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의 문
인간은 살면서 서로에게 작용하고 반응하지만 본질상 육신을 입은 영혼으로 모든 걸 홀로 겪고 누려야 할 운명을 진 고립된 우주들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추론적이거나 심지어 상호간의 감정이입인 ‘들어가 느낌’이 가능할 정도로 닮아있다는 점에서 최면이나 자기최면을 통하거나 체계적인 명상이나 적당한 약물을 복용함으로서 평소의 의식상황을 변화시켜 환상가, 영매, 신비가가 말하는 일종의 내면세계를 알 수 있으므로, 원시종교나 멕시코와 미국 남서부의 인디언들이 신적인 존재로 숭앙한 페요테라 불리는 뿌리식물의 독특한 유효성분인 메스칼린이 약리학자들이 알고 있는 어떤 물질보다도 더 심오하게 의식의 질을 변화시키면서도 덜 유독하다는 점에서 기꺼이 실험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주관적 환상의 세계는 일어나지 않고 가장 큰 변화는, 객관적 사실의 영역인 꽃이 ‘그냥 있는’ 곧 아담이 자신이 창조된 아침에 보았던 매 순간마다의 적나라한 존재의 기적인 영생인 무상, 순수한 실존인 동시에 영속적 소멸은, 표현할 수는 없지만 자명한 역설에 의해 모든 실존의 신적 원천임이 드러나게 될 미세하고 고유한 특수성의 집합이자 나보다는 복된 나의 비아가 잠시나마 숨도 못 쉬게 옥죄는 나로부터 놓여나서 보고자 했건 무엇이며, 공간은 위치와 삼차원이라는 핵심에서 벗어나 정신이 공간적 범주를 통해 세상을 지각하지 않음으로 크기와 위치가 아니라 존재와 의미에만 관심을 가지게 하고, 시간은 내 시계가 다른 우주에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지속이나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묵시로 구성된 영속적인 현재였고, 사물들은 사진사나 과학기록원으로서가 아니라 형체와 이 형체가 시야인 그림의 공간 안에서 만들어내는 관계들에만 관심을 가지는 순수한 심미가로서 보고 있었다.
이러한 경험에서 인간의 뇌와 신경계와 감각기관이 오로지 생존을 위해 무엇을 생산하지 않고 대개는 제거하려는 기능을 가지게 됨으로서, 각각의 잠재적인 ‘편재정신’으로 축소된 자각의 내용을 형성하고 이를 표현하려 언어라 불리는 상징체계의 암시적 철학을 만들어내며 면면히 발전시켜 왔다는 것에서, 개인은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경험의 축적된 기록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에서 수혜자인 동시에 언어 때문에 축소된 자각이 유일한 지각이라는 믿음을 강화하게 되고 현실감각이 교란되어 너무도 쉽게 개념을 소여로, 말을 실제의 사물로 착각하게 되는 피해자인 이므로, 이를 종교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 세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언어로 표현되는 축소된 지각의 우주이고 인간들이 제멋대로 접촉하는 여러 ‘다른 세상들’은 편재정신에 속하는 지각의 총체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명료해진 지각이 사랑과 그의 실천은 차치하고서라도, 어떻게 인간관계와 해야만 하는 잡일들과 의무에 대한 합당한 관심과 조화를 이룰 것인가에 대하여 메스칼린이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의 복용자들이 내가 눈을 뜨고 보았던 변모된 그 외부세계만큼 자명하게 ‘무한하게 거룩한’ 어떤 내면세계를 역연히 하나의 소여로서 발견한 후에 공포를 느끼는 것에 있으며, 이를 신학적 언어로 말하자면 인간의 자만이 신적 순수와 인간 스스로 악화시킨 단절이 신의 무한성과 양립할 수 없음에 기인하므로 단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름들에게 이 문제를 묵시의 형식으로 제기할 뿐,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답은 바른 행위와 한결같고 순리로운 바른 경각심으로서 바른 세계관을 실천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만이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자의식적인 자아성을 초월하려는 모든 명상 중에서도 가장 정적주의적인 것조차도 나름의 윤리적 가치를 지니고 모든 도덕의 최소한의 절반이 부정적이라는 요점이 해악을 멀리하려는 것이고, 명상을 최고조로 실천한다면 이들은 그 다른 나라의 유익한 영향력이 그것이 없어 누가만년 죽어가고 있던 암흑 속에 갇힌 자아들의 나라로 흘러들어오는 통로가 될 것이기에 참을 수 없는 자아의 현실과 혐오스러운 환경으로부터의 빈번한 화학적 휴식이 분명히 필요하다는 것은, 페요테 조각을 먹는 인디언들이 그 습관 때문에 신체적,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는 사례에서 단기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닌 장기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우리 고통 받는 종種을 풀어주고 달래줄 새로운 약물은,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단순한 진정이나 몽환상태나 전능의 망상이나 억제로부터의 해방감보다 더 재미있고 더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의식의 변화로 만들어야 한다.
