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일:3월2일(1월25일)
복자 하인리히 소이에(수소)
Blessed Henry Suso
Beato Enrico Suso (Susone) Domenicano
(Uberlingen, Germania, 21 marzo 1295 - Ulm, 25 gennaio 1366)
Born:21 March 1295 at Uberlingen, Germany as Heinrich von Berg
Died:25 January 1366 at Ulm, Germany
Beatified:1831 by Pope Gregory XVI
Enrico = possente in patria, dal tedesco
Order of Friars Preachers; Dominicans; Order of Preachers
헨리쿠스 수소(Henricus Suso, 또는 헨리코 수소)는 유명한 도미니코 회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뛰어난 제자로, 독일 남서부 슈바벤(Schwaben)의 콘스탄츠(Konstanz)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베르크(Berg)의 헨리쿠스 백작이고, 그의 어머니는 수소 가문의 성녀 같은 분이었다. 그래서 그의 실제 이름은 하인리히 폰 베르크(Heinrich von Berg)였으나, 어머니의 영향으로 수소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3세 때에 콘스탄츠의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여 신비 생활과 신적 사랑을 통해 강한 영적 변화를 체험하고는, 18세에 '영원한 지혜와 영적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콘스탄츠에서 공부를 마친 후 쾰른의 에크하르트의 학교에서 대학 공부를 하였다. 공부를 마치고 콘스탄츠로 돌아온 그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놀라운 현시를 보았으며, 예수 성명을 특히 공경하고, 천주의 모친께 남다른 신심을 지녔기 때문에 가끔 ‘신비가’란 소리를 들으며 생활하였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신심서적을 저술하였는데, “영원한 지혜에 관한 소책자”(Das Buchlein der ewigen Weisheit)가 가장 유명하다. 이 책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작품으로 알려진 "준주성범"(Imitatio Christi)과 함께 여러 세기에 걸쳐서 인기를 누린 수소의 문학적, 신비학적 걸작이다. 그는 1348년 울름(Ulm)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가서 생활하다가 1366년 1월 25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31년 4월 16일 그의 '문화의 길'(viam cultus)을 높이 평가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학자들은 그를 "독일 신비가들 가운데, 아니 어쩌면 모든 신비 저술가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참고자료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0권 - '주조, 하인리히',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4년, 7869-7872쪽.
(가톨릭홈에서)
하인리히 소이에(수소)의 놓아두고 있기- 정달용신부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그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한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보면, ‘버리고 떠나 있기Abgeschiedenheit’이다. 또는 ‘두루 놓아두고 있기Gelassenheit’이다. 이것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1260~1328)가 평생을 두고 생각하고 가르친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한때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알지 않는 사람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그가 가난한 사람이다.”
첫째,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 그가 가난한 사람이다. 사람이 참으로 가난해지려면 ‘원한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는 그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둘째, ‘아무것도 알지 않는 사람’, 그가 가난한 사람이다. 사람이 참으로 가난해지려면 ‘안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는 그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지 않았다.
셋째,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그가 가난한 사람이다. 사람이 참으로 가난해지려면 ‘가진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것이 사물이든 자기 자신이든 ‘가진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는 그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사람’은 ‘버리고 떠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두루 놓아두고 있는 사람’이다.
놓아두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제자였던 하인리히 소이세는 1295년경 3월 21일 스위스의 콘스탄츠에서 출생했다. 콘스탄츠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들어간 소이세는 수도원에서 기초교육을 받고, 1313년부터 1318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물리학, 형이상학 등을 중심으로 철학을 전공한다. 이어 1319년부터 23년에는 슈트라스부르그 수도회 대학에서, 1323년부터 1327년까지는 쾰른의 수도회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다. 이때 스승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만난다. 콘스탄츠 수도원으로 돌아온 소이세는 선생Lector으로 후배를 가르치고 이후 20년간 그 곳에서 산다. 1330년경 그의 가르침은 이단異端의 의심을 받아 선생으로서의 직책을 정지당한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 시기에 ‘두루 놓아두고 있기Gelassenheit’라는 신비사상을 터득하게 된다. 1347년경 소이세는 독일 울름의 수도원으로 옮긴다. 그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는 ‘두루 버리고 떠나 있기’라고 하는 자신의 신비사상을 익히며 살았으리라 추측된다. 136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울름 수도원에 머물렀다. 소이세는 《진리의 서書》 《지혜의 서》 《생애》 등 중세 독일어 저서를 남겼으며 1831년 복자福者 위에 올랐다.
