없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가서 그들이 모든 연보와 그들이 보내 주어서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교제를 그렇게도 간절히 바랬습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방문할 계획을 말하면서, 자기가 가기 전에 디모데를 보내니 잘 영접하라고 당부합니다. 디모데도 동일하게 주의 일에 힘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를 영접하는 것은 자기를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복음 선포자를 영접하는 것은 사랑의 행동일 뿐만 아니라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남자다워라고 말하고,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절)고 말합니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 외에 복종할 이들을 말합니다.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동일하게 질서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사역자들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습니다. 바울은 아시아 교회들이 인사를 전하고 거룩한 입맞춤을 하라고 말합니다. 이후에 교회는 성찬식때 이 거룩한 입맞춤을 했습니다. 바울은 대부분의 서신을 다른 사람을 통해 대필했지만 이 고린도전서는 친필로 썼습니다. 이렇게 친필로 쓰면서 바울은 주의 사랑으로 마무리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끝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진실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절).
고린도후서 개요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들은 바울은 눈물로 고린도전서를 써서 고린도교회를 책망합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지 않자 바울은 서둘러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으나 오히려 모욕을 당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눈물어린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2:4). 그 후 바울은 디도를 보내어 권면합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했으며, 바울을 보기를 원한다는 고무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이에 바울은 본서를 써서 보내면서 너무 자학하지 말라고 말하고 복음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전합니다.
거짓선지자들 이야기도 합니다. 바울을 반대하던 거짓 선지자들은 바울의 실패와 고난을 아주 고소하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고린도 교회에서 행한 바울의 사역을 평가절하했습니다. 이들은 욥의 친구들처럼 약함과 고난은 불신앙과 불순종의 증거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약함 가운데서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성공을 바라고 있습니까? 능력을 원합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고린도후서를 통해 십자가의 약함과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깊이 묵상하도록 합시다.
고린도후서 1장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찬양과 감사로 본서를 시작합니다. 환란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전도여행 동안에 살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지키셨음을 언급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절). 이제 고난에서 위로로 넘어갑니다. 바울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고린도 교회도 고난뿐만 아니라 위로에도 참여하게 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절).
바울은 자기를 비난하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거룩하게, 진실하게 대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앙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은혜받은 이는 누구든지 은혜로 대합니다. 바울은 ‘주 예수의 날’, 즉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는 자신과 고린도 교회가 서로 자랑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절). 우리는 서로 부분적으로 아는 것 때문에 비난하고 조롱하기도 하지만 주님 오시는 그 날에는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를 방문하려는 계획을 변경한 것 때문에 비난을 받자 그것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가려고 계획한 것이 경솔하게 된 것이 아님을 먼저 말합니다. 그리고 장면을 조금 전환하여 인간의 약속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지켜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변명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절). 하나님은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성령님도 보내셔서 주의 백성을 인치시고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까지 고린도교회를 굳게 지키실 것을 확신합니다.
고린도후서 2장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들르지 못하게 된 것이 고린도 교회를 아끼기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1:23). 즉, 근심 중에 방문하여 교회를 근심되게 하지 않게 하려고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첫번째 편지를 쓸 때도 눈물 중에 썼다고 언급합니다. 그만큼 고린도 교회를 아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도우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근심되게 한 자는 교회를 근심되게 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를 교회가 벌 주었기 때문에 이제는 받아주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용서한 것은 곧 사도인 바울이 용서한 것이요, 그 용서는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입니다( 절). 교회는 천국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어떤 사람을 권징한 후에 그 사람이 회개하면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오기로 되어 있었던 디도를 만나지 못해 근심하면서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이런 근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바울의 무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게 하셨습니다. 신전에서 제사하면서 풍겨나오는 향기를 연상시키는데 이 향기는 이중적입니다. 복음은 사망의 향기를 나게도, 생명의 향기를 나게도 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절).
고린도후서 3장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하고 있는 복음의 영광을 보지 않고 단지 바울 개인만을 바라보면서 불평을 토해 놓았습니다. 바울은 사도들의 추천서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편지요, 추천사이지 않냐고 말합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절). 고린도 교인들은 복음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복음의 영광을 전하고 있는 사도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새 언약의 일군’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맺은 언약들을 새롭게 갱신하는 성취의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것을 바울이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새 언약으로 인해 구성된 무리라고 강조합니다.
바울은 구약과 신약을 비교합니다. 구약시대 모세의 직분은 율법 조문을 전달한 ‘정죄의 직분’이었습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율법의 특징은 정죄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후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뵈었고,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이 빛날 때에 온 백성들은 그 영광 때문에 모세 보기를 두려워합니다. 이때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 영광은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세가 그 사라지는 영광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말하기조차 합니다. 바울은 정죄의 직분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영의 직분’, ‘의의 직분’, ‘길이 있을 직분’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옛 언약 시대에 살아가듯이 수건으로 마음을 덮어 복음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절).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직분은 구약의 그 어떤 직분과는 비교도 되지 못할 놀라운 영광의 직분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해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비취게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위하여 자기들이 교인들의 종이 된 것을 전파했습니다( 절). 복음에는 주님이심과 종됨을 선포하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그 무엇이 아니라 그 누구입니다. 복음은 곧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고, 그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신(사탄)이 사람들을 혼미케 하여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 영광의 광채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미혹에 빠진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들의 외형적인 모습만 바라보므로 사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영광스러운 복음을 무시하기조차 했습니다.