지식인들은 눈이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지각되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낯설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못할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므로, 메스칼린 체험이 가톨릭 신학자들이 ‘무상은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잠재적으로 도움이 되기에 받을 수 있으면 감사히 받아야 할 것이고, 일상적인 지각의 관습으로부터 탈피해서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몇 시간동안 생존문제에 사로잡힌 동물이나 말과 관념에 집착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편재정신이 이해하는 바대로 직접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외부와 내면의 세계를 보는 것으로, 누구에게나 특별히 지식인들에게는 측량할 바 없는 가치를 지닌 경험이다.
천국과 지옥
천지사방에 널린 물질적 사물로부터 이끌어낸 직유를 사용하지 않고 정신적 사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어렵고 불가능한 것은, 지리적이고 동물적인 언어에 의한 생생한 비유가 정신 안의 극지의 본질적 타자성과 그 거주자들의 완전한 자율성과 자족성을 아주 강력하게 표현해주기 때문에 있으므로, 이러한 개인의식이라는 ‘구세계’와 대륙들을 가르는 바다 너머의 일련의 ‘신세계’로 구성된 사람이 신세계로 가는 방법은 영혼이 메스칼린이나 라세르그산과 같은 화학물질의 도움을 받거나 아니면 본질상 심리적인 정신의 대척점으로의 통행인 최면에 의해 완성된다.
이러한 메스칼린의 영향이나 깊은 최면 아래에서 조우하는 경험이 기이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규칙성이 있는 공통적인 특징으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안으로부터 나오는 찬란하게 빛나는 빛의 체험에서, 정신의 대척점에서 자력으로 존재하는 비정상적인 거주자들은 주어진 외부세계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자연적인 상태로 채색되고 언어로부터 자유로운 개념적 사고체계 밖에 있다는 의미로, 그것은 사물은 극도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소여인 우주의 탈인간적 타자성의 시현이고 환상유도 물질인 초자연적인 빛, 색, 의미는 고립된 채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대상을 개조하거나 대상에 의해 표현됨으로서, 각색의 움직이는 살아있는 기하학적 형태로 시작하여 구체성을 띠는 사물로 지각된다.
그리고 신들, 죽은 사람들의 혼들, 천의무봉의 태곳적 사람들이 사는 ‘다른 세계들’의 모든 문화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환상체험에서, 황금시대의 특징인 환상으로 수송하는 초자연적인 빛, 색, 의미와 더불어 유도성 환상체험과 자발성 환상체험 사이의 또 민속과 종교에서 말하는 요정의 나라와 천국간의 밀접한 유상성에 놀라게 되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다른 세계’가 본질적으로 생경하게 설명할 수 없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풍경화도 환상체험에 자주 나타나는 특성이지만, 이러한 환상체험에 천국과 지옥이 있음은 행복한 환상은 보통 신체와의 분리감인 탈개체화의 감정과 연결되지만 부정적인 체험은 종종 아주 특별하고 특징적인 신체적 감각을 수반한다.