소이세는 스승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스승의 이러한 가르침을 잘못된 오해로부터 건져낸다. ‘놓아두고 있는 사람’은 소이세에 의하면 ‘단순하고 순수한 하나’를 가지고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순하고 순수한 하나’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있는 것이 아니다.’ ‘무無’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모든 것의 그리고 일체의 것의 ‘근원根源’이며 동시에 ‘목표目標’이다.
‘놓아두고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리고 ‘저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으로부터 그리고 일체의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그리고 심지어 자기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두루 놓아두고 있는 사람’은 그리하여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단순하고 순수한 하나’와 ‘하나가 된다’. ‘이렇게 있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니-있는 것’ 즉 ‘무無’로 드러나는 ‘단순하고 순수한 하나’와 ‘하나가 된다’. 이것이 하인리히 소이세의 ‘신비사상神秘思想’이다.
‘그르게’ 놓아두기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 그리고 ‘두루 놓아둔다는 것’은 잘못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잘못된 놓아두기’가 될 수 있다. 즉 ‘그르게 놓아두기’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 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의 ‘과업課業’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결코 하나의 되어버린 ‘상태狀態, Zustand’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과정으로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하나의 완성된 그리하여 고정된 상태로 오해하고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마르게리테 폰 포레테Marguerite von Porete, 1310년 사망)은 ‘무無가 되어버린’ 영혼에 대해서 그리고 ‘자유로워진’ 영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한 영혼(사람)은 ‘옳은 일’이나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옳은 일’이나 ‘선한 일’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無’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옳은 일’이나 ‘선한 일’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제 이렇게 ‘자유로워진’ 영혼(사람)은 ‘단식’ ‘고행’ 그리고 ‘기도’ 등을 따로 힘쓰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상관없는 일’이다. ‘관심 밖의 일’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람(소이세의 작품에 나오는 ‘이름 없는 무법자無法者’)도 있다. 어느날 소이세에게 사람의 모습을 가진 하나의 형상이 다가 왔다. 소이세가 물었다. 그리고 그가 대답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어느 곳도 아니다.”
“너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을 원하는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네 이름은?” “이름없는 무법자다.”
“네 이성理性이 목표로 하는 것은?”
“구애받지 않는 자유다.”
“무슨 말이냐?”
“사람이 전적으로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도 세계도 상관하지 않고, 앞도 뒤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구애받지 않는 자유는 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
올바로 놓아두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내가 설교할 때, 나는 언제나 첫 번째로 ‘버리고 떠나 있기’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즉 사람은 ‘자기 자신과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람은 단순한 선성善性 즉 ‘신神 속에’ 들어가서, 그와 ‘하나의 모습eingebildet werden’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 말하려 한다”고 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어떤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선한 일werke로부터 벗어나’, ‘전적으로 자유로워지려 한다’하여 그들을 나무라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루가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10,38-40)를 가지고 그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분주하게 음식을 장만하고 있는 마르타와는 달리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는, 단순히 ‘일에서 벗어나’ ‘자유롭기 위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는 앞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 잠잠히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마리아는 그 후 사도들을 따라 다니면서, 부지런히 빨래하고 밥하는 일을 했다.
하인리히 소이세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두루 놓아두고 있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해 내고 있다. ‘놓아두고 있는 사람der gelassene Mensch’은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놓아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옳은 일’이나 ‘선한 일’을 한다. 다만 그는 이 모든 일을 그에 마지막까지 ‘집착하지 않고’ 그 일들을 ‘놓아두는’ 그러한 마음으로 한다.
