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박완호
달항아리 외
항아리에 뜬 달이 지기 전
서둘러 뚜껑을 덮어주었다
간장 익어가는 소리 따라
항아리 속을 떠다니고 있을
쪽배 하나, 밤하늘 빛 간장이
단내로 깊어 가는 달항아리
그 배는 지금쯤 어디까지 흘러갔을까
간장 냄새 되게 풍기는 날이면
항아리 속 달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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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목을 길게 내밀면 누구나 기린이 되지요 발뒤꿈치를 높이 쳐들면 까치가 되듯
봐요 빨개지니까 사과, 참 사과는 아니랬죠 사과를 까먹은 신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고, 다시
빨개지면 토마토, 사실 난 검은 토마토라니까요 그러니까
몸을 둥글게 구부리고 두 팔을 모으는 듯 펴는 듯 만들면 그게 바로 곰이래요 맞아요 학이든 호랑이든 뭐든 가능해지는 무협의 판타지, 우리 다시
기린으로 돌아가요 거기서 목을 조금 더, 딱 죽기 직전까지만 잡아 빼면, 간절한 기린이 되는 건가요 정말
저 너머엔 뭐가 있기는 한 걸까요 신이라고 떠벌리는 이상한 것들 말고, 이제
빠진 목을 도로 집어넣을 시간이에요 이 밤이 지나면 또 밤이 오겠지만 어디나 환하디환한,
절망뿐일 테니까요 여전히, 반쯤 빠지려다 만 모가지를 흔들어 가며
기린이 되는 꿈을 꾸는 중인가요 거기, 모가지가 자꾸 길어지는 당신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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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호∥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김춘수시문학상, 경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너무 많은 당신』,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