천국이 지옥으로 변하는 부정적 환상체험은 주로 신체적인 이유의 결과로, 이것을 순수하게 심리적 수단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공포, 분노, 증오, 악의 등의 심리적 기초 위에 세계의 모든 종교적 전통에서 볼 수 있는 구원신앙의 교리가 세워지고, 종말론자들이 언제나 자신의 합리성과 도덕성을 심리적으로 경험하는 엄연한 사실과 조화시키는 것에 버거워했던 이유 또한 행위만으로는 무력하므로 환상체험이 축복이 되도록 보장해 주는 것은 신앙 즉 사랑의 확신임을 알았기 때문에 있으므로, 정신의 그러한 본질로 인하여 모든 위대한 종교적 전통이 죽음의 시점에서의 정신 상태를 대단히 중시한다는 점에서, 참혹한 지경에 빠지는 것이 해방이 아니듯 ‘천국에 가는 것’도 해방이 아니라 ‘심적 근원’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전망대일 뿐이다.
인간의 정신을 형성하는 약물
에틸알코홀과 아편제에 대한 갈망이 큰 사람들이 외치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가 아니라 ‘자신을 노예로 삼은 뒤 죽여 달라’는 구호에 대하여 각각의 개인은 고유하며 많은 면에서 같은 종에 속하는 구성원들과 다르기 때문에 어떤 단순하거나 단일한 대답이 없다는 것이 역설이자 신비인 것은, 그것이 화학과 정신병리학, 고통의 경감, 나쁜 사회에의 순응 등의 문제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문제와 혹은 신학적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싫어하는 곧 우상을 섬기듯 아끼는 자신에 대한 혐오가 상관관계이며,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때때로 잠재적이지만 때로는 의식적이며 열정적으로 표출되는 자신의 개체성이라는 감옥으로 부터 탈신도주하려는 욕망인 자기초월의 충동이며, 그리고 이러한 충동 때문에 신비신학과 영성수련과 요가가 있고 또한 이것 때문에 알코홀 중독과 마약 중독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소의 각성의식이 아주 유용하며 필수적인 정신 상태라고 해도 유일한 형태의 의식이 결코 아니며 모든 상황에서 최선의 의식도 아닌 것은, 동시에 몇 개의 수준에서 존재하는 완전한 고등종교의 추상적 개념이 마지막으로 신적인 원칙 안에서의 만물과의 일체감인 신과의 합일을 체험하는 특별한 종류의 감정과 직관으로 존재하듯이, 신비가가 약물에 취한 상태를 신에 취한 상태로 비유한 것은 그가 평소의 자아와 자각양식을 초월하기만 하면 자신의 환상을 확대하여 측량할 수 없는 존재의 기적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에 있음으로, 이러한 신비체험은 이를 경험하는 사람이 자신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으며 또 덜 자기중심적이고 더 창조적인 삶을 살도록 하지 때문에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강력하지만 거의 무해한 약물 완성의 도상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과 무엇보다도 의심의 여지없이 곧 가지게 될 것들을 감안해 볼 때, 당장 이 새로운 정신변화제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이것들이 어떻게 남용될 수 있겠는가? 이를 발견함으로 해서 인간들이 더 나아지고 행복해질 것인가? 아니면 더 못해지고 비참해질 것인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가 언제나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어왔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과제는 우리 자신 탓에 지나칠 정도로 어려워졌다. 그러나 한편 부분적이고 순간적인 깨달음의 형태로 주어지는 무상은총이 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현실적이면서 덜 배타적인 언어적 교육체계 아래 있다면,(블레이크가 말하는 바의 의미에서) 모든 천사를 안식년 향응에 모셔 와서 화학적인 ’벽에 난 문‘을 지나 초월적 체험의 세계로 특별 여행을 떠나도록 강권하던지, 필요하다면 강제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