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곡정에는 6명(강공수 김영부 양수랑 윤정남 이용환 장덕균 등)이 모였다. 나종만은 지금 버스를 타고 오는 중인데 많이 늦을 것 같다고 하였다. 강공수가 대상포진으로 한 달 동안 참여하지 못하다가 오늘 출석하였으니 이 얼마나 반가운가! 아침이면 부곡정 식당에서 만났던 낯익은 얼굴들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6명이 산행을 시작하였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아주 적었다. 비가 온다고 예보하였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수의과대학으로부터 초청받아 갔던 춘강선생은 비행기 탈 5시간 전에 숙소를 출발하였어도 도시의 거리를 장악한 오토바이 군중들로 인하여 비행기 시간을 대지 못하고, 공항에 연락하여 다음 비행기를 예약하였는데, 좌석이 비즈니스 석이었는데 다음 비행기는 비즈니스 잔여석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이코노믹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 뒤인 어제 아침에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지만, 집에 처리할 일이 많아 그리운 친구들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은 꿀 같았지만, 오늘 산행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점심시간에 올 것이라 하였다.
요즘 나의 관심사인 사육신(死六臣)의 자손들이 모두 죽었지만(무려 280명이 죽었다.) 박팽년(朴彭年)의 자손이 양자(養子)를 들이지 않고 혈손(血孫)으로 대(代)를 이어온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세조 원년, 단종 복위 운동을 기도한 사육신 가운데 박팽년의 가족이 가장 많이 처형당했다고 한다. 본인인 박팽년(1417-1456), 아버지 이조판서 박중림, 동생 박대년 그리고 세 아들 박헌, 박순, 박분 삼대가 연좌로 사약을 받고 모두 죽었다.
그때 마침 박팽년의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 성주(星州) 이씨(李氏) 부인이 임신 중이었는데, 박순의 장인인 이철근(李鐵根)이 달성현감으로 나가 있었다. 그래서 임신한 성주이씨 부인이 친정인 대구관아(大邱官衙)로 가서 머물고 있었다. 조정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이고 여자아이는 노비로 삼게 하였다. 이때에 아들을 낳은 이씨(李氏) 부인은 친정 여종이 딸을 낳아 서로 아기를 바꿔, 죽음을 면하고 외할아버지 이철근(李鐵根)의 손에서 박비(朴婢)란 이름으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박팽년의 혈손이 극적으로 살아나게 된 것이다.
세조(世祖)이래로 사육신(死六臣)을 거명(擧名)하는 것은 금기어였었다. 그런데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지은 <六臣傳>에 힘입어, 성종(成宗) 때에는 그들의 후손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금고(禁錮)된 것을 풀어 주었다. 이때, 박팽년의 손자인 박비(朴婢)가 17세 되었다. 그의 이모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였던 이극균(李克均, 廣州李氏)의 권유로 성종(成宗)에게 자신이 박팽년의 손자임을 자수하고 사면을 받았다.
성종(成宗)은 그동안 박비(朴婢)의 사정을 듣고 박일산(朴壹珊)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 이름은 사육신이 모두 삼족(三族)이 멸문(滅門)의 화를 입었는데, 박팽년의 혈손(血孫)이 살아나게 된 것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있는 ‘산호섬’과 같이 아주 귀한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박팽년의 본관은 순천(順天, 平陽인근 지역),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아버지는 단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박중림(朴仲林), 어머니는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낸 김익생(金益生)의 따님이다. 그리고 박팽년은 세종(世宗)의 후궁이 낳은 영풍군이 그의 사위였다. 박팽년은 태종(太宗) 17년(1417)에 태어나 세종 16년(143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세종 29년(1447) 중시(重試)에 합격하고 삼각산(三角山)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는 세종의 총애를 받아 18년 동안 집현전 학사로 봉직하였고, 이 시기에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와 동국정운(東國正韻),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등의 편찬사업에 관여하여 학문과 사상체계에 크게 기여하였다.
단종 원년(1453)에는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刑曹叅判)이 되었다. 박팽년의 시문(詩文)과 기문(記文) 등이 많았지만 모두 없어져 버렸다. 특히 그의 유작(遺作)으로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에 박팽년과 도원(桃園)에서 산책을 했다는 내용을, 안견(安堅)이 그린 산수화 즉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가 있고, 이 그림에는 당시 정인지(鄭麟趾), 김종서(金宗瑞) 등 유명 인사들 23명의 시문(詩文)이 19m 길이의 종이에 자필(自筆)로 쓰여 있고, 서문(序文)인 몽유도원서(夢遊桃園序)는 박팽년이 직접 썼다고 한다. 현재 이 그림은 일본 천리대학교(天理大學校) 중앙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는데, 이 그림을 우리나라에서 빌려 와 국립박물관에서 공개한 적이 있다.
박팽년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을 생각도 했다. 단종복위 계획이 발각되어 국문(鞠問)을 받을 때 박팽년이 남긴 언행(言行) 등을 보면 그의 충절과 선비의 지조를 알 수 있다.
세조(世祖)가 형(刑)을 가하기 전에 사람을 시켜 이방원(李芳遠)의 하여가(何如歌)로 그를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 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줄 있으랴!