복음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전파했던 사도들은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영광스럽지 못했습니다. 복음 자체는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단지 질그릇같은 형편없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룻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절). 질그릇같은 사도들은 늘 죽음의 위협 앞에 처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음이 영광스럽듯이 그 환란 뒤에 올 영광을 바라보므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절). 그렇습니다. 보이는 환란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영광은 영원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늘 죽음의 위협 앞에 놓여 있었던 바울은 이제 죽음 이후의 문제를 논합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육체)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죽으면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적인 성공과는 관계없이 핍박받은 성도들은 영광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벗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덧입기를 바라며 탄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보증으로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절).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말고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차라리 죽는 것을 더 원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절). 이런 소망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이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복음을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이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한 이는 그 분의 살아나심에도 연합하여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살려주신 분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창조로 인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절). 새로운 피조물은 이제 세상을 그리스도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인인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고린도후서 6장
바울 일행이 이렇게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할진대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절). 여기서 바울은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사 49:8). 이미 메시아의 시대에 돌입해 있는 지금이 바로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직분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많이 수고하였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받은 수많은 환란이며, 자기가 가진 태도며, 자기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중성, 아니 역설적인 모습을 말합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다는 말로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아주 인상깊은 말을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절). 고린도 교인들의 반응은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할까요? 바울은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넓혔습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보답하는 태도로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절). 마음을 넓힌다는 말은 그냥 양보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해 서로 용납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마음을 넓히라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을 말합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타락한 유대인들과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일 수 있습니다. 타락한 유대인들과 깊이 교제하는 것은 새 언약의 영광을 가로막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 어떤 우상숭배도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절).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나와야 합니다.(레 26:12; 사 52:11). 세상을 떠나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에 속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영광을 가로막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고린도 교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오직 그리스도를 전하는 바울을 진정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바울은 당시 말장이들처럼 불의를 행하거나 해로운 일을 하거나 속여 빼앗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런 의로움을 내세워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무조건 영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낮추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담대한 것도 많고, 자랑할 것도 많고, 위로와 기쁨도 많다고 말합니다( 절).
바울이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 밖으로는 분쟁과 소요, 안으로는 겁에 질려 떨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보낸 디도가 와서 고린도 교인들이 이제는 바울을 사모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잘못을 애통해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바울은 큰 위로를 받습니다. 바울이 전에 편지를 보내어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했었는데 그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거룩한 근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절). 세상 근심이 아닌 이 거룩한 근심은 7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슬픔은 열성, 변호, 의분, 두려움, 그리워함, 열정, 징계를 특징으로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이런 회개로 말미암아 디도가 안심한 가운데 바울에게 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디도를 보낼 때에 고린도 교회를 자랑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절). 디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를 영접하고 바울의 말을 전한 것을 순종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도 놀랍게 변화될 것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바울은 극심한 기근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해 달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런 기근시에 유대인들로부터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헌금의 의미를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절). 마게도냐 교회는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도록 연보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복음을 받았고, 진실한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면 연보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예수님이 부요하신 분이었지만 성도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의 가난이 우리의 부요함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1년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고, 이제는 그것을 완성할 시점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연보를 요구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를 가난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평균케 하려는 목적입니다( 절). 바울은 이 구제 헌금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만나 사건과 연결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젊은이들은 정해진 양보다 만나를 조금 많이 거두었습니다. 늙은이들은 조금 적게 거두었습니다. 가족 단위로 모아보면 모두가 먹기에 충분했습니다. 욕심을 내어 필요없이 많이 거둔 경우에는 만나가 하루만 지나면 상해서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워온 것을 가지고 나눌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평균케 하는 만나 사건을 구제헌금에 적용했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절).
바울은 자신이 디도를 미리 보낸 것은 바로 이 연보를 준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이들도 보냈는데 이것은 바로 이 ‘은혜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직접 이 모든 거액의 연보를 챙겨서 가면 비방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절). 바울은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시험에 들게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일을 자원하여 하려고 했던 디도를 자기 동료요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함께 보낸 다른 이들을 ‘교회의 사자’,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야말로 복음에 합당한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가난한 마게도냐 교회들이 힘에 지나도록 구제헌금을 한 것은 고린도 교회가 1년 전부터 준비해 왔다는 말을 한 것도 작용했습니다.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절). 이처럼 거룩한 격동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바울은 다른 교회들에 고린도 교회를 자랑한 것이 사실임을 보이기 위해 구제헌금을 잘 준비하도록 디도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을 보냅니다.