‘참으로 놓아두고 있는 사람’은 ‘일 속에서’ ‘쉬고 있다’. 그리고 ‘일 속에서’ ‘한가롭다’.
그리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는 일이나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고요하다.
- 정달용 / 신부. 대구가톨릭대 교수(철학). 저서로 《그리스도교 철학》, 다수의 철학 논문이 있다.
도미니코 수도회 성인들
베로나의 성 베드로 순교자 1205-1252.축일:6월4일(4월29일)
폴란드의 성 히야친토.1185-1257.축일:8월17일
복자 베르셀리의 요한 (6번째 총장). 1264-1283. 축일:12월1일
헝가리의 성녀 마르가리타 수녀. 1242-1271.축일:1월18일(1월26일)
페냐포르트의 성 라이문도 학자. 1175-1275 축일:1월7일
성 대 알베르토 주교학자1207-1280. 축일:11월15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학자1225-1274. 축일:1월28일
몬테풀치아노의 성녀 이녜스 수녀1268-1317.축일:4월20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1347-1380.축일:4월29일
성 빈첸시오 페레르 사제 설교가. 1350-1419. 축일:4월5일
복자 피에솔레의 요한(프라 안젤리코) 1386-1455. 축일:2월18일
피렌체의 주교 성 안토니노 (S. Antonino). 1389-1459. 축일:5월10일
교황 성 비오 5세(1566-1572)트렌토 공의회.1504-1572. 축일:4월30일
리치의 성녀 카타리나 수녀.1522-1589. 축일:2월13일(2월2일)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 [빗자루 수사] 1579-1639.평수사.축일:11월3일
리마의 성녀 로사 동정 1586-1617. 축일:8월23일
신비가 복자 하인리히 소이세 Heinrich Seuse (1295 ∼1366)축일:3월2일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Eckhart Meister(1260?∼1327?)
신비가 복자 요한네스 타울러(Joh. Tauler, 1300-1361)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
가난한 이들의
귀한 보물이여!
죄를 짓고
지극히 높으신 우리 임금님을 잃었을때
천사들의 마음을 아프게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를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보물이신 당신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당신을 향해
충고를 구하고
도움을 청하며
몸과 마음의 눈길을 당신께 올립니다
제 마음의 기쁨
유일한 희망
내 삶의 즐거움이여
쓰디쓴 영혼과
동요하는 마음과
눈물맺힌 얼굴로
얼마나 여러번 당신을 바라보는지
당신은 아십니다
지극히 경건하고 복된 동정녀여
당신의 도움이 있기에
온갖 위험에서 벗어납니다
어머니
저의 희망
제 삶의 유일한 위로이신 어머니
오시어
제 상처를 낫게 하소서
제 슬픈 마음에 위안을 주소서
- 엔리코 수소네
♬Christus factus est - Santo Domingo de Silos
Beato Enrico Suso (Susone) Domenicano
25 gennaio
Uberlingen, Germania, 21 marzo 1295 - Ulm, 25 gennaio 1366
Nato a Costanza, in Germania verso la fine del XIII sec., a tredici anni entrò in convento. Ripresosi da un periodo di fede incerta, divenne famoso per la sua vita penitente, e insieme a Maestro Eckart e a Giovanni Taulero fu uno dei maestri della scuola di spiritualità domenicana "dei mistici renani". Del suo intimo colloquio con l'Eterna Sapienza restano testimonianze nelle sue opere che - come il Libro della Verità, il Libro dell'Eterna Sapienza e l'Orologio della Sapienza - hanno lasciato una notevole impronta nella spiritualità cristiana. Fu instancabile predicatore del SS. Nome di Gesù, che si era impresso sul petto con un ferro rovente. Morì a Ulma, ma le sue reliquie furono disperse nel XVI sec. dai protestanti. Il suo culto fu confermato da Gregorio XVI nel 1831.
Etimologia: Enrico = possente in patria, dal tedesco
Il 16 aprile 1831 papa Gregorio XVI confermò con decreto, l’approvazione del culto del beato Enrico Suso (Seuse) da secoli considerato tale dall’Ordine Domenicano, da filosofi, teologi e dalla Chiesa tedesca.