라는 시조로 응답했다고 한다. 이 시조는 세상이 모두 어두운 밤과 같지만 달이 언제나 밝은 빛을 내는 것처럼 나 자신도 상왕(上王) 단종을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세조 원년(1455)에 그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있을 때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에는 관찰사의 서명에 신(臣)자 대신 거(巨)자를 쓰고, 받은 녹봉도 그대로 자기 집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세조가 박팽년의 의젓한 태도를 보고 그는 박팽년 등을 가리켜 ‘당대의 난신(亂臣)이요, 후세의 충신이다.’고 했다. 결국 박팽년은 동료들과 함께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中宗) 때 들어와서 재야 선비들과 조정 관리들이 사육신은 난신(亂臣)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되고, 숙종(肅宗) 7년(1691)에 육신묘에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그들의 관직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영조(英祖) 34년(1758)에 이르러 사육신에 대한 추모와 현창(顯彰)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하게 추진되어 그들은 만고(萬古)의 충신(忠臣)으로 명예가 회복되고, 박팽년에게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追贈)하고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내렸다.
박일산(朴壹珊)은 신분을 회복한 후 자손이 없는 외가(外家, 星州李氏)의 재산을 물려받고, 대구의 ‘묘골(廟谷,竗谷)’에서 99칸의 순천박씨(順天朴氏) 종택(宗宅)을 짓고 삶의 터전을 잡음으로써 박팽년(朴彭年)을 시조(始祖)로 하는 순천박씨충정공파(順天朴氏忠正公派) 종중(宗中)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박팽년은 손자(孫子)의 손에 의해 다시 ‘묘골’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묘골에 육신사(六臣祠)가 세워진 경위는 다음과 같다. 박일산의 큰아들 박계창(朴繼昌)이 충정공(忠正公)의 제사를 지낸 후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에 사당(祠堂) 밖에서 몰골이 초췌한 다섯 분의 선비가 서성거리고 있어서 다가가 누구시냐고 물으니,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들은
“박팽년 저 친구는 손자를 남긴 탓에 제삿날 밥이라도 챙겨 먹는데 우리는 배가 너무 고프다.”
고 했다.
임란 때 묘골 주변 곳곳에서 마치 들불처럼 의병(義兵)들이 일어나 왜적을 무찌른 것은 우연한 것으로 보지 않으며 충절의 표상인 박팽년의 절의사상(節義思想)과 대구 묘골의 역사적 스토리는 정신문화(精神文化)의 상징이 되었다.
이렇게 이어져 온 박팽년의 혈손(血孫) 중의 한 분이, 삼성가(三星家)를 창업한 이병철(李秉喆, 慶州李氏) 전 회장의 부인인 박두을(朴杜乙, 順天朴氏)여사로 이어져서, 오늘날 반도체(半導體)로 우리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산업의 쌀’을 생산하는 바탕을 이루게 까지 된 것이라 한다.
우리는 약사암의 석등에서 나오는 석간수를 마시고, 해우소도 다녀왔다.
오랜만에 음악정자(音樂亭子)에 모였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소나기가 내렸다. 너무 많은 비가 뿌려서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바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가 오늘 부를 노래는 오세복 작사 작곡의 ‘긴 머리 소녀’로 둘 다섯이 불렀던 노래였다. ‘긴 머리 소녀’는 1970년대 포크 듀오 전성기의 한 부분을 담당한 둘 다섯의 데뷔 앨범 수록곡입니다. 이 앨범에는 한국 포크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자 국민 애창곡이 된 ‘긴 머리 소녀’와 ‘밤배’를 수록하였습니다. 당시 손철은 소년시절을 보낸 칠갑산 자락, 긴 개울이 있는 장곡리 마을을 배경으로 서울 광교소재 음악다방에서 ‘긴 머리의 소녀’ 노랫말을 써주었다고 합니다. ‘긴 머리 소녀’는 소녀와의 우연한 만남과 이별, 그리움과 추억을 담은 가사 내용이,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작사가 손철이 개울이 있는 장곡리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야기가 노랫말로 탄생되어 동요 같은 대중가요로 70년대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습니다. 이 노래는 오세복 작사, 이두진 작곡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작사자는 코미디언 손철이었습니다. 당시 둘 다섯은 1970년대의 대학생 가수라는 이미지와 감미로운 목소리 그리고 풋풋한 사랑 얘기가 담긴 노랫말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1975년 발표한 1집에 실린 ‘긴 머리 소녀’가 인기곡으로 떠오르면서 대학가의 여대생과 당시 여성들 사이에서는 긴 생머리가 유행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노인이 된 우리가 따라 부르기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50년 전인 1970년대의 시절로 돌아가서 작지만 노랫말을 생각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오늘은 밝뫼선생(윤정남)이 한 달 전부터 밥을 사겠다고 하였지만 우리 회원들이 다 모이지 못하여 오늘까지 미뤄 왔었다. 다행히 동명선생(강공수)도 한 달 만에 나왔고, 춘강선생(박남용)도 인도네시아 산 마누카(manuka) 허니(honey)를 우리들에게 줄 선물로 사가지고 무사 귀국하였으며, 석당선생(나종만)도 자리를 함께 하였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밝뫼 선생의 생일도 곧 돌아오기 때문에 미리 축하하는 뜻으로 감사의 박수를 함께 나누었다.
일 시 : 2026.07.09(목)
참 가 : 강공수 김영부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정남 이용환 장덕균 장휘부 등 9명
불 참 : 김상문(당분간 쉼) 윤상윤(아파트 회의)
당 일 회 비 : 0원
메 뉴 : 돼지주물럭 2인분, 애호박찌개 6, 막걸리 1
금 일 지 출 : 윤정남이 계산
금 일 잔 액 :
이월 잔액 : 693,000원
총 잔 액 : 693,000원