어떤 마음으로 연보해야 하겠습니까?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하되 억지로 하면 안되고, 오직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절). 하나님은 은혜를 넉넉하게 베푸시는 분이요, 또한 우리가 나누기 위해 넉넉하게 공급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구제하는 이는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임을 증거합니다(시 112:9).
우리가 즐거워하며 구제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을 씨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추수할 열매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구제헌금을 ‘봉사의 직무’라고 표현합니다. 이 직무로 인해 성도들의 부족한 것이 보충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도움받는 이들은 도와주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구제헌금, 즉 연보는 성도의 교제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제헌금은 교회의 직무 중에 필수적인 한 부분입니다. 집사직이 바로 이것을 위해 세워졌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바울은 거짓 사도들을 대항하여 자신의 사도직이 정당함을 변호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겸손과 담대함으로 행한 것을 말합니다. 거짓 사도들은 육체를 자랑했지만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싸움이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함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이론’과 ‘모든 교만’과 ‘모든 생각’을 무너뜨려 그리스도에게 무릎꿇고 복종하게 해야 합니다( 절).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복종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외모만 보고 판단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세우려고 일했기 때문에 겸손히 일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권세를 가지고 횡포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은 바울의 편지가 무게와 힘이 잔뜩 들어있지만, 실제 바울을 대하면 너무나 약해 빠졌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조롱했습니다. 바울은 편지로 말하는 자신이나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신이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절).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을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남이 이루어놓은 것을 가지고 범위를 넘어서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를 헤아리고, 스스로 자기를 비교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서로 대립하고 자랑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범위 밖의 자랑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고린도에까지 이르렀고, 고린도를 지나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이루어놓은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스스로 자랑한다고 해서 높아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옳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주님이 칭찬하시는 사람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절). 즉, 자랑하는 자는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바울은 거짓 사도들을 사단의 일꾼들이라고 정의합니다. 뱀이 하와를 미혹했듯이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유혹하여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도록 합니다. 거짓 사도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른 영을 받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게도 고린도 교인들을 그들을 잘도 받아들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아 고린도 교인들을 정결한 처녀로 잘 준비하여 남편인 그리스도께 중매했는데( 절) 이것을 몰라 줍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잘도 속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짓 사도들은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는 자들인 양 자랑하고 다녔으며, 자기들의 노력에 대한 댓가로 물질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사단의 일꾼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따라 다녔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낮추어 복음을 값없이 전하였습니다( 절). 이것이 어떤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도리어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전하는 것이 뭔가 부족해서 저렇게 댓가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하도 답답하게 생각한 바울은 거짓 사도들처럼 자기를 자랑해 보겠다고 합니다(16-33절). 바울은 거짓사도들과 비교할 수 없이 수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출생적으로 보나, 수고로 보나 자랑거리가 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가 수없이 위협을 무릎쓰고 복음을 전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보다 늘 교회를 위해 염려했습니다. 바울은 약한 이들을 위해 약하고, 실족한 이들을 위해 애가 탔습니다. 이제 바울의 본심이 드러납니다. 그가 지금까지 자랑한 것은 역설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굳이 자랑한다면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절).
고린도후서 12장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놀라운 환상을 본 어떤 한 사람을 아는데 그런 사람은 자랑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가 말한 그 사람, 놀라운 환상은 본 사람은 바로 자신입니다. 바울은 육체에 가시(끊이지 않는 육체의 질병이나 고통?)가 있어서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그것을 없애주시면 복음을 훨씬 더 잘, 능력있게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러 있게 하시려고 계속해서 찌르는 가시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적극적으로 기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절).
바울은 자신이 자랑해 보겠다고 한 것 등을 가지고 자신이 어리석은 자처럼 행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칭찬을 들어 마땅합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바울은 사도의 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했습니다( 절). 이것은 성령께서 사도의 표로서 주신 것입니다. 또한, 사도는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이제 바울이 세번째로 고린도를 방문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방문을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바울이 폐를 끼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을 나누어 주기 위해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듯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준비합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 내어 주리니....”( 절).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속이거나 교회로 인해 이득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보낸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이 오직 걱정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가 바라는 대로, 아니 복음이 요구하는 대로 행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미리 회개하므로 바울이 오는 것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바울은 세번째로 고린도에 방문할 때는 범죄한 자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외모만 보면서 연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연약하게 보인 것은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약한 자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셨습니다( 절).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약한 자 같으나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했기에 강한 자입니다.
이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확정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절). 복음 전하는 이도 버림받지 않고, 복음 받은 이도 버림받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버림받은 것처럼 보여도 우린느 진리를 위하고, 선을 행합니다. 복음 전하는 이들은 자신이 약해져도 복음 받는 이들이 강하고, 온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떠나 있으나 대면할 때나 넘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우기 위해서 일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권고합니다. 자기가 보내는 편지로 치료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절). 바울은 권고 후에 아름다운 축복을 빕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축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절). 이것은 축도, 즉 복 달라고 비는 기도가 아니라 ‘강복선언’, 즉 복이 내리기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삼위 하나님을 대신하여 복을 선포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이 복은 오직 믿음으로 ‘아멘!’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