Nacque il 21 marzo di un anno tra il 1293 e il 1303 a Costanza e secondo notizie pervenutaci del 1512, ebbe come padre il nobile von Berg commerciante, di sentimenti non religiosi e come madre una Seuse di Uberlingen donna piissima, Enrico prese il nome della madre.
A 13 anni entrò nel monastero dei domenicani di s. Nicola sull’isola di Costanza, dove perfezionò gli studi umanistici e seguì la vita regolare del monastero. A 18 anni ebbe una visione della Sapienza eterna di cui divenne fervente apostolo, fu chiamato per questo Amandus, cominciò così una vita d’intensa preghiera, penitenza e unione con Dio, volle incidersi sul petto il monogramma IHS quale segno di totale appartenenza a Cristo.
Studiò filosofia in vari conventi e teologia nella casa principale di Colonia dove ebbe occasione di ascoltare “le dolci dottrine del santo Maestro Eckhart”. Venne coinvolto nel processo per eresia che fu intentato contro Eckhart, fondatore della mistica speculativa tedesca, e dovette discolparsi anche lui davanti ad un capitolo dell’Ordine Domenicano tenutosi ad Anversa nel 1327.
Nel 1330 lasciò le sue pesanti penitenze e l’isolamento e si dedicò allo scrivere e al ministero delle anime, rivelando la sua dottrina e le sue esperienze spirituali. Si spostò da Costanza alla Svizzera, alla Renania, all’Alsazia; e nel monastero delle domenicane di Toss, trovò in Elisabetta Stagel di Zurigo, una pia e saggia raccoglitrice dei suoi racconti e insegnamenti.
A seguito della lotta fra il papa avignonese Giovanni XXII e Lodovico il Bavaro, una parte dei domenicani lasciò Costanza e con essi Enrico Suso, era ancora esule quando nel 1343 imperversò la carestia e lui come priore dei frati esuli, dovette provvedere al necessario per tutti.
Nel 1348 rientrò a Costanza dove fu gravemente calunniato da una giovane donna, dovette trasferirsi in un altro convento e se pur gli fu riconosciuta la sua innocenza, non tornò più a Costanza. Dal 1348 a Ulma continuò il suo ministero delle anime, nel 1362-63 redasse l’Exemplar che contiene la gran parte dei suoi scritti in tedesco. Morì il 25 gennaio 1366.
Grande filosofo tedesco, fu il discepolo più fedele del Maestro Eckhart, è considerato il più amabile dei mistici germanici e forse di tutti i mistici, dote che corrispondeva al suo carattere, egli vuole essere compreso dal cuore, Enrico Suso dice che l’altissimo grado di vita spirituale consiste nell’unione con Dio in visione, amore e gaudio inesprimibile, e compendia così l’unica via che conduce a Dio: deporre la forma creata, formarsi con Cristo, trasformarsi in Dio.
Scrisse il “Libriccino della verità”, il “Libriccino della Sapienza eterna”, l’”Horologium sapientae”, il “Libro delle lettere” con 11 epistole e altre opere ascetiche e religiose. Fu nei Paesi d’Oltrealpe l’autore più letto prima dell’avvento dell’”Imitazione di Cristo”.
Il beato non fu sepolto nella comune fossa dei frati, ma deposto nella chiesa del convento di Ulma; fino al 1531 davanti alla sua tomba ardeva da secoli una lampada e una lapide attestava il culto a lui dedicato.
Tanti santi si sono a lui ispirati nella ricerca della spiritualità eletta; è rappresentato in tantissime opere d’arte di artisti insigni, una sua statua fa parte del gruppo della Madonna del Rosario col Bambino posto sul campanile della Suso-Kirche in Ulma.
Autore: Antonio Borrelli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1-Mar-2002
Letto da 1883 persone
HENRY SUSO
Also known as
Amandus; Servant of the Eternal Wisdom; Heinrich Seuse; Heinrich von Berg
Memorial
2 March
Profile
German noble. Dominican at age 13. Mystic. Prior at several houses. Theological student of Meister Eckhart in Cologne from 1322 to 1325. Taught in Constance. Spent years imprisoned in a dungeon due to slander and his association with Meister Eckhart, a controversial figure in his day. Great spiritual writer, using the name Amandus. Noted preacher in Switzerland and the area of the Upper Rhine. Spiritual advisor to Dominicans and the spiritual community called Gottesfreunde
Given to great austeries, he owned a half-length, tight-fitting, coarse undergarment equipped with 150 sharp brass nails, the points facing inward; he used it as his night shirt. After 16 years of this, an angel appeared to him on Pentecost Sunday and whispered that God wanted him to discontinue this practice; he threw his shirt into the Rhine.
Born
21 March 1295 at Uberlingen, Germany as Heinrich von Berg
Died
25 January 1366 at Ulm, Germany
Beatified
1831 by Pope Gregory XVI
Prayers
God of wisdom, you called Blessed Henry to follow your Son and gave him the grace to mortify his body. May we follow the crucified Christ and so obtain his eternal consolation. We ask this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your Son, who lives and reigns with you and the Holy Spirit, one God, for ever and ever. - General Calendar of the Order of Preachers
Representation
Dominican with the Holy Name on his chest
Works
Book of the Eternal Wisdom
The Thirst of God
Blessed Henry Suso
(Also called Amandus, a name adopted in his writings). German mystic, born at Constance on 21 March, about 1295; died at Ulm, 25 January, 1366; declared Blessed in 1831 by Gregory XVI, who assigned his feast in the Dominican Order to 2 March.
HIS LIFE
His father belonged to the noble family of Berg; his mother, a holy woman from whom he took his name, to a family of Sus (or Süs). When thirteen years of age he entered the Dominican convent at Constance, where he made his preparatory,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studies.
From 1324 to 1327 he took a supplementary course in theology in the Dominican studium generale at Cologne, where he sat at the feet of Johann Eckhart, "the Master", and probably at the side of Tauler, both celebrated mystics. Returning to Constance, he was appointed to the office of lector, from which he seems to have been removed some time between 1329 and 1334. In the latter year he began his apostolic career. About 1343 he was elected prior of a convent, probably at Diessenhofen. Five years later he was sent from Constance to Ulrn where he remained until his death.
Suso's life as a mystic began in his eighteenth year, when giving up his careless habits of the five preceding years, he made himself "the Servant of the Eternal Wisdom", which he identified with the Divine essence and, in a concrete form, with the personal Eternal Wisdom made man. Henceforth a burning love for the Eternal Wisdom dominated his thoughts and controlled his actions. He had frequent visions and ecstasies, practised severe austerities (which he prudently moderated in maturer years), and bore with rare patience corporal afflictions, bitter persecutions and grievous calumnies.
He became foremost among the Friends of God in the work of restoring religious observance in the cloisters. His influence was especially strong in many convents of women, particularly in the Dominican convent of Katherinenthal, a famous nursery of mysticism in the thirteenth and fourteenth centuries, and in that of Toss, where lived the mystic Elsbeth Stagel, who turned some of his Latin into German, collected and preserved most of his extant letters, and drew from him the history of his life which he himself afterwards developed and published.
In the world he was esteemed as a preacher, and was heard in the cities and towns of Swabia, Switzerland, Alsace, and the Netherlands. His apostolate, however, was not with the masses, but rather with individuals of all classes who were drawn to him by his singularly attractive personality, and to whom he became a personal director in the spiritual life.
It has often been incorrectly said that he established among the Friends of God a society which he called the Brotherhood of the Eternal Wisdom. The so-called Rule of the Brotherhood of the Eternal Wisdom is but a free translation of a chapter of his "Horologium Sapientiae", and did not make its appearance until the fifteenth century.
HIS WRITINGS
The first writing from the pen of Suso was the "Büchlein der Wahrheit", which he issued while a student at Cologne. Its doctrine was unfavourably criticized in some circles -- very probably on account of its author's close relations with Eckhart, who had just been called upon to explain or to reject certain propositions -- but it was found to be entirely orthodox.
As in this, so in his other writings Suso, while betraying Eckhart's influence, always avoided the errors of "the Master". The book was really written in part against the pantheistic teachings of the Beghards, and against the libertine teachings of the Brethren of the Free Spirit. Father Denifle considers it the most difficult "little book" among the writings of the German mystics.
Whereas in this book Suso speaks as a contemplative and to the intellect, in his next, "Das Büchlein der ewigen Weisheit", published early in 1328, he is eminently practical and speaks out of the fullness of his heart to "simple men who still have imperfections to be put off". Bihlmeyer accepts Denifle's judgment that it is the "most beautiful fruit of German mysticism", and places it next to the "Homilies" of St. Bernard, and the "Imitation of Christ" by Thomas à Kempis. In the second half of the fourteenth and in the fifteenth century there was no more widely read meditation book in the German language.
In 1334 Suso translated this work into Latin, but in doing so added considerably to its contents, and made of it an almost entirely new book, to which he gave the name "Horologium Sapientiae". Even more elevating than the original, finished in language, rich in figure, rhythmic in movement, it became a favourite book in the cloisters at the close of the Middle Ages, not only in Germany, but also in the Netherlands, France, Italy, and England.
To the same period of Suso's literary activity may belong "Das Minnebüchlein" but its authenticity is doubtful.
After retiring to Ulm Suso wrote the story of his inner life ("Vita" or "Leben Seuses"), revised the "Büchlein der Wahrheit", and the "Büchlein der ewigen Weisheit", all of which, together with eleven of his letters (the " Briefbüchlein"), and a prologue, he formed into one book known as the "Exemplar Seuses".
Besides the above-mentioned writings we have also five sermons by Suso and a collection of twenty-eight of his letters (Grosses Briefbuch), which may be found in Bihlmeyer's edition.
Suso is called by Wackernagel and others a "Minnesinger in prose and in the spiritual order." The mutual love of God and man which is his principal theme gives warmth and colour to his style. He used the full and flexible Alamannian idiom with rare skill, and contributed much to the formation of good German prose, especially by giving new shades of meaning to words employed to describe inner sensations. His intellectual equipment was characteristic of the schoolmen of his age. In his doctrine there was never the least trace of an unorthodox tendency.
For centuries he exercised an influence upon spiritual writers. Among his readers and admirers were Thomas à Kempis and Bl. Peter Canisius.
Blessed Henry Suso
Confessor, Dominican mystic, born Constance, Germany, c.1295; died Ulm, 1366. He studied at Cologne under Eckhart the celebrated mystic. From his eighteenth year his life was dominated by a burning love for the Eternal Wisdom. Though an esteemed preacher his great work was as a spiritual director, his influence being particularly noticeable in the convents of KatherinenthaI and Toss. His "Little Book of Eternal Wisdom" is a most beautiful fruit of German mysticism. For centuries his works influenced spiritual writers and have contributed much to the formation of German prose. Represented with the Holy Name on his chest. Cult approved, 1831. Feast, 2 March.
St. Henry Suso, Blessed
Feastday: January 23
1366
Famed German Dominican mystic wrote many classic books. Born Heinrich von Berg in Constance, Swabia, he entered the Order of Preachers, the Dominicans, at an early age. Undergoing a conversion, he developed an abiding spiritual life and studied under Meister Eckhart in Cologne from 1322-1325. He then returned to Constance to teach, subsequently authoring numerous books of spirituality. As he supported Meister Eckhart who was then the source of some controversy and had been condemned by Pope John XXII in 1329 Henry was censured by his superiors and stripped of his teaching position. He subsequently became a preacher in Switzerland and the Upper Rhine and was a brilliant spiritual advisor among the Dominicans and the spiritual community of the Gottesfreunde . He endured persecution right up until his death at Ulm. Pope Gregory XVI beatified him in 1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